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6ㆍ15 남북정상회담 1주년의 의미도 되새길 겸 지난 주말 학생들과 함께 판문점으로 통일 기행을 다녀왔는데,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었다. 한 학생이 칼라 없는 셔츠와 반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판문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물론 `판문점 견학자 준수 사항`에는 "청바지, 짧은 바지, 치마, 쫄티, 소매ㆍ칼라 없는 옷, 샌달, 슬리퍼 불가"라는 항목이 분명히 적혀 있기 때문에, 이를 학생들에게 미리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나에게 잘못이 있었다.

`더 높은 사람`은 주한미군

아무래도 너무 안타까워 안내를 맡은 카츄샤 헌병에게 호소해 보았다. "당신도 아마 대학을 다니다 왔을텐데, 같은 젊은이들끼리 더구나 익산에서 4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왔는데, 그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지 않은가?"  자신은 졸병이라서 `높은 사람`의 지시를 따를 뿐이라는 대꾸가 돌아왔다.
 
잠시 후 판문점으로 향하는 버스에 마침 소령 계급장을 단 `높은 사람`이 버스에 오르기에 따지듯 물었다. "북한에서 남한 사람들이 입는 청바지를 보고 미국의 구호 물자라 하고, 소매 없는 옷차림에 대해서는 옷감이 모자라 그런 옷을 입느냐고 빈정거렸던 것은 오래된 옛날 이야기 아닌가. 지금이 어느 땐데 아직까지도 그런 이유로 방문객들의 복장을 단속하는가?"  그것은 미군들이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단다. 주한미군 사령부에 항의해보라고 덧붙이면서.
 
공동경비구역의 카츄사 사병이 말한 `높은 사람`은 한국군 장교였을지 몰라도, 그 보다 `더 높은 사람`은 바로 미군인 것이다. 하기야 70만 한국 대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진 사람은 한국의 합참의장도 아니고 국방장관도 아니며 대통령도 아니요, 3만 7천의 주한미군 사령관 아닌가.
 
한편, 두어해 전부터 미군들이 1950-60년대 노근리에서 양민을 학살한 일이나 휴전선 근처에서 고엽제를 뿌린 일 등이 밝혀지는 가운데, 매향리 사격장에 관한 문제나 한강에 독극물을 몰래 버린 일 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온 것 같다. 그러나 미군들이 이 땅에 왜 머무르는지를 차분하게 따져보는 글은 찾기 어려워 자칫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반미로 흐르기 쉬웠다.
 
마침 작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봇물처럼 쏟아지던 남북한 사이의 각종 회담이 지난 3월 미국의 개입으로 모두 중단된 채 김정일 총비서의 남한 방문 및 제 2차 정상회담까지 불투명하게 되고 말았는데, 이 기회에 주한미군이 이 땅에 왜 아직도 머무르고 있는지 알게 되면, 분단이나 통일문제에 대한 우리의 왜곡 편향된 인식을 고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주한미군을 생각할 때 북한의 남침에 따른 한반도의 위기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미국은 세계 지도를 그려놓고 군대를 해외에 전진 배치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맥락에서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국이 남한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럽-대서양 지역에 각각 약 10만의 병력을 왜 전진 배치시키는지, 미국 정부가 공식적 또는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미 정부의 주한미군에 대한 몇 가지 공식적인 배경과 이유
 
첫째, 소련의 붕괴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지속적으로 세계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국인 유럽의 러시아와 독일 그리고 동아시아의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고자 한다. 소련이 사라지고 소련이 이끌던 동유럽의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없어진 마당에, 미국이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를 해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NATO를 통해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는 한편,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독자적 안보 체제가 들어서는 것을 막겠다는 전략이다. 즉 미국이 NATO를 앞세워 유럽-대서양 지역에 10만 병력을 주둔시키는 데는 러시아를 견제하며 독일의 재무장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듯이,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10만 병력을 전진 배치시키는 데는 중국을 견제하며 일본의 재무장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둘째, 이른바 `윈-윈(동시 승리) 전략`에 따라, 세계에서 두 개의 전쟁이 같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미국은 두 지역에 신속하게 개입하여 동시에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서유럽과 동아시아에 전진 배치된 20만의 병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만의 이라크와 동아시아의 북한에 대해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더라도 승리를 거둘 수 있고, 이와 함께 유럽에서 러시아가 다시 군사적 팽창을 추구하더라도 이를 저지시킬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한다는 방침이다.
 
셋째, 주둔국들의 경비 분담 때문에 자국 안에서보다 해외에 더 적은 비용으로 병력을 유지할 수 있어 철수하기를 꺼린다. 특히 남한은 주한미군에 대해 해마다 대략 4억 달러를 지원하는데,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비용은 더 크다. 그 넓은 미군 부대 땅을 온통 공짜로 내주는 데다, 각종 세금은 물론 부두나 공항 등의 시설 사용료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매년 약 20억 달러의 비용까지 우리가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들은 공짜로 쓰는 땅에다 골프장이나 비행장을 짓고는 남한 사람들에게 비싼 사용료를 받고 있지 않은가.
 
넷째, 미군들이 주둔하는 국가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쉽게 행사할 수 있다. 이른바 내정 간섭을 쉽게 할 수 있다는 뜻인데, 여기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일반적으로 실패한다는 미국 지도자들의 말을 음미해보기 바란다. 그들은 군사력을 국력의 핵심으로 꼽으며, 군사력이야말로 외교의 유용한 배경이요 보완책이며 일시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병력을 해외에 전진 배치시킴으로써 미국 영토 안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줄이고자 한다. 지금까지 미국이 개입된 수많은 전쟁이 모두 미국 밖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아무리 세계 제일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미국 땅 안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미국인들의 생명에 치명적 손실을 가져오기 마련인데, 남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캐나다와 멕시코는 국토야 크지만 병력은 미국의 동네 군대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서유럽에 미군이 이끄는 NATO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건너 동아시아에 주일미군과 주한미군이 버티고 있으니, 육지를 통해서나 바다를 통해서나 다른 나라가 미국을 침략해 미국 땅에서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미국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춰야

위와 같은 배경에서 미국의 지도자들은 2020년 무렵까지 또는 한반도가 통일된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늦어도 2015년까지 미국의 이익에 군사적으로 도전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 아래,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주한미군은 우리에게 분명히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해방의 은인이기도 하고 분단의 원흉이기도 하다. 미군 부대 주위에서 수재나 긴급 사태나 일어나면 가장 먼저 구조의 손길을 보내주기도 하고, 기지촌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만행과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더욱 중요하게는 북한의 남침을 억제할 수도 있는 반면,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으로 한반도에서의 무력 충돌을 촉발할 수도 있다.
 
주한미군이 꼭 있어야 한다거나 또는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미국을 제대로 알고, 상황에 따라 친미를 하든 반미를 하든,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약력>

이 재 봉 (pbpm@chollian.net)
1955년 전남 고흥 출생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정치학사)
1990년 미국 텍사스텍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석사)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1996년부터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97년부터 경실련 통일협회 정책위원
1998년 남북 지역간 자매결연 추진을 위해 평양 방문
1999년부터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반미주의, 평화연구, 통일문제 (한미관계, 북미관계, 남북관계) 등에 관한 논문과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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