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새해가 밝았지만, 이명박 대통령 집권 2년차에 대한 어두운 전망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통일뉴스>는 신년을 맞아 통일운동단체, 대북지원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 실무자들을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모아봤습니다. 이들의 목소리를 통한 각 운동진영의 현주소를 조명했습니다. <신년기획>은 ①통일운동진영의 현주소 ②대북지원단체의 고민과 대응 ③방담-시민.사회.네티즌의 소통 ④ 인터뷰-실천연대 구속자 가족  ⑤르포-미군훈련장 확장으로 고통 받는 무건리 주민들 순으로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경기도 파주 오현리로 들어가는 마을 초입에는 간이정류장이 있다.

도심에서 보이는 그럴듯한 햇빛가리개나 칸막이, 정류장을 알리는 표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이곳을 그냥 지나치는 버스는 없다.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결같이 정해진 위치에 멈춰 선다.

요란한 네온사인도, 분명한 이정표도 존재하지 않지만 오현리에는 정해진 공간 속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처음 오현리를 찾았던 지난해 8월, 파주시민들에게 마을 가는 길을 물을 때마다 되돌아왔던 것은 갸우뚱한 고개짓이었다. 간혹 머리가 희끗한 이들이 "아! 그 군부대 옆에 있는 마을"이라고 알은 체를 할 때면 반가움보다 '도대체 어떤 곳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군부대 옆에 있는 마을', 그것이 오현리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지난 18일, 오현리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새해 들어 두 번째 수련회를 열고, 향후 대책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18일, 오현리를 향한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인 하늘은 잔뜩 흐렸다. 금방이라도 한 움큼 눈을 뿌릴 기세였다. 오현리 사이를 흐르는 직천(直川)은 동장군의 추위에 겨울잠을 자는 듯 꽁꽁 얼어붙었다.

마을 내 직천저수지 뒷편에 위치한 원두막 휴게소에 들어서자, 낯익은 목소리들이 겨울 바람을 뚫고 새어나왔다.

이날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들과 주민들이 새해 들어 가진 두 번째 수련회의 분위기는 진지했다.

국회에서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위한 예산 753억이 한나라당의 강행처리로 통과되고, 국방부가 2009년 내로 훈련장 확장을 위해 부지 매입을 완료시키겠다고 발표한 터라 이들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새해에도 계속되고 있는 토지감정평가

▲ 감정평가단에 항의한 일부 주민들이 강제 연행되자 마을 주민들은 파주경찰서 앞에서 이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자료사진-통일뉴스]

▲ 지난해 4월 22일 오후 1군단 사령부 앞에서 ‘농토파괴 무건리 훈련장 확장 강제추진 1군단 사령부 규탄 집회’를 가진  시민사회단체들과 주민들.[사진-통일뉴스 자료사진]
지난 한 해 끊임없이 진행된 토지강제 수용을 위한 토지감정평가는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한 농번기(9, 10월)에도 예고 없이 찾아온 감정평가단을 막기 위해 마을 주민들은 농사일을 포기하면서 안간힘을 썼다. 감정평가단과의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며 연행된 이들도 있었고, 강제연행에 항의하며 파주경찰서에서 벌인 촛불문화제에서는 고등학생을 비롯한 30여 명의 주민들이 일시에 연행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부 주민들에게 출석 요구서가 통보됐다. 검찰에서 연행된 주민들에게 조사할 것이 있다며 경기도 고양지검에 직접 출석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 고양지검으로 출석을 요구하는 출석요구서.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한 주민은 얼마 전 받은 문자메시지를 보이며 "검찰에서 주민들을 불러 촛불집회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받고 풀어준 것으로 들었다"며 "촛불집회에서 강제 연행돼 48시간 동안 경찰서에 있으면서 그에 대한 법적 처벌을 다 받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또 다시 무슨 조사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가을이 가장 고역이었다. 가을이 (수확의) 기쁨으로 가득 차야 되는데 국방부 사업단, 토지공사 감정단 때문에 올 가을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며 100차 촛불문화제에서 힘겨운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주민의 말처럼, 지난 한 해 감정평가를 막기 위해 주민들은 무거운 삶의 이중고를 견뎌내야 했다.

2008 년 8월 1일, 훈련장 확장 반대를 염원하며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든 촛불은 벌써 170일을 넘었다. 이들은 26일, 설날을 맞아 오현리를 찾는 가족들과 함께 178차 촛불문화제를 한바탕 열어 주민들의 결속력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감정평가단, 독거 노인 찾아 협박. 회유

토지감정평가단은 새해 벽두부터 주민들에게 토지감정평가에 대한 내용을 가구별로 일일이 배송했다. 1월 23일까지 협의매수에 응하지 않는다면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토지수용을 의뢰하고 토지 강제수용 절차를 밟겠다는 통보다.

주병준 '무건리 훈련장' 주민대책위원장은 "마을 주민들이 감정평가를 원하지 않고 있어 사업단에서 일괄적으로 공시지가로 제 마음대로 평가하고는 주민들에게 일방 통보했다"며 "이들의 협박과 회유에 마을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감정평가단은 수시로 마을에 출입하면서 주민들에게 계속해서 토지감정평가를 종용하고 있었다.

주 위원장은 "특히 혼자 사는 늙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감정평가를 받지 않으면 보상 문제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토지감정평가단은 '토지를 꼭 안 팔아도 되니까 감정평가를 받아보라'며 어르신들에게 접근하고 있는데, 일단 토지 감정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감정평가단에 유리한 부분으로 작용한다"며 "평가단은 감정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토지 수용에 있어서 정당한 절차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상부에 보고한 뒤 결국엔 강제 수용절차의 구실을 마련하려는 속셈"이라고 봤다.

오현리 150여 가구 가운데 국방부의 토지 수용에 반대하는 가구는 100여 가구가 넘는다. 이들 가운데 현재 40여 가구가 감정평가단의 회유로 평가를 받은 상태지만, 이들은 고향을 떠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주민 김 아무개 씨는 "감정평가단의 계속된 권유로 받았다"며 "평가 이전에는 대책을 내줄 것처럼 하더니 평가를 받고 나서는 얼굴도 비추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감정평가, 규제 완화에도 불구하고 이전 공시지가로 저평가 
정부, 낮은 토지 보상에다 이주 대책 마저도 없어...타들어가는 민심

▲ 국방부의 일방적인 토지감정평가가 가장 큰 문제인데다 토지보상 및 이주 대책 역시 마련되지 않아 오현리 주민들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감정평가에 있어서 평가 기준에 대한 문제도 있다. 지난 12월, 농림수산식품부가 전국적으로 농업보호구역 농지 6만여 ha를 해제한다고 밝혔는데, 오현리 일대의 농지도 그 대상에 포함됐다.

보호구역에서 해제되면 농지 이외의 전용이 가능해져 집을 짓거나 근린생활시설과 식당 등을 세울 수 있다. 30여 년 동안 제재 당했던 건물의 신.증축 방침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가 지난 9월 4일, 오현리 일대 120만평에 대해 강제수용절차인 국방부 실시계획승인을 고시함에 따라 이 일대는 개발 제한지역으로 묶인 상태다. 정부의 규제 철폐로 이 일대의 공시지가가 상승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전 공시지가로 인해 저평가 받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게 될 경우 이 지역은 신.증축이 자유롭게 풀리는 등 그 혜택을 고스란히 국방부가 받게 될 것이라는 점도 문제다.

몇 대에 걸쳐 오현리에서 살고 있다는 토박이 이기철(70) 씨는 "마을 사람들 땅을 절대 팔 의사가 없는 사람들인데, 토지를 매입하려는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으니 주민들의 반발이 오죽하겠냐"며 "땅 값도 현저하게 낮게 평가돼서 이곳 땅 3평을 팔아도 다른 곳 1평 사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어디 가서 생활하란 말이냐"고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

▲오현리 할머니들은 고향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국가의 일방적인 토지 매입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인데다 국가가 내놓은 토지 보상 대책마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는 부분에서 주민들은 격앙된 목소리를 여과 없이 쏟아냈다.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고 있는 정부의 대책에 주민들은 '불만'이 아닌 '원망'을 퍼부었다.

김용성(70) 씨는 "정부가 세살 먹은 어린애들보다도 못하고 있다"며 "30년 전 훈련장 부지로 편입되었을 때의 보상규정을 갖고 있는데, 그 규정을 먼저 고쳐야 한다"고 정부의 대책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강제 토지 수용을 예고한 국방부의 방침에 주민들의 속은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김종렬 씨는 "주민들의 열의가 처음 보다 많이 떨어진 것 같다.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 않아 외롭고 힘들다"면서 "강제 수용 절차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보다는 오현리를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수련회를 마치고 술잔을 들이키는 주민들의 속은 취기 때문이 아니라 고향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답답함에 더욱 쓰려 보였다.

"우리는 이 땅에서 꼭 살고 싶네, 살아야 하네"

▲ 마을 곳곳에는 훈련장 확장을 반대하는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오현리 주민들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처럼 이곳에서 그냥 머물러 있겠다"는 것.

국방부는 인근 사격장에서 발사한 포탄이 오현리 일대에 떨어져 주민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주민들의 안전을 첫째 이유로 이 일대를 훈련장 부지로 확장시키려 하고 있지만, 이 곳에서 30여 년간 살고 있는 주민들은 국방부의 논리가 궁색한 변명이라고 반박한다.

이미 훈련장 부지가 702만평으로 훈련을 실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데다가, 지금껏 30여 년간 고향땅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안전 상의 문제로 내쫓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다.

주병준 위원장은 "주민들은 정부의 정책에 어떤 불만도 갖고 있지 않은 순박한 사람들"이라며 "단지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마을 텃밭을 가꾸고, 소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난 30여 년 동안의 불편함을 참고 왔던 것인데, 이제 와서 어떤 대책 없이 나가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이곳 주민들이 파주시 지역에 있는 군유휴지를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파주시에 요청한 상태지만, 상당수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오현리 주민들이 파주시 내에서 목축을 하는 것은 시에서 허가를 내릴 수 없는 방침인 데다가 허가가 나온다고 해도 부지 역시 협소한 상태다.

한 주민은 기자에게 부탁을 했다.

"기자양반, 주민들의 목소리가 단순하게 땅을 안 내놓겠다는 식으로 비춰지는 것이 너무 아쉬워. 우리는 이 땅에서 꼭 살고 싶네, 살아야 하네. 이 문제는 단순하게 오현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의 고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을 언론에서 제대로 알려주라"고.

고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어르신의 손은 고향의 흙을 매만지며 살아온 여느 아버지의 손과 차이가 없었다.

분단의 아픔, 시대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 오현리

▲ 국방부는 2009년까지 훈련장 확장을 위한 부지 매입을 마무리짓겠다고 밝혔다. 마을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 훈련장임을 알리는 알림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오현리 삼거리에서 부작골로 향하는 길목 좌우에 무건리 훈련장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왔다.

훈련장 한 가운데는 훈련을 마친 군용 트럭들과 차량들이 있었고, 곳곳마다 설치된 훈련장 알림판 너머로 흙인지 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색을 잃은 누런 잔디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차량으로 불과 몇 분 사이로 주민들의 거주지와 군인들의 훈련장이 한 눈에 겹쳐 들어오는 곳,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곳. 오현리에는 시대의 아픔이 서려있다.

무건리 훈련장 일대의 지명에서도 이와 같은 아픔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공교롭게도 이 일대에는 오래 전에 외국 군대가 주둔했던 흔적이 있었고, 이와 연관된 마을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무건리(武建里)라는 지명은 당나라 장군 설인귀가 산골짜기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설마리와 마지리 역시 당나라 장군 설인귀와 연관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 일대에 외국 군대가 머물렀다는 점은 오랫동안 이 일대의 주민들이 겪은 고통을 짐작케 한다.

천년 전, 외세의 침입으로 당시 주민들이 당한 고통이 지금 오현리 주민들의 고통과 닮아있다는 기자의 추측은 억지일 수도 있겠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 속에서 주민들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가슴 아픈 역사는 다시금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소망은 더욱 더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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