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간 몸담았던 통일부를 명예퇴직한 고경빈 전 하나원 원장.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후대 우리 역사가들은 우리 세대들에게 '당신들이 국민소득 3만불을 달성하기 위해 뭘 했느냐'고 묻기 전에 '분단해소를 위해 뭘 했느냐'고 물을 거라 생각한다.“

지난 2일 20년간 몸담았던 통일부를 명예퇴직한 고경빈(52) 전 하나원 원장은 “일제시대를 뒤집어서 얘기하면 독립을 준비하는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듯이 분단시대는 통일을 준비하는 시대”라며 이같이 말했다.

87년 통일부에 첫 발을 내딛어 냉전해체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이 화해협력 기조로 전환되는 과정을 일선에서 지켜본 그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북한 남포항에서 맞았고, 2007년 2차 정상회담은 정책홍보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수행했다.

13대 허문도 장관부터 이홍구, 임동원, 정동영, 이종석 등 이름만으로도 무게감이 전해지는 역대 통일부 장관들을 거쳐 35대 현인택 장관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이어져온 남북관계의 현장을 일선에서 뛰어온 것이다.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 자격으로 참여했던 2차 정상회담의 결과물인 10.4선언이 채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그는 “10.4선언처럼 남북 당국 의지가 확고하더라도 그것이 초당적으로 뒷받침되고 남북한 주민들이 같이 밀어주지 않으면 역시 한계가 있다”고 교훈을 찾았다.

그는 “분단해소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은 한반도에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남북이 적대감, 증오, 복수심 이런 것으로 가득찬 상황에서 그런 사태를 맞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라며 “정부를 포함한 지도층에서는 민족적인 관점을 잃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남북 간에 증오와 적대감을 조장하는 방향이 아닌 쪽의 입장에 서주는 것이 최소한 후대에서 평가할 때 분단시대의 지도자로서, 분단시대의 지도층으로서의 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할 것”이라는 소신을 강조했다.

그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에는 말을 아꼈지만 “상생공영의 정책은 화해협력의 정책 토대 위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사성을 강조했으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닥쳐진 현실을 어떻게 돌파하느냐는 문제”라고 말했다.

'뚝심'있는 열정적 업무추진력으로 정평이 난 그는 현 정부 들어 하나원 원장으로 마지막 공직생활을 마감하게 됐지만 "남북간 전면적 사회통합이라는 예방접종 차원으로 탈북자 문제를 접근하고 그 결과물로써 우리 사회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며 "남북교류를 통해 같다는 것을 억지로 강조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상황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현 단계 우리의 과제"라는 사색의 일단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음은 지난 13일 오전 11시부터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고경빈 전 하나원 원장과 진행한 인터뷰 전문이다.

대북정책 일대 전환, 민족자존과 ‘맏형정책’

▲ 13일 고경빈 전 원장과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부에 언제 들어와서 얼마동안 일했나?

■ 87년에 통일부에 들어왔고, 해외연수 3년 빼고 만 20년 일했다.

87,88년은 남북관계에서 큰 전환점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남북 간의 역학구도가 변해서 그전까지 우리가 수세적 입장이었지만 그 이후 공세적 입장에서 여유있게 임할 수 있었다. 그 결과 88년 7.7선언이 나왔다.

□ 88년 7.7선언을 중요한 계기로 꼽았는데, 통일부에 재직한 20여 년간 우여곡절도 많았을텐데 중요한 계기들을 꼽는다면?

■ 남북관계 60년 구조를 바꾼 가장 큰 사건은 외부적으로는 80년대 말 국제 냉전체제 해체고, 우리 내부적으로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라고 생각한다.

□ 냉전체제 해제기 당시의 통일부 분위기는?

■ 80년대 중반까지도 남북 간에 좀 경쟁적인 의식이 있었다. 북한이 뭘 하면 우리도 뭘 하고, 국제경기에 나가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국민적인 일반 정서가 있었다. 그러나 국제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우리가 옳았다. 남북 간 체제경쟁은 의미가 없다. 공산주의 체제는 실패로 확인됐다” 이런 자신감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88올림픽이라는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큰 행사를 치렀고, 88올림픽이 그 이전 80년, 84년의 모스크바와 LA(로스앤젤레스) 반쪽 올림픽을 극복하고 규모있게 잘 치러져 국민들의 자긍심을 크게 높였다. 또 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에 대한 민족의 자긍심이 생겼고 그때는 정부에서도 ‘민족자존’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산업화가 됐고 민주적인 정통성을 국민의 힘으로 이뤄냈고, 국제적으로 국력이 크게 올라간 상황에서 다음 과제는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고 민족의 자존을 추구한다는 것이 기본 흐름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7.7선언이고, 우리가 북한과 합의가 이뤄지기 이전이라도 분단해소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먼저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걸 시중에서는 ‘맏형정책’으로 별명을 붙였는데, 정책 성격이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은 당시 현상유지라는, 국제적으로 탈냉전의 흐름을 막아보고 자기 체제 유지 차원에서 남북대화에 임하긴 했지만 결국 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못하는 내외적인 한계가 좀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오히려 우리가 수세적인 입장에서 남북관계를 관리했다면 7.7선언 이후에는 우리가 공세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자심감이 좀 생겼다고 보여진다. 90년대 초에 남북 간에 구체적인 합의나 실천이 없었더라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차원에서 남북교류협력법을 만들고, 남북협력기금을 만들어서 햇볕정책을 추진할 때 큰 동력이 될 준비를 했다.

□ 남북교류협력법이나 남북협력기금을 만들 때 실무를 담당했나?

■ 그렇다. 초기에 남북교류협력법 체계를 실행하면서 여러 새로운 개념들이 나왔다. 결국 국가보안법 체계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그 안에서 남북 간에 교류협력의 공간을 만들려다 보니까 ‘북한주민 접촉’이라는 개념도 나왔고, ‘방북승인’, ‘교역’, ‘협력사업’ 이런 개념들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정말 활발하게 현실에서 이뤄진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다. 10년 동안 정부가 미리 준비를 했던 셈이다.

□ 당시는 개념들은 만들어졌지만 실행해보지 못했던 것 아닌가?

■ 현실하고도 아직 잘 안 맞는 측면들도 있었고, 당시 언론에서는 누가 북한주민 접촉승인 신청서를 냈다는 것 자체도 기사가 됐고, 그게 승인됐다고 해도 기사가 됐다. 북한과의 협의에 따른 이행과는 별개로 말이다.

남포항서 남북정상회담 실황중계 지켜봐

▲ 그는 80년대 말 냉전해체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대북정책 전환의 주요 계기로 꼽았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2000년이 중요한 계기라고 꼽았는데, 변화가 컸을 것 같다. 남북 정상회담의 흐름이 사전에 있었나? 당시 갑작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 성사가 된 배경은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지만, 남북관계가 서로 공존하고 화해하는 쪽으로 발전할 수 없는 가장 큰 제약은 결국 남북 간의 불신이다. 그런 불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최고지도자 간의 만남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실 남북 간의 정상회담을 추구한 역사는 굉장히 오래된다. 이미 김영삼 대통령 때도 합의하고 실천 직전에 무산된 적도 있었고, 그 이전에도 남북 최고당국자 회담 제안들을 수차례 했고 서로 밀사를 주고받고 준비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

그런 노력들이 기초가 돼서 2000년에 성사가 됐다고 보는데, 내적 외적으로 성사가 가능한 동력들은 충분했다고 본다.

□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어떤 직책을 맡고 있었나?

■ 인도지원기획과장을 하고 있었다. 정상회담 당일에는 비료를 싣고 북한 남포에 가서 북쪽 인수인원들과 같이 텔레비전으로 남북 정상회담 장면을 봤다.

□ 역사적인 순간을 남포에서 맞았다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 비료지원 인도요원으로 배를 타고 남포에 들어갔는데, 남포항구에 정박한 우리 배에서는 화면이 깨끗하지는 않지만 남쪽 화면이 잡혔다. 우리는 그때 대통령께서 순안공항에 내리는 실황중계를 했는데, 북쪽은 실황중계를 안했기 때문에 북쪽 텔레비전에서는 알 수 없었다.

북쪽 인수요원과 내기를 했다. “공항에 누가 나올 것이냐?” 북쪽 인수요원은 “당연히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나가지 않겠나. 왜냐하면 김영남은 국가수반이고 김정일 위원장은 민족의 지도자다”라고 자신하더라. 나는 “분명히 국방위원장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지금쯤 도착할 시간이 됐을 것이니까 배에 가서 같이 보자”, 그런데 안 따라오더라. 우리만 봤는데 결국 내기에서 우리가 이겼다.

북쪽도 다음날엔가 밤중에 이례적으로 텔레비전에서 새벽까지 그동안 남북관계, 특히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접견한 남측인사들의 다큐멘터리 필름들을 쭉 방영했다. 남포에 있던 기간 내내 북측 인수요원들과 민족의 앞날에 대해 장밋빛 담화를 나누면서 맥주를 마신 기억이 난다.

□ 6.15공동선언으로 남북도 그간 적대상대에서 같은 민족으로 거리도 훨씬 좁혀진 것 아닌가?

■ 북쪽이 6.15공동선언 이후 계속 ‘민족공조’, ‘우리 민족끼리’ 개념을 만들어 내서 자기네 대남사업 명분을 갖고 추진했지만 국내적으로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그 당시 북측 관계자들에게도 비공식적인 자리에 서면 “민족공조는 현실이 아니다. 남북관계가 어떻게 공조할 수 있는 단계냐. 민족공조는 우리의 이상이고 목표지 현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얘기를 쭉 해왔다.

그런데 “그래도 민족공조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는데, 이종석 장관 때 이야기다.

이종석 장관이 북한 미사일 발사 직후에 청와대에 사표를 내고 마지막으로 개성공단을 가고 싶다고 해서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행사를 당시 개성공단지원단장이었기 때문에 제가 준비했다. 퇴임이 예정된 장관을 모시고 하는 행사라서 뚜렷하게 메시지나 테마를 잡기 어려워 일단 장관행사로서 격식을 갖추기 위해 그 당시 개성에 진출해 있던 우리 기업체들의 기업주들과 개성 현장에서 통일부 장관이 간담회를 하는 것을 중심행사로 잡았다.

그리고 장관을 모시고 개성에 들어갔는데 주동찬 북측 총국장이 나와서 처음부터 영접하더라. 당시 우리는 예상 못했는데 주동찬 총국장이 “나도 기업인 간담회에 참석하면 안 되겠느냐”, “왜 안 되겠나(Why not?), 와라”. 그래서 같이 참석하게 됐다.

그랬더니 우리 장관이 가운데 앉고 오른쪽에 주동찬 총국장이 왼쪽에 김동근 (개성공단관리위)위원장이 앉고 그 옆에 제가 앉았다. 우리 앞으로는 쭉 둘러싸서 사장들이 앉았다.

기업인 간담회를 하면 기업활동하는 애로사항들이 쏟아져 나올 것 아닌가? 그 애로사항 중 어떤 것은 북쪽에서 해결해줘야 할 것이 있고, 어떤 것은 남쪽에서 해결해줘야 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이종석 장관이 기업인들의 애로사항을 받아서 “이것은 주동찬 총국장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

그걸 보면서 “이건 새로운 모습이다”, 남북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면서 공동의 정책고객들의 애로를 해소하는 장면이었다. “아 이거 잘 하면 민족공조 가능하겠다”, 그 씨를 넓혀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민간교류 보장, 2005년 당국 회담 복구로 결실

▲ 주로 남북교류의 일선에서 일해왔다는 고경빈 전 원장.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2000년 이후는 어떻게 보면 ‘회담의 시대’라고 볼 수 있는데, 분위기나 상황도 많이 바뀌지 않았나?

■ 2000년 이전과 이후의 남북간 회담의 결과론적인 차이라면 2000년 이전에도 회담은 무척 많았다. 특히 고위급회담 당시는 일주일에 두 번 할 정도로 굉장히 바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회담은 많았는데 회담 이후 현실에서 변화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2000년 이후의 회담은 회담 자체도 바빴지만 회담 합의사항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남북간 교류가 많이 이뤄지고 굉장히 바빴다.

과거 적십자회담은 본회담, 실무회담, 무슨 접촉해서 회담이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바뀐 게 아무것도 없었다면, 2000년 이후의 회담은 적십자회담의 경우에도 합의서 한 장 나오면 일이 끝난 게 아니라 그 이후 이산가족 상봉행사 준비로 직원들이 한두 달을 꼬박 격무로 보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일이 바빴지만 굉장히 기분좋은 시절이었다.

당초 7.7선언 이전에도 박정희 대통령 당시 1973년 6.23선언으로 남북간 평화공존으로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입장에서 남북관계를 추구하게 된 이후, 늘 우리 쪽은 다양한 정책을 추구하고 시책이 있었지만 기본적인 전략은 접촉을 통한 변화였다. 접촉면을 많이 만들어서 그 접촉면을 통해서 북한의 변화, 남북관계의 변화를 추구해왔는데 그것이 실제 이뤄진 것은 2000년 이후에 여러 국면에서 이뤄졌다고 본다.

□ 2000년 이후 주로 어떤 영역을 담당했나?

■ 주로 현장에 많이 있었다. 지금은 교류협력국, 정책실의 일부가 됐지만 당시는 사회문화교류국이 있었다. 남북 간의 인도적인 문제, 비경제 분야 즉, 사회문화 분야의 남북협력을 맡아 1년 반 정도 일을 했었고, 개성공단지원단장으로 1년, 경제협력본부장 직무대리를 잠깐 했고, 2007년 한해는 정책홍보본부장으로 일했다. 그 이전 과장 때도 주로 남북교류협력, 경제협력, 사회문화협력, 대북 인도적지원, 이산가족 이런 현장 부분의 일을 쭉 해왔다.

□ 정동영 장관시절 2005년 평양 6.15통일축전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일거에 개선된 일대 사건이 있었는데.

■ 당시 베트남에서 탈북자가 대규모로 한꺼번에 들어오고 박용길 장로의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이 불허되고 미국에서는 북한인권법이 제정되는 바람에 남북관계가 다 끊겼다.

그러나 민간 차원의 교류는 계속 보장했고, 그 결과 상황이 변하면서 민간행사가 성사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명분을 만들어 주고 당국 대표단도 민간행사에 참여하기로 해 북쪽에 큰 선물을 줬다. 이를 북에서도 받아들여 6.15행사 대표단에 당국도 같이 참여해 행사 기간중 좋은 분위기를 다시 만들어 당국 회담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다.

□ 정책홍보본부장 재직시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수행했던 것으로 안다.

■ 정책홍보본부장으로 있었던 1년은 저한테 잊지 못할 추억이고,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굉장한 특혜였다고 생각한다. 그 1년 동안 남북관계에서 거의 모든 종류의 회담이 다 이뤄졌다. 야구로 치면 ‘사이클 히트’랄까. 적십자회담, 경제회담, 군사회담, 장관회담, 총리회담, 정상회담까지 1년동안 쭉 이뤄졌다. 사실 정상회담 수요는 남북관계 내부 측면에서 이미 몇 년 전부터 늘 있었다.

제 생각에는 남북관계 현실이나 특성을 봤을 때, 정상회담이 남북관계를 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 현실을 볼 때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의 갈등이 해결될 수는 없지만 그런 걸림돌을 옆으로 미뤄놓을 수 있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개성공단에 기업들이 입주하면서 활발히 1단계 사업이 진행되던 시점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선가 실무선에서 동력을 자꾸 잃어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개성공단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남쪽이 더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개성공단 발전이 더딘 책임을 남쪽에 전가하고 우리로서는 “투자를 하려면 3통이라든가 이런 것이 좀더 확대돼야 되지 않겠느냐”, 결국 그 책임을 북쪽으로 넘겼다. 서로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기면서 진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여러 장관회담, 경제회담에서 북쪽이 해결 안 되는 부분을 근본문제에 걸기 시작했다.

군사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에서 근본문제를 당국간 회담에서 제기하면서부터는 회담의 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최고위급의 판단 내지는 결정들이 필요한데, 최고위급 정상회담에서도 풀릴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한미군사훈련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정상회담을 통해 풀릴 일들이 아니었지만 정상회담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런 것들을 실무회담의 걸림돌에서, “이게 풀려야 실무회담이 진전될 수 있다”는 전제, 부담으로부터 벗겨주는 것이다. “자 이것은 앞으로 현안이 아니다. 좀 옆으로 비켜두자” 하는 차원에서 정상회담이 큰 역할을 했다.

10.4선언 이후 많은 실무회담이 가능해졌다. 10.4선언으로 남북의 근본문제를 푼 것은 없지만 실무회담에서 제기된 근본문제를 선반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본다. 남북 간 현실이 변화하면 어느 순간 근본문제도 다룰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10.4선언의 교훈 “남북 주민 모두의 지지가 없으면 안 된다”

▲ 그는 10.4선언 당시 통일부 정책홍보본부장으로 참여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책임적 위치에서 2차 정상회담을 진행했는데, 평가는?

■ 제가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면 저로서는 큰 영광이다. 저로서는 열심히 준비했고, 부처간 협의, 청와대와 협조 이런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제일 아쉬운 게 그 당시 북한에서 큰 비가 와서 몇 달 지연된 것이다.

왜냐하면 10.4선언 그 무렵에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지난 100년 이래 가장 유리한 정세였다고 생각된다. 미.중관계도 좋았고, 북한도 핵문제와 관련해서 9.19, 2.13합의 거치면서 1단계는 완료하고 2단계로 들어가는 시점이었고, 10.4선언 시기에 이루어진 10.3합의에 따라 2단계도 착수할 수 있는 시기였다.

결국 10.4합의를 이행 못하고 있는 상황이 아쉽기는 하지만 굉장히 귀중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남북관계에서는 우리 국민들, 남북 주민 모두의 지지가 없으면 안 된다. 초당적인 뒷받침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92년 남북기본합의서처럼 합의문이 아무리 완벽하고 기술적으로 정교하더라도, 또 6.15, 10.4선언처럼 남북 당국 의지가 확고하더라도 그것이 초당적으로 뒷받침되고 남북한 주민들이 같이 밀어주지 않으면 역시 한계가 있다.

□ 10.4선언에서 서해평화지대는 굉장히 획기적인 발상인데, 당시 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유력했는데 추진 가능성을 염두에 뒀나?

■ 10.4합의에서 서해평화협력지대가 구체적으로 합의된 것은 없다.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서해평화지대추진위원회 장관급 회담을 시작했을 뿐이다. 그게 너무 예민한 문제로 우리 여론에 제기됐기 때문에 동력을 잃은 것이 참 아쉽다.

□ 일각에서는 당시 이재정 장관이 국민의 의식수준보다 너무 앞서 나가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있다.

■ 국민의 의식이라기보다도 국민적 합의가 부족했고, 기술적으로 역사적으로 사실관계가 오해된 측면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최소한 국민들의 합의나 지지 이전에 전문가나 각 정당 사이에 공감대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좀 미흡했던 것 같다.

서해평화협력지대에 대한 전문가들과의 합의 미흡, 이런 것은 당시 정책홍보본부장으로서 피할 수 없는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 2000년 정상회담 이후, 참여정부까지 공무원들의 분위기가 좀 달라졌나?

■ 공무원 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큰 변화가 있지 않았겠나. 북한 주민도 상당히 대남인식이 변화했다. 그러한 변화의 방향을 추스르고 좀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치밀한 대응을 못하지 않았나 싶다.

접촉면이 많아지면서 북한에 대한 인식이나 관점이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오히려 대립되는 관점들 간의 논쟁 위주로 가버렸지 새로이 넓어진 접촉면을 통한 서로의 변화를 큰 물줄기를 때라서 정리해줄 노력들이 부족했던 것 같다.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아는 만큼 보기도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만 볼 수도 있다.

2004년 잠깐 하나원 원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존경하던 장선섭 경수로기획단장이 하나원 견학을 오고 싶다고 해서 “직원들 데리고 오십쇼”라고 했다. 그 당시 경수로 기획단이 사실 좀 정체된 상황이었다. 직원들도 여유가 있어서 하나원에 견학을 왔는데, 하나원에 대해 브리핑하고 시설 라운딩만 준비하면 싱거울 것 같아 하나원 교육생들 중에 신포공사 현장에 참여했거나 그 근처에 산 사람이 있나 파악해, 많지 않지만 간접경험자까지 몇 사람을 모아 경수로기획단 직원들과 간담회 기회를 만들었다.

당연히 당시 신포가 화제의 중심이었는데, 당시 경수로 공사를 하기 위해 필요한 골재를 인근 하천에서 채취해서 끌어다 썼다. 그게 거리가 좀 돼서 거기를 왕복하는 도로가 필요했고, 아스팔트로 포장했다. 함경도 그 지역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오랜만에, 거의 해방후 처으로 닦아 우리 차량도 쓰고 북한 차량도 쓰고 북한 주민도 보행자들이 이용했다.

그런데 하나원 교육생 한 명이 “그 도로에서 남조선 사람을 처음 봤다. 그런데 거기서 남조선 사람들을 만나고는 남조선 사람들이 참 교양수준이 높다고 느꼈다. 북한 사람은 사람이 지나가나 안 지나가나 클락션을 빵빵 울리면서 ‘비켜’ 하는데, 남조선 차량은 앞에 사람이 지나가면 얌전하게 기다렸다가 출발한다”는 거다.

그런데 제 옆에 있던 경수로기획단 직원이 귓속말로 저한데 “나 저 얘기 안 믿어” 하더라. “왜 그러냐” 그랬더니 “내가 볼 때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이 잘 산다는 것 아니까 열등감 내지는 자격지심 이런 차원에서 성격들이 뒤틀려 있어서 북한 차량이 멀리서 나타나면 후다닥 피해주는데 남한 차량이 지나가면 일부러 어슬렁 어슬렁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탈북자의 이야기나 경수로기획단 직원의 이야기가 자기들이 현장을 보고 느꼈던 이야기기 때문에 다 사실이다. 똑같은 현상에서 서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남북간 접촉면이 많아지고 개별적 경험들이 어려가지로 나타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여론 지도층 내지는 정부까지 포함한 정치권이 남북관계의 바람직한 방향, 비전을 합리적으로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필요하다. 결국 남북관계는 북한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내부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들을 많이 느꼈다.

북한 축구팀 응원하는 하나원 탈북자들

▲ '뚝심'있는 업무추진력을 평가받았던 고경빈 전 원장.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새 정부 들어 또 하나원 원장을 맡았는데 섭섭하지는 않았나?

■ 그렇지는 않다. 첫 번째 하나원장 할 때 너무 짧게 2달여 밖에 못해 그때 굉장히 아쉬웠다. 하나원에서 탈북자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이 현실에서 겪은 것을 간접경험하면서 많은 공부를 했다.

탈북자 중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교육도 많이 못 받았지만 공부도 많이 하고 상황만 좋았으면 충분히 엘리트로서 사회적 위치를 가졌을 사람들도 들어와 있는데, ‘저 사람은 왜 피교육자 신분이고 나는 관리자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는 딱 하나다. 저는 운좋게 휴전선 남쪽에서 태어난 것 밖에 없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거기에다 공직자로서 통일문제, 남북문제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저한테는 굉장한 혜택이고 또 정말 직분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다.

□ 마지막으로 하나원장을 1년간 맡았는데, 어떤 의미가 있었나?

■ 탈북자들은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미리 얘기해주고 있다. 만약 남북이 60년 이상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한반도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때 우리 사회가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이렇게 단절된 상황에서도 탈북자들이 우리사회에 와서 우리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단서들을 많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탈북현상, 탈북자의 적응에 관한 여러 측면들을 깊이있게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포인트는 탈북자 지원정책이 탈북자 개개인의 복지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탈북자를 지원하는 것은 이들이 불쌍하고 어렵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돕는 것이지만 탈북자 지원에 들어가는 투자의 결과물은 우리 사회의 통일능력, 역량을 강화하는 결과물로 나와야 한다. 그

남북간 전면적 사회통합이라는 예방접종 차원으로 탈북자 문제를 접근하고 그 결과물로써 우리 사회의 역량을 강화한다면 탈북자 숫자가 늘어나건 전면적 사회통합에 직면하건 우리 사회의 발전에 좋은 결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만나본 탈북자 중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지금도 만나는 이들도 있나?

□ 더러 있다. 그러나 개별적인 상황보다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4월 1일 남아공 월드컵 남북한 예선전을 서울에서 했을 때다.

그때 하나원에서는 “직원이랑 교육생이랑 같이 공동응원하자. 식사하고 강당에 모여 같이 보자”고 했는데, 교육생들이 우리 직원들 눈치를 보는 것을 느꼈다. 누구를 응원해야 하느냐는 문제인데, 하나원에서는 우리 직원들 모두 다 고향팀을 응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 마음 놓고 고향팀을 응원하라고 격려하는 분위기였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다가 저녁식사하고 텔레비전 앞에 점점 많이 몰리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북한 응원으로 쭉 갔는데 우리가 1대 0으로 이겼다. 당직 선생 한 명만 “골인” 환호성을 질러 분위기가 좀 어색했다. 더구나 교육생의 상당수가 공동응원에 참여 안하고 자기 숙소에 가서 텔레비전을 봤다. 혼자 맘놓고 보겠다는 것이다.

하나원 안에서는 그나마 이런 분위기가 유지되는데,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 나왔을 때 음식점에서 일반인들과 식사하면서 텔레비전을 볼 때 과연 그럴 수 있느냐, 이게 큰 의문으로 남게 됐다.

저는 한반도의 근본적인 상황 변화가 올 때 어떤 시나리오가 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남북한 간에 증오나 복수심이 팽배해있는 상태라면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변화시켜나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남북한 주민들이 통일 이후에도 서로의 정체감을 가지고 서로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통일이 되면 어떡하나,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하나” 하는 남쪽 국민들의 부담감이나, “통일되면 2등 국민으로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북한 주민들의 불안감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그게 배경이 돼서 증오와 복수심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시나리오든지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제가 정책홍보본부장을 하던 2007년 5월 북 아일랜드 연합정부가 출범했다. 북 아일랜드는 구교도와 신교도의 대립으로 유혈 경험이 많았는데,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한쪽이 수상을 맡으면, 다른쪽에서 부수상을 맡아서 일종의 권력을 분점하는 연합정부가 합의됐다. 그게 초기에 조금 이행되다가 4,5년 공백을 겪고 2007년에 극적으로 타협해서 출범식을 갖는다. 신문에서 출범식 기사를 읽다가 부수상으로 된 마틴 맥기니스 신페인(Shin Fein)당의 당수가 연설을 하는데 연설 제목이 ‘분단으로부터 다양성으로(from division, to diversity)’였다. 우리 같으면 ‘통일’로 할텐데. 그게 공존의 기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도 지난 10여년간 여러 분야의 교류협력을 하면서 “민족동질성을 회복한다” 이야기하는데 참 좋은 취지지만 북한 사람과 만나서 “같다. 같은 피다” 그렇게 흥분해서 ‘우리의 소원’이나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고 돌아온 즉시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저 사람들의 생활양식 관습, 고향에 대한 애정을 서로 존중해주는 그런 결과물로 나왔으면 좋겠다. 남북교류를 통해 같다는 것을 억지로 강조하기 보다는 서로 다른 상황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 현 단계 우리 과제가 아닌가 싶다.

□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정책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

■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고 본다. 여러 차례 정부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대북정책은 지난 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큰 틀에서 포용(engagement)정책으로 잡은 이후로 다른 대안은 없다. 수사적(rhetoric) 차원에서의 것을 너무 과대 해석한 것이지 근본적 차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정부의 대북정책이 여전히 햇볕정책을 계승했다고 하면 거부감을 가질지 모르겠지만 지난 60년 동안 축적돼온 대북정책의 역사적인 결과물이라고 이해한다면, 지난 60년 전의 것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아니니까 조금씩 조금씩 상황에 맞게 변화해온 산물이라고 본다.

물론 단절감을 느끼는 것은 새 정부 들어서자마자 여러 가지 남북관계가 중단되고 이런 실물부분에서 단절이 있기 때문에 정책상에서도 단절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제가 느끼기는 상생공영의 정책은 화해협력의 정책 토대 위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단시대의 화두 “분단해소를 위해 뭘 했느냐?”

▲ 분단시대의 화두는 분단극복과 통일이라고 강조한 고경빈 전 원장.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그렇게 본다면 남북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요인은 어떻게 보나?

■ 우리쪽 요인은 언론에 많이 나왔고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북쪽 요인이 많이 궁금하다. 지난 수십 년동안 대남전략을 추진해왔고 그런 바탕이 되는 관성이라는 게 있는데 이번 2차 핵실험을 아무리 자기 계획을 갖고 일정대로 추진한다 하더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장기간에 했다는 것은 남쪽의 많은 일반 국민들의 대북감정을 크게 악화시킬 그런 부분이었고, 그나마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국민들에게도 당혹스런 조치였다. 국장기간이 무한정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날짜가 정해져있었고 기술적으로 자기네들이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었을텐데...

북한이 새정부 들어서 기다렸다는 듯이 남북관계를 모두 접었고, 지금 상황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느냐” 따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복잡한 전철에서 신발을 밟았는데 밟힌 사람이 심하게 구타하면 원인제공을 누가 했느냐가 큰 의미가 없다.

우리는 지금 상황을 기초로 판단을 하고 대응해야할텐데, 어쩌면 북한이 남북관계의 긴장, 악화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남북관계를 계속 꾸준히 가져갈 때보다 클 수도 있겠다. 지난 10년 동안 남북 교류협력, 접촉면의 확대를 통해서 북한 사회가 상당히 많이 변화된 것에 대한 반작용, 이런 것들이 북한 내부에 보이지 않게 계속 축적돼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지난 10년 동안의 남북관계, 교류협력이 북한 사회를 많이 변화시켰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 현 정부도 크게 봐서 화해협력정책이라고 했지만, 상당히 기존과는 다른 방식, 접근법들로 인해 남북관계를 많이 깨뜨렸고, 심지어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도 남북관계의 긴장을 바라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제가 지금 이야기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 닥쳐진 현실을 어떻게 돌파하느냐는 문제다. 우리 정부로서도 많이 답답해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다. 상황전개가 너무 악화됐다. 전철 안에서 누가 누구의 발을 먼저 밟았고 그 다음이 어땠고가 아니라 상황이 크게 악화됐기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도 운신할 수 있는 폭이 굉장히 좁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정책의 골간을 바꾼다고 해서 그 상황이 바뀔까 의문이 든다. 그것이 또 장기적으로 남북관계를 주도해나가는 힘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고려해야 되고. 결국 상황이 좀 바뀌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 외부적 상황이 변화해야 한다는 뜻인가?

■ 지금 내부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을 바꿀만한 공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6.15나 이런 측면에서 북한이 원하는 워딩을 그대로 해준다고 해도 개성공단의 토지임대료와 임금 인상을 없었던 일로 해줄 것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 개성공단은 이런 상황이 계속가면 어렵다고 봐야 되는가?

■ 굉장히 답답한 상황이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대국적인 측면에서는 결국 분단해소의 방향으로 남북관계가 진행될 것이라 생각은 갖는다. 오히려 대국적인 흐름이 분단해소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이라면 전술적인 국면에서 악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핵문제, 미사일, 개성공단, 악재가 한 시기에 몰려 있다는 것도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싶다.

□ 자연인으로 돌아왔는데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심경은?

■ 그동안 20년 동안 남북관계 현장에 있으면서 몇 가지 남북 간의 쟁점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 굉장히 아쉬웠다.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볼 여유가 없었다. 주로 쟁점이 생기면 “전문가들은 이렇더라” 했는데, 그런 것들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다.

지금 우리는 분단시대의 끝자락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제시대를 뒤집어서 얘기하면 독립을 준비하는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듯이 분단시대는 통일을 준비하는 시대다.

일제시대의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은 해방이었고 독립이었다. 물론 일제시대에도 많은 사회적 과제가 있었다. 조선의 근대화라든가 철도도로를 놓는 일이라든가 교육제도를 확립하는 일이라든가 신문물을 정립하는 여러 가지 정말 엄청난 사회적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도움으로 그런 근대화를 이룩했다고 하는 일각의 평가가 가슴에 안 와 닿는 이유가 해방이나 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을 외면한 근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사회적 과제가 굉장히 많다. 선진화도 해야 되고 또 뭐도 해야 되고 많지만, 후대 우리 역사가들은 우리 세대들에게 “당신들이 국민소득 3만불을 달성하기 위해 뭘 했느냐”고 묻기 전에 “분단해소를 위해 뭘 했느냐”고 물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분단해소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은 한반도에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게 임박했고 어떤 모습을 띨지 다 대비해야 되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남북이 적대감, 증오, 복수심 이런 것으로 가득찬 상황에서 그런 사태를 맞아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도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할 때까지 버텨온 우리 사회지도층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모든 언론이 일본이 전 세계를 점령할 것처럼 떠들고 일본의 지배가 200년 이상 갈 것으로 지식인 사회에서 이야기되고, 그런 상황에서 최남선이나 이광수 같은 분도 버티지 못했는데 결국 3년 뒤에 해방이 됐다.

1942년 당시 지식인들이 국제정세가 이렇고, 현실적인 힘이 이렇고 해서 아마 그런 판단들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소한 우리 민족에게 민족사라는 것이 있어서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국제정세가 불리해질수록 그것을 지켜내려고 하는 의지는 우리 사회, 특히 지도층이 견지해야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

일제시대에도 정말 착실하게 산 사람 많이 있었을 것이다. 착실하게 좋은 직장 가지고 나쁜 짓 않고 산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만 있어서는 뭔가 부족하다. 지금시대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것도 여러 시각이나 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문제는 국제문제라고 보는 관점도 근거와 일리가 있고, 또 북한은 정말 공존할 수 없는 체제다고 보는 관점도 다 근거가 있다. 그런 관점들을 다 쓸어버리고 한 가지 관점으로 통일하자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우리의 현실이나 미래를 볼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고 여러 관점들이 다 근거가 있다고 서로 존중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를 포함한 지도층에서는 민족적인 관점을 잃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남북 간에 증오와 적대감을 조장하는 방향이 아닌 쪽의 입장에 서주는 것이 최소한 후대에서 평가할 때 분단시대의 지도자로서, 분단시대의 지도층으로서의 제 역할을 했다라고 평가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