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 작가 황건의 개마고원 영인본. (1956, 조선작가동맹출판사) [사진제공-지식을만드는지식출판사]

한 출판사가 북한 작가의 문학작품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통일부의 일부 내용에 대한 삭제 요청을 받고 출판을 포기하기로 한 사실이 드러났다.

특히 삭제 요청을 받은 내용 가운데는 북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 이외에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 마을을 침입, 민간인을 학살하는 부분도 포함돼 통일부의 반입 승인에 대한 법적.행정적 기준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출판사는 한국문학평론가협회와 공동으로 기획, 한국근현대문학 100종을 선정하고 이 가운데 47종에 대해 지난해 12월 출간했다.

원작의 결을 살리기 위해 문학작품이 발표된 당시의 표기 형태를 최대한 살려낸다는 기획 의도로 1차적으로 출간 예정이었던 책 50종 가운데 문제가 된 것은 북한 작가 황건의 개마고원이라는 소설이다. 나머지 2종은 출간을 준비 중이다.

1956년 작인 황건의 개마고원은 1945년 해방 전후로부터 1951년 한국전쟁 시기까지를 다룬 1950년대 북한문학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북한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서 출판됐다.

통일부는 이 소설에 대해 일부 내용을 삭제하는 조건으로 출판을 승인하겠다는 '조건부 승인' 방침을 지난달 7일 통보해왔고, 다음 날인 8일 팩스로 전체 190쪽 분량 가운데 23쪽을 전부 삭제하고, 그 외 29쪽 분량에 대해 일부 내용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이후 북한에서 출판된 문학작품을 국내에서 출판할 경우에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통일부의 반입승인 절차를 거쳐야 되기 때문이다.

통일부가 출판사에 삭제를 요청한 내용에 대해서 출판사 측은 당초 원본 내용을 살려낸다는 기획 취지가 훼손된다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출판의 자유를 통일부가 임의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출판사의 한 편집자는 지난 1월 28일 <다음> 아고라에 '현 대한민국 출판의 자유는 없다'라는 글에서 통일부의 삭제 요청에 대해 "정말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며 "지금이 80년대도 아니고, 2000년대의 문학을 통일부 기준으로 마음대로 삭제하라니"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통일부가 북한의 저작권물에 대해 일부 삭제를 전제로 한 '조건부 승인'을 내준 경우는 전부터 종종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통일부가 삭제를 요청한 내용 중에 북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호칭이나 내용 이외에도 미국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통일부는 소설 내용 중 "고모네가 늦게 떠난 것이 확연한 것처럼 필시 이것은 늦어서야 피난가다 숨은 두 녀자를 미국 놈들이 발견하고 겁탈하려 끌어냈던 것이며, 반항하는 그들에게 수없는 총탄으로 보복한 것에 틀림없었다"는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청했다.

편집자는 "미군이 북한 마을에 와서 행패를 부린 부분은 아예 도려내라고 한다"며 "대체 미군이 선량하지 않으면 출간될 수 없다는 현실이 슬프다"고 밝혔다.

그는 전화통화에서 "도대체 어떤 기준이나 근거에 의해 삭제를 요청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내용 삭제 요청 시에도 특별한 사유를 들지 않았다"며 통일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출판물의 내용이 삭제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북한 저작권물이 국내에 반입될 경우 이를 승인하는 통일부의 법적.행정적 근거가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편집자는 "초판 300부를 찍었는데 통일부의 삭제 요청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출판사 내부적으로 이 소설에 대한 출판을 포기한 것으로 의견을 모았고, 아직 통일부에는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2차적으로 출판할 50종에 대해서도 48년 이후의 북한 문학을 제외하고 리스트를 다시 구성해야 할 상태"라며 "더구나 통일부가 어떤 근거나 기준도 제시하지 않아 선정하기에 매우 곤란하다"고 알렸다.

북한의 출판.영상물에 대한 국내 반입 승인을 관할하고 있는 통일부 부서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정해진 반입 승인 기준이나 내부 문서는 없다"며 "부서에서 담당할 인력이 없기 때문에 관계기관과 협의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조정하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계자는 "통일부가 일률적인 판단이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기관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한 뒤 "가급적이면 (출판사의 경우) 원본 문학을 살려낸다는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반입 승인 대상에 대해서는 "북한에 지적 재산권이 있다면 출판물이나 영상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것이 반입승인 대상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통일부는 지난해 10월 <통일뉴스>가 반입 신청한 ‘10.4선언 발표 1주년 기념 중앙보고회’라는 북한 동영상기사에 대해서도 "북한의 정치성 행사를 통일뉴스에 싣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반입을 불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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