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1년전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이 나왔을 때, 남북과 해외에 사는 우리 민족 모두는 하나같이 얼마나 벅찬 감격과 흥분에 휩싸였었던가? 우리는 모두 이제 반세기에 걸친 반목과 대결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와 협력과 통일의 영광된 새 역사를 엮어나가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실제로 그후 몇 달 동안 남북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그러한 희망이 결코 헛된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1년후 오늘날 남북관계는 또 다시 정체상태에 빠져 있다. 앞으로의 전망도 결코 투명하다 할 수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우선 남한내 분단기득권 세력에 의한 끈질긴 제동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으로는 한반도의 계속분단을 추구하는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의 노골적인 방해로 인해 남북관계의 발전은 암벽에 부딪치게 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남북관계의 근본적 전환을 위해서는 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남북간에 자주적으로 우리 민족의 통일문제를 해결한다는 자세를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국내의 분단기득권세력과 미국에 의한 방해공작이 먹혀 들어가는 것은 남한의 일반국민 사이에 북한불신의 정서와 친미감정이 널리 만연돼 있기 때문이다. 즉 "북한정권은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저지른 집단"이라는 생각이 반북정서의 근저를 이루고 있으며, "미국은 그때 우리를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구출해 준 고마운 나라"라는 인식이 친미사조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러한 생각이나 인식이 변하지 않고는, 남북한 화해노력에 대한 반통일세력이나 미국에 의한 방해공작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마침 6.25전쟁 발발 51주년을 맞는다. 북한에서는 이 전쟁은 미국과 남한의 공모에 의한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과 미국에서는 이 전쟁이 북한의 김일성 당시 수상이 소련의 스탈린 수상의 지원과 승인하에 불법남침을 감행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며 그 모든 책임이 김일성과 북한정권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반된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해 그간 많은 연구결과가 발표되었지만 그 상세에 논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나는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또 겪은 바에 따라서 6.25전쟁의 시작은 북한의 남침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6.25전쟁의 모든 책임이 오로지 김일성 그 개인이나 북한정권 그 자체에게만 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잘못이며, 그 책임은 남한에게도 있고, 특히 미국에게도 응분의 책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사실에 근거하여 밝혀 보고자 한다.
  

1.  한국전은 피할 수 없는 내전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 수상 스탈린은 쿠릴열도와 한반도 일부의 점령권을 약속받는 대가로, 독일이 항복하면 소련이 대일전쟁에 참가해달라는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후 5월에 스탈린은 트루먼 미 대통령의 특사 홉브킨스에게 소련이 8월 9일에 대일공격을 개시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소련은 그 약속대로 8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진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되자 8월 10,11일 심야에 워싱턴의 당국자들간 회의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진주할 것인가의 여부를 놓고 심한 논쟁이 벌어졌다. 군부는 이에 반대했으나 국무성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국무성의 의견이 채택되어, 러스크와 본스틸에게 한반도상에 미소양군이 점령할 경계선을 책정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두 사람은 별실에 물러가 한반도지도를 펼쳐놓고 38도 선상에 선을 그었다. 38도선을 택한 이유는 한반도의 수도인 서울을 미군점령지역내에 두어야 한다는 고려에서였다. 미국의 한반도 분단결정은 이렇듯 군사적 고려보다 정치적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한반도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소련군이 먼저 그리고 미군이 나중에 들어왔다. 소련군은 항일투쟁을 한 애국세력들을 우대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이들이 나중에 평양정부를 발족시켰다. 그 과정에서 친일세력은 철저히 숙청 또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친일반역세력을 요직에 기용했으며 이 세력이 중심이 되어 나중에 서울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좌익계열의 정치활동은 철저히 탄압되었다.
  
이와 같이 전혀 적대적인 요소로 구성된 두 정부간에 타협이란 처음부터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결국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었다.


2.  전쟁책임은 남북 양쪽에게 다 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북한에게 전쟁의 일차적 책임이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전쟁의 모든 책임은 오로지 북한에게만 있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 남한에게도 그 만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번 밝힌바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요점만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1) 1948년 서울에는 친일반역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부가 서고 평양에는 항일무력투쟁세력을 기간으로 한 정부가 섰다. 이 두 정부간에 조만간 내전이 벌어질 것은 필지의 사실이었다.
 
2) 1949년 여름부터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양쪽의 군대가 빈번한 충돌을 일으키면서 한국전의 서전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3)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단정수립과 북진통일의 주창자였으며 그를 위시한 남한정부 요인들은 기회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었다. 그러므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먼저 공격한 것은 그때까지 남한의 준비가 미비했기 때문이지, 준비만 완료되었더라면 남한이 먼저 북진공격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비난할 처지에 있지 않다.
  
4) 실제에 있어서 남한은 미군의 힘으로 38선 이남을 수복한 다음 1950년 10월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전기한 1) 2) 및 3)항의 사유가 없었더라도, 북진공격을 시작한 순간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동족상잔의 비극을 감행한 행위"라고 비난할 자격을 상실한다. 
  
5) 남한은 또 휴전협정 체결을 끝내 반대함으로써 동족상잔행위의 연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3.  미국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이무렵 미국의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2차대전이 끝난 후 얼마 안 가서 미.소간의 냉전기운이 심화됨에 따라,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소련의 진출을 봉쇄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에 도취된 미 국민들은 군비를 대폭 감축하고 하루 속히 완전한 평화체제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의식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미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정책입안자들은 알고 있었다. 한반도는 그런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지목되고 있었다.

1) 한반도의 내전은 예측되어 있었다

앞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한반도의 남북에 상극적인 두 정부가 선 다음, 이 두 정부간에 조만간 내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다. 미국이 북한의 불의의 공격으로 놀라고 당황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서울의 미 군사령관, 그의 정치고문, 평양주재 미국연락관, 주한군사고문단장, 주한대사, 유엔 임시위원단 등 현지의 모든 책임자와 기관들이 북한의 남침준비사실과 남침가능성을 보고 또는 경고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국내에서도 대통령, 국무장관, 육군장관, 국가안보회의 그리고 의회 등 모든 관련기관들이 북한이 조만간 남침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에 열거한 "관련사실"로 입증된다. 

"관련사실"

*  1947년 5월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장군은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는 북한군이 남한을 침공할 것이라고 언명하였음.
*  1947년 9월 하지장군의 정치고문 Jacobs 는 Washington에 보낸 보고문중에서 "한국을 지킬 의사가 없으면 속히 철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나 그런 경우에는 무정부상태와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지적하였음.
*  1948년 초, 평양주재 미국 연락관 Leahy는 북한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음으로 만약 미국이 남한에 강력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북한군은 한반도 전체를 용이하게 정복할 것이라는 보고를 제출하였음.
*  1948년 초 마샬 국무장관은 사석에서,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남한군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여유를 가질 수 있을런지 걱정스럽다고 말하였음.
*  1948년 2월, 유엔임시위원단은 남북을 분리한 선거는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키며 유혈을 수반하는 내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음.
*  미 국가안보회의 문서 NSC-8(1948년 3월 25일자)은 "북한이 군사적으로 남쪽을 침공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였음.
*  1948년 8월 PKMAG (임시군사고문단) 창설시, 그 임무는 "북한으로부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강력한 경비대를 창설.훈련하고 장비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음.
*  1948년 9월 뉴욕 타임스 등 미국의 유력지들은, 트루먼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은 미.소 양군이 철수하면 한국에서 통일을 위한 내전이 발발할 것은 거의 틀림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미국의 식자들은 그런 경우 남한의 생존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보도하였음. 
*  1948년 여순반란사건 발생후 무치오 주한 미 대사는 사태수습이 지연될 경우 북한이 침공해올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남한의 생존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 후, 1949년 봄에 북한이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하였음.
*  1948년 11월 제출된 유엔 임시위원단의 보고서에는 남북간의 협상에 의한 해결이 없는 경우, 미.소양군이 철수하면 무력통일을 위한 내전이 발생할 것이라는 정세판단이 포함되어 있었음.
*  1949년 3월 22일자 국가안보회의 문서 NSC-8/1은 미국이 한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북한의 공격을 저지할 능력이 있는 군대를 훈련하고 장비와 보급을 제공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음.
*  1949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 대한 서한에서 미국이 대한군사원조를 늘리지 않고 한국에서 철수하면 북한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음.
*  1949년 5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은 공보실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내에 들어가 있으며 북한군의 침공이 있을 시 미국은 그것을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인가 알고 싶다고 말하였음.
*  1949년 6월 대한원조법안 심의과정에서 미 의회의 많은 의원들이 미군철수 후에는 북한의 남침우려가 있다고 지적하였음.
*  1949년 7월19일 미 국가안보회의에 제출된 정보보고서는 한국의 대세는 공산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으며 이승만 정권의 비능률과 근시안적인 독재정치가 그런 대세를 촉진시키고 있다고 지적하였음.
*  1949년 7월 25일 트루먼은 대외군사원조법안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한국은 북으로부터의 침공 위협을 받고 있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충분한 장비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음.
*  1949년 8월 유엔 한국위원단은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소간의 합의 없이는 한국이 통일될 수 없으며 아마도 무자비한 내전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음.
*  1949년 9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한반도에 전쟁위험이 있음으로 국제대표단을 파견하여 군사동향을 감시 보고케 하자는 제의를 했으며, 이에 따라 10월 21일 유엔 총회는 유엔한국위원단에게 한반도의 군사동향을 관측 보고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음.
*  1949년 10월 북한 박헌영 외상은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엔이 북한의 참가 없이 한국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비난한 후 북한은 필요하다면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고 언명하였음.
*  1950년 4월 북한의 공격가능성이 임박한 것을 우려한 유엔 한위는 훈련된 군사전문가를 파견하여 사태의 진전을 관찰 보고케 할 것을 건의했으며 이에 따라 사무총장이 8명의 전문가를 보내 전쟁발발의 기운이 있으면 보고토록 지시하였음.
*  1950년 5월 및 6월, 미 국무성 정책실장 Kennan에게는 세계 어느 곳인지는 몰라도 어떤 공산국가가 곧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정보가 빈번히 입수되었음.
*  1950년 5월과 6월경에는 미행정부의 고위간부들은 불원 북한의 공격위험성이 있음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음.

2) 남한은 북진을 원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이때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일찍부터 북진통일정책을 공공연히 추진하고 있었으며,  군당국자들은 북진명령만 떨어지면 아침은 사리원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다만 북진에 필요한 군사원조를 미국에 요청했는데, 이 박사의 수차에 걸친 간청과 특사파견 등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에 불응하였다. 미국은 남한의 북침으로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북한의 남침으로 소련을 수세로 몰고갈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론은 다음의 "관련사실"로 입증된다.

"관련사실"

*  1948년 12월 18일 장택상 외무장관은 북한을 "실지"로 규정하면서 한국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실지를 회복할 것이라고 다짐한 다음, 만약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국민의 통일열망의 실현을 거부한다면 한국은 무력을 사용하여 38선의 인위적 장벽을 제거할 것이라고 언명하였음.(이무렵 미국의 대한경제원조 약속에 고무되어 많은 한국고위관리들이 북진론을 주장하였음)
*  1949년 2월 방한한 미 육군장관 Rayall 및 작전기획국장 Wedemeyer와의 대담에서 한국 관리들은 한국방위와 북진통일을 위해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음. 또한 이승만대통령도 오직 우월한 군사력만이 통일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단 북진이 시작되면 북한군은 사기가 저하되어 대량 투항할 것이며 통일은 간단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음.
*  1949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 5도지사를 임명함으로써 북진통일의 의지를 표시하였음.
*  1949년 3월 23일자 미 NSC-8/2 호 문서는, 미국 전문가들이 한국이 무력통일을 기도함으로써 대규모전쟁이 유발될 가능성을 제거하기를 원했다고 기록하였음. 그러나 동문서는 (6월 29일로 예정된) 미군의 철수는 결코 한국의 장차의 생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이 감소된 것으로 해석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하였음.
*  1949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 특사를 미국에 파견하였는데, 이 사실을 통지하는 각서에서 장면 주미대사는, 자위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군비증강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음.
*  1949년 4월 5일 미국에서 귀임한 무치오 미 대사에게 이 대통령은 통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미국원조가 필요하며 특히 비행기와 전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음. 그리고 일단 북진의 신호만 떨어지면 북한군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였음.
*  1949년 5월 임병직 외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3일만에 북한을 정복할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언명하였음.
*  1949년 8월 KMAG(주한 미 군사고문단) 단장 Roberts 장군은 38도 선상에서의 최근의 충돌사고는 남한측이 북한지역에 초소를 설치함으로서 발생한 것으로서 그 책임은 남한군에게 있다고 보고하였음.
*  1949년 8월 26일 Henderson(주한미대사관 직원)은 김백일, 민기식, 송요찬등 한국군 고급장교들과 회식하며 들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음.
  - 남쪽 군대가 북쪽을 더 많이 공격하고 있다한다.
  - 한국군 장병들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 북진명령이 내리지 않아서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 한다.
  - 앞으로 6개월 더 훈련하면 북진명령이 내릴 것이라 한다.
*  1949년 9월 Roberts 장군은 한국측이 탱크, 중포 및 탄약 등을 요구한데 대하여 반대하면서, 그런 것을 제공한다고 해서 한국의 안보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남한군의 북진의욕을 조장할 뿐이라고 말하였음.
*  1949년 특사로 방미중인 올리버 박사(이 대통령의 고문)는 이 대통령에 대한 10월 10일자 답신중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음.
"북진문제에 대해서 지금 이 시기에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나 언급하는 것은 미국내 관변이나 일반의 지지를 상실할 뿐 아니라 우리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입니다... 미국내의 뚜렷한 일반여론은 침략에 유사한 행위는 계속 삼가야 하며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책임이 소련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하께서 실망하실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 트루먼이나 고위관리에게 접근하여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는 문제를 꺼내는 것은 매우 해로운 일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  1949년 11월 이 대통령은 무치오 대사에게 한국은 필요한 때가 되면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하며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음.
*  1950년 6월 18일 덜레스를 수행해 방한한 Arizona Daily Star 기자 Mathews는 이 박사와 면담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음. "한국은 앞으로 1년내에 북한을 공격하여 통일을 이룰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 일은 전쟁을 수반하건 말건 상관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일이 벌어지면 북한사람들이 들고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통일은 수일내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  1950년 봄부터 미국은 한국군의 장비가 빈약하고 보급도 부족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탄약보급을 제한하였음.

3) 한국의 패전은 예견되어 있었다

미국 당국은 한국내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내전이 일어날 경우 남한이 북한을 당할 수 없으며 아마도 멸망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의 "관련사실"에 열거한 것처럼 현지 대사와 국무장관 사이의 왕복서신과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의 판단서에 나타나 있으며, 또 하원 공화당의 소수파의견에도 나타나 있었다.

"관련사실"

*  1948년 8월 트루먼 미 대통령 및 그의 보좌관들은 한국에 내전이 일어나면 한국이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관측하였음.
*  1948년 여순반란사건 직후 무치오 대사는 북한이 침공하면 남한은 생존하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하였음.
*  1949년 7월 1일 미 하원 공화당은 소수당 보고에서 "행정부는 한국이 공산측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경우 이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논리나 상식상으로 철수해서 안되는 바로 그 시기에 미군을 철수시켰다"고 지적하였음. 
*  1949년 7월 무치오와 애치슨 간의 여러번의 왕복서한에는, 북한으로부터의 대규모 공격이 있을시 한국이 이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미국관리들은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음.

4) 한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미국내에는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북한의 공격이 있을 시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특히 1949년 이후 미 대통령과 그의 주요 보좌관들이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상 한국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다음의 "관련사실"은 이런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관련사실"

*  1948년 9월 미 국무차관 Lovett는 대한원조는 미국경제에 과중한 부담이 되겠지만 그래도 미국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음.
*  1948년 12월 미 국무성 동북아과장 Bishop은 미군의 조기철수는 동북아에서의 공산진영의 정치.군사적 역량을 증강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음.
*  1949년 1월 무치오 주한대사는 한국으로부터의 철수를 수개월 연기할 것을 국가안보회의에 건의하였음.
*  1949년경부터 트루먼과 그의 주요 보좌관들은 점차로 한국을 단순히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거점으로만 보지 않고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대소봉쇄정책의 시금석으로 보기 시작하였음.
*  1949년 6월 23일, 애치슨은 하원 분과위 증언에서 한국은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 희망을 주는 상징적 존재임으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음.
*  1949년 6월 무치오 대사는 (소련이 북한공군을 원조할 계획을 발표하자) 미국도 한국에 고성능 항공기를 제공할 것을 건의하였음.
*  1949년 11월 무치오 대사는 국무성에 보낸 보고에서 현재까지의 대한군사원조는 북한군의 공격에 대항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지적하였음. 
*  1950년 1월 20일 국무성 극동국장 Butterworth는 장면 주미대사에게 미국이 한국의 생존을 보장하는 결의에 변동이 없다고 말하였음.

5) 한국 포기론(남침유도요인)이 더 우세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전략적 가치가 없으며, 북한의 공격이 있기 전에 미리, 아니면 북한의 공격이 있을 때에는 부득이, 한국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그리고 이런 의견이 맥아더 사령관,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 카너리 상원외교위원장 등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발표됨으로써, 그 본래의 의도는 여하튼 간에, 한반도 전란시의 미군참전가능성에 대한 소련 및 북한의 오판을 유도하였다. 다음의 "관련사실"은 이런 추론을 뒷받침해 준다.

"관련사실"

*  1947년 4월 29일 미 합참 산하 합동전략조사위원회(JSSC)의 보고서는 미국의 안보상 중요성의 관점에서 한국은 16개국 중 15위라고 평가하였음.
*  1947년 9월, 합참본부의 보고는 군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한국에 현재수준의 병력이나 군사기지를 유지할 전술적 의미가 없다고 밝혔음.
*  1947년 9월, 하지장군은 국무성에 대해 한국에서 가능한 속이 철수하되 부작용이 없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음.
*  1947년 11월, 마샬 미 국무장관은 한국은 미국에게 군사적으로 결정적 이익이 없는 지역임으로, 미국이 할 일은 위신에 큰 손상이 없는 방법으로 철수하는 것이라고 밝혔음.
*  1948년 8월, 미 육군차관 Draper는 남한의 생존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면서 어차피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갈 운명에 있는 남한에 막대한 양의 군사시설을 남길 필요가 없다고 발언하였음.
*  1949년 1월 19일 맥아더 장군은 합참본부에 보낸 보고에서 미국이 5월 10일까지 한국에서 철수할 것을 건의하였음. 그는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군사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미군이 한국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자율적으로 나가는 기회를 잃고 압력에 의해 나가게 될 위험성이 크며 그렇게 되면 미국의 위신이 크게 손상될 것이라고 지적하였음.
*  1949년 3월 맥아더는 영국 언론인 Price와의 회견에서 한국과 대만이 제외된 선을 태평양지역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이라고 밝혔음.
*  1949년 4월 트루먼은 분단국가의 어느 한쪽에 의한 군사행동이 미국의 전쟁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음.
*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National Press Club 연설에서 미국의 방위선은 알류션 열도에서 시작하여 일본열도를 거쳐 류큐에 이르는 것이라고 언명,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켰음. 그는 부연해서 한국은 미국의 원조를 통하여 강력한 민주국가가 됨으로써 공산주의에 성공적으로 대항할 가능성이 매우 큼으로 미국으로부터 명시적인 군사적 보호의 약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음.
*  1950년 4월 미국은 (한국을 제외하고) 캐나다, 일본, 필리핀, 호주 및 뉴질랜드와 태평양조약을 체결하였음.
*  1950년 5월 미 상원외교위원장 Connally는 기자회견에서 소련은 원한다면 대만이나 한국을 언제든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인데, 한국의 붕괴는 불가피할 것이고 또 한국이 미국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님으로,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할 준비를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였음.

6) 미국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와 같이 한국포기정책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지만 이면으로는 미군철수완료 직전인 1949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 특별지시에 의해 북한 남침시에 취할 비밀대비책(다음의 "관련사실" 참조)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관련사실"

*  미군철수 직전 트루먼의 지시에 따라 보좌관들이 북한 남침시의 대비책을 연구.작성하였는데 그 문서(1949년 6월27일자)의 내용은 요지 다음과 같다.
   1) 한국의 단기적 장래에 대비한 3가지 행동방안
     가) 한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통하여 평화통일을 이루도록 조언한다.
     나) 북한에서 활동할 한국인의 지하조직을 결성한다.
     다) 미군의 함정을 정기적으로 남한항구에 기항시킨다.
   2) 북한의 공공연한 침공시에 가능한 대비책
     가)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없이 한국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만약 미국이 북한의 전면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한국은 멸망하고 한반도는 공산화될 것이다.
     다) 그러므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있을 경우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
       ㄱ) 미국시민과 군사고문단 전원을 한국에서 철수한다.
       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하여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 소집을 요청한다. (이는 문제를 "국제화"함으로써 미국이 독자적으로 책임지고 행동하는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ㄷ) 미국이 제재를 가하고 "경찰행동"을 하는 것은 피한다.
       ㄹ) 그러나 다른 회원국들의 완전한 협력과 충분한 참여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오직 최후수단으로서 "경찰행동"을 취하는 것을 권고한다.
       ㅁ) 중국이 북한을 돕게 되면 "선전포고 없는 전쟁에서 미국의 병력이 장기적이며 피해가 많은 분쟁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유도될" 가능성이 있다.
*  한국 휴전 후 1953년 10월 10일 Princeton Seminar에 제출한 Acheson Comments에서 애치슨은 "한국전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이론의 영역을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고 밝힌 다음 "한국전쟁은 그 발발이전 몇 개월 동안 내막적으로 긴급 건의되어온 정책을 공공연히 채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고 술회하였음.(이러한 내용은 그후 미국 관리들의 회고록과 학자들의 연구서에 많이 소개되고 있음) 

7)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자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미국은 미리 마련해 놓은 대비책에 따라 다음과 같이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1950년 6월 24일 밤(미국 동부시간) 무치오 주한대사로부터 북한남침보고를 받은 러스크 국무차관보는 이 사실을 즉각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고하고, 사태를 유엔에 회부,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서 문제를 국제화하여 처리할 것을 건의하자, 애치슨 장관이 즉각 이를 승인하였다. 애치슨 장관은 이를 휴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똑같은 내용을 건의하자 트루먼이 즉각 이를 승인하였다. 미국의 제안에 따라 소집된 유엔 안보이사회는 6월 27일 소련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결의했으며, 미국은 맥아더 사령관의 현지시찰보고와 건의를 접수한 후 미군의 파병을 결정하였다. 그 전말은 다음의 "관련사실"과 같다.

"관련사실"

*  1950년 6월 24일 밤(한국시간 25일 아침) 무치오 주한대사의 긴급 전문보고를 접수한 러스크(국무성 차관보)는 즉시 휴가중인 애치슨에게 이를 알리고  유엔에 제소하여 안보이사회 긴급회의에서 미국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조치(1949년 6월에 작성된 비상대책방안의 내용과 같음)를 취하고자 한다고 보고하였음. 애치슨은 이를 즉각 승인하였음. (러스크는 바로 4일전 의회 증언에서 북한이 남침할 징조가 있는냐는 질문에 대해 "그런 징조가 전혀 없다"고 답변하였는데, 실제에 남침보고를 접수한 후에는 매우 침착하게 일을 처리한 점이 주목됨)
*  같은 날 러스크와의 통화를 마친 애치슨은 즉각 고향에서 휴가중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태를 보고하고 유엔에 상정하여 국제문제로 처리하겠다고 말하자 트루먼은 즉각 이를 승인하고 워싱턴에 즉각 돌아가지는 않기로 결정하였음.
*  1950년 6월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미국은 즉각, 종래 한국은 미국에게 전략적 가치가 적음으로 미국의 방위선밖에 둔다고 하던 입장을 돌변하여, 이는 소련의 세계제패계획의 일환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규정하고 (즉 문제를 국제화시키고) 적극 대처하는 입장을 취하였음.
*  1950년 6월 27일 미국의 제안으로 소집된 유엔안보이사회는 소련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한 유엔의 군사행동을 가결하였음.
*  1950년 6월30일 아침 JCS에 접수된 전선시찰보고에서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음. "결정적 조치가 없으면 북한은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것이다. 현 전선을 유지하고 나가서 점령당한 지역을 장차 회복하려면 미국 지상전투부대를 전선에 투입해야 할 것이다. 1개 전투연대를 즉각 전선에 투입하고 반격을 위하여 추가로 2개 사단을 투입할 것을 건의한다. 그보다 적은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공연히 인명과 시간과 위신의 손상을 가져 올 것이며 실패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8) 미국은 북한을 침공하였으며 휴전성립을 지연시켰다

미국의 계획과 요청에 따라 한국의 내전을 국제화함에 있어서 유엔이 미군휘하의 유엔군에게 부과한 임무는 "북한군의 침략을 격퇴"하는 일이었다. 이 임무는 사실상 9월말까지 완료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북한군의 남진공세가 한창이던 7월말 이미 북한군을 장차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킨 후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38선 이북으로 북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북한군이 38선 이북으로 격퇴될 무렵 중국은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오면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워싱턴의 지시를 받은 맥아더는 10월 2일 유엔군에게 북진명령을 내려, 전쟁을 38선 이북으로 확대하여 급기야 중국군의 개입을 초래케 하고 그 결과 3개월에 끝날 수 있는 전쟁을 3년 1개월이 걸리도록 하였으며, 또 휴전성립을 지연시킴으로써 그토록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발생하도록 하였다. 그 경위는 다음의 "관련사실"과 같다.

"관련사실"

*  1950년 7월 31일 미 국방성 정책입안자들은 유엔군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게 38선을 넘어 북진하도록 명령을 내릴 것을 상부에 건의하였음.
*  1950년 9월 11일 트루먼 미 대통령은 38선 이북으로 지상군을 진공시키라는 국가안보회의의 건의를,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을 유도하지 않도록 하라는 조건부로, 승인하였음.
*  1950년 9월 15일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맥아더에게 하달되었음.
*  1950년 9월 25일 중국군 총참모장 대리가 주중 인도대사에게 "중국은 미국이 38선을 넘는 것을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음.
*  1950년 9월 27일 북진명령(9월 15일자)의 재확인이 맥아더에게 하달되었음.
*  1950년 9월 30일 한국군 일부가 동부전선에서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였음.
*  1950년 10월 1일 주은래 중국수상은 "중국이 제국주의자가 중국의 이웃나라 영토에 침입하는 것을 방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언명하였음.
*  1950년 10월 2일 맥아더는 국련군(국제연합군=UN군)에게 북진명령을 하달하였음.
*  1950년 10월 3일 주은래는 주중 인도대사에게 "중국은 한국만이 북에 침입한다면 개입 안한다. 그러나 국련군이 38선을 넘는 경우에는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음.
*  1950년 10월 13일 중국군 압록강을 넘어왔으며, 10월 24일 전투를 개시하였음.
*  미국은 1951년 6월, 38선을 경계로 휴전할 것을 제의, 소련이 이에 동의함으로서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는데,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돌연 약속을 어기고 휴전시점의 현 전선을 경계선으로 휴전할 것을 주장했으며, 또한 종래의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본인의사에 따른 포로교환을 고집함으로써 휴전협정타결에 2년이 걸리도록 하였음.


4.  우리는 미국에 대한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측에게는 이를 규탄할 자격이 없다. 첫째는 남한도 그 때 북진통일을 절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남한도 서울 수복후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끝내자는 휴전에 남한이 끝내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가? 아니다. 미국에게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미국은 북의 남침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으면서도 자국의 이익에 맞추기 위해서 약세에 있는 남한이 침공을 받고 패퇴하도록 방치하였다. 또 서울 수복 후 북한에 침공해 들어감으로써 짧게 끝날 전쟁을 길게 연장시켰다. 그리고 약속을 어기고 관례를 무시함으로써 휴전의 성립을 지연시켰다. 그러므로 총 37개월의 전투기간중 초기 3개월을 제외한 34개월간의 피아의 피해에 대한 책임은 주로 미국이 져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한국전의 모든 책임을 일방적으로 북한에게만 돌려 왔는데 그것은 공정한 자세가 아니다. 또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의 한국내전 개입에 관련된 숨은 의도와 부정적 역할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맹목적인 숭미와 친미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폐단은 남북의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키고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의 기회를 효과적으로 봉쇄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의 분단에 대해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전에 대해서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헛된 망상에서 하루속히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자주성을 회복할 있으며, 자주성을 되찾아야만 남북의 화해와 통일도 이룰 수 있다.
   
2차대전 이전 일본에서 있은 이야기다. 빚에 쪼들린 가난한 농부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딸을 동경의 유곽에 팔아 넘겼다. 그런데 돌아가는 날 동경역에서 딸 팔아 받은 돈을 몽땅 소매치기 당하고 땅을 치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이때 어떤 점잖은 신사가 다가와서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동정하면서 차표도 끊어주고 약간의 돈도 건네주었다. 농부는 너무 고마워서 인사 백배하고 집에 돌아와 평생 그분에게 감사하며 살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 신사가 바로 소매치기 집단의 두목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미국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이 어리석은 일본농부처럼 생각하고 살아왔다 해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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