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 개인적 단상의 글로 전대협 동우회의 입장은 아님을 밝혀 둡니다. 또한 기억을 더듬어 쓰다보니 사실관계가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정청래(전대협동우회 부회장)


1일차 - `역사속으로`
 

▶속초항에서 류금수 선생님과 함께. [사진제공 - 정청래 통신원]

“애비야 고맙다. 이렇게 보내줘서.”
“아니 누구한테 전화하시는 거예요?”바다 내음이 약간 비릿하게 코끝을 스치는 속초항 광장 버스옆에서 불쑥 이렇게 여쭤 보았다.
“어∼ 우리 큰아들한테 한거야. 갑자기 돈을 내라고 해서 급하게 아들한테 연락했는데 알려준 통장번호로 금방 입금해줘서 이렇게 왔잖아. 아들이래도 고맙지 뭐야.”

언젠가 윤희보 선생(송환하신 비전향 장기수)댁에서 뵈었던 류금수 선생이시다.
“선생님 이렇게 역사적인 방북을 바로 코앞에 두고 계신데 사진 한방 찍으시죠.”
“그래 찍어야지. 근데 사진기가 어디 있더라.”한참동안 여행가방을 뒤적뒤적하시더니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아무리 찾아도 없네. 밤새 한숨도 못잤어. 준비한 것도 아무 것도 없고. 그저 만나면 눈물만 날 것 같아서 손수건만 두 장 준비했어.”
“선생님 제 카메라로 찍으시죠.”
“그럴까. 그래 그럼....”
찰칵 소리가 나며 나는 사진의 한컷을 역사의 한 페이지에 박아 넣었다. 뜻밖에도 역사적인 행사에 역사적인 주인공과 함께 말이다. 나는 이제부터 내가 `역사속으로` 들어간다는 현실에 몸이 떨려옴을 느꼈다.

사실 나는 민족대토론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일본 여행중에 국제전화를 통해 알게 되어 예정된 귀국 날짜를 하루 앞당겨 6월13일 오후에‘급거귀국’한 탓에 400명이 넘는 금강산 토론회 참가자 면면을 모르고 있었다. 경복궁 집결시각도 6시 30분으로 잘못 알아 30분 늦게 지각하는 바람에 참가자들과 인사도 못하고 허겁지겁 10호차에 오르면서 핀잔만 받는 신세였다. 3∼4일간 신문도 제대로 못봐서 이번 행사에 관한 정보는 거의 까막눈이었다. 부랴부랴 짐을 꾸려 배달된 조간을 주워들고 택시안에서 겨우 읽었던 바로 그 기사의 주인공을 속초항에서 만난 것이다. 반갑기도 하고 가슴 뭉클하기도 해서 뛰어가서 만난 류금수 선생을 2001년 6월 14일자 한겨레신문 사회면은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53년만에 방북길 “이런날 올줄이야”

오는 15일 금강산에서 열리는 `6·15공동선언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통일대토론회)를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려온 사람들이 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쪽본부 명예의장인 신창균(93 사진 오른쪽)씨와 민주주의민족통일서울연합 공동대표인 류금수(74 사진 왼쪽)씨. 두 사람은 지난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 연석회의)에 남쪽 대표로 참가했던 사연 탓에 이번 통일대토론회를 기다리는 감회가 남다르다. (중략) 스무살의 나이에 남북 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류씨는 “그 당시 얘기를 며칠 전에야 큰아들에게 털어놓고 금강산행 여비를 받았다”며 “이번 통일대토론회가 사실상 제2차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라고 생각해 참가신청을 했다”고 부푼 기대를 표시했다.

경복궁을 빠져나간 통일대열은 홍천휴게소를 잠깐 들러 허기진 배를 채우고 곧바로 미시령 공략에 나섰다. 굽이굽이 아슬아슬한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가는 모양새가 마치 통일의 열두 고개를 넘는 대장정과 같았다. 이화령을 넘은 버스는 한걸음에 속초항으로 내달렸다. 현대아산에서 운영하는 금강산 출항지 속초항은 갑자기 몰려든 열대의 관광버스에서 내린 400여명의 토론회 참가자들로 북적거렸다. 입출항 대기실은 몰려든 인파를 다 감당하기에는 다소 비좁은 규모였다.

언론사 기자들은 역사적인 방북길 현장을 스케치하느라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이런 광경은 행사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기자가 아니라 참가자들의 카메라에서도 역사를 담으려는 플래시는 그칠 줄 모르고 터졌다) 그 카메라 플래시 세례의 주인공은 텔레비젼에서 한번쯤 보았을 법한 유명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낯익은 분들은 승선을 기다리는 짧은 동안에도 기자들의 표적이 되었다.
 
경복궁 버스안에서 나누어준 금강산 관관객증과 신분증을 준비하고 승선수속을 밟으라는 안내방송이 있자 조금이라도 빨리 줄을 서려는 참가자들이 분주히 열을 지어 선다. 연두색 표지에 ‘금강산관광객’이라 쓰여진 고딕체 글씨 밑에 나 자신을 알리는 사진이 박혀있고 이름과 성별, 다음 줄에 생년월일, 그리고 직장직위란에 ‘전대협 동우회 부회장’이라 적혀있고 그 밑에 거주지, 기간 2001.06.14∼2001.06.16이 직사각형의 종이 위에 선명히 적혀있다.

검색대를 통과해 세관에 서자 신분증을 꺼내란다. 일종의 출국심사를 하는 것이다. 북녘은 외국이나 다름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느 외국에 나갈 때 쓰는 ‘입출국신고서’대신 ‘출발, 도착신고서’를 작성했다는 점과 여권을 금강산 관광증 두 장(하나는 북의 통행검사증과 자신의 보관용)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조국 두 개의 국가를 이렇게 절묘하게 구분하여 서류를 만들다니 누군가 머리께나 썼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비교적 간단한 수속절차와 완전한 외국 출국때와 다르다는 것이 뭔가 좋은 징조라고 위안하며 설봉호에 승선하였다.

승선하지 못한 사람들
 
아! 이제 드디어 모든 절차가 끝났고 간단한 방북교육만 받으면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북으로 선수를 돌리며 출항하리라. 이렇게 많은 인원이 그것도 정부에서 껄끄러워 하는 많은 인사를 싣고 가다니. 이건 분명 6·15선언 이후 남과 북의 변화된 관계를 보여주는 작은 징표인 셈이다.

기뻤다. 그동안 정부에서 이적단체 혐의를 씌웠던 탄압의 대명사 한총련과 범민련 남측본부, 범청학련 남측본부 관계자들이 방북단에 포함되고 밀입국으로 곤욕을 치뤘던 서경원 전의원과 환송객으로나 나올법한, 그래서 나의 눈을 의심케 했던 권낙기 선생도 모두 동행인이었다. 2박 3일동안 내가 묵을 방은 3층 16호. 방 열쇠를 받아 가방을 풀고 1층 방북교육실로 모여드는 참가단은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육을 받는 도중이었다. 강사 입에서 문제가 발생해 아직 승선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모든 것이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은 한순간 포말이 되어 흩어졌다. 출항대기실에 신분증을 맡기고 도착해 보니 격앙된 통일연대 관계자 100여명이 항의규탄 집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범청학련 남측본부 대변인 황 선씨를 비롯한 6명이 방북이 불허되었단다. 전국연합 집행위원장 한충목 선배가 메가폰을 잡고 작금의 사태를 수습하고 있었다. 실정법을 위반한 인사, 형집행 정지중인 인사, 수배된 인사 등이 갑자기 ‘불허’통보를 받았다. 문제는 지금까지 버젓이 도로를 활보하고 집에서 잠도 자고 활동을 한 인사들 자신도 본인이 수배자라는 사실을 승선 대기실에서 법무부 관계자로부터 처음 전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수배면 진작에 잡아가던지 이제 와서 불허라니 당사자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분노를 넘어 정부의 무능함과 무원칙에 맥이 풀렸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면 지금 불허된 인사와 허락된 인사의 차이는 무엇으로 설명할까? 6명의 불허 때문에 400여명이 모두 방북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불허된 인사들과 간단히 정리인사를 했다. 미안함과 씁쓸함을 안고 재차 승선하면서 남과 북의 문제는 언제 어디서 복병을 만나 퇴각명령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등짝을 오싹하게 했다.
 
예정된 출항시간 12시를 훌쩍 넘긴 3시 30분경 이런 저런 문제점을 힘차게 밀어 부치며 드디어 힘찬 방북 뱃고동이 울렸다. 이 역사적인 장면을 놓치기 싫은지 많은 인원이 배의 옥상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들떠 있었다. 속초항 부두를 밀어내고 출발한 설봉호는 어느새 망망대해 동해의 수평선 위를 미끄럼 타듯 수월하게 달리고 있다. 3시간 30분 후면 장전항에 도착한단다. 동해항에서 출발하는 대형 유람선 금강호는 느릿하게 10시간이상 가는 반면 설봉호는 배의 규모가 작은 대신 빠른 속도로 우리를 북녘땅에 내려놓으리라.

숙소에 돌아와 텔레비젼을  켜니 뭔 프로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보는 사람 없어도 열심히 혼자 프로를 이끌어 가고 있다. 룸메이트들은 피곤한지 눈꺼풀을 내리고 쪽잠을 자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젯밤 잠인들 제대로 잤을 리 없고....

“지금부터 북쪽이다”
 
누군가 밖에서 “지금부터 북쪽이다”라고 소리쳤다. 텔레비젼을 봤다. 화면이 약간 직직거릴 뿐 그래도 계속 뭐라뭐라 떠들고 있다. 밖에 나갔다 온 동료가 더 흥분한 투로 “핸드폰이 여기서도 터집니다. 신기하죠?”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갑판으로 뛰쳐나갔다. 번호를 눌렀다. ‘연결중’이라는 표식이 뜨더니 이내“네, 이상현입니다.”“여보세요. 나다”“ 어, 형이야. 거기 어디야?”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상현아! 여기 북한땅이야. 신기하지?”나는 들떠서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보고하였다.

▶설봉호에서 바라본 북녘땅.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남과 북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구나. 국경으로 선을 그어 놓았어도 텔레비젼이나 전화의 전파는 일정부분 영토의 교집합을 형성해 남과 북을 잇고 있구나. 남과 북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아주 가까운 거리임을 눈으로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검푸른 바다에 하얀 물보라를 만들며 아래위로 약간의 롤링을 하며 힘차게 달린 배가 7시를 지나갈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앞에 보이는 산이 해금강이란다. 어디서 이런 정보를 다들 입수했는지 카메라를 들고 갑판위로 무리를 지어 기념촬영에 열중이다.
 
그러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하얀 물체가 점점 몸집을 불리며 우리쪽으로 다가온다. 현대 금강호가 관광객을 싣고 장전항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향하는 중이란다. 이 금강호는 이번 항해를 마지막으로 그 임무를 마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다는 소문이 선상에 금새 쫘악 퍼졌다. 역사! 이 어찌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말이 아니던가! 역사, 놓칠 수 없지. 나는 금강호가 가까이 다가와 우리곁을 스칠 때를 기다렸다가 사진 세 방을 연이어 찍었다.(나중에 안거지만 이건 오보였다. 16일 금강산 등반때 보니까 금강호는 계속 임무 수행중이었다. 해금강 선상호텔은 우리 일행을 마지막으로 재워주고 영업간판을 내린다지만.) 아무튼 나는 역사적이라면 카메라를 들이대던지 펜을 들이대던지 역사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역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번 금강산 대토론회는 `역사풍년`인 행사이다. 6·15 공동선언 1주년 기념도 역사적이려니와 남측426명과 북측200여명의 대규모 토론회가 금강산에서 열린다는 점, 토론회에서 공동보도문을 낸다는 점, 서울, 평양, 금강산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기념행사를 한다는 점, 남쪽의 7대종단, 민화협 그리고 통일연대 등 등 모든 민간단체가 하나의 조직적 틀에 묶여 공동행사를 치루는 남남 단결의 최초의 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더욱 놀랄만한 것은 한총련, 범민련, 범청학련 등 소위 `이적단체`가 합법적으로 방북할 수 있었다는 점(현역 총학생회장으로 최초로 경희대 총학생회장이 방북했다고 한다), 그리고 금강산 호텔에서 부문별 남북 참가자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4∼5시간동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과 금강산 산행도 아무런 제약없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자유롭게 담소를 나누며 금강산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것 모두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나 개인의 입장으로선 2박3일 동안 모든 시간과 방문지, 만난 북쪽사람 역시 모두 역사적인 것이었지만.
 
공해를 항해하던 설봉호가 장전항쪽으로 뱃머리를 돌리자 갑판위의 사람들은 서로 조금이라도 먼저 북녘땅에 몸을 닿고 싶어서 인지 배의 맨앞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장전항이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오자 해금강 바위에 ‘위대한 선군정치 만세’라는 구호가 세로로 누워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확실히 북한땅이다. 옆에서 상념에 잠겨있던 서경원 前의원의 뇌까림이 내 귀가를 파고든다. “13년만이네. 13년만이야..... 김 주석이 더 오래 살았으면 더욱 빨랐을 텐데....” 그리곤 말문을 닫는다. 옆에 있던 가수 김원중씨도 전에 한번 온 일이 있다면서 저건 군함일거고 그때는 겨울이라 굉장히 을씨년스러웠는데 지금은 푸르러서 좋다는 등 흥분했지만 차분차분하게 자신이 선험자임을 은근히 밝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리 배밑에 조그마한 배 한 척이 단일기를 꽂고 나타나 앞쪽에서 먼저 달린다. 아마도 유도선일 거라고 생각했다. 배가 점점 속도를 줄이기 시작할 때쯤 저쪽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특유의 북한 여가수의 억양을 타고 경쾌한 선율이 사람의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들고 있다. 아니 이 환영가가 아니라도 우리 방북단 모두는 흥분하고 있었다.
 
첫발을 내딛다

2001년 6원 14일 오후 7시 30분.
내가 북한땅에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 순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왼쪽 팔목에 찬 시계는 아랑곳없이 멈춤이 없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하며 째깍인다. 방파제 시멘트는 우리 일행을 아무 말 없이 맞이했지만 그것을 딛고선 우리는 각각의 의미를 품은 가슴들의 술렁임으로 분주했다.

우리는 가, 나, 다 반으로 편성되어 말하자면 입국수속을 밟고 또 하나의 조국 북쪽의 품에 안겼다. 통행소에서 처음 만난 북측 세관원들은 여행증에 통과도장을 찍어주었다. 저녁식사를 하려면 버스를 타고 온정각 식당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예정시각보다 훨씬 늦어져 가이드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세관원들은 방문증 사진과 실제인물을 꼼꼼히 살펴본다. 검색대를 통과하며 카메라는 검색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육안으로 식별하려는 이유인 듯 하다. 무뚝뚝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반갑씁네다”라는 인사를 건넨다. 아마 우리가 토론회 참가자들이라는 점을 알아서 일까?  예전보다 친절한 편이라고 한다. 대기중인 버스에 조별로 분승하기 전 나는 커다란 입간판에 눈을 돌렸다.
 
‘천하의 명산 금강산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한글밑에 영어로 ‘Welcome to Mt. Kumgang, the Biggest Diamond on Earth’를 적고 있었다. 북한은 금강산을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로 여기고 있을 만큼 금강산에 대한 자부심을 이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속한 가반 8조 35인승 차량은 파랑과 흰색을 칠한 심플한 현대자동차다. 다만 차량 표지판은 금강산 2-318호로 적혀있어 이것이 북한소유임을 알리고 있었다. 차량외형과 내부는 아주 쾌적한 신빙이 차였다.

한 5-6분쯤 달렸을까? 주변은 이미 해가 떨어져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군데군데 민가에서 새어나오는 흐릿한 전기불과 차량불빛에 보이는 유명한 금강산 전용 도로 옆의 철조망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자신을 박규남이라고 소개한 가이드 말로는 민가의 전기불 빛을 자신도 며칠만에 보는 것이라며 이는 북한의 전기사정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조심스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여기가 가끔 텔레비젼에 비쳤던 철조망 도로였다.
 
그런 상념에 젖을 무렵 벌써 온정각 식당이라며 내리란다. 하차후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 최신 유행곡“알아요∼마음 약한 여자라는 걸....믿어요...느껴요. 당신이...”나는 제목도 모르는 이 노래(돌아와서 WAX의 ‘엄마의 일기’로 확인)가 분주한 사람들의 귀를 삐집고 들어왔다.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 여기는 북한땅이거늘 어찌하여 남쪽 유행가가 버젓이 북녘하늘에 펄럭이고 있는가? 남쪽의 관광객을 위해 이런 자본주의 사랑 타령의 노래를 틀어 놓은 것은 내키지 않는 배려인가 아니면 호객행위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신기할 노릇이었다. 더욱 나를 당황케 한 것은 팝송‘카사블랑카’와 ‘Whenever You Go’였다. 마치 서울의 고급 식당을 삽으로 푹 떠다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현대측에서 지은 온정각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상징하는 몇 개의 건축물들로 줄이어 서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화장실이란 표식대신 걸린 위생실이란 간판이 그래도 여기는 북한땅임을 알리고 있다.  뷔페식으로 차린 음식은 전통적 한식으로 채소와 나물, 불고기와 김치와 잡채 등으로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어 조건 반사작용에 의한 군침이 샘솟았다. 북녘땅에서 처음 맛보는 저녁식사는 두세번을 더 접시를 들고 왔다갔다할 만큼 맛있었다.

상품진열대에는 단주 5불, 맥주 2불, 눈에 띄는 것은 한마음 한 보루가 5불로 남쪽보다 43% 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한마음만을 피우기 때문에 한마음 한 보루를 사들고 간 나는 억울한 노릇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간단한 실무교육을 받는 장소로 이동했다. 현대측이 60억원을 들여 지었다는 돔형식의 「금강산 문화회관」이다. 다음날 평양 모란봉 교예단의 환상적인 공연이 펼쳐질 장소답게 700석 정도의 규모로 비교적 무대가 넓었다. 종단을 대표한 사무총장 변진흥 교수의 간단한 실무보고 후 한상렬 목사는 가슴벅찬 어조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머리는 두 개요 몸뚱이는 하나인 어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는 둘일까요? 아니면 하나 일까요? ”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머리를 딱 때려 하나는 ‘아야’ 그러는데 하나는 웃고 있다. 그러면 둘이고 동시에 ‘아야’ 그러면 하나입니다. 오늘 여기에 못 들어온 불허자 6명도 우리와 하나요 남과 북도 하나입니다.’ 너무도 명쾌한 해답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밤 10시가 통금시간이라는데 우리는 11시를 훌쩍 넘겨 버스를 탔다. 그래 맞아 맞아. 숙소로 다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나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2일차 - “반갑습니다”
 
버스가 출발을 하지 않는다.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민족대토론회가 열리는 금강산 호텔로 향할 버스가 멈춘지 한시간여가 경과되었다.

“도대체 이거  뭣들 하는 짓이야. 이래도 되는 거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래도 되는 거야.”
단번에 백발에 다리를 약간 저시는 박정희 기념관건립반대의 이관복 선생임을 알 수 있다.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이다. 버스에서 튀어나가 상황을 살폈다. 삼삼오오 웅성거림이 계속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북측 기자에게 물었다.
“나도 잘 모르갔시오. 한총련 관련 뭐 같긴 한데 정확히는....”
역사기록을 위한 나라비디오 조학선 기자는 말끝을 흐렸다. 「통일뉴스」,「민족21」기자들이 이리저리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이번 행사를 독점 취재하는 MBC 김현경 북한 전문기자도 눈에 띄고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초청된 방북예정자 6명을 남한당국이 불허한 것에 대한 항의로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소속 인사의 입국을 문제 삼은 것이라고 했다. 남쪽 정부에서 껄끄러운 인사를 불허했으니  북쪽도 북에 껄끄러운 이들을 불허하겠다는 입장인 듯 했다. 상호주의 입장의 관점에서 남쪽에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내 짐작으로는 북은 항의 차원에서 시위를 했을 뿐 이들의 입국을 불허할 의도는 없었던 듯 하다.

▶차량 넘버가 ‘평양 615’, ‘금강산 615’, ‘서울 615’인 전시 차량들.
[사진 - 정청래 통신원]

“자∼ 출발합시다.” 버스는 너무도 화창한 날씨의 북녘 땅을 파고든다. 북한의 현대오일뱅크 1호점이라는 「연유공급소」를 지나 왼쪽의 양진마을과 오른쪽의 온정리를 가로지른 도로를 따라 가자니 지금은 가동을 멈춘 금강산 샘물 공장도 눈에 띈다. 소로 밭갈이하는 농부, 트럭을 타고 가는 승객들의 모습은 내가 어릴적 보았던 풍경들이라 낯설지 않았다.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 날씨라면 남쪽의 통일전망대도 육안으로 관측이 가능하다고 가이드가 설명하다가 갑자기 “손 흔들어 주세요” 한다. 차창밖에 주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본 주민들은 모찌기를 하다가 정답게 답례의 예를 갖추며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온정각에서 잠시 멈춘 버스 밖으로 현대 EF소나타 세대가 도열되어 있는데 차량 넘버가 ‘평양 615’, ‘금강산 615’, ‘서울 615’이고 맨 왼쪽 차량부터 『하』『한반도 꽃무늬 지도』『나』이다. 무슨 의미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차량을 동원해 장식한 것이다.
 
금강산호텔은 온정각에서 버스로 2∼3분 가량 소요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앞서가던 버스들이 줄지어 멈춰 서자 노래 소리와 사람들의 흥분된 웅성거림으로 호텔 근처는 이미 큰 잔치 분위기였다. 호텔 진입로 양쪽에는 북측 환영객들이 민족자주, 자주통일의 손기를 들고 일일이 악수로 맞는다.

“반갑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금강산 여관에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갖은 남북청년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처음 보는 아니 50년만에 감격의 상봉을 하는 그래서 더욱더 말문을 막히게 하는지는 몰라도 그저 반갑다는 말로 모든 인사를 대신하고 있었다. 악수를 하고 또 하고 나는 지금껏 이렇게 악수를 많이 해본 적이 없다. 지루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악수를 해도 모두들 희색이 만연하다.

흰색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곱게 차려 입은 여학생들과 카키색 인민복 복장을 한 중년의 아저씨들 모두 남쪽 사람들과 얼굴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한 핏줄 한 형제임이 분명하다. 남과 북을 구별하는 것이 있다면 가슴에 김일성 주석 휘장(뺏지)을 했느냐의 여부와 사투리였다.(참고로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에 따르면 휘장에는 김주석 1인이 새겨진 것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포함된 두 종류가 있는데 선택은 본인 의사에 따른다고 했다) 

환영의 악수세례가 끝나고 우리 청년학생들은 지정된 8번 지역으로 갔다. 토론회 장소는 주석단을 중심으로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우리식 대로 살아가자」는 구호가 금강산 호텔 앞 출입문 장식하고 있다. 「화해협력」, 「민족자주」, 「조국통일」의 세 개의 애드벌룬이 떠있고 곳곳에 붉은 천에 하얀 글씨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현수막들이 이번 행사의 성격을 가르쳐주고 있다.

「나라의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하자」
「서로 믿는 남과 북, 철길 따라 이어진다.」
「력사적인 북남 공동선언을 철저히 관철하여 조국통일을 앞당겨 이룩하자」
「조국 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남 해외의 전민족이 서로 련대성을 강화하자」
「희망의 21세기 온겨레가 화해와 통일의 문을 열자」

김형직사범대학생 장원옥

북의 청년학생들과 앉아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행사 주최측이 배려한 자리이다. 「6.15 공동선언 발표 1돐 기념 민족대토론회」가 걸려있는 중앙 주석단을 마주보고 오른쪽 뒤편이 남북 청년학생들의 자리이다. 처음 만나는 자리라 서먹서먹 어쩔 줄 모르는 동안 나는 예쁘장한 여학생에게 같이 앉을 것을 제안했다.
 
장원옥. 22살(북쪽은 만 나이를 썼다). 김형직사범대학 2학년. 음악학부. 피아노전공. 전형적인 동양미를 갖춘 빼어난 미모의 여학생이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기가 무섭게 나는  질문 공세를 했다.

“어디 살아요?”
“평양에 살아요.”        
“부모님은 다 살아 계세요?”
“네”
“몇 남매 예요?”
“저 혼자예요.”      
“외동딸이라 귀여움 많이 받겠네요?”
“네”
“아버님은 뭐 하세요”
“군무원이예요”
“계급은요? 뭐 남한(이 말을 피하라 했다) 아니 남쪽은 소령 중령 대령 그런 계급이 있거든요. 북한 아니 북쪽은 소좌 중좌 대좌 뭐 그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단답형 질문을 피할 수 있는 질문다운 질문을 했다. 
“잘 아시네요. 그런데요 중좌와 대좌 사이에 상좌라고 하나 더 있어요. 저희 아버님은 그 위치예요.”
주고 받는 질문과 대답속에 행사장이 왁자지껄 어수선하다.

“북남 해외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금부터 력사적인 2001 금강산 민족대토론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깐 대화를 멈추어야 했다.

“그럼 먼저 단일기 입장이 있겠습니다” 아리랑 음악에 맞게 형형색색 한복을 차려입은 북측 여성 여섯 명이 흰 천에 하늘색 한반도가 새겨진 단일기를 들고 입장해 게양한다. 단일기가 펄럭거리자 일제히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온다. 허혁필 북측 대표가 마이크를 잡는다. “세계의 명산 금강산에 분렬사상 최초로 북과남 230여 정당 사회단체 대표가 한자리 모여 력사적인 민족대토론회를 열게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중국, 러시아 등 해외 동포 20여명도 참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우리 민족끼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노력합시다.”

북측의 김영대 준비위원장은 “력사적인 6.15공선언 1돐을 맞아......기쁘게 생각하며.... 열렬히 축하합니다......이번 금강산 토론회는 통일운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변입니다.”라는 요지로 연설하였다. 남측의 축하연설자로 나선 이돈명 변호사는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조국통일의 시간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한민족입니다. 너무나 가슴벅찬 이 행사를 뜻깊게 생각합니다....” 이어 남과 북 6명의 토론자들이 나와 각각의 주제로 연설하였다.(이에 관한 내용은 이미 보도된 관계로 생략)
 

▶북측의 장원옥 학생과 함께.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다시 장원옥. (나는 장 학생으로 불렀다. 남쪽의 장학생의 의미를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북쪽은 의무교육으로 장학금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장학생, 피아노는 언제부터 배웠어요?”
“아주 어릴 적부터였어요.”
“혹시 예술학교에 다녔나요?”                   
“예. 저는 금성고등중학교에 다녔는데요. 그 학교가 예술학교예요. 금성이 무슨 뜻인 줄 아세요?”
“샛별, 아 한별을 뜻하지요? 바로 김일성 주석을 뜻하겠네요?”
“와아 잘 아시네요. 맞아요. 수령님이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인데요 그래서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지요. 저희 수령님은 어린이를 왕으로 대접해 주셨어요. 매년 12월 31일이면 설맞이 잔치가 있는데요 그때 많은 어린이들이 초대돼요. 저는 11살 때 뽑혀갔는데 수령님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손잡고 춤추고 노래도 하고 했어요. 영광스러웠어요.”
놀라서 내가 물었다. “그 정도 실력이면 굉장한 수준이겠네요?  아참 혹시 오은별이라고 아나요? 남쪽에는 천재 소녀화가로.....”
“제 고등중학교 3년 후배예요. 나하고 친해요. 며칠 전에도 만나서 이야기했는데...”
“그럼 나중에 인민배우 공훈배우 해야겠네요?”
“지금은 배우는 학생이니까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요. 그저 열심히 배워야지요. 김정일 장군님 생신일을 따서 만든 2. 16예술상이 있는데 나이가 차면 한번 나가 보고 싶어요. 근데 아직 멀었어요. 군대도 나가려고 하고 하니까”
“아니 군대에 가면 피아노는 언제 칩니까? 그러다 감각을 잃기라도 하면 어쩔려구요?”
“기동대(인민군 예술기동대)로 가면 일없어요.”

"선생님은 전대협출신인데 어떤 투쟁을 했습니까?"

장 학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대에 나가야 한다는 점과 자주권은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0.001mm도 양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당은 청년을 믿는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조국을 위해 일할 것을 굳게 다짐한다.
내가 남쪽에는 ‘청년이 바로 서야 조국이 바로 선다.’라는 비슷한 말이 있다고 하자 수첩에 얼른 메모를 하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런데 선생님은 전대협출신인데 어떤 투쟁을 했습니까?” 당돌한 질문에 잠깐 머리가 띵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이러 저런 활동을 이야기하다 학생운동때 조국통일위원장을 했다고 하자 장학생은 옆으로 바짝 고쳐 앉는다. 줄곧 통일에 관심이 많았고 북한에 대한 공부도 좀 했다고 하자 대화는 술술 풀려 나갔다. 많이 친해진 듯해서 슬쩍 “남자친구는 있어요?”라고 묻자 금새 얼굴이 빨개지며 “그런거 없어요.”라며 얼굴을 붉힌다.

“그럼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세요?”
“아직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군대도 나가야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하고 하여튼 잘 모르겠어요. 근데 선생님은 왜 자꾸 그런거 물어 보세요?”
“남쪽에 대해 뭐 아는거 있으세요?”
“남쪽은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다면서요? 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남조선 경제문화사를 배우고 있는데 그렇다데요.”

장 학생은 자본주의의 사적소유의 개념과 자본가의 잉여가치의 창출, 임금과 자본의 축적 등에 대해 이해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못받으면 싸워서 찾아야지 왜 그냥 당하고 있냐고 되묻곤 했다. 장 학생 말대로 사회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고 인민은 그 당과 국가의 방침에 맞게 일하면 되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국가보다는 개인이 돈을 벌어서 개인의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남쪽의 ‘생활전사’들의 괴로운 투쟁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
  
행사기간 내내 북쪽의 청년 학생들은 시종일관 ‘조국통일과 한총련지지’, ‘민족자주와 우리 민족끼리’를 강조했다. 사실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나 다른 북쪽 관계자들이 ‘청년학생 앞장서서 조국 통일 앞당겨야지 않겠느냐’는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통일운동을 생업으로 택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남쪽 386세대(이 용어를 알고 있었다)들의 고민을 얼마나 알까? 에는 의문부호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국가가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주는 그래서 통일운동을 열심히만 하면 칭찬을 받는 북의 상황보다는 생활의 문제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고달픔과 통일운동에 선봉장이 되었을 때 오는 탄압과 고초를 견뎌야 하는 남쪽의 상황을 안다면 오히려 통일운동에 대한 채근 비슷한 말은 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내가 받은 느낌으로는 오로지 한총련만이 투쟁을 제대로 하고 있으니 한총련과 함께 힘차게 투쟁하라는 다그침으로 와닿곤 했다. 학생때와 졸업후 많은 청년들이 어렵게 시간을 쪼개어 활동하니 어쩌면 이들의 눈에 예전의 전대협을 생각하면 양에 차지 않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리라.

국가가 인민의 생활과 복지, 탁아와 양육, 교육문제를 책임지고 있다는 예를 장 학생은 자신의 예방주사 일화로 들었다. 한번은 예방주사 맞는게 싫어서 도망쳐 강의실로 들어가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의사가 강의실 앞에서 계속 기다려 할 수 없이 걸어나와 주사를 맞았단다. 주치의제도와 예방의학의 북한 의료시스템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장 학생이 정말이라고 강조하지 않았어도 나는 이 사실을 믿고 있다. 의무교육에다 학용품까지 국가가 책임지고 있는 북한과 그렇지 않은 남한. 어디가 옳다 그르다를 떠나 남과 북은 정녕 다른 작동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임이 분명했다.
 
“혹시 탈북자들을 아세요?”
“저는 그들을 증오합니다. 조국을 배신한자들 아닙니까?” 단호함 그 자체다.
“북에도 이혼하는 사례가 있나요. 뭐 살다가 뜻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예요. 일심 단결에 저해가 되잖아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라면 일심단결을 해치지 않기 위해 혹 싫어도 같이 사는 부부도 있겠구나는 심술궂은 생각도 해보았다. 개인보다는 집단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대목이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봉원익 조직비서가 힘찬 목소리로 “조국통일은 청년학생의 어깨 위에 있다. 청년학생이 선봉장이 되자”는 요지의 연설을 어찌나 힘차게 하던지 장 학생과 나는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점심식사 시간이다. 장 학생과는 잠깐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한다. 점심식사 테이블이 따로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81번 테이블은 정갈히 차려진 음식들로 가득차 있다. 평양술, 룡성배사이다, 룡성맥주, 사과, 조개구이, 김치, 나물 네 가지, 동그랗고 하얀 쉬움떡, 닭구이, 청포냉채, 생선즙 튀기, 해금강 어물합성 섭죽, 그리고 남쪽의 뷔페 식사후 아이들이 즐기는 아이스크림인 에스키모 등 진수성찬이 차려있었다. 

잠시후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입장하였다. 호텔안이 비좁아 우리는 천막을 친 야외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학생위원장인 양순철씨는 33세라는데 결혼을 했다고 했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다 노총각들이었다. 대부분 서른 살이 넘는 만학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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