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동북아여성평화회의' 참가자들이 개성을 다녀왔다. 사진은 개성 통일거리 통일관 앞에서의 기념사진.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도라산 출입경사무소의 아침은 생각보다 분주했다. 사무소 정문 앞에서는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고, 환전소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현대아산 직원들도 쉴 새 없이 오고 갔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상황이지만 남북의 서쪽을 잇는 경의선 첫 관문은 개성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강원도 평창 시골 마을에서 온 노인부터 서울 노원구청 직원들까지 관광객도 다양했다.

한 쪽에서는 이색적으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가 뒤섞였다. '동북아여성평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여성단체 대표들이 '개성평화기행'을 나선 것. 여성 '6자회담'으로 준비됐던 행사에 북한이 참석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각국 참가자들이 직접 북한 지역을 방문하기로 했다. 러시아 대표는 개인적 신상의 이유로 이번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참가단은 외국인, 내국인 그리고 통역을 포함해서 40명.

'미국인으로서 군사분계선을 건너다'

▲ 참가자들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선혈이 남아 있는 선죽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개성의 하늘은 맑았다. 남쪽에서는 올해도 비 피해로 북쪽의 식량난이 심각하다고 떠들썩하지만 개성의 논밭은 초가을만큼 풍성해 보였다. 한 북측 안내원은 "올해 농사가 잘 되었다고 아직 확답할 수는 없지만 모두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북측의 식량난을 묻는 질문에 "세계적인 식량 위기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육로를 통해 개성 땅을 밟은 느낌은 '동북아여성평화회의' 참가자들의 구성만큼이나 다양했다. 어릴 때 이민 간 재미교포 2세 애나벨 박씨는 "북녘 땅을 처음 밟는다. 꿈꾸는 것만 같다"며 기자의 계속된 질문에 "계속 이것저것 물으니까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한인대책위원회 'HR-121연맹' 전국 코디네이터로 활동하면서, 지난해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케린 리 전미북한위원회 사무국장.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남북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직접 통과한 것도 이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이다. 케린 리 전미북한위원회 사무국장은 이 과정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심정을 전했다.

"한국 사람들이 원해서 분단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과 같은 강대국에 의해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 강대국들이 지금까지 해 온 것은 분단 상태 유지 밖에 없어요. 그 비극에 미국이 관여하고 있어요. 저는 오늘 미국인으로서 그 군사분계선을 건넜습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되는 모습이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묻어났다. 그는 "오늘 이 행사를 통해 평화구축을 위해 우리가 또 다른 행동을 다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며 "분단 상황에서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이들을 도우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피스보트 평화활동가로 평양을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재일교포 3세 조미수 씨에게도 이번 방북이 색다른 느낌이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일본 내 민족교육을 가르치는 '조선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 여성들과 함께 방북하는 것이 새롭다"면서도 "조선학교 다닐 때 나도 이런 분위기에 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감각이 떨어져 복잡한 생각도 든다"고 솔직한 감정을 전했다.

정홍 중국국제민간조직합작촉진회(CANGO) 홍보 코디네이터도 "그동안 북한을 와 보지 못했는데, 이번 방북은 신선하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남북, 4차선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다

▲ 숭양서원 앞 대로에서 남측 관광객들이 대로변 너머 인도를 지나는 개성 시민들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이날 개성관광객들은 박연폭포와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유적지인 선죽교, 숭양서원, 표충비, 그리고 고려 '성균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는 고려박물관을 둘러봤다. 며칠 전 폭우로 인해 진입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박연폭포 위쪽에 있는 대흥산성와 관음사는 둘러보지 못했다.

수려한 자연경치 못지않게 관광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다름 아닌 '개성 시내'다. 금강산 관광과 다르게 개성 관광은 시내 중심을 관통하기 때문에 개성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개성 시민들도 바쁜 일상 속에 행렬을 지어 달리는 버스를 향해 간간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무덤덤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을 지켜본 한 남측 관광객은 "관광버스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다 보니 매번 열렬한 환영을 보내는 것도 힘들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정몽주의 위패가 모셔진 숭양서원을 빠져나온 남측 관광객들이 대로변을 따라 늘어서서 차도 건너편 인도를 오가는 개성 시민들을 한 동안 바라봤다. 건너편 개성 시민들도 남측 관광객이 신기한 듯 이쪽을 응시했다.

4차선 도로 폭 정도의 거리를 앞두고 서로 손 한번 맞잡지 못하는 상황에 아쉬움이 깊이 베어 나왔다. 한 동안 걸음을 멈추고 건너편을 바라보던 이정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제사업단장은 "뺏지만 없으면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인데......"라고 말끝을 흐리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한 북측 안내원은 개성관광 초기만 해도 관광버스 15대에서 20대까지 매일 들어와 제한인원인 600명이 가득 찼지만, 요즘에는 8-10대 정도로 줄었다고 전했다. 이날 개성 관광에 동원된 버스도 10대.

북측 남성 안내원과 남측 여성의 어울림, "통일된 모습"

▲ 북측 안내원과 환담을 나누는 각국 여성 대표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관광버스 안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북측 남성 안내원 2-3명이 함께 버스에 오른다. 개성 시내 관광 안내도 이 남성 안내원들이 도맡는다.

동북아여성평화회의 참가자들이 탄 버스에 오른 북측 남성 안내원은 남측 여성들 앞에서 초면에 약간 머뭇거리는 듯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말문이 터지기 시작하자 북측 특유의 입담이 이어졌다.

개성이 낳은 조선의 명기 황진이의 연애담이 시작되자 '여성회의' 참가자들도 그 이야기 속에 푹 빠졌다. 이어 직접 노래까지 선사하자 버스는 박수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이같은 모습을 지켜본 외국인 참가자들의 느낌도 새로웠다. 방북 경험이 20차례가 넘는 시미즈 스미꼬 일본 사회당 전 참의원도 이런 광경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버스에 북측 남성 안내원이 타는 것도 처음 보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고 여기에 남측의 여성들이 박수치고 호응하는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화해를 넘어서 통일된 모습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남성 안내원의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올 뻔 했습니다. 분단 상황에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시미즈 전 의원은 "여기서는 이런 모습을 만들고 있는데 정치가들은 벽을 만들고 있다"며 "요즘 남북관계가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데 이것은 절대 이명박 정부에게도 플러스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개성을 통해 바라본 '분단체험'..."우리 모두의 과제"

▲참가자들은 도라산역에서 평화메시지가 적힌 소지천을 둥글게 잇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동북아평화여성회의'에 대한 북측 안내원들의 관심도 높았다. 한 남성 안내원은 "남측 여성들이 통일하자고 세계 각국의 여성 대표들을 북으로 다 데리고 오니 반가운 일"이라고 말했다.

개성의 하루가 저물어가자 동북아여성평화회의 참가자들은 개성공단을 경유해 남쪽으로 향했다. 피곤한 일정에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은 개성을 통해 바라본 자신들만의 '분단 체험'을 여러 언어로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남북의 경계선인 도라산 역에서 폐막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스웨덴의 커스틴 그레벡 국제여성연맹(WILPF) 회장은 "저는 동북아 영내국가에서 오지 않았지만 전 세계 여성평화단체 대변인으로 참가했다"며 "북한 지역으로 들어와 체험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 모두의 과제라는 점을 확인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동북아여성평화회의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이번 모임을 토대로 참여한 나라별로 돌아가 향후 네트워크가 가능한지 돌아 볼 것"이라며 "적어도 이번 개성 기행을 기회로 개성공단이나 개성관광에 위기가 오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더 이상 북으로 가지 못한 열차가 남쪽으로 빠져나간 도라산역 철도 위에서, 참가자들은 '평화 메시지'가 적힌 소지천을 둥글게 이었다.

<사진 이모저모>

▲ 송도 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 높이가 37m에 달한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통일관에서 13첩 반상기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케린 리 전미북한위원회 사무국장이 표충비의 거북이 코를 만지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숭양서원을 향하고 있는 관광객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고려 성균관 한켠에 위치한 '헌화사 7층탑'. 북한 국보유적 제139호다.[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경의선도로 남측 출입사무소 정문 앞이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도라산역 앞에서 폐막행사가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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