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5일 이소선 어머니의 팔순잔치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렸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자들의 어머니인 이소선의 팔순 잔치는 장관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600여명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함께하며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소선의 반대 속에 이번 팔순 잔치가 성사되기까지는 ‘사기꾼’ 소리까지 들으며 헌신한 전태일기념사업회 박계현 사무국장이 있다.

특히, 이날 행사는 전태일문학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작가 오도엽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말을 빌려 쓴 책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저자 오도엽, 후마니타스)와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팔순기념 헌정문집 ‘조선질경이 이소선’의 출판기념회도 겸해 열렸다.

전태일로 맺어진 이소선, 박계현, 오도엽 세 사람과 인터뷰를 나누기 위해 지난 9일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찾았다.

1. 이소선 어머니 이야기

‘부끄러운 팔순잔치’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 ‘생신 축하드린다’고 인사하며 자연스레 팔순잔치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정말 하지 않으려 하셨다고 정색을 한다.

▲ 이소선 어머니. [사진-통일뉴스 박현아 통신원]

그는 “경기가 어려워 서민들의 시름은 깊어가고 기륭의 노동자들은 백일 가까이 단식을 하며 쓰러져 가는데 그렇게 좋은 곳에서 무슨 팔순잔치냐, 나를 개망신 시키려는 것이냐”며 팔순잔치를 하지 않으시겠다고 두 달 넘게 싸우다 결국 졌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는 현재 창신동에 위치한 전태일기념사업회 아래층에 기거 하고 있는데 팔순잔치를 계속 강행하면 “여기서 나가겠다”고 하고 짐을 싸다가 발에 못이 찔려 꼼짝없이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한다. 상근자들의 도움으로 병원을 왔다갔다 했고 발이 거의 나을 즈음엔 벌써 모든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고 있었단다. 두 달간 팔순잔치를 하지 않겠다고 실무자들과 싸우다가 알레르기까지 생겼다며 머릿속을 보여준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치러진 팔순잔치에는 참 많은 아들딸들이 찾았다. 이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분신현장은 물론 노동자들의 어려운 싸움에는 늘 내 자식이 다치고 힘든 양 한걸음에 달려가 아픈 이들을 어루만져줬기 때문이리라.

‘3번의 구속과 10여 차례의 구류’

이소선 어머니는 한참을 청계노조를 만들 당시와 민주화운동명예회복법을 만들기 위해 422일간 거리농성을 했던 때, 유가협 결성 때, 그리고 이석규 열사 장례식집행위원장을 맡아 싸우던 이야기를 한다.

“그때 노무현이 자신은 변호사니 경찰들과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겠다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경찰들이 꼼짝 못하게 양팔을 잡고 바로 끌고 가더라고. 변호사도 그러니 우린 뭐 말할 것도 없지. 우린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의 단체복을 벗겨 입고 정신없이 싸우는 틈에 바로 산으로 기어 올라갔지......”

옥포에서 몰래 빠져나와 산으로 도망을 쳐 대전이고 서울이고 신출귀몰하게 수배생활을 했던 당시를 화면을 보듯 자세히 설명을 한다.

결국 이런 싸움들 끝에 이소선 어머니는 3번의 구속, 10여 차례의 구류를 겪었다.

그는 “구치소에 가면 오히려 쉴 수 있었다, 춥지만 않으면 매일이라도 살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악명 높은 보안사에도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지만 내가 잘못한 것이 없어 전혀 무섭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쓰기 위해 이소선 어머니의 구술을 받아 적은 오도엽씨가 어떤 이야기는 똑같은 것을 일곱, 여덟 차례 하시기도 한다고 했는데 분명 이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 일 듯하다. 힘차게 싸웠던 때를 떠올리며 어머니는 또 힘을 받는 듯한 모습이다.

▲  이소선 어머니가 구술하고 오도엽이 받아쓴 책,『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표지.  [사진-전태일기념사업회 제공]

‘아들과의 약속...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는 사실 세상의 너무 아픈 곳만 바라보고 살다보니 지금까지 산 팔십 평생이 늘 힘들었다고 한다. 늘 힘들었던 그는 가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오히려 힘들지 않았을텐데...’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그러나 이처럼 열심히 산 이유는 바로 끝까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을 이루도록 싸우겠다는 아들과의 약속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들과의 약속도 약속이지만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근로조건도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상황에서 차별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기가 났단다.

“사람은 부자건 학자건 없는 사람이건 간에 모두 행복할 권리가 있는데 있는 것들이 배고픈 자들을 짓밟고 차별을 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뼈 빠지게 일하는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이라고 지렁이 차버리듯 하는 것을 보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냐? 기륭전자만 해도 백일 금식으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인데 사장은 중국 가서 장사하는 것 보면 힘없는 자들은 벌레보다도 더 못하게 차별하고 있다.”

‘세상은 전혀 변한 것이 없어’

전태일이 분신한지 벌써 40여년이 흘렀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아직도 세상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1980, 90년대는 근로기준법이 있어 어느 정도 이야기가 통했지만 이제는 법으로 비정규직을 허용하다보니 작년, 올해는 오히려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예전보다 더 하다는 것이 어머니의 설명이다.

그는 “우리나라를 이 정도로 성장시킨 것은 노동자이지만 비정규직은 인간취급도 받지 못하는 등 짐승보다 못한 것이 현실이다”며 “노동운동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가 아무리 별난 재주를 갖고 있더라도 머릿수가 힘으로 한국노총도 함께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특히 “정규직이라고 언제까지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이 아닌데도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감싸지 않는 모습은 절통하고 억울하다”며 “정규직, 비정규직, 민주노총, 한국노총 할 것 없이 모든 노동자가 함께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이들의 어머니’

▲ "모든 이들에게 고마워" [사진-통일뉴스 박현아 통신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나 문익환 목사, 나이가 훨씬 많은 김대중 전 대통령까지 이소선 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불렀다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소선 어머니는 이 땅 모두의 어머니리라. 그러나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호칭이 부담스럽지는 않을까?

그는 “처음에는 나와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까지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해서 혼났는데 이제는 하도 듣다보니 그냥 그러려니 한다”며 “우리 아들, 남의 아들 상관없이 잘 살도록 하는 것만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배우 김혜자가 그저 어머니 역할을 해서 ‘우리 시대 진정한 어머니’라는 최고의 찬사를 얻고 있는 것이 아니듯 이소선 어머니도 단지 전태일의 어머니라서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늘 어머니의 마음으로 노동자를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계노조가 만들어질 당시 어려운 상근자들에게 밥이라도 배불리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헌옷을 모아다 빨아 팔러 다니고 이제는 밥보다도 약을 많이 먹고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유가협까지 가는데 5번은 쉬어야 갈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모든 곳에 다 가보려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100여일 가까이 단식을 할 때 살아서 싸우라고 가서 말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제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힘들어 죽어도 가야해, 내가 당연히 가야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한다.

‘모든 이들에게 고마워’

이소선 어머니는 그동안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일일이 하지 못하니 책을 통해 고마운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 두 책을 통해 이소선 어머니는 ‘나를 기억하는 분들에게 아무튼 모든 사람들 고맙습니다. 내말은 이거뿐입니다’라고 그동안 알고 지낸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싸움을 할 때마다 함께하는 사람들 덕에 이길 수 있었고 오늘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며 “하나 안 빠지고 전부 고맙다, 이집 발 딛고 만나는 모든 이들이 고맙다”고 연신 고마운 인사를 한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처음부터 대통령으로 태어나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뽑아줬으니 대통령이 된 것 아니냐”며 “국민들과 노동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한다”고 쓴 소리를 던졌다.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수많은 노동자들을 챙기기가 버겁겠지만 노동자들의 어머니이자 약자들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의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가운데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의 따스함을 느끼길 바란다.

2. 전태일기념사업회 박계현 사무국장 이야기

‘청계노조가 맺어준 인연’

▲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이소선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계현 사무국장. [사진-통일뉴스 박현아 통신원]

전태일기념사업회 박계현 국장은 중부시장에서 재단사 연합회를 만들어서 창동에서 어머님말씀을 듣는 순서가 있어 쫓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곤 한 것이 어머니를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박 국장은 “전태일은 그 전에 전혀 몰랐으나 제일교회를 다니며 사회에 눈을 뜨게 됐다, 이후 노동조합에 참여하고 대의원 활동을 하면서 전태일기념사업회와 인연을 맺었다”고 말했다.

1985년에는 결혼을 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살기도 했다는 그는 90년대 초까지 노조활동을 하다가 90년대 초에는 노조 활동비로는 생활이 어려워서 떠났다가 지난해 7월부터 다시 오게 됐다고 설명한다.

박영진 열사 장례투쟁 때 구속되기도 한 그는 처음 시작할 때나 다시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일하게 된 지금이나 늘 가슴속에 ‘전태일 정신’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

박 국장은 “전태일이 환경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을 개선하고 인권이 억눌린 사회의 개선을 위해 분신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지독한 인간사랑 때문이다”며 “어려운 밑바닥에서 살수록 어려움을 어려움 이상으로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 가장 중요한 전태일 정신으로 단체 생활은 물론 어디서나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팔순잔치, 사람 모으는 계기를 기대하며 강행’

이소선 어머니가 그토록 완강히 거부를 하는데도 굳이 행사를 성대히 치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질문에 그는 “사기꾼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며 웃는다.

지난 8월부터 팔순인데 어찌할까 어머니한테 물어봤는데 단호하게 세상도 어지럽고 노동자들도 삶이 어려운데, 내 잔치 한다고 사람들 어려운 발걸음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다고 한다.

아주 어렵게 어머니의 삶을 정리한 책의 출판기념회 정도만 하기로 했고 민주노총, 한국노총, 추모연대, 70민노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태일기념사업회 등 6개 단체가 매주 월요일 마다 회의를 하며 행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세 번째 회의 때 어머니의 팔순잔치를 통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단다.

이후 팔순잔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나 팔순잔치를 하지 않으려고 했던 어머니가 리플렛이 나온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셨고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욕도 하셨다고 한다.

그는 “그런데도 불구하고 행사를 강행한 것은 단지 어른이기 때문에 잔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라 요즘은 집회를 해도 사람 100명 모으는 것이 힘들 정도로 어려운 상황인데 모임을 통해 소통의 계기가 되길 기대했다”며 “비록 양대 노총에서 많은 인원이 오진 못했지만 각계각층에서 600여명 정도가 참석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태일 거리가꾸기 추진’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대대적으로 전태일거리 가꾸기 사업을 추진했다.

박 국장은 “전태일 동상이 있는 곳에 누군가 오토바이를 세워놓기 시작하더니 하나 둘 늘어나 이제는 워낙 오토바이가 많아서 보는 사람도 안 좋고 그 거리에 오고 싶어도 사람들이 발 딛을 곳도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며 “우선 오토바이들부터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종로구청과 혜화경찰서에 협조를 얻어 단속을 벌여 오토바이를 없앴고 주변의 미화를 위해 화분도 갖다 놨다. 이제는 거리가 아주 말끔해져 멀리서 전태일거리를 찾는 이들도 전태일 정신을 떠올리기 한결 좋아졌단다.

새로 재정비된 전태일 거리에서 올해 범국민추모제 전야제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태일 정신 알리기에 주력’

▲ '전태일 정신을 알리자' [사진-통일뉴스 박현아 통신원]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앞으로 기존 사업을 재정비하는 동시에 전태일 정신을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알려나가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한다.

박 국장은 “현재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청소년문학상, 문학상, 노동상 등의 시상과 함께 추도식 정도인데 특히 노동상의 경우 추천된 분들이 많이 부족해서 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후보들이 미흡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장기투쟁 사업장도 있고, 훌륭한 노동단체가 없는 것도 아닌데 너무 전태일이라는 틀에 묶으려고 제한이 너무 컸던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된다”고 밝혔다.

그는 “기본에 충실하자는 마음가짐으로 우선 기존사업의 활성화에 주력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여건만 된다면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요즘은 전태일정신이 많이 퇴색되어가는 것 같아 전태일 정신계승 사업을 국내는 물론, 국제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박 국장은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전태일기념사업회를 찾아 전태일 정신을 배우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공간이 좁아 어쩔 수 없이 취소를 한 적이 있다”며 “기념사업회 공간을 확대하고 이곳을 찾는 청소년에게 나눠줄 책자나 리플렛 등의 제작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국장은 또 “전태일평전을 동남아에서 번역본을 출간하거나 해외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노동자들에게 전태일 노동상을 주는 것 등을 생각해보고 있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 재정 부족 고민’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업을 추진한다는 바로 돈과 직결이 되어 있는 것, 모두 어려운 때이긴 하지만 후원회원이 줄어들며 기념사업회의 재정이 부족한 것이 박 국장의 고민이다.

상근활동가가 3명인데 이들 모두의 연봉으로 4,400만원이 책정되어있다. 그나마 이 금액도 보장되지 못하며 책을 쓴 오도엽씨의 경우는 아이까지 있는데 차비 정도만 받고 활동을 한다고 한다.

어머니 역시 전태일 평전의 인세를 받아서 생활을 하는데 약값조차 대기 어려운 상황이고 그저 이곳에 모여서 같이 밥을 먹어드리는 것밖에 해드릴 수가 없다고 한다.

문학상 수여에 드는 600여 만원은 소식지에 광고를 내주며 출판사에서 후원을 하는데 지속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늘 부족한 상황으로 CMS 후원회원도 늘고 소식지 광고도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끝으로 박 국장은 “태일이형은 지독한 인간사랑 때문에 분신을 하게 된 것이다, 태일이형은 굉장한 밑바닥인생을 살면서 그 어려움 같은 것들을 사랑으로 승화시켜나간 것으로 이게 바로 진정한 전태일정신이 아닐까한다.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랑으로 승화시킨 것이다”며 “어려운 상황일수록 참된 전태일 정신을 곱씹어 보면 좋겠다”고 전했다.

3. 책을 쓴 작가이자 전태일기념사업회 간사인 오도엽씨 이야기

‘어머니의 아들 오도엽’

▲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한 소설가 오도엽(왼쪽). [사진-전태일기념사업회 제공]

오도엽씨는 처음부터 인터뷰를 따로 하지 않겠다고 했다. 책의 프롤로그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적어 놓아서 그 것을 인용하면 될 것이라고 한다.

오전 11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금세 점심시간을 넘겼고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기념사업회 식구들은 우리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염치불구하고 함께 밥을 먹는데 우리 때문에 식탁이 더욱 비좁아 도엽씨가 밥그릇을 들고 먹어야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소선 어머니가 (자신의 밥그릇 옆 자리를 가리키며) “이쪽에다 밥그릇을 놓고 먹음 되겠네”하자 그는 “맨날 눈칫밥 먹으니까 괜찮아”한다.

어머니는 (눈을 흘기며) “눈치는 무슨 눈치, 말하는 본새가 그게 뭐냐”했고 도엽씨는 그저 씩 웃는다.

뿐만 아니다. 이소선 어머니가 인터뷰 도중 “유가협 어머니들은 남들이 자식 앞세우고 웃는다고 할까봐 웃지도 못하고 춤추고 노래하지도 않는다”고 하자 그는 냉큼 “내가 엄마 춤추는 거 봤구만...”한다.

가끔씩 어머니가 기억을 하지 못하면 “아 저것 봐, 분명 했는데도 모른다고 잡아떼니 내가 얼마나 힘들겠냐”고 너스레도 떤다.

이소선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며 함께 먹고 자며 글을 썼다는 오도엽씨는 진짜 이소선 어머니의 귀여운 막내아들쯤 돼 보였다.

‘이소선은 독특한 향기를 가진 사람’

그가 처음 어머니의 목소리를 받아 적겠다고 생각 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것이 아니고 일이 있어 전태일기념사업회에 들른 그는 아래층에 살고 있는 이소선 어머니께 별 생각 없이 “다시 뵙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고 이에 이소선 어머니는 “다시는 뭘, 이제 일이년이나 살겠어. 이게 마지막이지”라고 답했다고 한다.

‘마지막’이라는 말에 오도엽씨는 창신동에 주저 않아 몰래 녹음기를 켜놓고 밤부터 새벽까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두 해를 꼬박 이야기를 들었고 이소선이라는 이름 석자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7개월이나 원고를 정리하며 글을 쓰는 내내 괴로워했다고 한다.

가장 곁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지켜본 그는 “누군가 내게 이소선은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보다 독특한 향기를 가진 사람, 그러나 향기를 내뿜는 순간 자신은 스멀스멀 사라지고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질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며 “이소선은 천성적으로 자신을 높이거나 높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했던 실천은 주변사람들의 요청에 성실히 응답을 한 것일 뿐이다”고 한다.

‘가슴으로 듣고 발로 쓰는 글’

‘자칭 이야기를 들으러 다니는 건달’ 오도엽은 불혹의 나이를 코앞에 두고 15년 공장 생활을 접었다고 한다. 들풀처럼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기록문학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고.

그 뒤 1960~1970년대 가발공장과 봉제 공장에서 일했던 우리의 ‘언니’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아줌마 열전’을 기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세상을 떠돌며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듣고 발로 쓸 것이라고 한다.

이소선 어머니에게 푹 빠져 두 해 동안 남편 노릇, 아비노릇 팽개치고 산 오도엽씨는 부산에 있는 아내와 딸에게 “할머니가 말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 오면 셋방살이를 탈출할 날이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누구의 어머니나 투사가 아닌, 그저 ‘이소선’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며 “‘누군들 미쳐 살만큼 힘들지 않겠는가. 그래도 함께한 사람들이 있다. 고맙다는 말, 다 못하고 헤어지고 떠나보낸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 모두가 내 인생의 주인공들이다. 고맙다. 지겹도록 고맙고 또 고맙다. 그립다. 보고 싶다’라는 이소선 어머니의 육성이 우리에게 보내는 영원한 응원가이자 희망의 위안이다”고 말했다.

이소선 어머니와 전태일기념사업회 식구들을 만나면서 이들이 바로 사랑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승화시킨 전태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진 것 없는 어려운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전령인 이들의 노력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모두 흩뿌려져 가진 것 없다는 이유로, 또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약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빨리 오길 기대해본다.

(이 인터뷰 기사는 추모연대의 <열사회보> 11, 12월호와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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