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외곽에 있는 재일동포들의 절, 국평사 전경.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통일뉴스가 일본 도쿄 소재 국평사를 찾은 것은 지난달 26일이었다. 윤벽암 주지 스님은 국평사를 재일동포들의 사랑방이자 죽은자들의 고향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이 절의 구조와 역사를 “최초로 공개한다”면서 손수 법당과 납골당을 일일이 안내하는 친절을 베풀었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절, 국평사

▲ 2003년 10월 국평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와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가 최초로 공동법회를 봉행하고 있다.[통일뉴스 자료 사진]

국평사(國平寺).

문자 그대로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절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절이라고나 할까.

이 절은 일본 도쿄도 히가시무라야마시(東村山市) 하기야마조(萩山町)에 있다. 도쿄 외곽에 있는 888평의 아담하고 깨끗한 절이다. 이 근방에는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인 조선대학교도 있다.

국평사(주지 윤벽암 스님)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해 절이라기보다는 묘라고 해야 옳다. 절이라면 포교를 해야 하는데 포교 활동을 하지 않고 절간 안에는 죽은자들의 혼백을 모은 납골당과 묘가 꽉 들어차 있으니 말이다.

산자들에게는 재일동포들의 모임마당이자, 죽은자들에게는 좋은 땅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다. 말하자면 국평사는 산자나 죽은자 모두에게 사랑방이자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지금 국평사의 역할은 이국땅에서 남과 북이 화해하는 것을 돕고 또한 한국과 일본이 화평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사실 국평사는 이제까지 이같은 일을 해왔고 6년 전에는 특별한 일을 한 적이 있다.

2003년 10월 국평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와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가 최초로 공동법회를 봉행한 것이다. 이때 열린 ‘조국의 평화와 통일, 재일동포의 민족적 권리를 위한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 공동법회’에서 낭독된 공동발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의 실천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는 그 이름도 나라의 평화를 바라는 ‘국평사’의 신성한 법당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 재일동포들의 민족적 권리를 위한 합동법회를 갖고 우리 불자들의 한결같은 서원을 담아 부처님 전에 가호원력을 염하여 두 손 모아 삼가 공동의 축원을 드리는 바입니다.”

국평사는 일본 도꾸가와 가문의 절

▲ 절의 지붕 기와에는 도꾸가와 가문임을 뜻하는 문양이 있다.[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본래 이 절은 370년 전에 세워진 절로서 일본 사원이었다. 도꾸가와 막부(德川幕府)의 8대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 1684년 ~ 1751년)의 청에 의해 지어졌다는 말이 있다.

지금도 절의 지붕에는 도꾸가와 가문임을 뜻하는 기와 문양이 있다.

원래 이 절은 은퇴한 스님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수양하던 곳이다. 그런데 이 절을 이어받을 스님이 일본에 없었다. 고승(高僧)에 해당하는 일본 스님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이 절을 이어 받은 스님이 있었다. 다름아닌 일본에 온 한국의 유종묵 스님이다.

유종묵 스님은 이 절에다 조선인 유골을 한 자리에 모았다. 통일될 때까지 유골을 모으고자 했다. 아주 먼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까지 가서 조선인 유골을 다 모아 이 절의 지하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스님은 절 이름을 국평사(國平寺)로 칭했고, 이때 제일 먼저 지은 게 유골을 모신 납골당이었다.

▲ 납골당 안에 있는 모형 다보탑.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유종묵 스님은 이곳 국평사에다 1965년에 3층으로 된 납골당을 지었다. 납골당은 불국사 다보탑 모양으로 지었다. 지금 이 납골당 안에는 모형 다보탑이 있다. 원래 이 모형 다보탑은 북한이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들의 민족학교인 조선대학교에 보내준 것이다. 그런데 남한이 조선대에다 다보탑과 석가탑의 모형을 보내주자 조선대에 있던 이 모형 다보탑이 국평사로 오게 된 것이다.

국평사는 크게 보아 법당과 납골당으로 되어있다. 법당은 원래 지하에 납골당이 있었는데 다보탑 모양의 납골당이 세워지자 모두 이리로 옮겨졌다. 법당 지하에는 지금 석묘가 있다. 놀라운 건 이 법당과 납골당이 마치 산자와 죽은자가 서로 교류하듯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당에서 남과 북이 <고려대장경>과 <팔만대장경>으로 만나다

▲ 법당에 있는 불상이 특이하게도 합장을 하고 있다.[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법당 좌우에는 한글로 쓰여진 위패가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법당 중앙에는 불상이 있고 좌우 양쪽에는 위패가 있다. 특이한 건 불상의 손 모양이다. 보통 불상은 한 손은 들고 다른 한 손은 받치고 있는데, 이곳 법당의 불상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다.

위패도 한자가 아닌 우리 글로 쓰인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유종묵 스님이 지은 축문에 ‘조국통일’과 ‘평화’의 내용이 있는 것도 독특한 점이다.

이 법당에는 남북이 보내온 고려시대 <고려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이 있다.

▲ 남측이 보낸 <고려대장경>과 북측이 보낸 <팔만대장경>.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남측에서는 동양불전연구회가 편찬한 축소판 <고려대장경>(1972)을 보내왔다. 이 책은 합천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을 한 자 한 자 적어서 축소, 인쇄해서 만든 것이다. 모두 1천부를 인쇄했다고 하는데, 유종묵 스님에게 78번째를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북측이 보내온 것은 <팔만대장경해제> 15권(사회과학출판사, 1992. 평양)이다.

남과 북이 제3국인 일본의 한 사찰에서 고려시대 <고려대장경>과 <팔만대장경>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유골 1500기 모신 납골당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국평사에 납골당이 생긴 것은 1965년이다. 국평사에 있는 유골은 모두 1500기다. 그중 일본에 유가족이 있어 찾아오는 게 1,200기이고, 300기는 가족, 친지, 소식도 없는 이른바 임자 없는 유골이다.

법당 건물과 다보탑 형태의 유골 건물, 두 군데에는 모두 유골이 있다. 법당 지하에는 독립된 유골이 있다.

▲ 납골당 내부 모습.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납골당 2층에 있는 부부합장 묘.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그리고 다보탑 모양의 납골당은 모두 3층으로 되어있다. 국평사는 이 납골당으로 인해 특징 있는 절이 되었다. 다보탑 납골당은 모두 3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은 개인묘지이고, 2,3층은 공동묘지인데 특히 2층에는 부부합장으로 되어 있다.

▲ 납골당 1층에 있는 개인묘지.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1층 개인묘지는 108개가 있다. 비석에는 본관과 본적지가 새겨져 있다. 일본에 살면서 세상을 떠도 조선식으로 묘를 모실 수 있게끔 했다.

그렇다고 납골당에는 조선 사람만 모시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도 있다. 국평사는 도쿄도에 종교법인화 되어있다. 유종묵 스님이 조선절에 일본 사람도 모시라고 해서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국평사에는 한 사람 묘, 부부 합장묘, 유가족이 없는 묘, 일본 사람의 묘 등 다양하다.

국평사의 첫 주지 스님, 유종묵 스님

▲ 유종묵 스님이 기거하던 방. 이응접실에서 2003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와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가 만났다.[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국평사를 얘기하면서 유종묵(柳宗默, 1893.1.12-1983) 스님을 빼 놓을 수 없다.

유종묵 스님은 일제시대 때인 40대에 조선에서 일본 교토대학에 철학공부를 하러 왔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았고 1945년에는 교토에 있는 만수사에서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이후 총련과 민단 간부들이 유종묵 스님께 공부를 배웠다.

그러다가 1965년 교토에서 도쿄로 와서 이곳 국평사 주지가 되었다. 일본에는 불교가 18개파가 있는데 국평사는 어떤 종파에도 속해있지 않다.

유종묵 스님의 지론은 “통일되면 국평사는 없앤다”는 것이다. 통일이 되면 유골들을 갖고 조국에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국평사의 후계자 생각을 안했고 또 직접 지은 책도 없다.

유종묵 스님을 중심으로 사제(師弟)간의 계보를 설명할 수 있다. 유종묵 스님의 스승은 한암 스님이다. 그리고 유종묵 스님의 바로 아래 제자는 윤일산(尹一山) 스님이다. 윤일산 스님은 지금 국평사 주지인 윤벽암 스님의 부친이다. 그러니까 한암 스님-유종묵 스님-윤일산 스님-윤벽암 스님, 이렇게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유종묵 스님의 스승, 한암 스님

▲ 유종묵 스님이 90세 때 쓴 '통일단결'.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한암(漢岩) 스님(1876-1951)은 한국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상원사에 있으면서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한암 스님은 참선만 했다.

일본 총독부가 금으로 만든 가사를 한암 스님에게 드렸는데 그 가사를 안 입었다고 한다. 한암 스님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 스님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국군이 상원사에 와 이 절이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그래도 한암 스님은 법당에서 참선만 했다.

이윽고 한암 스님은 “스님은 수행하는 게 일이다”고 말한 뒤 “그러면 군인은 무엇인가? 명령을 수행하는 게 군인이다. 그러니 명령대로 절간에 불을 지르라”고 말하고는 계속 참선을 수행했다. 결국 군인들이 불을 못 질러 사찰을 지켰다는 것이다.

한암 스님에게는 특별한 제자가 셋이 있었다.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 스님이다. 여기서 난암(煖岩)이 유종묵 스님이다. 세 제자 중 유종묵 스님이 일본에 온 것이다. 그리하여 국평사를 매개로 하여 지금의 윤벽암 스님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 국평사 주지 스님, 윤벽암 스님.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통일뉴스 : 국평사는 어떤 절인가?

■ 윤벽암 스님 : 여기에는 조선 사람들의 유골을 모은 납골당이 있다. 좋은 땅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재일동포들에게는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다.

이 절의 초대 주지 스님이셨던 유종묵 스님이 1965년에 국평사를 만들면서 통일 되면 국평사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나는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통일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지금 국평사의 역할은 남북이, 한일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 국평사의 역할에 대해 설명해 달라.

■ 한마디로 말해 통일을 위해 살아오신 분들이 계셨다는 것을 후대손들에게 알리는 장소다. 꼭 종교적으로 볼 게 아니다. 국평사에서는 제사도 지낸다. 말하자면 불교 기독교 유교 등의 종교를 넘어서 있다. 남과 북, 일본을 뛰어 넘자는 것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고유하게는 선조의 불공을 드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리다.

□ 신도는 몇 명이나 되는가?


■ 축원이란 장부가 있다. 신도개념은 아니다. 이 절에 납골되어 있는 유골자가 있고 또한 그 보호자를 비롯해 집안 식구들이 적혀 있다. 그 장부가 1023호다. 사람 수가 아닌 장부 수다. 그러니까 사람은 훨씬 많다.

□ 도쿄 외곽에 있고 또 한국식 절이라 포교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 특별히 포교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국평사는 절이라기보다는 묘라고 해야 옳다. 납골당을 운영하는 게 주된 일이니 말이다. 재일동포들의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 운영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운영하나?

■ 4월 초파일, 동지, 추석 그리고 기일 등에 신도들이 찾아와서 돈, 물건 등으로 도와준다. 여기 국평사의 모든 물건들도 신도들이 기증하거나 도와준 것들이다. 그리고 사찰 땅은 국평사 소유이고 종교법인이라서 토지세나 세금이 없다.

□ 국평사는 납골당 사찰로 독특하다.

■ 일본에서는 보통 토장이 아니라 화장을 해서 유골함에 낳는다. 한국사람의 경우 이곳이 고향이 아니다. 특히 1세는 일본에 묘를 안 만들고 죽어도 고향에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들고 갈 수 있게끔 임시적으로 함에 유골을 넣었다. 국평사 납골당은 묘이면서도 묘가 아닌 임시 보관소이다.


▲ 유종묵 스님이 기거하던 응접실에서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국평사 제공]
□ 어떤 유골들이 있나?

■ 일제 식민지시대 때 적지 않은 조선사람들이 강제 징용, 강제 노동자 등으로 일본엘 왔다. 일제시대 때 세상을 뜬 사람들은 일본정부가 유골을 납골당에 보관했는데, 해방 후 세상을 뜬 사람은 관리하지 않았다. 1945년을 계선으로 일본정부의 입장이 다른 것이다. 그러자 유종묵 스님이 1945년 이후 일본정부가 관리를 하지 않은 유골들을 간수하기 시작했다.

주로 혼자 계신 분, 고향에 갈 수 없는 분들의 유골이다.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골들을 다 모았다. 홋카이도, 오키나와, 규슈 지방 등 각 지역에서 다 왔다. 절이나 개인들이 갖고 있거나 방치된 유골도 모두 모았다. 국평사를 믿기에 모두 보내주었다. 총련이든 민단이든 수습 못한 유골들을 한 군데에 모은 것이다.

그리고 해방 전에 돌아가신 한국국적 유골은 일본 정부가 1965년 한일수교 후 가족에게 반환해 주었다. 그런데 유가족이 없거나 알 수 없는 경우 일본정부가 아직 유골을 내놓지 않고 있다.

□ 그렇다면 납골당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임자 없는 유골은 어떡하나?

■ 그게 문제다. 납골당은 국평사와 함께 1965년에 만들어졌다. 그 이전의 유골이 문제다. 이름을 모르거나, 이름이 있어도 본명인지 가명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조사도 쉽지 않다. 유일한 해결방도는 통일밖에 없다. 통일된 다음에 공동묘지가 필요하다.

□ 국평사 하면 유종묵 스님의 비중이 큰 것 같다. 유종묵 스님은 어떤 분인가?

■ 대선사이시다. 이름은 난암(煖岩)이다. 몸은 작지만 엄한 스님이셨다. 신발을 항상 나란히 해야 했고 생활규칙이 엄했다. 나는 손자뻘로 이쁨과 귀여움을 잔뜩 받았던 기억이 있다.

▲ 법당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 윤벽암 스님.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유종묵 스님과의 관계는?

■ 내 부친이 유종묵 스님의 제자이셨다. 교토에서 유종묵 스님과 부친이 함께 지냈다. 제 부친이 아직 결혼을 안 했을 땐데 유종묵 스님이 결혼하라고 해서 2남 2녀를 낳았다. 그러니까 나는 유종묵 스님의 손자뻘이다.

나는 조선대학교 기계공학과 4년을 졸업하고 도쿄대 공학연구소 연구자로 일했다. 그때 유종묵 스님이 내게 도쿄 공학연구소에 찾아와서 “공부를 잘 해서 통일된 나라에 기여하라”고 말씀하셨다. “통일사업보다 공대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 부친께서 어떻게 유종묵 스님을 만났나?

■ 제 부친께서는 일제시대 때 합천 해인사 스님이셨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하셨다. 그때 일본 스님이 부친더러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해서 일본 절에 와서 수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교토에 조선에서 온 큰 스님인 유종묵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친께서는 1930년에 유종묵 스님을 만나 뵙고 제자가 되었다.

□ 일본에도 국평사와 같은 한국 절이 많이 있나?

■ 일본에 3천개의 사찰이 있다. 그중 한국 절은 몇 개 안 된다. 이곳 도쿄에는 국평사가 있고, 오사카에는 통국사, 고베에는 대승사 그리고 교토에는 만수사와 2만평 부지의 고려사가 있다. 이들 한국 절의 공통점은 대개가 유골을 모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동부지역 유골은 도쿄에 있는 이곳 국평사가 맡고, 서쪽지역 유골은 오사카에 있는 통국사가 맡았다. 통국사엔 1천개 유골이 있다. 고베 대승사엔 300기가 있다. 교토 만수사에는 1300기, 고려사에도 유골이 있다.

□ 교토 만수사가 유종묵 스님이 원래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 1940년에 유종묵 스님이 만수사에 들어갔다. 원래 일본 절인데 이 절을 맡아서 할 스님이 없다고 해서 비어있는 절이었기에 유종묵 스님이 빌렸다.

재밌는 일이 있다. 만수사는 일본 천왕 후예의 절이고, 국평사는 도꾸가와 후예의 절이다. 이들 절은 고승이 맡아야 한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들 절을 맡을 고승이 없었다. 그래서 고승인 유종묵 스님이 맡았다. 이는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도 확인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을 괴롭혀도 유종묵 스님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만큼 이름 있는 고승이었다. 그래서 국평사나 만수사 모두가 통일 때까지를 대비한 임시적인 절이다. 그래서 국평사와 만수사에는 후계자가 없다.

그러니까 유종묵 스님이 만수사를 운영하시다가 1965년에 도쿄로 와서 이곳 국평사를 운영했다. 그 사이에 교토 만수사는 내 부친인 일산 스님이 운영했다. 그런데 부친이 돌아가셔서 내 동생인 청안(靑眼) 스님이 지금 만수사를 운영하고 있다. 내 청안 스님은 영화 ‘박치기’에서 스님으로 나온 사람이다.

▲ 윤벽암 스님이 임자 없는 유골함 앞에 서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국평사를 운영하면서 재일동포들의 애환을 많아 봤겠다.

■ 1세들이 고생을 많이 하셨다. 1세는 진실을 안고 산다. 참는다는 것을 안다. 1세들은 가난해서 배고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자연의 법칙을 깨달으셨다. 겨울을 넘겨 봄이 되면 산나물을 캐서 자식들을 준다. 삶의 방식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2,3세대는 풍족하면서도 더 어렵게 산다. 일본 사람이 되어가고 싶은 것과 일본사람이고 싶지 않다는 갈등 속에 있다.

□ 국평사가 아주 아담하고 평화롭다. 지역사회에서도 하는 일이 있을 것 같다.

■ 일본에서 한류가 대단하다. 그래서 여기에서 일본사람들 대상으로 한국말 강좌를 한다. 원래 히가시무라야마시에서 ‘지구시민클럽’ 만들어 운영하는데 우리도 지역사회의 일환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 전체로는 70여명이고 이곳 국평사에서는 10여명 정도가 배운다. 국평사 인원과 유학생, 조선대학교생 등이 선생이 되어 매주 화요일 오후 7시부터 8시 30분까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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