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인 일본 당국과 국정원의 ‘의지’

1987년 11월 29일,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실종된 KAL858기의 폭파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면된 김현희(47) 씨가 다시 공개무대에 나섰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대통령 선거가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끝난 1997년 12월 국정원 직원과의 결혼과 함께 공개활동을 중단하고 잠적한 이후 11년여 만이다.

11일 김 씨가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 씨의 가족을 만나는 부산 해운대구 소재 벡스코(BEXCO) 앞은 경찰특공대 차량을 비롯한 경비차량들과 내외신 언론사들의 방송차량들이 즐비했다.

사전 취재신청을 한 기자들도 신원을 확인한 뒤 일일이 비표를 발급받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했고, 김 씨는 베레모를 쓴 경찰특공대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마치 20여년 전으로 시간이 거꾸러 흘러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KAL858 가족회나 시민대책위가 이날 행사에 대해 일체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인경호 못지않은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한 주최측인 일본 정부와 국정원의 ‘의지’가 돋보인 셈이다. 특히 일본은 이날 행사를 주최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들도 생중계를 하는 등 한국 보다 높은 취재열기를 보였다.

12일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KAL858 대책위)는 “일본 정부는 이를 계기로 납북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을 압박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며 “이는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일본의 전략이며 김현희 씨는 여기에 맞장구를 치며 스스로 활용당해 준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12일 오후 문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유명환 외교 통상부 장관은 3월 12일 아침10시부터 15분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일본외상과 전화 통화를 가졌다"며 "금번 통화는 日측 요청에 따라서 이뤄진 것으로 나카소네 외상은 금번 김현희-다구치 가족간 면담 실현에 대해서 아소 총리를 포함한 일본 정부의 사의를 표명하였다"고 밝혔다.

문태영 대변인은 "유명환 장관은 위성락 한반도본부장을 내주 초 일본을 방문토록 하였음을 설명하였으며, 양측은 동 계기에 지난주 보즈워스(Stephen Bosworth)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협의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대응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 이번 김현희-다구치 가족 면담에 대해 이명박 정부의 신주류와 일본 강경파의 오바마 정부를 염두에 둔 대북정책에서의 끈끈한 동맹과시가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도 이같은 흐름에 근거해 있다.

화동사진과 김현희 씨의 ‘예의’

김 씨는 기자회견에서 일성으로 “오늘 저에게 북한에서 일본어를 가르쳐준 다구치 야에코 씨 아들과 그 가족 만나 너무 기쁘기도 하고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씨가 북한에서 일본인 현지화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은 리은혜이고, 그가 다구치 야에코라는 사실은 김 씨의 주장에 불과하지만 그는 이를 아무 거리낌 없이 기정사실화 했다.

1991년 5월 16일 김현희 씨는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사진을 보는 순간 은혜선생님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살이 찐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 모습이 눈에 떠올랐으며 그리움과 함께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세계일보 1991.5.17)고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김현희 씨의 이 같은 증언은 이전 두 차례 거짓말과 신통히 닮아 있어 두 차례 거짓말을 말끔히 해명하기 전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1988년 1월 15일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KAL858기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김 씨가 북한 사람이라는 가장 중요한 증거로 1972년 11월 2일 남북조절위원회 고위급 2차 평양회담 시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김 씨가 남측 대표단의 일원인 장기영 씨에게 화환을 증정한 이른바 ‘화동’ 사진을 제시했다.

김 씨는 이 사진에 대해 “네, 틀림없이 저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뺨에 살이 올라 통통 했습니다. 그리고 이마, 눈썹, 눈두덩, 귀의 모습과 얼굴 윤곽을 보면 틀림없이 저라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안기부 신문조서)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화동 속 학생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귓불 모양이 동그랗지만 김 씨는 이른바 ‘칼귀’ 모양이어서 논란이 가열됐고, 결국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성이 나타나 사진속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고 나서 거짓으로 판명됐다. 김 씨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은 이후 국가정보원(국정원)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또한 김 씨는 일본 잡지 ‘그라프 곤니찌와’에 실린 일본 기자의 또다른 화동사진에 대해 “이 사진을 어디에서 구했나요? 이것은 틀림없는 저입니다”(수사기록)라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거짓으로 판명됐고 역시 국정원에서도 이를 인정했다.

김 씨는 심지어 법정에서 조차도 “두장의 사진은 피고인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진들은 피고인의 집에 있는 사진의 모습과 분명히 같으며, 앞에 있는 어린이가 그때 피고인과 함께 참가하여 앞에 서있던 동무가 틀림없습니다”(서울형사지법 공판기록)라고 위증했다.

11일 기자회견에서 김 씨는 ‘화동사진’과 관련된 질문을 받고 “화동사진은 이미 다 분명히 밝혀졌다”고 전제하고 “내가 먼저 그때 화동으로 나갔다고 진술했고 그 뒤에 사실 그 사진, 내가 없었다고 하는 그 사진에도 내가 있었다. 첫 번째 사람에 가려져 있어서 사실 나오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러나 왜 두 차례나 구체적으로 자신이라고 지목한 사진 속 여학생이 자신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가려져 나오지 않은 여학생이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해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늘 가족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 얘기는 피함이 예의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두 차례나 만 천하에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법정에서 조차 위증한데 대해서는 질문을 받고도 한 마디 반성이나 해명 없이 언급을 피하는 것이 ‘예의’라며 피해간 것이다.

‘확실히 생존하고 있다는 증거’는 뭘까?

김 씨는 다구치 야에코 씨의 행방에 대해 “내가 87년에 마카오에서 돌아와서 87년 1월부터 87년 10월까지 북한 초대소 생활을 하면서 들은 것은 그냥, 다구치 씨가 어디에 데려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며 “그래서 사망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어디 다른 곳에 갔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물론 김 씨가 언급한 ‘다구치 씨’는 리은혜 씨를 지칭하고 있다.

김 씨는 “내가 알기론 86년도에 결혼들을 좀 시켜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결혼을 다른 납치자들도.. 혹시 그래서 결혼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고 자신의 추측을 보탰다.

북측이 2002년 10월 방북한 일본 정부조사단에 통보한 일본인 피랍 사망자 사망 경위서에는 다구치 야에코 씨에 대해 “86년 7월 30일 승용차로 귀가 중 트럭과 충돌 사고로 사망했다. ‘이은혜’와는 관계없다”고 명기돼 있다.

그런데 다구치 야에코 씨의 장남 이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32) 씨는 김 씨와의 면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장에서 “나의 모친인 다구치 야에코 씨에 대해서 정말 확실히 생존하고 있다는 증거를 받았다”며 “저희들의 구출활동에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 씨가 다구치 가족들에게 ‘확실히 생존하고 있다는 증거’로 무엇을 이야기하거나 줬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80여분 간의 면담과정에서 김 씨가 주로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 내용 중 북측이 다구치 씨가 사망했다고 제시한 86년 이후인 87년에 김 씨가 북한에서 다구치(리은혜)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했고, 김 씨와 동거했던 다구치(리은혜) 씨를 돌려보내면 북한이 KAL858기 폭파사건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돌려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취지가 담겨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씨는 이미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진술했고, 김 씨가 리은혜 씨와 북한에서 함께 보낸 1년 8개월에 대해서는 이미 『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고려원, 1995)라는 책까지 발간해 소상히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정통한 소식통 역시 “새로운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확인했다. 나아가 “직접 구체적인 이야기를 한 시간 정도 들으니 감정적으로 더 확신하게 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보탰다.

유가족과 ‘조건부 면담’ 이뤄질까?

김 씨는 기자회견에서 “97년 결혼을 하고, 사실은 사회와는 거리를 둔 채 돌아가신 분들 유가족 분들의 아픈 마음도 헤아리기 위해서 그냥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다 알다시피 지난 정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라며 “오늘 이 자리에서 거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그렇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또한 “지금 현 정부가 지난 정부에서 있었던 일을 조사하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를 지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최근들어 공개 편지 등을 통해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과 방송사, KAL858기 대책위 등으로부터 부당한 증언 압력을 받았다고 국정원과 법원 등에 탄원했으며, 국정원은 이전 정부에서 국정원이 김현희 씨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했는지 조사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KAL858기 대책위는 12일 “김현희 씨는 지난 해 말에도 공개편지 형식의 글에서 자신이 지난 정권에서 모진 탄압을 받았고 국정원으로부터 조작된 진술을 강요받았다는 주장하였다. 또 ‘KAL 858기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의 전위조직’이라느니 ‘KAL 858기 가족회가 순수하지 못하다’느니 하며 대책위와 가족회를 모욕하기도 하였다”며 “우리는 그녀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거짓임을 이미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바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김 씨는 면담 계획이 알려지자 지난 2월 3일 KAL858기 가족회 임원들이 외교통상부를 방문해 전달한 항의서한에서 “사형을 사면하면서 산 증인으로 이용한다며 국가가 약속했지만 국정원 발전위와 진실화해위와 가족회가 면담을 요청했지만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한 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 씨는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 발전위는 물론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진실화해위의 재조사 요구에 응한 바 없으며, KAL858기 가족회의 진상규명을 위한 면담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함 만을 호소하면서 유독 일본 납북자 가족과의 면담에만 응하고 있다.

김 씨는 진실화해위의 조사나 가족회와의 면담에 응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일부 유가족 분들이 북한이 한 어떤 증거도 없다고 아직까지 그런 의혹을 얘기하는데 참... 20년이나 지난 사건을 아직도 누가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 참 안타깝다”며 “나는 유가족 분들이 칼기사건을 북한이 한 테러사건임을 인정한다면, 어떤 다른 목적이 없다면,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고 답했다. 조건부 면담 의사를 밝힌 것이다.

KAL858기 가족회 차옥정 회장은 12일 “우리는 안 만나고 일본인 납북자 2세만 만난 것은 말이 안 되고 어이가 없다”면서 “화동사진도 거짓말 한 것이고 지금까지 테러했다고 했지 물증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는데, 공개적으로 자기가 테러범이라 했으니까 만나서 테러했다는 물증만 나오면 대화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 발생 20년이 넘어 이명박 정부 하에서 김현희 씨가 철통같은 경호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 다시 한번 화려한 스포트를 받고 있는 ‘이벤트’가 이번에는 표면상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KAL858기 대책위는 12일 “그녀가 마치 자선을 베푸는 인도적인 인사인양, 정권에서 탄압을 받은 피해자인양, 국민을 기만하고 KAL858기 가족들을 의 마음에 또다시 상처 내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김현희씨가 지금 할 일은 언론을 상대로 ‘이벤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과 시민사회가 그동안 제기해 왔던 의혹들에 솔직하게 답하는 것뿐이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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