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광복절 55주년을 즈음해 남북의 이산가족 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한 바 있습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첫 실천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습니다. 50년만의 가족상봉은 평양과 서울의 상봉 가족은 물론이고, 그 장면을 방송으로 지켜보던 남한의 국민들과 북조선의 인민들, 그리고 해외동포 등 7천만 겨레에게 눈물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집을 떠날 때 10대의 미소년이 어느덧 60대 반백의 초로가 되어 팔순의 어머니 앞에서 50년만의 큰절을 올릴 때 노모와 아들은 통곡했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북의 한 방문객은 이런 기막힌 현실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살아있다고 해도 조선민족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극과 희극으로 인간의 심금을 울린 대문호 셰익스피어. 그가 살아있더라도 그리지 못할 통한의 비극. 이것이 우리 민족의 삶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을까요? 그것은 모두 분단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되었지만, 다시 분단의 비운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 비극의 분단은 누가 가져다 준 것입니까? 우리 민족이 원했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분단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통일된 자주독립국가의 건설, 그것이 해방된 당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분단되어야 했을까요? 그 원인과 책임은 어디에 있나요?

분단의 가장 큰 책임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외세에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 등 세계 강대국들은 일제가 패망하기 몇 년 전부터 전쟁이 끝난 뒤 한반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 흥정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반도를 일정한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 다음 독립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거기서부터 분단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한국 문제가 연합국 사이에서 최초로 논의된 것은 1943년 3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이든 영국 외상이 워싱턴에서 가진 회담에서였습니다. 여기서 일본의 식민지로 있는 아시아 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이때 루스벨트는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어야 하며 인도차이나(베트남)와 한국은 신탁통치 아래 놓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미국은 신탁통치 기간을 4, 50년 정도로 거론했습니다. 이것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있는 나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안돼 있고, 독립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정 기간 강대국의 후견(신탁)을 거쳐야 한다는 루스벨트의 평소 지론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리고 11월 20일 카이로에서 열린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의 3거두 회담의 공동선언에서는 "일본은 1914년 이후 태평양지역에서 탈취한 모든 섬들을 반환해야 하며 만주·대만·팽호군도를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적당한 시기`에 해방되고 독립될 것"이라고 하여 즉시 독립을 유보하고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미국의 의도를 재차 확인합니다.

그후 미국은 여러 차례 한국의 신탁통치를 언급했고, 1945년 2월 8일에 열린 미·영·소의 3거두 수뇌회담과 7월의 포츠담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이때 루스벨트는 2, 3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이야기했으나 스탈린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독립시키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개진하였습니다. 결국 소련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미국과 소련은 5년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접근했습니다. 그리고는 7월 26일에 발표된 포츠담선언은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함으로써 한국이 `적당한 시기`에, 즉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게 됩니다.

참 웃기는 일이지요. 한국(조선)이 민주주의를 할 능력이 없다느니 독립된 국가를 꾸려갈 준비가 안됐다느니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도 웃기지만, 설령 그렇게 생각 된다하더라도 당사자의 의견이라도 들어보는 것이 정도일 텐데 그들은 단 한번도 우리의 의견을 청취하거나 함께 의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강대국의 사고방식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 해방된 한반도의 운명을 강대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합니까? 그 운명은 당연히 우리 민족이 주체가 되어 결정해야지요.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를 해방이나 광복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일제를 대신해 다른 나라에 점령당한 꼴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포츠담 회담 때까지도 과도정부의 성격, 군사적 점령이나 한국이 완전히 독립을 얻는 시기 등에 관해서는 논의되지 못했고 결국 이것은 후에 분란의 씨앗이 됩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이 패망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황은 8월에 들어서면서 급변합니다.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8일에는 다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소련은 8월 8일 대일 참전을 선언하고, 다음날부터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단에 대한 군사작전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 육군의 주력부대인 백만의 관동군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일본군의 본토 사수 결의도 한갓 말장난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국 일본은 8월 10일 항복의사를 표시하였고, 8월 14일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급변하자 미국은 바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때 소련군은 이미 일본과 전투를 통해 만주지역과 한반도의 북동부에 진입하고 있었지만, 미군은 한반도에서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와 2천마일 가량 되는 필리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소련과 사전에 합의하지 않는다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갈 판국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한국 수도 서울이 포함되는 적당한 선에서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것이 38도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8선은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 편의로 그어진 임시 분계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변화하게 됩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적 편의를 위한 경계선이 점차 정치·경제적인 분단선으로 발전해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셰익스피어도 쓰지 못할 조선민족의 비극적 삶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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