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백산맥> 프랑스어 번역가 변정원(우측)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8일 그가 서울에 와서 기거하는 강남의 한 빌라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사람이 있다. 정확하게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 부부가 번역했기 때문이다. 변정원(프리랜서 번역가) 씨와 그의 남편 프랑스인 조르주 지겔메이어(Georges Ziegelmeyer, 아르마땅 출판사 한국담당) 씨.

변 씨는 프랑스에서만 35년째 살고 있다. 한국사회의 엘리트로서 이 나이에 ‘유한마담’으로 살 수도 있겠지만 그는 편안한 삶을 경계한다. 그는 그가 배운 만큼의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길 원한다. 그러다 그는 조정래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하긴 그도 한국인이지만 처음엔 한국사회를 잘 몰랐다. 그러나 <태백산맥>을 읽고 달라졌다. 그는 <태백산맥>을 ‘한국인의 복음서’라고 불렀다. 한국인의 삶과 애환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가족사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태백산맥>을 읽고 “특히 저 같은 중년 여성한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밝혔다.

그가 <태백산맥>을 번역하자 프랑스 지성인들이 그 책을 보고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한국의 문학작품에 이어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계속 프랑스에 알리고자 하는 변정원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8일(목) 오후 4시경 그가 서울에 와서 기거하는 강남의 한 빌라에서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조정래의 작품은 한국인의 복음서다”

▲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일본군 성노예가 될 수 있었고, 집단학살로 흔적도 없이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 번역을 하게 된 계기는?

■ 프랑스에서 산지 35년 됐다. 나는 35년 전 파리에 화려한 입성을 했다. 프랑스에서 소위 엘리트로서 정부 장학생으로 일류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프랑스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물어보면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사람이 대접을 받으면 거기에 상응되는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 엘리트로서 한국과 프랑스를 서로 많이 소개하고 싶었다. 너희가 역사가 있으면 우리도 역사가 있다, 너희가 문학이 있으면 우리도 문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대화가 되지, 저자세에서 계속 받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특별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계속 고민하게 됐다. 나도 예의상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있어야겠다고. 그래서 기다리다보니까 <태백산맥>을 만나게 됐다.

조정래의 작품은 한국인의 복음서다.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고통을 당하고 분단이 되고 이웃 강대국에 이렇게 짓밟혔고... 나는 이런 것을 잘 몰랐다. 그 안에 있던 모든 민초들이 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었다.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일본군 성노예가 될 수 있었고, 집단학살로 흔적도 없이 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기자 악셀 크라우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단학살, 민족학살이 아시아에서는 굉장히 흔한 사례인데, 참 이상하다. 아시아 사람들은 그렇게 집단학살이 많은데 다 입을 막고 있다. 이해를 할 수 없다.’ 지금은 세계사 추세가 그게 아니다. 과거사를 다 들춰내서 반성하고 하는 그런 추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다 덮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집단학살 당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대변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인생이 값진데, 이렇게 개죽음을 당하고 갔을까, 그래서 이건 내가 꼭 알려야겠다, 민초들의, 서민들의 삶의 애환들을 내가 증거를 해줘야겠다, 세계에 알려야겠다, 하고 생각해 왔다.

프랑스의 유명한 역사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은 이런 큰 상처가 문학을 통하지 않으면 이게 이념으로 남는다. 문학은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진솔하게 다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이 역사가 아니라 문학 작품이며, 대하소설이기 때문에 가슴 깊이 다가오는 것이다.

□ 프랑스어권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사회과학 분야보다는 오히려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이 적격이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겠네요?

■ 그렇다. 문학작품을 소개하면 역사와 사회과학 등을 한꺼번에 다 소개하는 것이 되는 거다.

‘<태백산맥> 남편과 함께 5년에 걸쳐 번역’

▲ 남원 광한루에서 남편 지겔메이어 씨와 함께.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6년간에 걸쳐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번역에는 몇 년 걸렸는가?

■ 5년 걸렸다. 일단 조정래 스타일을 안다. 주야장천 이것만 했는데도 5년 걸렸다. 불어권의 원어민 조르주 지겔메이어(Georges Ziegelmeyer) 씨와 함께 했다. 지겔메이어 씨는 내 남편이다. 프랑스인이 한국어를 한꺼번에 하면 좋고, 또는 내가 한국인이면서 불어를 완벽하게 하면 좋은데 둘 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저희는 초창기 번역가로서 둘이 함께 했다.

□ 번역할 때 역할분담을 했을 것 같다.

■ 먼저, 첫 권을 내가 했다. 지겔메이어 씨가 그 첫 권을 보면서 어휘나 표현을 터득했다. 그 다음 권부터는 지겔메이어 씨가 혼자 했다. 그러면 나는 뒤에 쫓아가면서 이거 잘못됐다 하면서 보충하고 수정해 줬다. 그 다음에도 다시 읽고 하면서 몇 번의 퇴고를 거쳤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른 프랑스인이 검토해주고 그랬다.

□ <태백산맥> 10권만이 아니라 <아리랑> 12권도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조정래 선생이 <태백산맥>을 먼저 쓰고 <아리랑>을 그 다음에 썼는데, 우리는 반대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태백산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랑>이 일제시대 때 이야기로 시대적으로 앞섰기 때문이다. <아리랑>을 번역할 때 이미 <태백산맥>을 번역하려고 마음먹었었다. <아리랑> 12권을 1권의 희곡집으로도 냈다.

□ <아리랑>과 <태백산맥> 두 질의 대하소설은 번역만이 아니라 출간도 쉽지 않았을 텐데.

■ <태백산맥>이 영어권에서 먼저 나와야 되는데, 출판사를 못 찾았다. 대하소설 10권, 12권을 내줄 출판사가 없기 때문이다.(웃음) 그래서 불어로 아르마땅(L'Harmattan) 출판사에서 먼저 나왔다. 아르마땅 출판사는 프랑스에서 인문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출판사다.

아르마땅 출판사 사장이 드니 프리앙(Denis Pryen) 씨다. 이 분도 우리가 일본에 강점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아리랑>을 보고나서 “우리가 무식하구나, 한국에 대해 이 정도도 모르고 있구나” 했다. 출판사 사장은 “12권으로 의식을 바꿀 수는 없다. 장사가 안 된다. 그러나 출판인의 의무다. 출판사 수익 하나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출판한다. 조정래의 작품은 무조건 출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한국을 알리는데 1세기 역사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리랑>, <태백산맥>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전쟁의 원인, 그리고 전쟁 이전의 일본 강점, 그게 우리 100년의 역사 중 아주 결정적인 것이다. 우리도 몰랐던 것을 조정래 작가가 치열하게 썼고, 우리는 그 책을 통해 ‘우리가 이렇게 서럽게 당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도 있다. <태백산맥>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부분은?

■ 그런 말이 있다. 하지만 번역가는 창작을 할 자격이 없다.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작중인물이 하고 싶은 일을 그대로 써야 한다. 우리의 상상을 넣어서도 안 되고, 가능한 한 원문에 충실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창작을 한다고 하면, 예를 들어 불어권에 없는 언어들, 한옥, 한복과 같이 불어에 없는 것은 우리가 창작해서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불어도 어휘가 풍부해지는 계기가 됐다.

□ 궁금한 게 있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남도 지방의 사투리를 어떻게 번역했나? 제대로 번역이 안 되면 제 맛이 안 날 텐데?

■ (번역하면서) 반역을 저질렀다. 사투리는 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표준어로 다 고쳤다. 욕 같은 것도 모두 프랑스식으로 했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가 많은데, 그런 것 전부 표준어로 했다. 불어에도 욕이 많다.

그런데 그보다 <태백산맥>의 핵심은 전체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갈등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쟁의 원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게 농업사회에서는 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강대국이 끼어들어 대리전을 시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프랑스가 공산당을 좋아하지 않는다. 워낙 가톨릭 전통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가톨릭이 공산 정신이다. 그렇지만 공산당을 좋아하진 않는다. 사회당까지는 인정한다. ‘<태백산맥>이 공산당 문학이다, 빨갱이 문학이다’ 그러는데 그게 아니다. 지금 북한에 대해서도 기자들이 제멋대로 쓴다.

“<태백산맥> 보고 프랑스 지성인들이 부끄러워했다”

▲ "지금 프랑스, 유럽에서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작가가 있는가? 없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태백산맥>에는 숱한 개성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숱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묘사가 번역을 통해 가능한가?

■ 쉽지 않다. 한마디로 인물이 너무 많다. 그래서 지겔메이어 씨가 <아리랑>, <태백산맥>에 나오는 인물들을 묶어 한 권으로 된 인물사전을 만들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한테는 염상진이 남자인데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여성 이름인지, 남성 이름인지 감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참고로 프랑스어 문화권의 범주는 어떻게 되나?

■ 불어문화권은 캐나다와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지역, 그리고 이집트와 레바논에도 있다. 심지어는 러시아, 영국, 일본의 옛날 황족들은 다 불어를 썼다. 200년 전에는 모두 불어를 썼다. 그래서 우리가 불문학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사람들이 다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동남아도 마찬가지다. 베트남, 캄보디아도 전부 불어권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가 지금 영어권으로 바뀌고 있어서... 불어권에서 비상이 걸렸다. (웃음)

□ <태백산맥> 번역본이 프랑스어 문화권 독자들한테 어떤 느낌을 줄까요?

■ 프랑스만 해도 지금 경제위기에 처해 있지만 그래도 부유한 나라다. 바캉스의 나라다. 휴가가 많고 주 35시간 근무다. 최저임금, 무상교육 보장된다. 월급이 부족하면 정부 보조가 다 있어서 주택보증, 생활 보호 차원 등 국가가 다 살려준다. 국민을 옆에서 다 어시스트 해준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쾌락을 느낄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도 그렇다. 섹스 소설이 많이 팔린다. 베스트셀러가 섹스 소설이다. 동성애 소설, 여성이 남성을 편력하는 소설이 베스트셀러다. 인간 쾌락의 극치가 무엇일까, 이런 것을 추구한다.

그러던 참에 <태백산맥>처럼 이렇게 빈곤, 약소문제를 다루니까 이 사람들이 처음에는 당황해 하고, 지성인들이 부끄러워했다. ‘우리 작가들이 게으르구나’ 하며 진짜 부끄럽다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자극을 받는 것이다. 지금 프랑스, 유럽에서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다루는 작가가 있는가? 없다. 그래서 조정래가 상당히 앞서가는 작가이고, 세계적인 작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구 사람, 프랑스 사람들은 항상 남을 지배하고 항상 자기들의 우월 속에 있다 보니까 조정래 작가를 갑자기 받아들이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들이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그래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게다가 대하소설은 지금 없어지고 있는 문학 장르다. 그래서 깜짝 놀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 아시아 저 끝에서 이런 작가가 있구나, 굉장하다. 심지어 나는 그런다. 한국이 선진국이고 프랑스가 후진국이다. 프랑스는 너무 침체되어 있어서 재미가 없다, 이것만 봐도 한국의 기적을 보는 것이다. 당장 베스트셀러는 안 되더라도 서서히 우리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태백산맥>이 특히 저 같은 중년 여성한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 한국에서는 <태백산맥>이 아직도 독자들, 특히 대학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직접 번역을 한 입장에서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우리는 학교 다니며 역사를 배울 때 교수 자체가 역사관이 없었다. 역사를 보는 눈이 없었다. 역사는 그냥 외우고, 시대별로 암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래를 통해서 한 나라의 역사, 민족의 역사, 심지어 가족사를 보는 눈이 깨쳐졌다. 역사를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구나, 사관을 우리한테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을 보는 눈, 유럽을 보는 눈, 일본을 보는 눈, 특히 저 같은 중년 여성한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 작가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 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그리고 나와 국가, 나와 세계, 나와 인간관계, 한 인간, 인간이 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작가의 글의 힘이 이렇게 훌륭하구나, 세상을 보는 사관을 바꿔주는구나 하고 느꼈다. 이런 점들 때문에 한국 대학생들이 <태백산맥>을 많이 읽는 것이고, 또 반드시 읽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한국 작가가 내게 그랬다. “나도 조정래 작가가 유명하다고 해서 도대체 뭘 썼길래 하면서 조정래 작가 책을 읽고 났더니 굉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보고 꼭 번역하라고 부탁하더라. “나는 역량이 안 되지만 같은 작가로서 조정래 같은 작가가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하고 말하는 그런 작가도 만나봤다.

내가 한국에만 살았더라면 <태백산맥>을 번역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안주하다 보면 개입하기 싫고 아웃사이더로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태백산맥>의 무대가 한국이고 유라시아 끝인데, 이게 한 덩어리인데... 아주 객관적이고 냉정해진다. 왜 60년이 지났는데 똑똑한 한국 사람들이 분단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한국 사람들이 능력이 있는데 왜 이렇게 어리석게 있는가?

□ 이번에 한국에 오셔서 지난해 11월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 건립된 ‘태백산맥 문학관’ 개관식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태백산맥 문학관’에 대해서 평가한다면?

■ 제석산 끝자락에 전위예술로 현대식으로 잘 지었다. 다 좋은데 단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 집단학살 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다 써서 기억해 주고 있다. 집단학살 피해자도 다 우리의 영웅들이다.

그래서 작가한테도 부탁했다. 문학관에 비석을 하나 세워서 한국전쟁 때 집단학살로 죽은 사람들 명단을 다 새겼으면 좋겠다, 집단학살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풀어줘야 한다고 부탁했다. 실질적으로 집단학살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문학관에 대해서는 다 좋게 생각하고, 또 있어야 되고, 후세들에게 이러한 역사 자료가 꼭 있어야 된다.

□ 최근 한국에서는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이 과거에 비해 많이 읽히지 않는다면서 ‘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는 어떤가?

■ TV와 인터넷이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다. 프랑스에는 TV가 없는 집이 많다. 일부러 TV를 안 산다. 안 사는 집이 많다. 무엇보다도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TV는 있는 그대로 강요한다.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기에 TV가 주는 한계가 너무 명확하다.

그래서 많은 지성인들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TV를 일부러 안 산다. 이게 끊임없는 선택이다. 그래서 소설 읽어주고, 대하소설도 부탁하면 읽어주고 그런다. 인문사회과학이 그래도 아직 버티고 있다. 프랑스도 위기는 있겠지만 문학,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꾸준히 나간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집집마다 습관적으로 TV를 켠다. 프랑스에서는 손님이 왔을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TV를 끄는 것이다. TV를 켜는 것은 굉장한 실례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런 개념이 없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TV를 다 보는 것도 아니고 습관이다. 그래서 TV가 소설, 시를 잡아먹는 것이다. TV 소음이 뇌를 마비시키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자신과 성찰할 수도 없게 만든다.

“아직 남북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은 ‘민족’이다”

▲ "우리가 아직 분단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하고 나서 ‘민족’을 없애도 된다. 아직 남북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은 ‘민족’이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한국에 올 때 식당에서 등 TV 소리가 거슬리겠다.

■ 한국이 동방예의지국인데... 이거 자꾸 TV 보면 언제 책을 읽고, 언제 글을 쓰겠는가. 그리고 의식이 희미해진다. 게다가 지금 프랑스는 포도주를 안 마시는 추세다. 술 마실 것 실컷 마시고, TV 볼 것 실컷 보고 그러면 마비가 되는데 언제 글자가 들어오겠나?

□ 한국에서는 포도주가 유행이다. 프랑스에서는 왜 포도주를 안 마시나?

■ 한창 젊은 나이 때 포도주 먹어서 몸 망가지지, 음주사고 나지, 젊은 세대 죽는 숫자가 늘어나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알코올 광고가 법으로 금지돼 있다. 그러니까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지금 알코올 중독자들이 너무 많다. 여성의 경우도 개인생활 하다 보니까 홀짝, 매일 마시니까 은근히 중독자들이 많아져서 사회적으로 심각하다. 뇌가 작게 나오는 애들까지 있다. 너무 심각해서 여성들 알코올 마시지 말자고 캠페인하고 있다.

□ 몇 년 전 한국에서는 진보적 민족문학운동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그 명칭에서 ‘민족’을 떼고 ‘한국작가회의’로 개칭을 했다.

■ 고민을 했다. 사실 표현의 자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직까지도 분단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프랑스에 있다고 해서 분단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분단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은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자존심 상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아직 분단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하고 나서 (명칭에서) ‘민족’을 없애도 된다. 아직 남북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은 ‘민족’이다.

□ 말씀하신 대로 한국사회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다.

■ 나도 한국에 와서 봐도 그렇고, 가장 무서운 것은 고정관념이다. 내가 해외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한국에 오면) 친구들이 ‘북한에 대해 쟤 얘기 좀 들어봐. 다르게 볼 수 있을 거야’ 한다. 일단은 창피하다. 이렇게 우리가 잘 살고 또 머리도 좋은데 우리가 왜 이렇게 어리석게 지내고 있는 것인가.

친구들이 내게 “우리가 북한을 많이 도와주는데, 근데 걔네들 무기나 만들고 김정일 혼자 잘 산다” 이런다. 그렇게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고정관념, 빨갱이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이 편견을 어떻게 부수나. 해외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는 특히 싫은 게 “꼬레” 그러면 “너 어디서 왔어? 북쪽이냐, 남쪽이냐” 이런다. 이럴 때마다 ‘나, 가운데서 왔어’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프랑스에서는 어려서부터 민족주의를 가르친다”

□ <태백산맥>에는 민족주의 문제가 들어가 있다. 프랑스나 서구에서는 ‘민족’ 또는 ‘민족주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 프랑스는 유럽연합에서 정치적 통합을 이루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갖고 들어간다. 심지어는 지방의 안 쓰는 언어, 사투리까지 다 살리고 있다. 이것이 프랑스의 정체성이다. 불어권을 강화시키되 지방 사투리까지 가르치라고 한다. 게다가 그 지방의 특산물까지 다 살린다. 이것이 프랑스의 민족주의다. 두루뭉수리가 아니다. 그리고 집을 지을 때도 그 지역의 특색에 맞게 지어야 한다. 지역의 특성에 맞는 것을 유지한다. 획일적으로 하지 않는다.

프랑스에 살면서 프랑스는 진짜 민족주의를 추구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사실 누구나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세계화로 가면서 민족을 지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사실 프랑스 민족주의는 굉장하다. 그런데도 배타적이지 않다. 배타적이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한다. 지금까지는 프랑스적이 아닌 것들은 불편했다. 근데 지금은 상생이다. 프랑스가 살기 위해서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이북이 있다. 우리의 경우도 그래야 한다. 남한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너희가 필요하다. 이북이 필요하다. 이래야 된다. 프랑스는 그런 게 되게 강하다. 곳곳에 “프랑스, 프랑스”다. 어떨 땐 유치하다할 정도로 ‘프랑스’를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도 ‘민족’을 더 오래 해도 된다.

□ 프랑스 민족주의에 대해 좀 더 설명해 달라.

■ 프랑스 사람들이야말로 민족주의자들이다. 자기네 국익과 민족을 위해 딱 합친다. 프랑스란 이름으로 백인, 흑인 등 피부색을 막론하고 뭉친다. 대단하다. 우리는 단일민족인데도, 민족하면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것같이 들리는데 프랑스는 안 그렇다. 실제로 안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어려서부터 민족주의를 가르친다. 나도 프랑스에서 애를 낳고 키웠는데 애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민족주의를 저렇게 가르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예를 들면 유치원 애들에게 ‘샹젤리제 거리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다’라고 가르친다. 애들에게 ‘맞아 내가 프랑스인이지’하는 자부심을 갖게 한다.

프랑스 국기의 삼색인 자유, 평등, 박애 이게 사실은 복음이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민족주의가 굉장히 강하게 싹텄다. 놀라운 게 있다. 기자가 프랑스를 욕하는 기사를 쓰면, 예를 들어 ‘프랑스가 무기를 팔아서 살고 있다’는 식의 기사를 쓰면 당장 “계속 파리에 살고 싶어? 아님 네 나라로 가고 싶어?”하고 나온다.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그런데 유머러스하게 또는 은유적으로 프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괜찮다. 나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가 얼마나 자기 나라를 보호하는지를 안다. 외국인이 프랑스 관련 글을 써서 해코지 하면 가차 없이 안 된다고 한다. 민족주의와 꼭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게 프랑스의 힘이다.

‘큰 오빠인 국군 변규영과 이모부인 북한 부수상 박성철’

□ 작가 조정래나 소설 <태백산맥>은 독자들이 많이 알고 있는데, 프랑스어 번역자인 변정원 선생님은 잘 모른다. 본인에 대해 소개해 달라.

▲ "<태백산맥>과 <아리랑>에 우리 가족사가 다 들어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10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님이 낙태를 한 번도 안했다. 낙태를 안 했기 때문에 내가 세상 구경을 하면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낙태 반대주의자다.

그리고 내가 <태백산맥>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오빠가 있었고 또 이모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사가 근대사와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가족에서 불화가 많았다. 전쟁을 치룬 사람들이기 때문에 과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막내로 태어나서 그와 같은 것을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태백산맥>을 통해 다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태백산맥>과 <아리랑>이 우리 가족사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우리 가족 이야기가 다 들어있었다.

내 큰 오빠는 변규영이다. 오빠는 장남이었는데 국군장교였다. 그래서 인민군과 싸워야 했다. 한국전쟁 때 큰 오빠는 영천 거의 막바지까지 내려온 인민군 탱크를 다 폭파시켰다. 인민군 탱크 8대를 파괴했다. 마지막에 인민군이 쏜 총에 다리를 맞고 수술도 하지 않고 절단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볼 때 큰 오빠는 전쟁 영웅이다. 큰 오빠는 전쟁기념관에 영정도 있고,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2001년 9월에는 ‘호국인물 변규영 육군중령’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그리고 북한에서 부수상을 지낸 박성철이 저희 이모부다. 이모부가 애가 있었는데 월북했다. 1972년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고, 그해 7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지난해 10월 돌아가셨다. 큰 오빠인 국군 변규영과 이모부인 북한 부수상 박성철. 그러니까 집안끼리 싸운 것이다.

□ 한국 또는 한국문학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한 앞으로의 계획은?

■ 35년 전 프랑스에 유학 가서 한국과 관련된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프랑스에 살면서 딸하고 아들 낳았다. 다들 명문학교 나와서 프랑스 사회에서도 주류에서 일하고 있다. 나는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지만, 내 역할은 교류다. 한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

번역을 오랫동안 했다.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불문학을 한국에 알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불어가 되면 알려지지 않은 한국을 프랑스에 알리는 것이 불어를 공부한 사람들의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프랑스인보다 한국인인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프랑스를 한국에 소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프랑스인은 한국을 잘 모른다. 프랑스에 한국을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

사회과학, 인문과학, 한국의 사상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문학은 많이 알렸다. 아무튼 한국을 알릴만한 것들은 여러 형태를 통해서 다 하고 싶다. 나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과 불어교육을 전공했고, 파리 국제행정대학원 (IIAP)에서 사회과학 석사를 했다. 그리고 파리3대학에서 시몬느 베이유 (Simone Weil)의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조건에 대한 분석과 미래 전망’을 주제로 박사과정을 했다. 시몬느 베이유는 프랑스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공장노동자, 농민 생활을 했으며 저서를 통해 어떻게 하면 지성인들과 민중들이 함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철학자다.

그래서 한국에서 보는 인문사회과학을 프랑스에 알리고 싶다. 한국 사람이 보는 그런 인문사회과학 분야 말이다. 우리는 동양철학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르다. 지금까지 서양 철학자가 보는 시각으로 거기에 맞췄는데, 이것은 아니다. 동양철학은 다르고 우리의 인문과학이 더 깊다. 그것을 발전시켜서 알려야 한다. 동양의 인문, 그래서 나는 동서양의 지적 풍토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 번역만 해왔나, 저작은 없나?

■ 아직 집필한 것은 없다. 그와 관계없이 지적 활동을 계속 하고 싶다. 책도 보고 도서관도 다니고 강연회를 다니고 있다. 계속 지식을 접해야 한다. 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가 뭔지 계속 공급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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