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다시 시작하며

민경우 전문기자의 <소통과 논쟁 II>를 다시 연재한다. 지난 <소통과 논쟁>(2008.1.17- 6.27)에 이어 이번 연재에서도 민 기자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의 진로와 관련한 민감한 문제들을 논쟁적인 방식으로 제기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 편집자 주

진보연대가 12월 사업과 관련, 국회 일정과 맞물려 국회 앞 농성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가령 ‘이명박 out’, ‘종부세 및 강부자 내각 퇴진’, ‘대북 적대정책 철회’ 등의 요구를 걸고 주로 전국의 활동가들이 국회 앞에서 거리 농성을 진행하고 이를 통해 전체 운동의 돌파구를 열겠다는 것이다.

필자는 위의 계획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논쟁을 위해 이 글을 쓴다.

1. 이데올로기 투쟁을 중시해야 한다

9월 중순 미국의 금융위기가 심각해지고 10월 한국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신자유주의,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오바마 당선 이후 시간이 갈수록 진보진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러한 정세를 반영하여 9~10월 군계일학처럼 떠오른 필자들이 있었다. 미네르바, 김광수경제연구소, 새사연의 김병권 센터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 주류든 비주류 제도권이 아니라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필자들이라는 점, 둘째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쳤다는 점, 셋째 현실과 밀착된 실천적 이론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점 등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주류의 약점은 실물에 강하되 현실을 변호하려는 속성으로 인해 역사적 전환기에는 무력하기 마련이고 저명한 비주류 경제학자들은 공허한 거대 담론을 읊조리며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들은 구체적인 현실 분석에 입각하여 상황을 분석 평가함으로써 9~10월 역사적 격동기에 이데올로기 전선을 주도하였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이고 어떤 형태로든 커다란 변화가 불가피한 조건에서 지금 시기 가장 중요한 작업은 이데올로기 전선을 강화하는 것이다. 위 농성 투쟁 계획은 거리 행동전 중심의 고답적인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9~10월은 30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질서가 동요하고 한국경제의 밑뿌리가 흔들리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 역사의 현장에서 이름깨나 하는 좌파 강단 학자들은 무기력했고 운동 진영의 다수를 차지하는 자민통(자주 민주 통일) 진영은 무능했다.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여 이에 대한 명료한 방향을 제시하기는커녕 서브프라임모기지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서도 힘에 부쳤다.

그런 와중에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무명의 필자들이 선풍을 일으켰다. 돌이켜 보면 진보진영은 상반기 촛불시위에서 대중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는데 급급했고 9~10월 역사의 격동기에서는 주변인에 불과했다. 운동의 선도성을 말하기 전에 왜 진보진영에서 ‘미네르바’가 나오지 않았는가에 대해 심각히 자문해 보아야 한다.

2. 대중의 정서를 고려한 철저한 대중노선을 견지해야 한다

대중의 정서와 관심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를 살피고 그에 입각해 구호, 투쟁방식 등을 결정해야 한다. 반면 위 계획은 대중의 정서와 관심보다는 활동가들의 일정과 계획에 입각해 사업을 입안하고 있다.

현재 대중의 정서는, 첫째 경기불황에 대한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지만 행동화하지는 않고 있고, 둘째 자영업 하층, 중소기업 노동자, 노인ㆍ장애인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포괄적인 주제를 내건 활동가 중심의 거리 행동전은 대중의 공감을 받기 어렵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민생파탄 따위와 같은 포괄적인 주제가 아니라 등록금 인하와 같은 대중적 공감대가 높은 구체적인 사안을 가지고 투쟁해야 하며, 둘째 활동가 중심이 아니라 철저한 대중노선을 견지하고, 셋째 파산ㆍ사채ㆍ구빈 활동과 같은 직접적인 피해에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취약층에 대한 대면ㆍ대인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명박 out’과 같은 근본적인 주제를 걸고 역동적인 대중투쟁이 창출되는 국면이라기보다는 큰 규모의 대중투쟁을 준비하고 대중과의 접촉면을 강화해야 할 때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활동가 중심의 장기 농성을 진행(이는 필연적으로 국회라는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될 것이다)하기보다는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범국민 전선을 구축하거나, 파산ㆍ사채 피해에 대비한 상담가를 양성하거나, 다종다양한 의식화사업을 끈기 있게 진행하는 것이 옳다.

3. 중장기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현재의 경기불황은 대단히 오래갈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경기불황 초입에는 집권층에 대한 기대심리가 유지되고 사회적 의식도 파편화되는 경향이 있다.

2009년 정세는 경제상황에 따라 역동적인 정세가 있을 수도 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거부감이 꾸준히 누적되면서도 거리 진출에 이르지는 못하는 상황에 머무를 수도 있다. 따라서 2009년 상반기를 예민하게 주시하고 진보진영의 역할을 높이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역량을 비축하고 준비해야할 때이지 국회 앞에서 농성에 돌입하는 것은 무리한 전술이다.

전체적으로 대중의 역동적인 진출은 대중의 생활고와 함께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권력교체기가 맞물리는 2010~12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에 대한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구상 하에 그림을 짜는 것이 옳다. 그런 면에서 위 계획은 너무 조급하다.

4. 아타(我他)간의 역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현재는 경제위기ㆍ지지율 답보에 직면한 이명박 정부가 보수적인 기조와 강압적인 통치를 통해 전통적인 지지세를 복원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전술적인 후퇴기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대다수의 국민 대중에 반하는 정책을 구사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대단히 난폭한 탄압을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 중심의 거리 행동전은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현 상황은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는 유리하되 임금인상ㆍ구조조정과 같은 구체적인 경제현안에 대해서는 불리하고 사이버 공간은 유리하되 거리 행동전은 불리한 국면이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이버 공간을 활용한 이데올로기 전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유리한 공간과 전선을 두고 불리한 곳에 역량을 집중시키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5. 사람을 아껴야 한다

1980~90년대에는 학생운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에 각종 행사와 운동에서 온갖 허드렛일과 선봉적인 역할을 학생들이 담당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학생운동이 약화되고 운동이 고령화되면서 30대 중반의 활동가들의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반면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정보와 논쟁이 중시되면서 헌신적인 활동력과 함께 유능한 정치력이 중요한 시점이 되었다.

위 사업계획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또다시 12월 전체의 일정을 비워두고 국회 앞에서 만만치 않은 투쟁에 참가해야 함을 뜻한다. 돌이켜 보면 이런 류의 활동이 지난 10여년 이상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학생운동은 약화되고 진보진영의 대(對)사회적인 영향력은 약화되면서 기존 운동진영과 후배들 사이의 연관고리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제는 30대 중반의 활동가들이 앰프를 나르고 깃발을 들어야 하는 위험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사람을 키우고 이들을 요직에 배치하기보다는 이미 준비된 활동가를 중심으로 행사ㆍ투쟁 중심의 활동을 끊임없이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은 1년에 몇 번의 기자회견, 각종 행사와 대회에 참가하는가?) 배치했기 때문이다.

집행부는 정세가 엄혹하다는 이유로, 중간 활동가들은 집행부가 결정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남기고 사람을 양성하는 기조가 아니라 사람을 소진하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사업이 남발되었다. 지금이라도 이를 악물고 사업의 방향과 기조를 철저히 활동가를 소중히 여기고 이들의 능력을 키워 주는 방향으로 대전환해야 한다.

글을 맺으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12월 초부터 진행하려는 국회 앞 농성 투쟁에 동의하는가? 필자는 상당수 독자들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운동에 가장 결정적인 결함은 적극적인 논쟁과 토론이 부재하여 조직적ㆍ사상적 활력이 떨어지고 있는 점이다. 옳든 그르든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고 대중적으로 논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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