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 정변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무신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차별은 고려 초기부터 지속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신 정변의 수괴라고 할 수 있는 정중부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에게 수염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은 일도 있었습니다. 고려 왕조의 무신에 대한 차별은 태조인 왕건 때부터 있었던 의도적인 정책이었습니다. 무인 출신인 왕건은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신을 의도적으로 차별했던 것입니다.
 
무신에 대한 차별이 굳어지자 유력한 문벌에서는 무신이 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지방 향리 출신들이 주로 무신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평민 출신인 병사에서 뽑혀 무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신들은 대부분 낮은 신분 출신들이었습니다. 무신 정변을 주도한 정중부도 병사에서 무신으로 뽑힌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정중부와 함께 정변을 주도한 사람의 하나로서 정중부, 경대승에 이어 정권을 잡은 이의민은 어머니가 절의 종으로서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주로 무신이 되자 무신에 대한 차별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무신은 심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문벌 귀족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혹사당했습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같은 권력 투쟁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으며, 문신들의 호화스러운 행락 놀이 따위에 호위병으로 불려나가곤 했습니다. 더욱이 무신 정변이 일어났던 의종 때는 문벌 귀족 사회의 사치와 부패가 갈 데까지 간 때였습니다. 의종은 왕권이 힘을 잃은 상태에서 문벌 귀족들의 부패에 덩달아 놀아나면서 사치와 방탕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무신 정변이 일어났던 날도 왕과 문신들은 보현원에 사치스러운 나들이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신들이 차별을 당하면서 죽어 지내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정중부가 일으킨 무신 정변이 성공하기 이전에도 몇 차례 무신들의 반란 기도가 있었습니다. 8대 현종 때에는 문신들이 경군에게 주어진 토지를 빼앗아 문신들의 녹봉으로 돌리려 한 것에 격분해 최질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의 무신 정변은 겨우 4개월만에 문벌 귀족의 반격으로 쓰러졌습니다. 또 의종 때 문신 자제들이 만든 계에 무신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자, "만약 무신의 가입을 거절하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고 위협해 가입을 관철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무신들은 차별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복수의 칼날을 갈아 왔습니다.
 
그 무렵 문벌 귀족 사회는 썩을 대로 썩었고 왕은 무능과 부패에 절어 있었으므로 무신이 아니더라도 실력만 갖추었다면 정권을 뒤엎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상황에서 정권을 뒤엎을 만한 현실적인 힘을 갖춘 세력은 무신들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무신들은 조직이 잘 되어 있고 무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잦은 전쟁과 반란을 겪으면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즉, 무신 정변의 발발과 성공은 무신들이 현실적인 정권 담당 세력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무신 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신들이 무력을 갖춘 집단이면서 가장 잘 조직된 집단이었다는 데에도 있었지만, 병사들의 적극적인 협력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습니다. 병사들은 평민 출신으로서 주로 지방 향리 출신인 무신들과 이해가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문벌 귀족 사회의 혹독한 병역 의무와 노역 동원 그리고 농민인 부모형제의 곤궁함 때문에 크나큰 불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농민들이 왕과 문벌 귀족의 부패와 사치를 위해 얼마나 곤궁한 생활을 했는가는 [고려사]의 기록에도 잘 나옵니다.

[고려사]에는 노역에 불려나간 남편이 굶주리면서 일을 하자 그 아내가 자기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밥을 지어 갔다거나, 수성사라는 절을 지을 때 공사를 맡은 감독자가 군사들이 날라오는 돌을 일일이 저울에 달아 보았을 만큼 착취가 심했다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더구나 문벌 귀족 사회가 부패할수록 병역 제도는 어지러워져서 문벌들이 병사들에게 내주어야 할 토지를 모두 빼앗아 차지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력으로 반란을 꾀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이루고 있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상관인 무신들의 반란에 적극 협력하는 것으로 불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무신 정변을 거쳐 집권한 무신들은 썩어빠진 문벌 귀족 사회에서 정권을 뒤엎고 다음 정권을 떠맡을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세력이기는 했지만, 문벌 귀족 사회의 부패와 무능을 개혁할 수 있는 세력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신 정권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부패와 무능을 개혁하기는커녕 모순을 더욱 증폭하는 작용을 했습니다.
 
반란에 성공한 무신들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문벌 귀족들이 차지했던 부와 권력을 차지하는 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러는 만큼 농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고, 반란에 성공한 무신들끼리 벌이는 부와 권력을 둘러싼 다툼도 심각했습니다.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는 서로 사병을 거느리면서 혈투를 벌이다가 이고는 이의방에게, 이의방은 정중부에게 제거 당했습니다. 마침내 정중부가 일인자가 되어 혼자서 권력을 독차지한 뒤 무신들의 최고 회의 기관인 중방을 중심으로 통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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