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평화3000’은 주요 대북 협력사업 중의 하나인 장충성당에 있는 콩우유공장을 현장방문했으며, 아울러 평양시내-백두산-묘향산을 참관하였다.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과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느낀 방북기를 일기식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김 기자는 이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평양일기를 작성한 적이 있기에 이번 방북기 제목은 구별을 위해 ‘김양희 기자의 다시 쓰는 평양일기’로 한다. / 편집자 주

“김 기자 오바 하지 마시오”

▲ 평양순안공항에서 남측 방북단이 발권을 하며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평양순안공항으로 가는 길,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박용호 안내원과 즉석사진을 찍어 나눠가졌다. 북녘 안내원들은 매번 사진을 찍으면 모델은 되어주지만 함께 찍은 사진을 받을 수 없기에 이미 즉석사진기를 가져간 터였다. 무엇보다 며칠간이지만 함께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의 대부분이 감기 몸살과 전날 마신 술로 인한 숙취로 버스에서 잠을 자 우리의 사진은 김철웅 부회장이 찍어줄 수밖에 없었다.

김철웅 부회장은 우리를 찍어 준 후 “평양에 온 기념으로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기겠다”며 즉석사진기를 들고 버스를 누비며 일행의 자는 모습을 일일이 찍고 있었다.

자는 모습들만 모아도 꽤 재미있는 작품이 됐다.
그는 “김 기자 나중에 이거 사진 값 비싸게 받으라구, 받아서 뒷풀이 해야지” 한다.

그리고는 순안공항, 3박4일의 일정이 어느새 훌쩍 지나고 우린 벌써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다. 일정 내내 잘해준 박용호 안내원과 사진도 찍고 인사를 나누는데 자꾸 눈물이 나려해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언제 또 올까요?”
“자주 오라, 담에 올 땐 꼭 내가 마중하지.”
“에이 자주면, 다음 달에 또 와요?”
“그래라 다음 달에 또 오라.”

분명 다음 달에 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 또 그렇게 약속을 하고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김철웅 부회장은 남녘으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자 그는 “김 기자 오바 하지 마시오” 한다.

엥? 왠 오바? 내가 그리 허풍스럽고 부산스러웠나? 하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그는 한 번 더 “오보하지 말라구” 말한다.
“아... 오보...”

비행기에 오르니 남녘의 승무원들이 반갑게 맞는다. 나는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일보를 하나 꺼내들었다. 조선일보는 이명박 대통령이 러시아 순방을 마치고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2015년부터 30년 동안 국내에 도입해 국내 가스 수요를 해결한다는 것, 한반도 종단열차(TKR)와 시베리아 횡단 열차(TSR)를 연결한다는 것, 연해주의 광활한 농림지를 인접국과 협력하여 대규모의 식량 공급 기지로 개발한다는 것 등 선물보따리를 가지고 돌아온다는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북녘과 교감이 있어야 하는 일들인데 북녘과는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러시아와 아무리 협약을 맺었더라도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꿈같은 시간은 흘러 벌써 서울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예전 친구와 통닭을 시켜먹는데 어찌나 허겁지겁 먹었던지, 한 마리를 다 먹었는데 맛을 모르겠다고 하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분명 배는 부른데 허전한 마음은 달랠 수 없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분명 평양에서 4일을 보냈는데도 또 그리운 이들을 언제 또 볼지 모르니 여전히 평양은 그리운 곳이다. 허전한 마음은 언제쯤이나 채워질 수 있을까?

▲ 김포공항 도착 직후,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참가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평양, 그 뒷이야기>

☐ 주체독감에 걸리다

이번 일정은 평양에서 삼지연으로, 삼지연에서 백두산으로 또 백두산에서 평양,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이동하는 등 워낙에 빡빡하다보니 무리가 됐고 또 백두산에서 일교차가 워낙 커 많은 참가자들이 감기몸살을 앓았다.

특히 마지막 밤에 평양을 그리며 마신 술 때문인지 일정의 마지막 날에는 보현사를 가지 않고 차에 남아있겠다고 하는 사람이 몇 될 정도로 일행의 감기몸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덕분에 함께 차에 탄 친선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선생들은 분주했다. 워낙에 독하고 매서웠던 감기를 사람들은 ‘주체독감’이라고 불렀다.

건강 체질이라 자부하던 나 역시 ‘주체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정 중에는 끄떡없다며 반팔을 입고 다녔지만 서울에 돌아와 치 쌓여 있는 일들을 매일같이 야근하며 해냈더니 결국 감기몸살에 걸린 것이다. 온몸이 으실거리며 근육이 아파 쑤셨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주체독감에 걸렸구나, 온몸으로 평양의 여운을 느끼면서 충분히 앓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서 나는 지쳐갔고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편도선이 단단히 부어 약국에서도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할 정도니 감기 치고는 심각했다. 북녘에서 걸린 감기라 우스갯소리로 주체독감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무리 어려워도 끈질기게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있는 북녘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병원에 가보니 편도선이 곪았다며 주사와 약을 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루 만에 증세가 호전됐다. 무심결에 ‘주체독감도 자본주의의 주사 한방에 바로 떨어지는 구나’라고 생각해서 일까?

주체독감은 결코 자본주의의 주사 한방으로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하루 반짝 증세가 호전되는가 싶더니 또 다시 열이 오르고 온몸이 아팠다.

무심결에 한 생각을 반성이라도 하듯, 나는 주체독감 바이러스를 내 몸에 고이 간직한 채 충분히 앓기로 했다. 언제 나을까 조바심도 치지 않고 한 달여를 그렇게 가슴에 안고 살았더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다 나아버렸다.

그리고 지금, 한겨울이 시작되면서 주변에 감기 때문에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충분히 감기를 앓아서인지 나는 끄떡없다. 아무래도 주체독감 바이러스가 내 몸에서 면역력을 키워줬을 것이다.

통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자존심 강한 북녘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하나가 되고 누구보다도 막강해 지는 것이 아닐까? 너무 유치할지 모르지만 주체독감을 앓으면서 얻은 교훈이다.

☐ 이젠 익숙해진 북녘

민족음식이야기 기고를 시작하면서부터 북녘의 음식을 직접 먹어보고 느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된 방북취재.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번씩 가다보니 어느새 부끄럽게도 4번이나 평양을 방문하게 됐다. 4번씩이나 방북을 했다고 하면 모르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하겠지만 그만큼 내가 북녘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다.

이런 나도 평양을 4번이나 방문하다보니 어느 순간 나도 이젠 북녘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북녘은 한민족이고 동포이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말을 쓰고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30년이 넘도록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서 가끔씩 어색함에 놀라곤 했다.

2005년 처음 평양에 도착해서는 사실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긴장을 했다. 긴장을 하다 보니 실수도 자꾸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말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시 일행과 같이 껌을 나눠 씹는데 나는 아무리 손을 내밀고 기다려도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내 손에 주어진 껌은 반에 반토막, 나는 무심결에 “아니 고작 이 껌 받자고 어린애 배급 받듯 한참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내 바로 앞에 앉은 북녘 안내원의 눈치를 살피고 나 역시 순간 철렁~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일행은 어찌나 나의 입막음을 하던지, 나 스스로도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자체 검열을 하고 아주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 여러 차례 방문을 하다 보니 말을 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실수하는 일도 적어졌다.

이런 일상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번에 평양 방문 후 내 스스로 ‘아 이젠 북녘에 익숙해졌구나’하고 깜짝 놀란 순간이 두 차례 있으니 바로 순안공항과 화장실에서였다.

처음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해서 정말 크게 놀란 것은 순안공항이 생각보다 작아서였다.

분명 나도 기자라 ‘모든 기사들이 믿을 만 한 것은 아니고 기자들이 필요한 부분을 부각하기 때문에 사건의 본질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남북 정상간 만남의 장소로 대대적인 언론 보도를 해서 인지 순안공항이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2층 건물이 생각보다 작아 크게 놀랐던 것이다. 이전에도 여전히 평양순안공항은 작게 느껴졌으나 이번엔 더 이상 공항이 작아 보이지 않는다.

이제야 머릿속에 있던 선입견이 사라지면서 평양순안공항이 제 크기로 보이는 것이다. 느끼지는 못했지만 평양순안공항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서 조금씩 커졌을 것이다.

북녘의 화장실에서는 머릿속으로는 이해를 하지만 가슴으로 이해를 하지 못했던 일이 있다.

▲ 백두산 천지 화장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화장실로 이곳 역시 문 잠그는 고리가 없다.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이제는 관광객들이 많아져서 인지 바뀌고 있는 추세이지만 북녘 화장실에는 잠그는 고리가 없다.

북녘 안내원은 “아니 밖에서 노크를 하고 들어가는데 뭐 하러 문고리가 필요합니까? 남녘에는 노크도 안하고 문부터 엽니까?”하며 “나 평생 동안 문고리 없이도 누가 먼저 연 적도 없고 하나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했다.

‘그래 맞아, 어차피 노크를 하는데 문을 잠그지 않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는 말이 틀리지 않아’라고 머릿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도 문을 잠그지 않는 것이 영 어색해 처음엔 엉거주춤하게 앉은 채 손잡이를 꼭 붙들고 볼일을 봤다. 세 번째 방문에도 어색함은 남아있었으나 이번에 아무렇지 않게 화장실에서 익숙하게 볼일을 보면서 ‘어머 이제 아무렇지 않네’하고 깜짝 놀란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로 이젠 아무렇지 않아졌다고 놀라는 일도 없어질 테고 이제 북녘에 가는 일이 지방 출장을 가는 것처럼 전혀 특별한 일이 되지 않겠지 생각한다. 이제까지 간 것만큼 또 가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

늘 평양 취재를 갈 때마다 주변 이들의 도움을 얻어 기사를 쓰곤 했다. 그 당시에는 다 아는 것 같아 물어볼 생각도 않지만 돌아와서 보면 어찌나 물어봐야 할 것이 많고 찍지 않은 사진은 왜 이리 또 많은 것인지...

이번 평양취재에는 구로시민센터의 김성국 대표가 일일이 동영상을 찍어줘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줬다. 취재기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김 대표가 조금 늦기라도 하면 “어서 서두르라”고 끊임없이 재촉하곤 한 것이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는 북녘 안내원이 “김 기자가 더 직책이 높은가?” 물었고, “제가 한꺼번에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자 “수고료를 따로 받아야겠구만”이라고 했을 정도다.

김 대표 외에도 북녘의 박용호 안내원이 따뜻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터에 어렵지 않게 취재를 할 수 있었다. 곤란한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불편해 하지 않았고 늘 편안히 대해주던 터라 가족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다만 박용호 안내원의 나이가 나보다 5살은 넘고 10살이 채 되지 않게 차이가 나 오빠나 삼촌 등의 호칭이 어색해 가족을 삼자고 말을 하진 않았다.

결혼 10년차인 박 안내원은 3살짜리 딸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다음번에 또 만나면 꼭 아이에게 내가 좋아하는 인형 선물을 해주고 싶다.

고마움과 더불어 미안함도 전하고 싶다.

이번에 평양에 방문한 시기가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로 달수로 보면 꼬박 2달에 걸쳐 기사를 마감한 셈이다. 인터넷 매체의 특성이 실시간 기사가 실릴 수 있다는 것인데 그저 세월아 네월아 한 것이다.

처음엔 늦어도 일주일에 3회 이상 올려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나마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는 핑계에 한 번 감을 놓치다보니 일주일에 한편씩 쓰는 것도 겨우겨우, 결국 억지로 마감을 했고 이런 나의 마음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노출됐을 것 같아 너무 부끄러웠다. 무조건 기사를 쓰는 게 다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을 다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 진심으로 죄송할 따름이다.

너무도 부실한 일기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는 진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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