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전  'KAL기사건 21주기 추모행사'에서 한 희생자의 어머니가 위패를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어느덧 2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헌화를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유가족들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115명의 실종자 이름이 빽빽이 적힌 현수막 앞에 서자 눈물은 오열로 변해버렸다.

29일 오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KAL기사건 21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행사장에는 100여명의 가족들이 자리를 메웠다.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는 머리가 희끗하게 변해 있었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대신해 손녀가 유가족 대표로 참석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소년도 어엿한 가장이 되어 아들을 데리고 추모제를 지켜봤다.

유가족들은 대를 이어서라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겠다는 심정이다. 차옥정 KAL858가족회 회장은 이날 추모회 가족대표 인사말에서 "가족들이 힘을 합쳐 진상규명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 가족대표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차옥정 KAL858가족회 회장.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그러나 수년간 시민단체와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종자의 시신조차 찾지 못한 형편이다. 1987년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가족들을 태운 여객기가 흔적 없이 사라진 이 사건에 대해 아직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대선에 적극 활용하라는 안기부의 '무지개공작' 계획도 밝혀졌지만, '국정원과거사진상위원회'는 사건 당사자인 김현희에 대한 면담조차 못한 채 '북한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라는 기존의 결론만 되풀이했다. 최근 KAL858기 사건을 계기로 지정된 북한의 테러지원국 멍에도 벗겨졌지만, 정작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은 여전히 모호하다.

차 회장은 "가족회가 요구하는 남북 공동조사, 추락지역 수색 등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을 21년간 왜 안하고 있는지 답답하다"고 분통해했다. 권오헌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상임공동대표도 "승무원들과 탑승객들이 몇 시 어느 지점에서 사망했다는 증거도 없이 사실상 21주기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희가 범인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나"

이렇듯 KAL858기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은 지지부진한 가운데, 이 사건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특별사면된 김현희가 오히려 억울하다는 편지를 공개해 피해자 가족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내용인 즉, 노무현 정권이 국가정보원과 방송사를 동원해 북한에 의한 KAL858기 테러를 뒤집기 위해 강압을 가해 자신만 억울하게 '피난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21년이 지났지만 가족들은 시신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이에 대해 이날 추모식 사회를 본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오히려 가족위와 대책위를 친북좌파로 몰아가고 있다"며 "실제 김현희 자신이 115명을 희생시킨 장본인이라면 자신의 불편함을 하소연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가족 손성기(37)씨도 "그 사람이 사면을 받으면서 평생 유가족을 위해 살겠다고 말한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면서 "이런 편지를 공개한 것은 유가족을 두 번 죽이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 아버지 송명준씨를 갑자기 잃었던 손 씨는 이날 세 살배기 아들과 함께 추모제에 참석해, 자신의 아들이 더 자라기 전에 이 사건이 빨리 진상규명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김현희가 자신의 의도만으로 이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KAL858기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 『배후』의 작가 서현우(본명 서현필) KAL858기사건시민대책위 조사팀장은 "87년 당시 자필진술서도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이미 작성된 것을) 베껴 쓴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면서 이번 편지도 "김현희를 조정하는 배후 세력에 의한 것으로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중단시키려는 역공세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전국의 교회나 단체에서 반공강연 활동을 하다가 1997년 12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돌연 비밀 결혼과 함께 잠적했던 김현희가, 올해 보수세력이 집권하고 과거사 정리작업을 중단시키려는 최근의 상황과 맞물려 나타난 것 자체가 의혹이라는 지적이다. 

유가족들이  KAL858기 사건 희생자들의 영전에 헌화를 하고 있다. 
김현희의 이번 편지가 피해자 가족들에게 또 한번 상처를 줬다. 다만 이번을 계기로 다소 주춤했던 KAL858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유가족들에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차옥정 회장은 "우리 유가족들은 눈 하나 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재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지난해 7월부터 이 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 결정을 내리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도 김현희에 대한 동행명령장을 발부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맞고 있는 김병상 신부는 이날 추도사에서 "세상 어떤 의혹도 끝까지 숨겨지는 일은 없다"고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했다.

의혹을 밝히려는 가족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대책위는 지난 5년간 법정싸움 끝에 공개받은 안기부 수사기록및 재판기록과 국정원 발전위의 조사결과 발표문을 검토, 분석해 A4 250쪽 분량의 자료집을 마련했고, 머지않아 언론에 발표할 예정이다.

북미관계의 진전으로 지난 10월 11일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됐음에도 불구하고 KAL858기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안개에 쌓인채 희생자 가족들은 김현희의 불만섞인 '편지' 소식에 씁쓸한 21주기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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