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중부의 집권도 잠깐이었습니다. 정중부는 다시 경대승의 손에 숙청되고, 경대승은 도방을 두어 자기의 신변을 지키면서 권력을 휘두르다 병이 들어서 죽었습니다. 경대승이 죽은 뒤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으나, 곧바로 최충헌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무신 정변이 일어난 1170년부터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1196년까지 자그마치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신들은 서로 토지와 권력을 빼앗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려 사회는 크나큰 혼란에 빠졌고, 백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닌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 농토를 빼앗기고 유랑하는 농민의 슬픔을 노래한 고려 속요가 바로 유명한 `청산별곡`입니다. 그 중 5장을 한 번 볼까요?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어디에 던지던 돌인가, 누구에게 맞히던 돌인가/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이 맞아서 울며 다니노라)

여기에서 돌은 바로 `운명`에 해당하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외적 폭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은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없는데 외적 폭거에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무신 정권도 탐욕적인 짓을 마냥 계속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무신들 사이의 권력 쟁탈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최충헌은 정권을 잡은 뒤 명종 26년인 1196년에 봉사 10조를 왕에게 올렸습니다. 그 때 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봉사 10조는 왕의 형식적인 승낙을 얻고는 최씨 정권의 정책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 겸병을 제한하고 사원 승려들의 특권을 제한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이들한테서 거두어들인 토지는 모조리 최씨 일가와 그들의 심복 무신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보현원 나들이에서 상장군 이소응이 받은 수모는 무신 정변의 계기에 지나지 않고, 무신들은 이미 그 때 기회만 닿으면 문벌 귀족의 정권을 뒤엎고자 하는 의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신에 대한 차별이 무신 정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더욱 근원적으로는 문벌 귀족 사회의 부패와 왕권의 무능, 부패 그리고 현실적인 정권 담당 세력으로서 무신들이 지닌 실력이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신 정변은 문벌 귀족 사회의 무능과 부패를 개혁하기 위한 거사가 아니라 무신들의 소외를 극단의 반동적 방식으로 보상받으려 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려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볼까요? 군사 쿠데타는 일부 정치군인들의 야욕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일부 정치군인들은 왜 야욕을 갖는 것일까요? 또 야욕을 갖는 정치군인들은 왜 생겨나는 것일까요?
 
고려 시대의 무신 정변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역사적 교훈을 줍니다. 무신 정변은 무신 차별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보다는 문벌 귀족 사회의 부패와 왕권의 무능 및 부패, 그리고 현실적인 정권 담당 세력으로서 무신들이 지닌 실력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억압과 수탈에 시달리던 일반 병사들의 도움이 한몫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 원인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그 사회의 집권 세력이 부패하고 무능할 때 군사 쿠데타의 온상이 됩니다. 그리고 군부 이외에 부패한 집권 세력을 대신해서 정권을 담당할 실력을 갖춘 세력이 없을 때 군사 쿠데타는 발생할 조건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집권 세력을 대신해서 개혁을 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군사 쿠데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군사 쿠데타는 정상적인 헌정 질서를 중단시켰다는 것 때문에만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군인들이 주도 세력이라는 것 때문에 문제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고려 시대의 무신 정변에서 보듯 개혁과는 거리가 먼, 극단적인 반동적 형태의 폭거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5. 16 군사 쿠데타는 4. 19 혁명에서 분출된 민주 열기를 짓누른 폭거였고, 반외세 민족통일운동의 열기를 짓밟은 반혁명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12. 12와 연이은 5. 18 군사 쿠데타는 반유신 민주화투쟁과 80년의 이른바 `서울의 봄`을 짓밟고 과거로 회귀하려 했던 폭거이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이 쿠데타들은 그 순간에 현장에서 진압되지 못했지만, 이후 역사적 평가 혹은 법적 처리를 통해 폭거로 규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수괴와 그 수괴를 추종하던 세력들이 역사적 정당성을 공공연하게 떠드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군사 쿠데타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정신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승인하고,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며, 민주화 운동과 민족 통일 운동의 성과를 송두리째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가볍게 보아서 넘길 문제가 아닌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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