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낮 경기도 남한산성 자락에 위치한 故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묘소에서 47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고성진 기자]

반세기 동안 감춰졌던 진실의 주인공, '무죄' 판결 이후 처음 맞는 故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의 47주기 추도식이 14일 열렸다.

이날 낮 12시 30분,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 남한산성 자락 중턱에 위치한 고인의 묘소를 찾은 이들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지난 1월, 법원은 1961년 5.16쿠데타 세력이 조 사장에게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등의 혐의를 억지로 뒤집어씌우고 사형을 집행한 '민족일보사건'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그래서였을까? 재작년과 작년, 고인의 묘역에 수북하게 쌓였던 흰 눈은 이날만큼은 봄을 부르는 따스한 겨울 햇살로 누그러져 이 일대를 가득 비추며 찾아오는 이들을 반겼다.

추도식에는 故조용수 사장의 동생이자 '민족일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의 위원장인 조용준(74)씨를 비롯해 고인의 아들 조웅제(45)씨 등 유가족 10여 명과 <민족일보>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양실근 선생, 김병태 선생, 박석률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상임의장, '조용수와 민족일보'의 저자 원희복 기자 등 30여 명의 각계 인사와 통일운동 원로들이 참석했다.

▲ 조용수 사장의 유족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고 있다. 맨앞이 조용준 진상규명위 위원장[사진-통일뉴스 고성진 기자]

일본에서도 8명의 재일동포들이 이곳까지 걸음을 했다. '재일본 민족일보 연대포럼' 회원 8명은 추도식이 참석하기 위해 지난 13일 바다를 건넜다.

이들 중 정경모 선생의 아들 정강헌 씨는 부친이 고국 땅을 밟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하며 부친이 쓴 간략한 추도사를 고인에게 바쳤다.

정 선생은 조 사장과 같은 날 "내무부 장관 때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죄로 처형당"한 최인규 전 내무부 장관을 소개하고는 "되도록 조용수 같게, 그러나 최인규와는 같지 않게 살고자 하다 보니, 40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보내게 되었다"며 "어느 때이고 내가 이승을 떠나 저승에 가서 조용수 동지를 만난다면 얼마나 감회 깊게 서로가 나눌 말이 많겠냐"고 아쉬움을 전해왔다.

▲ 각계 인사들이 고인의 묘소에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고성진 기자]
박석률 상임의장은 추도사에서 "선생께서 예기치 않은 야만적 살인을 당하신 날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돌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선생께서 뜻을 펼친 기반이었던 4.19혁명이 폄하되는 소동을 겪게 되고 결코 순조롭지 못한 현실 앞에 서 있다"며 조 사장의 희생정신과 선각자로서의 기백이 지금 시점에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사회를 맡은 한찬욱 진상규명위 사무처장도 "이명박 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무시, 경제 위기, 민주주의 후퇴, 역사왜곡 등 피와 땀으로 쟁취한 투쟁의 성과를 한 순간에 되돌리고, 파괴당하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행로를 되돌아보아야 된다"고 조 사장의 뜻을 이어나갈 것을 주문했다.

조용준 위원장은 이번 추도식을 마련한 유족들을 대표해서 먼저 찾아온 이들에게 사의를 전하며 "여건이 조성된다면 사회적인 기념사업회가 되든, 추모사업회가 되든 사회단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라고 향후 계획을 조심스레 밝혔다.

이에 대해 한 사무처장도 "조용수 사장에 대한 재심 선고에서 무려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이제는 민족일보사건진상 규명위원회가 발전하여 추모사업회를 만들어 조용수 사장님의 뜻을 받들어 '전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문제'에 조금이라도 밑거름이 되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의미가 깊은 추모제가 될 것으로 생각됐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형사는 국가가 보상하면서 민사는 법원이 지금까지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며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 해결이 지연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조 사장의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현 정부 내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조용준 위원장 등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형사보상 청구소송에 법원은 고인이 구금됐던 200여 일과 사형집행 보상금을 합쳐서 국가가 6천여 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려 지극히 형식적인 보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가가 제대로 된 피해보상 대책을 내놓지 않자 유족들은 올 8월 국가에 97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지만, 이에 대한 전망도 순탄치만은 않아 어떤 결과가 나오게 될지 주목되고 있다.

이날 추도객들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차례대로 고인의 묘소에 헌주와 헌화를 이어갔다. 안병욱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위원장도 조 사장 앞으로 애도의 뜻을 담아 꽃을 보내오기도 했다.

▲ 유족들이 <민족일보> 전 기자였던 김자동 회장과 함께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고인의 아들인 조웅제 씨, 김자동 선생, 조성제 씨.[사진-통일뉴스 고성진 기자]

<추도사1>

조용수 선생님 영전에

선생께서 가신지 47주기, 어언 반세기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예기치 않은 야만적 살인을 당하신 날로부터 거의 반세기를 돌고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선생께서 뜻을 펼친 기반이었던 4.19혁명이 폄하되는 소동을 겪게 되는 등 결코 순조롭지 못한 현실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나라는 분단의 굴레를 벗어날 민족자주역량의 도량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하고 있건만, 오늘 우리의 기백은 선생께서 떨쳐 일어났던 그 날의 기백을 온전하게 살려내고 있는지 다시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수십 년의 질곡을 헤치고 약진해왔던 민주화의 동력이 일순 역주행의 험로를 만나 절체절명의 지경에 처해 있지 않나 하는 시점에 처하여 선생께서 걸으셨던 선구적이며, 민중과 함께 대중적이며,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며, 민족자주와 민족애에 무한히 충실했던 역사를 되돌아보며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60년 4.19혁명은 부정과 불의, 독재에 항거한 이남 땅의 학생들을 동력으로 하여 거세찬 새 불길을 온 사회에 뿜어냈습니다.

조국의 이러한 현실을 목도하고 재일교포사회에서 누구보다도 앞서 이남 땅의 새 사회 건설에 뛰어든 것이 선생이셨습니다.

수많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밟으시려고 하는 이남 땅에서 투신과 헌신의 의지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고. 선생께서 떠나오시기 전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지들로부터 어느 누구도 선생께서 가실 길의 예감 같은 것을 꺼낼 수도 없었다는 것을.
수많은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4.19혁명의 불길은 솟아올라 이승만 독재정권은 타도되었으나, 독재 권력이 온존할 수 있었던 사대와 매판, 외세 의존적 토양은 뿌리 깊어 곳곳에서 민중들의 자주적 역량이 발전되지 못하도록 갖은 횡포와 음모, 탄압을 가하며 일대 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첨예한 국면에 홀연히 몸을 던지신 선생의 투쟁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선구적인 길을 걸으신 데서 빛나는 것입니다.

자주적 역량이 동토를 깨고 다시 솟아올랐으나 그 주도력이 아직은 미약했던 시절, 1960년의 총선에서 불과 몇 석의 의정진출로 그쳤을 때, 이남 땅에서의 투쟁방향은 열려진 공간에서 대중적 역량을 키워내고, 발전시킬 수 있는 대중적 합작과 대중적 투쟁노선의 실천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요청되던 시기였습니다.

4.19혁명의 조직자요, 선전자로서 대중적 지도의 임무를 다하는 정치신문의 창간은 하루도 미룰 수 없는 과제였고, 이 과제를 푸는 것은 대중이 주인이 되는 무기를 쥐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950년의 전쟁으로 얼어붙은 동토의 이 땅에서 분연히 몸을 일으켜 선생께서 민족일보라는 깃발을 들어 올리신 것은 그 무엇보다도 선구적이고 대중적인 쾌거였습니다.

약관 30초반의 나이에 아무것도 없던 불모의 땅에서 대중들에게 정치투쟁의 무기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조직자요, 선전자인 민족일보를 내오신 것은, 말로만 들끓던 이 땅에서 선구적 탁견이요, 선구적 실천이었으며, 후세의 귀감으로 되는 금자탑을 우리에게 안아 올려준 것이었습니다.

친일하다가 친미를 하며 독재와 지주, 매판세력의 대변자였던 양대 일간지의 발간부수를 단숨에 누르고 선두에 선 그 역사는 90여 일에 불과하나 만약에 1년을 계속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교훈을 우리에게 새겨주는 계기를 만들어냈으며, 군사쿠데타 후 묵과할 수 없는 최전방의 타격대상으로 위치 지어진 것이었습니다.

민족자주적 통일역량이 일어서느냐, 또는 밀리느냐! 평화통일역량이 일어서느냐, 또는 밀리느냐! 민주적 혁명역량이 일어서느냐, 또는 밀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서 4월 혁명의 도정은 판가름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자주와 평화, 민주 통일세력의 투쟁결집체로서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의 깃발 아래 혁신세력과 대중단체들이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면, 민족자주와 평화, 4.19혁명역량의 대중적 조직자로서, 또한 선전자로서 소임을 맡은 민족일보는 이 땅의 가장 위력한 양대 무기 중 일익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한미행정협정 반대, 2대악법제정 반대 등 당면투쟁에서 정치적 노선의 차이를 인정하며 연합전선을 실현하는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끌고 가는 한 축이었습니다. 대중적 무기의 전취는 그야말로 황무지에 가까웠던 박토에서 정치 사상전을 이끌어 올릴 동력을 확보한 것이며, 대중적 투쟁노선을 과감하게 관철해 내는, 그 주역이 약관 30을 갓 지난 조용수 선생이셨다는 것을 역사는 뭐라고 가르쳐왔던가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억압과 예속의 강요냐, 억압과 예속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것이냐 하는 간구한 투쟁사가 전개된 이래, 약관 30의 선지자와 선구자가 몇 있었으니, 선생께서 이 땅의 전 민중의 고통과 항거를 끌어안고, 투쟁동력의 구심을 세운 역사를 우리는 긍지 높은 귀감으로 받아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생께서 걸으셨던 무한히 헌신적인 민족애는 보통사람들이 소홀히 하고 있었던 임무, 즉 일제의 강도적 지배하에 결연히 맞서다가 분단의 질곡 아래에서 쇠락해지고 계셨던 노 독립투사들에 대한 사랑으로 의리를 다하려고 했던 것은, 말로만 역사의 교훈을 찾는 자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깨닫고 계승하려는 실천적 자세의 귀감으로 된 것입니다.

군사쿠데타의 반민중적, 반민족적 폭거의 장기화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었던 그 시기에 누구보다도 그 본질을 명확히 꿰뚫고 있었으나, 선생께서 보이신 두려움 없는 투지의 일관은, 선생께 비교하여 10~20년 나이는 많았으나 노회하고 문약함조차 분간 못했던 일부 지도자들의 허상을 일깨우는 계기로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헌신한다는 것,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하며, 도망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음에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 분께서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이 맞겠지요"라고 하면서 뒤집어씌우는 것조차 태연히 끌어안고, 정도의 길을 밟아 기꺼이 옥중의 죽음을 맞이한 선생과 같은 선각자들의 희생으로 하여, 피압박 인류의 투쟁사는 빛나게 발전해 왔음을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아직은 튼튼하지 못한 민족자주역량의 선두에서 죽음을 투쟁으로 맞이한 선각자요, 선구자인 선생의 짧은 한 생애를 보면서 우리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심장의 고동소리와 함께 우리의 뇌수에 기록하여, 기억하고, 새로운 깃발을 이어 날아갈 수 있는 기틀을 계승할 것임을 숙연한 마음으로 다지고자 합니다.

조용수 선생이시여!
찾아오는 이 없는 이 남한산성의 외로운 땅에 선생을 모시고 있는 후생들의 미약함을 꾸짖어주소서.

조용수 선생이시여!
이제 봄이 되어, 만천하에 민족애의 들꽃이 화창하게 만발하여 걸음마하는 어린애들마저 돌담 위에서 속삭이는 자유와 독립, 해방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 '그 때를 준비하여 빈틈없으라'는 선생께서 주신 귀중한 가르침을 실현해 낼 때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그날 우리 모두는 선생을 이 차가운 바람 흩날리는 곳에서 따스한 꽃들이 만개하는 곳으로 모셔갈 것임을 다짐 드리면서 또 한 번의 작별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럽지 않은 생애를 다짐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외침을 전해 올리며.

2008년 12월 14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공동대표,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상임의장 불초 박석률 상향(尙響)

<추도사2>

조용수 씨가 민족일보를 통해 남북간의 협상과 교류를 주장하였다는 것으로 처형당한 1961년 12월 21일, 나는 처자 식구를 일본에 둔 채 서울로 돌아와 있던 관계로 그 날의 공포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나는 GHQ로부터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서울에 와 있었느니 만치 나 자신이 조용수 일수도 있었다는 생각으로 심중의 공포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같은 날 처형당한 또 하나의 인물이 최인구 였는 바,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내무부 장관에 취임하여 3.15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죄로 처형당한 최인규(崔仁圭)는, 아직 군정청 시대였던 1947년 8월, 나와 같은 배를 타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났던 인물이었습니다.

나 자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의 덕분이었으니, 만약에 결혼문제로 이승만 대통령의 분노를 사지 않았더라면 내가 최인규 였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을 때 실로 불가사의한 운명의 갈림길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되도록 조용수 같게, 그러나 최인규와는 같지 않게 살고자 하다 보니, 40년에 걸친 망명생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이고 내가 이승을 떠나 저승에 가서 조용수 동지를 만난다면 얼마나 감회 깊게 서로가 나눌 말이 많겠습니까.

정경모
2008. 12. 8
망명지 일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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