민중가수로 유명한 박종화(46) 시인의 서예산문 '나의 삶은 커라'를 연재한다. 전남 함평의 한 산골마을에서 올라오는 박 시인의 산문과 서예작품은 매주 토요일 게재된다. / 편집자주
밥
오늘은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지어 먹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한 달 동안 쓴 돈이 6800원 밖에 안 되네요. 읍내에 나가 진통제 사고 작업에 필요한 문구류 몇 가지 산 것이 이 달의 가계비 지출의 전부입니다. 작업하느라 움직일 겨를도 없이 산속 작업실에서만 있다보니 돈 떨어지고 쌀 떨어진 줄도 모르고 살았던 한 달이 되고 말았습니다.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우려는데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산 아래 동네의 아저씨 한 분이 밭에서 일하다 말고 고추 몇 개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찾아옵니다. 밥 먹느냐면서 당신도 한 그릇을 청하더군요. 밥이 없는데 어쩌느냐며 라면보다 빨리되는 죽이 있으니 드시라고 마지막 남은 나의 비상식량인 죽을 내어 끓여 드렸지요. 검은콩 검은깨 검은 쌀을 갈아 만든 군대로 말하면 비상전투식량인 거지요.
내일은 또 어디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까 걱정이군요. 가난한 예술장이 아니랄까 봐 이런 날이 가끔씩 찾아오네요. 남의 밭에 가서 뭐라도 캐어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차라리 징역이나 살았으면 좋겠다는 어느 노숙자의 푸념에 공감도 가고 그렇고 그런 지랄 같은 날이네요.
텅 빈 쌀통을 알 리가 없는 어르신은 고맙게도 죽을 맛있게 먹어줍니다.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인 채 숟가락을 움직이는 촌로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숟가락 길이의 반 깊이만도 못한 밥그릇이 무슨 큰 수렁처럼 보입니다. 그 수렁이 십리 길 낭떠러지 깊이로 느껴지는 무기력한 오후입니다.
지식인일수록 매와 밥에 약하다고들 합니다 희멀건 피부에 매질을 하면 거짓도 진실이라 말하고 풍요로운 쌀밥을 주면 사람도 팔아먹는 나약한 지식인의 기득권을 빗대는 말입니다 머릿속의 지식보다 실천하는 근육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작품설명 : 아래 [ㅂ]에는 큰 사발 그릇을 형상화 하고 작은 글씨에는 [깊]을 깊게 써서 깊음을 강조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