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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검은 그림자’<연재> 전상봉의 ‘20세기 경제사 산책’ (5)
전상봉  |  jsangb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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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9.06.16  14: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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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봉 (공공성강화를 위한 서울시민연대 대표)

‘20세기 경제사 산책’ 연재를 시작하며

자크 아탈리에 따르면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비롯되어 1991년에 끝난다. 이 같은 구분은 소련을 중심으로 전개된 20세기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냉전체제의 또 다른 축이었던 미국을 중심으로 20세기 역사를 기술하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필자는 미국의 20세기는 1917년 시작되어 2008년에 끝났다고 단정한다.

1917년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 해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50-60년대의 호황기와 80-90년대의 신자유주의를 거쳐 마침내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으로 미국의 세기는 저물었다.

이런 인식에서 필자는 미국의 1차 세계대전 참전에서부터 2007년 서브프라임사태로 미국이 쇠락하는 과정을 집필 중에 있다. 그중 연재를 시작하는 부분은 1차 세계대전에서 1930년대 대공황을 거쳐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제1부에 해당하는 글이다.

고백하건대 이 연재는 과문한 필자에게 버거운 주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지난 역사가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는 창이라는 생각으로 보다 진보하는 세계를 꿈꾸며 이 연재를 시작한다.

참고로 연재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1차 세계대전 : 제국의 번영은 시작되고① ‘한 통의 전보’
2. 1차 세계대전 : 제국의 번영은 시작되고② ‘베르사유조약’
3. 1차 세계대전 : 제국의 번영은 시작되고③ ‘손익 계산서’
4. 대공황 : 파산 난 자유방임주의① ‘20년대의 호황’
5. 대공황 : 파산 난 자유방임주의② ‘대공황의 검은 그림자’
6. 대공황 : 파산 난 자유방임주의③ ‘뉴딜정책’
7. 대공황 : 파산 난 자유방임주의④ ‘케인스라는 이름의 구세주’
8. 2차 세계대전 : 20년 동안 예비된 전쟁① ‘꺼지지 않은 불씨’
9. 2차 세계대전 : 20년 동안 예비된 전쟁② ‘마침내 전쟁은 시작되고’
10. 2차 세계대전 : 20년 동안 예비된 전쟁③ ‘사활을 건 싸움’
11. 2차 세계대전 : 20년 동안 예비된 전쟁④ ‘제국의 아침’

<연재5> 대공황 : 파산 난 자유방임주의② ‘대공황의 검은 그림자’

검은 목요일

1929년 9월 5일 매사추세츠 웰즐리에서 개최된 어느 오찬모임. 이날 오찬모임에 초대된 연사는 로저 밥슨(Roger Babson, 1875∼1967)이라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애널리스트였다. 강연이 시작되자 로저 밥슨은 예의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냈다.

“파국이 눈앞에 왔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작년에도, 그리고 재작년에도 했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겠습니다. 언젠가 시장은 붕괴할 것입니다.”

그의 강연을 듣는 참석자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주가가 고공행진 하는 상황에서 밥슨의 비관적인 전망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달랐다. 평소 같으면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을 밥슨의 발언은 오후 2시부터 전파와 주가표시기를 타고 번져나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별다른 뉴스거리가 없었다. 덕분에 전파를 타고 번지기 시작한 밥슨의 발언은 증시에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밥슨의 발언이 알려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팔자주문이 쏟아졌다. 이날 뉴욕 증권거래소의 거래량은 평일의 세배 가까운 200만주였고, 다우존스지수는 전날에 비해 9.84포인트 떨어진 369.77로 마감했다.

상승일로를 걷던 증시는 이날을 고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증시가 하락하자 당대의 경제학자 어빙 피셔(Irving Fisher, 1867∼1947)는 “시장이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라고 상황을 호도했다. 그러나 꺼지기 시작한 증시의 거품을 어빙 피셔도 어쩔 수가 없었다.

달포 넘게 지속되던 하락세 속에서 운명의 날이 밝아왔다.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이날 아침 뉴욕 증권거래소는 하락세 속에서 등락을 반복하던 지난 몇 주간의 장세에 비해 평온하기만 했다. 그러나 오전 11시가 되자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갑자기 주식을 팔겠다는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주식을 팔겠다는 사람만 나설 뿐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날 쏟아진 주식 매도세는 마치 방파제를 넘어 덮쳐오는 해일 같았다. 일순간 투자자들은 거대한 공포감에 휩싸였고 증권 시세 표시기는 감당할 수 없는 매도 주문에 허둥댔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파산한 투자자 11명이 자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 투자신탁회사의 큰손들은 대책회의를 열고 필사적인 주식 매입 작전에 나섰다. 그 덕분에 금요일과 토요일의 증시는 다소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나 주말이 지난 10월 28일 월요일, 몇 명의 또 다른 투자자들이 자살했다는 소문과 함께 대재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10월 29일 화요일, 뉴욕 증권거래소가 개장하자마자 매물들로 넘쳐났다. 장세는 날개 없이 추락했고 아무도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날 다우존스지수는 지난 토요일에 비해 평균 23%나 하락했다. 한 달 전인 9월과 비교하여 40%나 곤두박질친 것이다. 일주일전 혹시 주가가 오르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주식을 샀던 사람들은 처참하게 폭락한 가격에 되팔아야만 했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대재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는 사실. 당시 경제상황은 지옥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달리는 열차 같았다.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10월 한 달 동안 무려 320억 달러가 증시에서 사라졌다. 10월 1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가 총액은 870억 달러였으나 한 달이 지난 11월 1일에 이르면 550억 달러로 폭락해 있었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30년 3월 주가 총액은 19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불과 6개월 사이에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전비로 쏟아 부은 300억 달러의 두 배가 넘는 680억 달러가 사라진 것이다.

주가가 폭락하자 집과 땅을 저당 잡히고 빌린 돈으로 주식을 샀던 사람들은 졸지에 알거지 신세가 됐다. 재산과 예금을 날려버린 사람들은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물건이 팔리지 않자 기업들은 생산을 감축하고 직원들을 해고했다. 실업자는 부지기수로 늘었고 빈곤은 깊어져 상품 판매가 급감했다. 저주와도 같은 대공황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자금난에 빠진 기업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1929년부터 1932년 사이 도산한 기업은 8만5000개가 넘었다. 은행 또한 주가 폭락으로 돈을 회수하지 못해 줄줄이 파산의 길로 들어섰다. 1929년부터 1934년 사이 2만5000개의 미국 은행 가운데 9000개가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900만 개의 저금통장이 쓸모없는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이 기간 농업생산과 공업생산은 절반이나 줄었고, 실업자는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늘어났다.

대공황의 그림자

“공황은 끝났습니다. 여러분께서는 60일 늦게 왔습니다.”

대통령 후버는 1930년 6월 공공구제 정책을 촉구하려고 백악관을 방문한 성직자들을 돌려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해 3월에도 “두 달이 지나면 증시 폭락에 따른 고용불안도 사라질 것”이라고 공황 종료를 선언한 바 있었다.

당시 경제 상황을 살펴보면 후버의 말이 생뚱맞은 것이 아니었다. 1930년 10월까지만 해도 미국 경제는 1920년대 초반의 불황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 그해 3월과 4월 다우존스지수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대폭락 이전 수준을 향해 완만하게 상승하였고 실업률은 9%로 1920∼1921년의 실업률 11.9%에 비해 낮은 수치였다.

미국 경제가 대공황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1930년 11월과 12월을 지나면서다. 그해 11월과 12월 무려 600개의 은행이 연쇄 파산하면서 미국 경제는 처참하게 추락했다. 그리고 1931년이 되자 미국 경제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에 봉착한다. 그해 2293개의 은행이 도산했으며 GNP의 20%가 떨어졌다. 수많은 미국인들은 엄습해 오는 실업의 칼바람에 속수무책이었다. 실업의 칼바람은 고무, 유리, 철강 등 제조업은 물론이고 자동차 중개상과 보험업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몰아쳤다. 자동차 산업의 경우 1929년 450만 명이었던 종사자들이 1931년이 되자 19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농민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 농가가 벌어들인 1년 순소득은 1929년 945달러에서 1932년 304달러로 줄어들었다. 당시 미국민의 절반가량이 농촌 인구였기 때문에 농가 수입의 감소는 사회 전체의 구매력 감소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실업률의 경우 1931년 말 15.9%까지 치솟았다. 그해 연방정부의 세입은 9억 달러 감소한 반면 지출은 2억 달러가 늘어났다. 덕분에 1931년 연방정부가 기록한 적자액은 5억 달러였다. 5억 달러는 당시 세입의 13%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산업생산지수의 경우 1932년 12월 64%에서 1933년 3월 56%로 하락했다. 이런 가운데 엄청난 양의 금이 해외로 빠져 나갔다. 어떤 주에서는 1억 달러어치의 금이 유출됐다. 그로인해 1932년 연방정부가 세금을 인상했음에도 불구하고 27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전시를 제외하고는 미국 역사상 최고치였다. 그해 GNP는 580억 달러로 3년 전에 비해 56%에 불과했으며, 실업률은 전례 없는 수준인 23.6%였다. 게다가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임금과 노동 시간이 감소한 불완전한 고용 상태였다.

마침내 악마의 얼굴을 한 대공황이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기 미국 경제는 붕괴하다시피 했다. 생산설비와 기술자들은 건재했으나 공장은 돌아가지 않았다. 덕분에 기술자들은 직장을 잃었고 거리에는 해진 옷을 걸치고 일자리를 찾아 해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농촌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한 끼 밥과 잠자리와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창고에는 재고상품이 가득했지만 사람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야적장에는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나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 긴긴 겨울밤을 지새워야 했다.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맛 좋은 오렌지가 썩어가는 동안 뉴욕의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파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기업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해마다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경제는 차관, 수출, 관광 수입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미국 자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황이 깊어지자 미국은 더 이상의 자본을 유럽에 투자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되자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나라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였다. 패전의 멍에를 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통화 불안에 시달리던 두 나라는 미국발 대공황의 충격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31년 5월 11일 오스트리아의 크레디트 안슈탈트(Credit Anstalt)은행이 파산하면서 유럽의 금융공황이 시작되었다. 크레디트 안슈탈트은행의 파산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수많은 은행들이 다투어 파산의 길로 들어섰다. 1931년 7월 13일 독일 최대의 다나트은행이 영업을 정지하자 베를린 증권거래소와 은행들은 문을 닫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시작된 파산의 도미노는 유럽 금융의 상징인 런던을 향해 번져갔다. 당시 영국은 1차 대전의 후과로 생산력이 저하되어 수출이 급감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영국정부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금본위제를 재건하면서 파운드화의 국제시세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때문에 국제무역업자들은 파운드화보다는 금을 선호했고 여기에 대공황의 충격이 더해져 국제적인 금 부족사태가 빚어졌다. 결국 1931년 9월 20일 영국정부는 국제적인 위신 추락에도 불구하고 금본위제(주1)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금본위제의 해체는 세계를 주름잡았던 팍스 브리태니커 시대의 종말을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금본위제가 해체되자 세계의 경제지도는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다. 자유무역이 퇴조하고 보호무역주의가 고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보호무역 장벽이 높아지자 파운드, 달러, 프랑, 마르크 등 제국주의 국가의 화폐가 활거 하는 시대가 개막됐다. 그리하여 각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들의 식민지가 배타적인 경제 블록을 형성, 다른 통화권에 대해서는 높은 관세를 부가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배타적인 경제 블록의 형성은 2차 세계대전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영연방 국가들의 경우 1932년 7월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 ‘대영제국 경제회의’를 개최하고 오타와협정을 체결한다. 12개 조항으로 구성된 오타와협정은 영연방 국가 간의 특혜를 부여하는 배타적인 협정이었다. 오타와협정의 체결로 영연방 사이에는 ‘스털링블록(Sterling Block)’이 탄생했다.

미국의 경우 금본위제가 해체되자 연방준비은행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달러를 보호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연방준비은행은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자율을 인상하고 시중에 풀린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연방준비은행의 이 같은 방침에 따라 은행들은 대출금 회수에 나섰고, 사람들은 극도로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미 심각한 상황에 처했던 디플레이션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버 정부는 공황을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패착을 두고 만다. 후버 정부는 1930년 6월 “농산물 수입관세를 올려 농가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스무트-홀리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제정한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스무트-홀리관세법이 교역국의 보복관세를 부추겨 미국의 수출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시 미국의 GNP에서 수입이 차지한 비중은 4.2%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후버정부가 스무트-홀리관세법을 제정한 것은 자신들의 지지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정략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스무트-홀리관세법이 제정되자 법 제정에 반대했던 경제학자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1930년 6월 후버가 스무트-홀리관세법에 서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나라들이 보호무역정책을 들고 나왔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문단속에 나선 것이다. 스무트-홀리관세법이 제정되고 2년이 지나자 20여개의 국가들이 미국에 대해 보복관세를 부과하였다. 그로인해 미국의 수출은 1929년 52억 달러에서 1932년 16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세계의 무역량 또한 형편없이 감소했다. 1929년 세계 무역액은 총 360억 달러였으나 1930년 139억 달러, 1931년 97억 달러, 1932년 65억 달러, 1933년 54억 달러로 급감했다. 세계의 무역액이 4년 동안 무려 70%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이 원고는 http://cafe.daum.net/615simin 에도 동시에 실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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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금본위제(gold standard)는 화폐 가치를 금으로 나타내는 제도이다. 금본위제도가 안정적으로 시행된 것은 1870년대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였다. 영국 정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25년부터 금본위제를 재개했으나 대공황으로 금 부족사태가 빚어지자 폐지를 선언한다. 금본위제는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무역 수지를 조절하는데 효율적인 제도이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금의 희소성으로 인해 유동성 공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금본위제는 경제규모가 커지고 금융이 개방화된 금융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가동되기 어려운 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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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 2009-06-16 20:3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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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정부 중앙은행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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