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민족21>은 남측 언론사상 최초로 북측 <통일신보>와 정기적 기사교류를 시작했고, 가장 많은 단독 방북취재를 진행해왔다.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관계자들이 <민족21>을 돌려봐 책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는 후문이 들릴 정도로 북과 해외에까지 애독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매체와 확연히 구분되는 점일 것이다.
26일 서울 홍대인근에 자리한 <민족21> 사무실에서 만난 정창현(45) 대표는 “초대 편집국장 신준영 국장을 비롯해서 많은 기자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100호까지 올 수 있었다”면서 “<민족21> 100호를 내고 200호를 향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입장이다”며 새로운 포부까지 밝혔다.
그는 “남과 북, 해외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통일 전문지로 자리잡는 것”과 “제대로 된 통일교육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통일교육 교양도서를 출간해 통일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것, 그리고 “통일정세를 정확히 분석하고, 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한 대안제시에 힘을 기울”이는 것을 향후 방향으로 제시했다.
정창현 대표는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널리 알져지지 않았지만 북한문제나 한반도문제를 다루는 기자와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정평을 얻고 있는 우뚝 선 존재다.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기자로 일하던 1999년 저술한 『곁에서 본 김정일』은 그동안 왜곡되거나 베일에 쌓여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당시로서는 충격에 가까울 정도의 전면적 접근을 선보였고, 이후 2007년 『CEO of DPRK 김정일』은 이를 보다 풍부화한 증보판에 해당한다.
2005년부터 <민족21> 편집국장을 맡아 2008년부터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는 지난 6월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정운이 북의 후계자로 결정됐다는 특집기사로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계자가 결정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다만 후계자가 공식석상에 나올 때까지는 논란이 계속 될 것으로 본다”며 “중국, 미국, 일본 당국에서도 후계자 결정을 기정사실화하고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한 분석 단계로 들어갔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북측의 일련의 강도 높은 대외공세에 대해서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상호 관심사에 대해 결국은 포괄적으로 빅딜(big deal)하려고 하는 의도”라며 “켐벨 동아태차관보 내정자 인준이 다 끝나서 정식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2,3달 정도에 대북정책이 입안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 정세가 대화로 갈지, 좀더 긴장국면으로 갈지가 판가름 난다”고 전망했다.
특히 “2월에 북미 간에는 적어도 확인된 것만으로도 두 차례 서로 서신을 교환했다”며 “2000년 10월 북미공동선언의 합의를 재확인하고 그 선에서 최고위급 특사교환을 하고 그 이후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협상방식을 미국에 제안했던 것 같다”고 관측하고 “미국은 2월 초에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은데, 한반도 정책 담당자들이 임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동문제에 집중하다보니 북핵문제를 후순위로 밀었고, 6자회담 틀 내에서 북미대화를 유지하는 부시 행정부 2기에 했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북미 간에 대립점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그는 “해주특구 개발이 시작되면 남북간에 가장 긴장이 조성돼 있는 가장 첨예한 지점들이 남북의 경제적 통합, 함께 노동하는 통합현장으로 바뀔 수 있다”며 “2007년 10.4선언에 합의된 내용들을 남북이 지금이라도 이행한다면 앞으로 10년 안에 통일이 먼 미래가 아니라 ‘어, 정말 우리가 모르는 사이 통일이 오고 있네’라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낙관적 전망을 제시했다.
오는 7월 1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삼성동 웨딩의전당에서 열리는 ‘<민족21> 100호 기념식 및 후원의 밤’ 행사 준비로 바쁜 정창현 대표와 <민족21>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는 것은 물론 나아갈 길까지 함께 들어보았다.
“많은 기자들 헌신으로 100호까지 올 수 있었다”
□ <민족21>을 창립하게 된 배경과 과정을 소개해 달라.
■ <민족21> 창간의 출발점은 98년 12월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기자로 있을 때 신준영 당시 <말>지 기자가 찾아와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이 없겠느냐”고 화두를 제기한 때였다.
그래서 “남북 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추진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내가 제안했고, 그 뒤 99년 1월에 “앞으로 남북 간 관계가 굉장히 급격히 변할 것 같다. 그때를 대비해 남북관계 전문가를 아우르는 평화통일포럼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 과정에서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을 실을 수 있는 잡지를 창간하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서 99년 말 쯤에 월간 잡지를 창간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2000년 1월에 들어와 남북 정상회담 성사가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이때부터 남북 정상회담이 된다는 가정 하에서 월간지 출간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칭 ‘통일을 여는 통일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그러다가 6월 정상회담이 끝나게 되니까 이제는 논의하는 단계에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0년 10월에 <민족21>이라고 하는 이름이 만들어졌고, 본격적으로 기자를 섭외하고 기금을 마련하는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다. 2001년 초에 들어오면 신준영 기자를 중심으로 해서 월간 <말>지에 관계했던 분들이 주축이 돼서 <민족21>이 만들어졌고, 2001년 3월 중순에 창간호가 나왔다.
□ 당시는 <중앙일보> 기자였던 것으로 아는데, 주류 언론사 기자로서 새로운 대안적 매체 창간에 참여한 셈인데, 당시부터 <민족21>에 몸을 실으려고 했었나?
■ 남북관계를 주로 다루는 <중앙일보> 통일연구소 기자로 있으면서 북한, 통일문제를 다루는 전문 월간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잡지 창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속 토론하면서 기획에 참여하게 됐다. 창간된 이후에도 기획회의에는 계속 참가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민족21>에 몸을 담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참여했던 것 같다.
그랬다가 2004년 12월 ‘<중앙일보>를 그만두고 북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려는 생각에서 연구소를 만들어서 활동하는 와중에 <민족21>이 재정, 외부기고 등 여러 가지 문제로 굉장히 어려움에 처해서 문을 닫느냐 마느냐는 논의까지 진행되는 상황이 됐다. 2005년에 안영민 현 편집국장이 찾아와서 <민족21> 국장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수락했다.
그 시점에 발행인이 강만길 교수에서 명진 스님으로 바뀌어, 2005 10월에 발행인 명진 스님, 대표 안영민, 편집주간 나 이렇게 해서 <민족21> 2기 간부진이 구성됐다.
그때 생각은 어려움만 조금 극복하면 그 뒤에는 후배들이 잘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생각이었는데 하다보니까 4년째 <민족21>에 계속 몸을 담고 있는 상황이 됐다.
□ 2008년 3월에 정창현 대표와 안영민 편집국장 체제로 다시 바뀌었는데.
■ 결국 그것은 재정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2005년부터 재정적 어려움 타개를 위해 여러 노력을 했는데 여의치 않으면서 재정을 내가 맡게 되고, 잡지 편집을 안영민 국장이 책임지게 됐다. 역할을 서로 바꾼 거다.
□ <민족21> 100호 발간에 대한 소감은?
■ 처음 <민족21>이라는 이름을 내가 지은 것이 인연이었던 것 같다. 그 업보 때문에 결국은 공식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같고, 그 동안 정말 어려운 상황 속에서 100호까지 낸 것은 <민족21> 식구들 입장에서 보면 기적인 것 같다.
그만큼 초대 편집국장 신준영 국장을 비롯해서 많은 기자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100호까지 올 수 있었다.
□ 100호 발간까지 오는데 있어서 겪은 어려움은?
■ 첫 번째 어려움은 객관적인 상황으로 월간 시사지 시장이 전반적으로 위축되면서, <민족21>도 갈수록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됐다는 것이다. 초창기에 <민족21>이 정기독자로 어느 정도까지는 유지가 됐지만 독자들이 줄면서 재정적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다.
두 번째로는 종합시사지가 아니라 통일과 남북관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이다 보니까 독자층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 분야는 남북관계에서 큰 이슈가 발생하지 않으면 평상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광고와 독자를 늘리는 문제에서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까 기자들 월급을 못주는 사태도 오랜 기간 있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북학술토론회 등 대외활동을 강화했지만 그것이 재정적인 뒷받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민족21>이 2005년을 전후해서 사실상 문을 닫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상황까지 갔던 것이다.
세 번째로는 <민족21>이 초기부터 ‘남북이 함께하는’이라는 모토를 내걸면서 북측에서 기사를 받아서 싣는 남북 언론교류를 처음으로 시도했는데, 정기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아시다시피 남북관계가 굉장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2차 북핵위기도 터지고, 서해교전도 터지고, 2004년에는 남북관계가 10개월 동안 중단되고, 남북관계가 굴곡을 겪으면서 <민족21> 입장에서는 원활한 남북교류에 제약으로 작용했다.
“설날 평양거리를 북측 주민들과 같이 걸어”
“북 민화협, 여러 사람이 돌려봐서 표지가 너덜너덜”
□ 선구적인 남북 언론교류를 진행해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고 보람도 많았을 것 같다.
■ 언론교류라고 했지만 북측의 우리 파트너인 <통일신보>의 입장에서 보면 북측 방식으로 기사를 쓰는데 익숙해 있는 상황에서 남측 언론에 기고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던 것 같다.
초창기에는 나름대로 많이 노력했지만 우리가 받아보면 싣기에 부담스런 주제, 또는 우리는 별로 관심 없는, 북쪽이 홍보하고 싶은 내용이 오면서 갈수록 남측 독자에게 가독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보람이라면 <통일신보>도 자꾸 기사를 쓰면서 남쪽의 정서에 맞는 사진을 찍는 방식, 기사를 쓰는 방식에서 굉장히 발전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통일신보>가 ‘남쪽의 독자들이 궁금한 게 뭘까’, ‘남쪽 잡지에 실리는 사진은 어떤 유형일까’ 이런 측면을 상당히 고민한 것 같다. 기사, 사진 교류를 하면서 서로 공감해 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통일뉴스>도 북측과 기사교류를 하고 있는데, 북측의 기사가 좀 부담스러운 형식과 내용이 있지 않나? 남쪽에서 관심이 떨어지는 내용도 있고... <민족21>도 초창기에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사진은 이런 구도로 찍었으면 좋겠다”, “누구누구를 인터뷰했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할 정도로 발전했다. 지난 100호까지 오면서 남북 기사교류 측면에서 모범으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고, 서로를 좀더 알게 된 계기가 됐다.
□ 특히 단독 방북취재도 선도적으로 여러 차례 했는데, 쉽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 처음에 방북취재를 다닐 때는 서로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독자적인 방북취재를 보장해주고, 사진찍는 것을 보장해주는 데서 굉장히 의견충돌이 많았고, 서로 간에 생각하는 방향이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사진을 하나 예로 든다면 대동강가 주체사상탑 앞에서 한 중년 남성이 뒤에 아이를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사진기자가 이것을 찍었다. 뒤에 대동강이 배경으로 보이고 괜찮은 풍경이었는데도 북측에서는 “그 사진 쓰지 마라”고 했다. “이게 남측 독자들에게는 친숙하게 다가올 것 같은데 왜 못쓰게 하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하니, 북측에서는 자전거 뒤에 사람을 태우고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대답했다. 서로 사진의 평가기준이 달랐던 것이다.
이런 예는 공식적인 얘기고, 그 외에 사진을 찍는 과정, 취재하는 과정에서 많은 충돌이 있다. 특히 사람들 만나 인터뷰할 때 현장에서 좀더 심층취재를 하기가 제한된 것이 방북취재를 하는 데서 어려운 점이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방북취재는?
■ 2006년 3월과 2007년 2월 방북취재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06년 3월 처음으로 <민족21>이 기획해서 북측 관계자를 심층인터뷰하고 표지까지 제작했다. ‘홍길동’ 주연으로 유명한 북의 인민배우 이영호를 우리가 요청해서 조선영화촬영소를 같이 둘러보면서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남쪽이 요구하는 취재 시스템, 남쪽이 궁금해 하는 인터뷰, 그것을 <민족21> 입장에서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해본 계기가 그때여서 기억에 남는다.
2007년 2월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취재범위가 한 단계 넓어졌다. 설날 취재를 갔는데 북측의 설맞이 공연을 취재하고, 고려호텔 앞의 식당가들을 직접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던 방북취재였다.
아시겠지만 통상적으로 평양거리에 직접 나가서 취재하기가 쉽지 않다. 설날 평양거리를 북측 주민들과 같이 걸어보고, 음식점에 들어가서 북 주민들이 가족단위로 나와서 식사하는 모습을 취재하고 사진 찍고, 직접 앉아서 간단한 전도 먹어보고, 그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북쪽에서 상당히 신경 써주었다. 남쪽 언론이 북쪽에 가서 취재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본 방북취재였던 것 같다.
□ <민족21>은 남쪽뿐만 아니라 해외나 북쪽에도 독자들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해외측과 북측의 평가나 반응도 궁금하다.
■ 북측에서 주로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간부들이 보는 것 같고, 남북 사회문화교류를 담당하는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같은 경우 <민족21>을 여러 사람이 돌려봐서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는 경우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민족21>에 대해서 첫 번째 평가가 “사진이 참 좋다”가 공통적인 얘기였던 것 같다. <민족21> 사진이 북측 입장에서 두 가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기존의 남쪽 언론의 편향된 시각으로 북측의 어려운 모습, 안 좋은 모습이 집중적으로 사진이 많이 나갔는데 <민족21>이 북측 주민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긍정적이었던 것 같고, 두 번째로는 사진을 찍는 북측 나름의 전형화 된 틀이 있는데, 그 틀에서 벗어난 북측의 모습을 찍어서 보도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민족21> 창간호에 대동강가의 김일성종합대학 여학생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지금도 북측에서는 두고두고 인상작인 사진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북측의 미소랄까 그런 것을 친숙하게 잘 담은 사진이었다는 평가인 것 같다.
두 번째는 <민족21>이 6.15공동선언 정신을 반영해서 남북 화해와 교류의 방향에서 일관되게 분석하고 지면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서 일정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어떤 때는 북측에서 무리한 요구를 할 때도 있다. 북측의 관심사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 보도해 달라는 제안 등등. 그런 경우에 <민족21>은 남쪽에 기반을 둔 언론사이기 때문에 북측의 노선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사를 쓸 수 있다는 점을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지금은 북측에서도 <민족21>이 북측에 대해 사실에 기초한 정당한 비판이라면, 그것이 오히려 북측의 입장에서도 도움이 되고 참고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 정도 단계까지는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북해외가 함께하는’ <민족21>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촘스키 교수 인터뷰”
□ 일본 <조선신보>와 교류도 하고 민족학교도 취재하고 했는데, 해외동포들에게는 <민족21>이 어떻게 읽히고 있나?
■ <민족21>을 가장 적극적으로 읽고 있는 것은 역시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 사회다. 가장 많이, 또 심도있게 읽고 있는 것 같다. <민족21> 입장에서도 그동안 재일동포 사회의 모습, 생활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기사가 많았고, 금강산가극단 서울공연이라든지 우리학교를 집중 취재해서 소개하는 기사에 대해서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다만 제일동포 사회가 3, 4세대가 주류로 되면서 한글을 원활하게 읽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은 있는 것 같다. <민족21>을 다 보려면 며칠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는 못 보더라도 <민족21>에 대한 인지도는 굉장히 높은 편이다.
창간 초기에 <민족21>에 실린 기사 중에서 독자층에게 굉장히 가독성 있었던 것이 <조선신보> 평양특파원들이 쓴 기사다. 남쪽 독자들 입장에서는 북측 기사도 아니면서 북측의 내부 상황이나 생활에 대해 깊이 있는 분석을 담아 국내외 학자들에게 굉장히 관심을 끌었다.
□ <민족21>은 처음부터 ‘최초의 평양 특파원’, ‘통일담론 발굴 전파’, ‘해외동포 민족네트워크 구축’을 표방했는데, 초기에 가졌던 생각이 어느 정도 실현됐고 어떤 과제들이 남아있나?
■ 초기에 <민족21>이 평양에 특파원을 파견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정상회담 이후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기대가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특파원을 파견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것은 북측에서 정기적으로, 일상적으로 <민족21>에 실을 기사를 쓰고, <민족21>에 기고를 전담하는 북측 기자를 독자적으로 둬서 우리가 원하는 기사들을 속도감 있게 바로 바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볼 수 있다고 보고 그런 방향에서 논의를 하고 있다.
민족네트워크 부분과 관련해 〈민족21〉은 최근 ‘남북이 함께하는’에서 ‘남북해외가 함께하는’으로 모토를 바꿨다. 그러면서 미국이나 중국, 일본에 있는 해외동포 사회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반영하려는 편집방향을 강조하고 있다.
네트워크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일본과의 네트워크는 상당히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그동안 교류가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중국과 미국은 취약했다. 지난해 중국 출장을 다녀오고 올해 초 미국 출장을 가면서, <민족21>을 해외에서 정기구독하고, 정기구독자 모집을 대행해주시는 분들, <민족21> 기자를 대신해 미국과 중국의 한반도전문가들을 인터뷰해 주는 현지 전문가와 단체들과도 네트워크 사업이 진행돼서 상당히 큰 성과가 있었다.
앞으로 <민족21>은 좀더 국제적인 시각에서 중국이나 미국,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남북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측면에서 지면을 많이 할애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민족21>이 몇 차례 영문을 함께 게재하고 있다. 노암 촘스키 MIT대 교수의 글이라든지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정세분석 기사를 영문으로 실어서 미주 동포사회에서 큰 반향이 있었다.
□ 100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호는?
■ 역시 창간호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내가 <민족21>을 맡은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촘스키 교수를 인터뷰하고 표지로 낸 2009년 3월호다. <민족21> 입장에서는 한 단계 새로운 도약을 하는 굉장히 중요한 계기였다.
<민족21>이 단순히 남북관계에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또 남북의 전문가들만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세계적인 석학,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를 단독으로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발판이 됐던 인터뷰였다고 생각한다.
예전 같았으면 촘스키 교수 인터뷰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민족21> 기획위원 중에 촘스키 교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분의 소개로 인터뷰할 수 있었는데, <민족21>을 세계화하고, 국제적인 분석 글을 싣는데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기사였다.
그 다음에는 아무래도 100호다. 100호를 보면 ‘한반도 평화구상’을 특집으로 잡았는데, 사실 요즘 정세가 굉장히 위기고 복잡한 상황이다. 그런 위기정세를 분석하는 쪽으로 가야겠지만 100호라는 점에서 앞으로 한반도의 미래상, 남북관계 미래상을 제시해보는 것이 좋겠다는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구상이라는 대안제시를 마련해봤다. 조금 미흡한 점은 있지만 남북의 평화공동체, 통일공동체, 경제공동체를 만드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점들은 대체로 분석했다고 본다.
그 중에서 서해경제특별지대 구상에 대해서 남북이 상당히 의견을 접근했다는 것, 그것을 확대하는 형태로 비무장지대(DMZ) 전체를 통일평화 생태지대로 점차적으로 바꿔나가는 구상에 대해서 남북이 상당히 오랜 기간 논의했고, 북측에서도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통일로 지향하는 관계로 가는 데 있어서 'MDZ를 평화지대로 만들자'라고 하는 구상이 남북에 일정한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10.4선언이 이행되기 시작한다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해에 우리의 장래 구상으로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100호에 걸맞는 기획이었고 기자들이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호였다.
“후계자가 결정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북.미 확인된 것만도 두 차례 서신 교환했다”
□ 많은 이들은 <민족21>이 지난달 6월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북한의 후계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다. 기사가 나간 후에 반향이 있었나?
■ 3가지 반응 정도 압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정말 진짜냐? 기사 내용이 정말 확실한 것이냐?”는 반응이 제일 많았고, 둘째는 “지금 상당히 위기국면에서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 간의 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흐름이 상당히 강한데 갑자기 예민한 후계문제를 <민족21>에서 다뤄서 그런 정치적 목적에 기여한 것 아니냐”는 비판적 반응도 꽤 있었다. 또 “<민족21>에서 보도한 만큼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그 다음에 후계체제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서 분석적인 후속보도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첫 번째 많이 질문한 “정말 사실이냐”고 하는 부분에서는 우리 정부당국에서도 확인했고 북측의 언론매체나 북측의 움직임을 봤을 때 북의 후계자가 결정됐고 후계자 중심으로 점차 북한 사회가 움직여 갈 것으로 본다.
□ 아직까지도 사실인지 여부에 대해 좀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확신하나?
■ 어떻게 이야기해야 될까... 후계자가 결정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다만 후계자가 공식석상에 나올 때까지는 논란이 계속 될 것으로 본다. 중국, 미국. 일본 당국에서도 후계자 결정을 기정사실화하고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한 분석 단계로 들어갔다고 본다.
□ 후계 체제 진행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분석을 좀더 깊이 해야 할 때라는 의미로 알겠다. 후계 문제를 포함해 북이 보여준 최근 행보는 기존과는 달라진 것 아는가 하는 평가가 나오는데 이런 것을 일목요연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화두나 분석틀이 있다면?
■ 북쪽은 한마디로 오래 봐야 보인다. 어떤 사회과학적 틀을 내세워 규정해 분석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벌써 북쪽 사회에 대한 왜곡이 생긴다. 가장 좋은 방식은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북쪽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 북쪽의 노선과 행동에 대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해야만 북쪽의 의도,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 정확히 분석될 것이다.
최근 북측의 대외강경노선에 대해 일부에서는 “후계체제를 안착시키기 위한 것이다. 북측 내부가 지금 불안정하기 때문에 불안정 요인을 없애기 위해 대외적으로 강경하게 나오는 것이다”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지난 15년 더 길게 올라가면 20년의 북핵문제는 다른 주변국을 곤혹스럽게 했지만, 북쪽 자체로도 제재가 강화되면서 굉장히 곤란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해 빠른 시간에 해결을 원하는 사안이다.
3차 북핵위기로 규정할 수 있는 최근 북핵문제는 북측 입장에서 보면 이제 북핵문제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곧 북미관계 정상화를 이번에 달성하겠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상호 관심사에 대해 결국은 포괄적으로 빅딜(big deal)하려고 하는 의도다. 미국이 그러한 협상방식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 현재 북측이 대외강경노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북이 이야기하는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만들겠다는 자신들의 목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국 북미관계 정상화, 안보문제가 풀려야만 가능하다. 그래야 해외자본 유치가 가능하고, 내부적으로도 보다 경제 개방적인 흐름으로 갈 수 있다. 북측은 아마 올해와 내년에 걸쳐서는 굉장히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미국이 당근과 채찍을 이야기하듯이 북도 일방적으로 강경노선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북이 계속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미국과는 여러 차례 메시지를 교환하면서 항상 접촉을 해왔다. 그걸 통해서 올 하반기 9월, 10월경에는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참고로 말하면, 북이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서 “부시 행정부와 다를 것이 없다” 평가했는데 그 중요한 지점이 2월인 것 같다. 2월에 북미 간에는 적어도 확인된 것만으로도 두 차례 서로 서신을 교환했다. 서신 교환을 통해서 북이 생각하는 협상방식에 대해서 미국에 전달됐고 그 내용은 추정컨대 2000년 10월 북미공동선언의 합의를 재확인하고 그 선에서 최고위급 특사교환을 하고 그 이후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포괄적인 협상방식을 미국에 제안했던 것 같다.
미국은 2월 초에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은데, 한반도 정책 담당자들이 임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동문제에 집중하다보니 북핵문제를 후순위로 밀었고, 6자회담 틀 내에서 북미대화를 유지하는 부시 행정부 2기에 했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북미 간에 대립점이 생겼다고 본다.
이제 켐벨 동아태차관보 내정자 인준이 다 끝나서 정식으로 임명됐기 때문에 2,3달 정도에 대북정책이 입안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한반도 정세가 대화로 갈지, 좀더 긴장국면으로 갈지가 판가름 난다고 볼 수 있다.
□ 책도 출간하고, 남북교류 사업도 하고 다양한 일을 해왔는데, 그 중에서도 『곁에서 본 김정일』이라는 책을 냈고, 이후 『CEO of DPRK 김정일』이라는 증보판으로 출간 됐는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가장 정통한 독본으로 읽혀지고 있다. 이 책을 내게 된 과정과 배경을 알고 싶다.
■ 99년도에 처음 나왔고 2000년도에 다시 1차 수정본이 나왔다. 증보판은 2007년에 나왔다.
그 책을 쓰는데 주요하게 증언해주신 분은 90년 초반부터 <중앙일보>에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월간중앙>에 남북관계 글을 꾸준히 증언하고 기고한 분이셨다. 개인적으로 그때 인연이 맺어졌고, 그 과정에서 보다 남북관계와 북한 현대사에 관한 심층취재를 위해서 93년부터 98년까지 약 5년간에 걸쳐서 드러나지 않은 비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쭉 들을 기회가 있었다.
99년 3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통일부 업무보고 할 때 “우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좀더 심층적으로 연구해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때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문제인식에서 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북관계가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단계에 진입하게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생긴 시점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책은 두 차례 수정했지만 최종 수정판은 아니고 좀더 보강할 내용도 많고 당시에 쓰지 못한 내용도 있어서 앞으로 적절한 시점에 최종판을 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해외 전문가들도 <민족21>을 번역해서라도 읽도록”
“평화와 경제를 결합시키는 상호특구”
□ 100호 이후 <민족21>의 앞으로의 방향성은?
■ <민족21> 100호를 내고 200호를 향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입장이다. 앞으로 <민족21>의 비전은 크게 3가지다.
첫째는 남과 북, 해외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통일 전문지로 자리잡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근 <민족21>은 미국, 중국, 일본에서 개최된 통일관련 국제토론회에 다녀왔고, 해외 한반도전문가 취재를 강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족21>의 국제화다. 해외에 있는 남북관계 전문가들도 <민족21>을 번역해서라도 읽어야만 되는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다. 또한 해외에 있는 동포 소식들을 그때그때 좀더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위해서 독일이나 미국, 일본 등지에 해외통신원을 두려하고 있다.
특히 전문가 그룹과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민족21> 자체의 필진을 넓히는 측면도 있고, 이들이 가장 중요한 독자이기도 하다. 전문가 네트워킹을 통해서 <민족21>이 남북관계, 평화, 통일을 다루는 전문가 사이에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갖추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둘째는 제대로 된 통일교육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 개발과 통일교육 교양도서를 출간해 통일운동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통일교육이 다양한 형태로 되고 있지만 너무 흥미위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당위적인 차원에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통일교육이 풍부화 되고 폭넓게 대중적으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북에 대한 다양한 컨텐츠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족21>이 그 동안 찍어놓은 사진, 컨텐츠들을 통일교육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도록 앞으로 출판사업도 할 예정이고, 북쪽의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담은 사진집을 낼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북측의 생활적인 모습이나 앞으로 통일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좀더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내용의 ‘통일교육 총서’도 기획단계에 있다. 앞으로 통일교육의 대중화와 전문화를 위한 다양한 컨텐츠를 <민족21>이 생산하고 보급하는 역할을 맡게 되기를 기대한다.
셋째는 통일정세를 정확히 분석하고, 통일운동의 발전을 위한 대안제시에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100호 발간 특집으로 'DMZ을 통일평화지대로!'라는 구상을 제시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민족21>이 단순하게 남북관계 보도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 통일이라는 문제를 우리 내부의 시각으로도 보고 국제적 시각에서도 분석함으로써 좀더 객관성과 전문성을 갖춘 잡지로 거듭나려는 노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과 국내외 전문가들의 애정 어린 조언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 재정 문제도 어려울텐데 어떻게 해결해 나갈 계획인가?
■ 잡지 자체로 독자를 늘려서 수지타산을 맞추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북측과의 관계 속에서 경협 사업이나 사회문화교류 사업을 진행해 수익을 냄으로써 안정적으로 재정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 <중앙일보> 기자였고, 학자이자 <민족21> 대표이기도 한데, 우리 사회에서 남북문제, 통일문제가 쉽지 않은데, 민족이나 통일 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일상화, 주류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우리 남쪽의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돈과 관련된 것 같다. 북쪽은 반면에 평화라든지 통일이라는 가치가 우선시되는 것 같은데, 결국은 평화와 경제 이게 상호 접점을 찾을 수 있는 프로젝트, 또는 남북 간의 사업이 체험적으로 눈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금강산관광 사업, 개성공단 사업은 실질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업이다. 일반 대중들은 금강산, 개성 관광을 통해 통일체험, 북측에 대해 체험하게 된다. 앞으로 평화와 경제를 결합시키는 상호특구라든지, 합작 산업단지 등이 이뤄지면 통일이 먼 이야기가 아니라, 가깝게 다가올 수 있다. 통일이란 것이 우리가 돈을 퍼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대될 것이다.
지금 일상적으로 많이 하는 판문점 평화통일기행, 민통선 기행 등을 통해 청소년과 일반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분단현장을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통일이라고 하는 것도 남북이 함께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통적 체험지점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다가와야 한다.
<민족21> 100호에 실려 있는 특집을 예로 든다면 금강산과 설악산을 연계해서 국제적인 관광지대를 만들고 강원도에서 지금 구상하는 것처럼 철원에 남북이 함께하는 평화산업단지를 조성해 북측 노동자가 남측 특구에 내려와서 일하고 것 등이 현실적 대안일 수 있다. 해주-파주경제특구도 북측 노동자가 파주특구에 와서 출퇴근하는 개념으로 남북이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주특구 개발이 시작되면 남북간에 가장 긴장이 조성돼 있는 가장 첨예한 지점들이 남북의 경제적 통합, 함께 노동하는 통합현장으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되면 판문점이 남북 분단의 상징이 아니라 남북의 교류와 화합의 열린 공간으로 거듭 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통일, 남북 화합이 아주 일상적으로 다가오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런 단계까지는 이념적 남남갈등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남남갈등은 지금 이념적 지형에서는 상호 소통하고 토론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민족을 위해서 통일을 위해서 기여되는 사업을 통해, 협력사업을 통해 구체적 성과를 보여주고 그 성과에 기초해서 ‘아, 이런 방향으로 가면 서로 도움이 되는구나’ 라는 인식의 전환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2007년 10.4선언에 합의된 내용들을 남북이 지금이라도 이행한다면 앞으로 10년 안에 통일이 먼 미래가 아니라 ‘어, 정말 우리가 모르는 사이 통일이 오고 있네’ 라고 생각하는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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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