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이 연재 글은 치과의사인 이병태 원장이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참관했다가 쓴 방북기이다. 이 방북기는 평양-백두산-묘향산-청천강의 순서로 7회에 걸쳐 연재될 것이다. 현재 이병태 원장은 치과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울러 치의학 관련 남북교류사업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 편집자 주

청천강 (1)

▲ 평양에서 묘향산 가는 길, 들녘은 황금벌판을 이루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원구 통신원]

2008년 9월 30일(화) 아침 7시 15분 양각도 호텔을 출발해서 15분간 평양 시내를 빠져나왔다. 이른 아침인데 시민들 출근 모습이 분주하다. 정류장마다 차를 기다리는 줄이 질서정연하게 길다. 공중전화 앞에는 서너 사람이 기다리는 모습도 보였다.

순안공항과 신의주, 묘향산 갈림길에서 우리 차는 오른쪽으로 달렸다.

신의주 198km. 이정표가 보인다.

5년 전 개성에서 평양을 방문할 때(<방북기 1> “교제도 조절했지 뭐”-평양 개성 3박4일 육로관광을 갔다와서, 2003.10.15)는 굴(터널) 이름을 적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숫자가 다 맞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다리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계절은 이념과 정치와 무관했던지 들녘은 황금벌판을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수로가 이어졌고 어디나 그렇지만, 고속도로변만이어서는 아니겠지만 경지정리가 잘 돼 있었다. 벼가 남측보다는 작고, 연변보다는 큰 벼가 참으로 잘 자라 주었다.

“안내 선생, 풍작이요. 아주 보기 좋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렇지요. 기후변화가 말입네다. 알 수가 없지요. 태풍이라거나 비바람만 쎄게 치지 않는다면 아주 좋지요. 여기는 청천강이 물을 보장해 줍니다.”

태풍과 풍수해로 고생한 경험담이다. 남과 북, 우리는 천재지변을 모면할 수 없음을 동감했다. 내가 탄 4호 버스는 황금벌판을 달리고 있다. 바로 안주평야인 것이다.

향산 76km. 이정표가 지났다.
향산은 읍이며 묘향산 아래 마을이다. 설악산과 속초(물치+설악동) 비슷한 관계이다.

“기사 선생, 저기 큰 동네인데, 저기가 어딥니까.”
“안주시입네다.”
“신안주 이정표도 있는데?”
“안주가 쎄게 큽니다. 화학비료공장, 종이공장이 있지요.”

황금들판을 끼고 있는 도시였다. 한참 달려도 오른쪽 들판 저 멀리는 안주시였다.

향산 61km 지점의 기송다리와 향산 60km의 용흥다리 1, 2, 3을 지나면서 눈이 이상해졌다. 향산 53km를 지나 용강다리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개천은 아니고 강 같은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 선생, 저게 강이요? 개천이요?”
“청천강입네다.”
“와, 청천강이라.”
“긴데 물이 다 썰었습네다. 뻘이 보이잖습니까?”

기사가 일러주었다. 나는 기사 옆 보조자리에 앉아서 물었다. 사진도 못 찍고, 설명도 안 해주고, 짐짝처럼 앉아서 가면서 게다가 졸기만하면 그게 무슨 여행인가.

나는 수첩에다 적어댔다. 대학시절 등반대의 운행을 맡으면 출발, 도착, 통과지점, 특이 지형지물을 적어야 했고 식사당번이 되면 쌀, 된장, 통조림, 가솔린, 식기 등을 챙겨야 했던 지난날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눈 감으면 몰라도, 눈과 귀가 도와주고 손으로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기록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평양-묘향산 간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다. 북으로 올라 갈수록 청천강 모습은 달라졌다. 자연 그대로의 청천강이 아름다웠다.

청천강 (2)

▲ 청천강.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고 해서 이름조차 청천강(淸川江)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원구 통신원]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고 해서 이름조차 청천강(淸川江)이다. 우리가 달려가 본 묘향산맥과 적유령(狄踰嶺)산맥 사이로 나와 녕변(寧邊) 남쪽에 다다르면 운산군(雲山郡)에서 시작한 구룡강(九龍江)과 합쳐, 박천(博川)과 안주(安州)의 충적평야를 통해 서해로 간다.

이 청천강이 고구려 때 살수(薩水)라는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감회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고난과 희생을 다해 오신 선조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음에 눈이 붉어진다.

누가 모르겠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양제가 이끄는 백만 대군을 대파하고 승전한 곳이구나.’ 나이 70이 가까워 10대에 배운 고구려 역사의 현장을 지나는 것이다.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의 청색 저고리 옷고름처럼 여겼다가 곧 을지문덕 장군이 떠오르자 조국산천에서 어찌 배움을 늦추랴 하는 깨우침을 받았다.

버스는 시속 70-80km를 유지하면서 청천강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계속 달린다.
정말 깨끗하다.
참으로 멋지다.
왜냐구? 자연 그대로니까.

청천강 (3)

▲ 청천강변 고가 고속도로. 차량은 드문드문, 강에는 고기잡는 사람이 보인다. [사진-이병태]

청천강변을 달리는 풍광은 좋기도 했지만 짧고 긴 다리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긴 다리인 천리길 다리와 철벽 1, 2 다리이다. 이 다리는 한강의 청평, 가평, 양평에 건설된 강변고가고속도로처럼 교각을 강물이나 강바닥에 박아서 건설한 긴 고가도로와 같다.

대표적인 것으로 천리길 다리와 철벽1, 2 다리는 당창건 기념일인 1994년 10월 10일에 완공되었단다.

철벽2 다리를 건너자 청천강 상류는 차창 왼쪽으로 바뀌었다. 고속도로는 철근 또는 시멘트로 된 중앙분리대 대신 약 2미터 높이로 전정한 측백나무 담장으로 강은 보이질 않았다. ‘내려올 때 보자’ 하고 잠시 상념에 잠겼다.

향산읍을 통과하고 있다. 채소가 잘 된 길가에 ‘읍남새밭’이란 팻말이 있다. 읍 인민들이 공동으로 재배하는 밭인가 보다. 김장배추가 싱그럽게 잘 자라고 있었다. 대관령 부근의 고랭지 배추처럼 큰 통배추는 아니었으나 ‘맛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아침 9시 23분.

첩첩산중으로 버스는 접어들었다. 묘향산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맑기만 했다.

청천강 (4)

▲ '평화3000 평양 백두산 방문단'이 평양순안공항에서 도착 기념촬영를 하고 있다. 평양을 떠나는 날 필자는 북측 운전기사와 평양순안공항에서 악수 한 번, 작별인사를 못하고 떠나와 마음이 찡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기사 선생, 서울서는 입체교차로라 하고, 고속도로에서 나가고 들어오는 길을 나들목이라고 하는데 북측에서는 뭐라고 하오.”
“뭐, 립체 맞지요. 나들길입네다.”

진출입로라고 어렵게 하느니 ‘(나)가고 (들)어오는 길’은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러운 남북공영어가 됐다. 통일은 이렇게 돼야 하지 않을까.

“기사선생, 이름이 뭐요.”
“한상천입네다.”
“청주 한씨 입니까?”
“아닌데요.”

본관을 댔는데 내가 잊었다. 청주 한씨 한 곳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나는 멍청해졌다.

“부인, 사랑해요?”
“아니, 왜 이러십네까. 하하.”

기사는 쑥스럽게 웃었고 주변은 흥미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가 모두 웃었다. 차는 계속 묘향산을 향해 달린다.

“아이는 딸이요. 아들이요.”
“아들 둘 입네다.”
“나는 아들 셋인데 내 나이 67인데 몇이시요.”
“서른 아홉 입네다. 야아. 우습다. 왜 자꾸 묻습네까.”

나는 비상으로 가지고 다니는 사탕을 까서 내 입에 하나 넣고 한 기사한테도 주었다. 참으로 운전을 잘 했다.

“운전 몇 년 하셨소.”
“20년 했습네다.”

“나는 이런 버스, 대형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1973년에 자가용 그러니까 승용차 면허를 땄어요. 운전 이거 몸 상태가 좋을 때 하면 기분 아주 좋거든.”
“그 기분 아십네까.”
“알구 말구. 그런데 왜 머리는 그렇게 짧게 깎았수.”

그는 스포츠형 두발을 하고 있었다.

“아, 길지 마시요. 우습다. 그만 물으시요.”
평양순안공항에서 악수 한 번, 작별인사를 못하고 떠나와 마음이 찡하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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