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많은 약속을 하고 사람을 만난다. 주말이면 친구들이나 연인을 만나기 위해 백화점 앞이나 이름난 장소에 목을 길게 빼고 서성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시간약속을 하지만 별로 잘 지키지 않는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늦는 것이 마치 `에티켓`처럼 되어 있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한 변명도 여러 가지이다. 교통혼잡을 이유로 드는 경우가 가장 많고, 그 다음은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이다. 요즘은 핸드폰 때문에 막연하게 기다리는 경우는 없어졌지만, 아예 핸드폰까지 꺼버리는 사람도 있다. 왜? 미안하니까.

어떤 외국사람은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우리 사람들을 비꼬는 말투로 `코리안 타임`이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한국인이 비교적 시간약속을 잘 지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의 시간약속은 지금보다 훨씬 널널했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은 붙박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약속도 이런 식이다. `저녁 먹고... `, `추수가 끝나거든...`, `따뜻한 바람이 불면 만나세` 따위이다. 상당히 애매하고 감성적인 시간약속이다.

나는 이런 선조들의 여유 있는 약속개념을 좋아한다. 사실 별로 시간약속을 할 일도 없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다급하면 약속은 무의미하다. 어떤 방식이든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친구들과 술 약속이면 `술을 먹다보면 오겠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만나는 장소도 술집이나 서점, 만화방, 오락실, PC방, 화실 따위로 정하면 지루하지 않다.

약속은 여러 종류가 있다. 연인들의 사랑 약속이 있고, 술 약속도 있다. 동창모임 약속도 있고, 회의나 세미나 약속이 있다. 하지만 국회의원이 국민들에게 하는 약속이 있고, 대통령이 민족과 국민 앞에 하는 약속도 있다. 심지어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하는 약속이 있고, 자신에게 하는 약속도 있다. 사람들은 감성적이고 직접적인 약속을 어기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지만 좀 큰 개념의 약속에는 무감각하다. 으레 어길 줄 알면서 약속을 믿는 경우도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적인 약속뿐만 아니라 자신과 사회, 혹은 더 큰 가치를 위해 맺는 약속이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의리와 신념이다.


아름다운 약속

▶약속
김명수/조선화/160*114/1983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북한화가 김명수가 그린 <약속>이란 조선화이다. 작품 크기가 160cm 정도로 크다. 눈발이 날리고, 기차와 이별이 있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철도기지 건설을 위해 일군의 젊은이들이 지원하러 떠나고 있다. 이런 행동을 격려하기 위해 악단이 동원되고 아리따운 처녀가 선물을 주고 있다. 작품의 분위기로 봐서는 등장인물은 대학생이 아닌가 싶다.

<약속>이란 제목이 붙은 걸로 봐서는 선물을 주는 여성과 선물을 받는 남성이 연인관계가 아닌가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추측은 작가의 치밀한 의도일 뿐이고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작품의 전체 분위기는 상당히 감성적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눈 내리는 기차와 마치 연인관계처럼 처리된 주인공의 분위기, 화려한 색감, 웃음 따위의 장치는 감상자로 하여금 긴장을 풀게 만든다.

하지만 이 작품은 80년대 북한의 `속도전`과 관련이 있고, 철도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청년들이 자원해 떠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우측에 있는 남성이 잡고 있는 `김혁 돌격대`란 붉은 깃발과 멀리 배경부분에 나타난 `80년대 속도`라는 구호가 이 작품을 떠받치고 있는 사상적 알맹이다.

상식적으로 공부를 해야할 청년들이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현실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현실을 웃음과 낙관으로 이겨내자는 메시지가 이 작품에 담겨있다. 마치 우리가 고통스런 한을 살풀이나 굿판으로 떨쳐내듯이 말이다.

사실 이런 내용이라면 <약속>이란 제목보다는 <철도건설을 위해 떠나는 김혁 돌격대 청년들>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데 김혁 돌격대 청년들과 환송하는 사람들은 무슨 약속을 한 것일까? 어떤 약속이기에 찐 계란이나 빵, 귤이 들어가야 할 선물보따리에 장갑과 딱딱하게 여겨지는 책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이들이 한 약속이 뭔지는 감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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