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창립 10주년 준비에 바쁜 이승환 민화협 집행위원장과 인터뷰를 나눴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정당.종교.시민사회단체의 범국민적 통일단체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 정세현)가 오는 3일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98년 김대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민족화해협력과 평화통일을 기치로 민관협력을 시도한 민화협의 그간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양할 수 있지만, 10년간 통일운동의 한축을 차지하며 비중있는 역할을 수행해온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창립 때부터 민화협에서 중추 역할을 맡아온 이승환(50) 민화협 집행위원장은 “민화협이 지난 10년 동안 이룬 성과도 적지 않고, 또 민화협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났다”며 “지난 10년동안 변화된 여러 가지 정세가 사실 민화협 운동에 여러 가지 도전과제를 던져주고 있다”고 총평했다.

지난 28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민화협 사무실에서 만난 이승환 집행위원장은 “민화협이 성과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 중에 하나가 민간교류, 특히 민간이 남북관계에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교류를 본격화시킨 점에서는 민화협의 역할이 적지 않게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성과를 꼽았다.

실제로 민화협은 61.5공동선언 이후 2001년부터 본격화된 남북해외 공동행사에서 남측 추진본부의 한축을 담당하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통일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남쪽 사회 내부의 갈등의 문제”에 힘을 기울인 결과는 “이런 담론을 선구적으로 제기하고 몇 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는 정도 이상을 했다고는 보여지지는 않는다”고 자평했다.

최근 정세현 대표상임의장에 대한 정부의 사퇴 압력에 대해서는 “정부 공기관도 아닌데 인사문제에 직접 개입을 정부가 하려고 했던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고,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민화협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며 “정세현 상임의장의 사임을 계속 말렸고, 만류를 정 의장이 수용해서 사퇴는 일단락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북정책에 어려움과 혼란, 남북관계 경색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냉온탕을 왔다갔다하는 데서 주로 발생해 왔다”며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민화협 운동의 중심적인 원칙이나 이런 것이 특별히 바뀔 게 별로 없다... 어려워진 여건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주체들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특히 “10.4선언 1주년 행사와 관련해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보다 진공적으로 공동행사를 추진해내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며 “민화협이 조직적인 대오를 늘리고 확대해나가는 조직운동적인 노력, 이런 게 앞으로 훨씬 더 중요하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서 남과 북, 해외가 함께 하는 공동행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고, 꿈”이었다며 “가장 기억에 나는 사건은 2002년 8.15 행사 때 북(대표단)이 서울에 와서 처음 행사할 때, 공항에서 북측 대표단을 영접할 때가 제 입장에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로는 초기 북측 실무단장을 맡았던 민족화해협의회 허혁필 부회장과 최근 북측 실무단장을 맡고 있는 리충복 6.15북측위 부위원장을 꼽았고, 남측에서는 김종수 신부와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을 떠올렸다.

또한 지난 10년 북측과의 접촉을 통해 “상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이해하게 된 내부적인 풍부함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뭐랄까, 정치적인 탄력성이랄까 이런 것은 어쨌든 여전히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하고, 그간 항상 비판을 받아왔던 국가보안법 폐지에 앞장서지 못한 데 대해서는 “오히려 지금 같은 시점에서 이제 민화협이 적극적인 흐름을 만들어나가는데 기여해야 되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민화협 운동이 제시했던 남남갈등의 문제라든가, 외생성이 아닌 우리 현실에 근거해서 운동을 하자라든가, 또는 어쨌든 거버넌스적인 사고를 갖고 운동해야 한다, 이런 측면은 웬만한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다 수용할 수 있게 됐는데, 결국 담론적 선구성이 없어졌다”며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할 수 있는 통일운동 담론을 개척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민화협은 3일 오후 6시 30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민화협 10주년 기념식 및 후원의 날’ 행사를 갖고 10월에 국제대회와 ‘종교.정당.시민사회단체 공동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다음은 지난달 28일 민화협 사무실에서 이승환 민화협 집행위원장과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기존 통일운동 방식 변화 만들고자”

▲ 인터뷰는 8월 28일 오후 3시 민화협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뉴스 : 바쁜데 시간 내줘서 감사하다. 민화협이 10주년을 맞았는데, 초창기부터 중심에서 활동해온 개인적 소회는?

■ 이승환 : 민화협을 만들 당시 상황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소위 민간에 존재하던 소수 담론이 국가정책화되는 상황이었고, 또 기존의 통일운동과는 흐름이 다른 새로운 운동적 흐름이 생겨났던 그런 시기에 민화협이 만들어졌던 것 같다. 사실은 민화협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기존 통일운동에 대한 어떤 변화의 요구가 담겨있고 변화된 정세가 담겨있다.

10년 이후 지금, 그 반대의 상황에 와 있다.
화해.협력의 담론이랄까 이런 것이 새 정부의 정책에 의해 대결 담론 방향으로 가고 있고, 지난 10년간 해 왔던 통일운동도 이제는 앞을 내다보는 어떤 변화의 시점에 서 있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해왔던 것들을 냉정하게 되돌아보면서, 앞으로의 통일운동 10년에 대한 비전, 변화된 정세에 대한 좀더 진지한 판단을 해야 하는 시점에 있는 것 같다.

민화협이 만들어질 당시에 고민이 참 많았는데, 지금도 그런 점에서 변화의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이런 상황에 있는 것 같다.

□ 폭넓은 통일운동을 구상하다가 민화협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임동원 전 장관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도적으로 민화협을 구상했다고 했는데, 당시 비판적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상황에서 민화협의 탄생에 대해 말해달라.

■ 민화협을 만드는 데에는 여러 사람들이 관여했고, 관여한 사람들이 다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 나름대로 자긍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것 같다. 임동원 장관도 당연히 민화협 구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고, 민간통일운동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민간통일운동의 발전과 지향이 반영돼서 만들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민화협 만들어진 시점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화해.협력 정책을 표방하게 되고, 90년대 중반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이라는 방식으로 대중적인 화해.협력 운동의 흐름이 생겨났다.

그리고 전통적인 통일운동 내부에서는 기존의 통일운동 방식, 남의 이론, 남의 운동론, 정치투쟁 위주에 일반대중이 함께 하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이런 운동이 중심이 되어왔다는 데서부터 변화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새로운 통일운동 흐름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각각의 변화의 흐름들이 한 지점에서 만났던 것이 민화협인 것 같다.

당시 김대중 정부 입장에서 볼 때는 아마 과거의 소수의 담론이었던 화해.협력 정책을 펼쳐나가는 데서 국민적인 동의 기반을 폭넓게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우리 민간 통일운동진영 입장에서 보면 북한동포돕기 운동과 같이 실사구시에 입각해서 인도주의적인 민족화해운동이 전개되는 것에 어떤 목적의식과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보다 많은 대중들이 참여하게 하고 그리고 기존의 통일운동에 이러저러한 편향과 문제들을 극복해 나가려고 하는 이런 노력이 필요했다.

특히나 우리사회 냉전적인 잔재들을 청산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이게 단순히 몇몇 민간단체가 일을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은 일정하게 민관이 협력하는 그런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거고, 그런 배경 하에서 각각의 여러 조건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만들어진 것 같다.

민화협이 만들어질 때 비판이 명백히 존재했다. 그런 비판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비판이고, 비판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운동이 권력과 결탁하는 것에 대한 체질적 거부랄까 이런 것들이 있었던 거고, 사실은 그런 점에서는 민간차원에서 통일운동의 순수성과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통일운동 해왔던 분들의 걱정이나 우려는, 또 그런 걱정에 근거한 비판은 있어야 되고, 우리가 그 부담을 안고 운동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봤다.

□ 지금까지의 민화협 활동은 하나는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와 6.15남측위원회를 통한 민족공동행사 추진의 한 축을 담당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남갈등을 치유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텐데, 먼저 추진본부와 6.15남측위에서 민화협이 활동한 부분에 대한 평가는?

■ 민화협이 지난 10년 동안 이룬 성과도 적지 않고, 또 민화협이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히 드러났고, 지난 10년동안 변화된 여러 가지 정세가 사실 민화협 운동에 여러 가지 도전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민화협이 성과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 중에 하나가 민간교류, 특히 민간이 남북관계에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교류를 본격화시킨 점에서는 민화협의 역할이 적지 않게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민화협의 고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과 만나는 것이 특정한 몇 사람, 감옥갈 생각을 하고, 이런 게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북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북과 만나는 데서 남쪽의 국민들의 정서와 폭넓은 동의를 획득해 내는 방식으로 북과 만나야 한다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고, 그런 고민 때문에 민화협이 제일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은 종교계였다.

종단하고 같이 남북관계를 고민하는 틀로 추진본부를 만들었던 것이고, 그리고 민화협이 만들어지면서 사실은 통일운동이 일정하게 분열이랄까, 갈라진 부분이 있었는데, 통일연대로 집중됐던 기존 통일운동의 힘들이 여기에 같이 결합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남쪽 정부도 통일운동을 합법화하고, 북도 관변단체라고 민화협 안 만나고 이런 부분에서 남쪽의 다양한 세력이 만나게 되는 그런 흐름이 형성됐던 것 같다.

민화협이 출발하는 지점에서는 보통사람들이 북과 만나고 그것을 통해서 분단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의 태도가 변하는 거, 그 다음에 또 북과 만나는 것이 정서적인 거부감으로 오는 게 아니라 광범위하게 동의 기반을 갖는 걸로 되게 했던 것이 초창기 고민이었다.

북과 만남이 진행되면서 민화협이 가졌던 문제의식이랄까 고민은 사실은 민간교류가 당국간 교류와 다르게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될 것인가 이런 점이었고, 그런 점에서는 민화협이 일관적으로 지키려 했던 스탠스는 북과 신뢰를 높이고, 신뢰를 높이는 만큼 의제를 확대해 나가자, 이런 스탠스였다.

그런데 어쨌든 지난 10년 동안 북과 굉장히 많은 여러 가지 교류를 해왔지만, 그런 점에서 민화협이 지켰던 스탠스대로 잘 해 왔다고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런 부분에서 민화협의 한계와 도전과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사회통합적인 통일운동’ 담론 일반화

▲ 그는 민화협의 친정부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사실관계보다는 예단이 많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일각에서는 꾸준히 민화협이 대중정서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정부와의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친정부적인 행보를 보인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 그런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점도 있다. 민화협이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사실은 정부와 여러 가지 정책적인 협의도 하고 그러기는 했지만, 실제 있어서는 정부 행보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여 왔고, 내용적으로도 실제로 좀 많이 달랐다.

이런 부분에서는 여러 가지 아주 세밀하고 구체적인 사례를 많이 얘기할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어쨌든 민화협은 민간교류, 민간통일운동의 바탕에 서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부와는 당국이 남북관계에서 이러저러하게 판단하고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베이스에 서 있었고, 그런 점에서 지금 공동행사하면서 발생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민화협이 친정부적이었다고 한 것은 저는 아마 사실관계보다는 예단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남측 내부의 많은 민간단체들을 포괄하면서 활동을 해 왔는데, 남측 내부에서 민간 토대를 넓히려는 활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가?

■ 민화협이 하나의 단체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몇 가지 점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마 통일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남쪽 사회 내부의 갈등의 문제가 통일을 하면서 내지르는 문제보다 중요한 부분이 있고, 그런 부분을 고려하는 사회통합적인 통일운동의 시야를 가져야 된다는 점을 제기한 게 민화협 운동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점과 관련해서 민화협이 이런저런 거 많이 하긴 했지만, 이런 담론을 선구적으로 제기하고 몇 가지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는 정도 이상을 했다고는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민화협이 더 많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잘 못했다는 의미도 있다.

남남갈등의 문제가 어떤 한 개 단체가 문제제기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사실은 다양한 주체들이, 정당이나 정부, 시민사회 이런 부분들이 힘을 모아서 공동의 노력을 좀 기울여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남남갈등을 완화하고, 특히 통일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들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국민협약이랄까, 사회적 대타협이랄까, 이런 것들이 필요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부분에서는 다양한 주체들이 그런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잘 안 된 것이다.

민화협 운동의 이 문제와 관련한 성과는 어쨌든 그런 문제의식, 그런 담론을 일반화시켰다는 정도이지 않겠나 싶다.

□ 여러 단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등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거나 일상적 통일투쟁에 앞장서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 그것은 뼈아픈 지적이다. 맞는 얘기다. 국가보안법 문제와 관련해서는 민화협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됐다. 그런데 민화협 내부가 워낙 복잡한 단체이고 스펙트럼이 넓은 단체로 구성되다 보니까 국보법 문제와 관련해서는 일정한 수위의 발언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는데, 내부의 폭넓은 동의를 얻어내기가 어려워서 지레 접은 측면은 있다.

그런데 국보법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지금 같은 시점에서 이제 민화협이 적극적인 흐름을 만들어나가는데 기여해야 되지 않나. 수위가 어느 정도가 될지는 모르지만, 국가보안법 폐지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독소조항들의 폐지, 이런 정도는 지금 남북관계 발전에 맞춰서 남북관계발전의 기본법 체제를 재정비하면서 여기에 맞지 않는 법제도를 정리하고 청산하는 문제로서, 민화협 운동의 과제로서 일단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할 시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게 민화협 내부에 보수적 단체도 있고, 얼마나 내부적으로 충분한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까는 그렇지만, 그래도 적어도 몇 년 전보다는 지금은 오히려 여건이나 민화협 내부 사정도 좀 이 점에서는 나아져 있다고 본다.

그 다음에 일상적 통일투쟁 문제에 대해서는 저는 조금 의견을 다르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는 게 일상적 통일운동이냐. 그리고 통일운동이라는 것이 결국은 일상생활에서 통일운동을 실천하는 것과 또 한편에서는 반통일적인 흐름에 투쟁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을 텐데.

지난 10년의 시기에서 보면 반통일 세력이 누구냐.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어쨌든 적어도 최소한 정권이 반통일세력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투쟁을 일상화하는 것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통일이나 평화를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이런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됐는데, 그런 노력을 민화협이 잘 못 기울였다는 부분은 전적으로 타당한 지적이다. 특히 그런 점과 관련해서 민화협이 대안을 만들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어쨌거나 민화협의 입장은, 이를테면 북한 나무심기운동 같은 사업을 통해서 초기에는 북한 임산부와 영유아 지원사업을 통해서 생활 속에서 인도주의 같은 것을 실천하는 흐름을 좀 만들어 보려 하고 있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운동적 정형이나 좋은 모델이나 성공사례를 잘 못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전투적 통일운동을 하지 않는다. 이 점과 관련해서도 저는 우리가 그런 지적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논쟁적인 문제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10주년 행사를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 9월 3일에 기념식을 하고, 10년된 잔치를 하니까 많이들 오셔서 함께 잔치를 즐기시면 될 것 같고, 이와는 별개로 올 하반기에 민화협 10주년을 기념해서 몇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국제대회를 지금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평가하고 이후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그 다음에 남북경협과 국제협력, 그리고 지금까지 진행해온 인도주의적 대북지원운동을 전반적으로 평가하고, 이런 관심을 국제적으로 확산하는, 이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국제대회가 10월에 개최될 예정이다.

그 외에 민화협이 매년 해 왔는데, 올해 하반기에 맞춰서 10주년의 의미를 집어넣어서 좀 더 의미있게 해보자 하는 것은 종교, 정당, 시민사회단체 공동회의이다. 올해는 민화협 10주년에 맞게 좀 더 의미있고, 규모있게 진행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 초청장에 보니까 10주년 행사 캐치프레이즈를 ‘화해.상생’이라고 내세웠던데, 어떤 의미인가?

■ 모르겠다.(웃음) 초청장을 만드는 친구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이름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초청장에 있는 문구가 큰 의미는 별로 없을 것이다.

“민화협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단체”

▲ 10주년 초청장에 '화해.상생'이 등장한 것에 대해 그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정세현 대표상임의장 인사문제로 파동을 겪었는데, 일단락됐다고 봐도 되겠나?

■ 그렇다. 일단락된 것이고, 민화협이라는 것은 다른 단체와는 다르게 통일부가 일정한 사업을 위임해서 민화협이 약간의 사업예산을 받고 있지만, 그러나 민화협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단체다. 재정도 그렇고, 운영도 그렇고, 인사도 그렇고.

그런데 어쨌든 정부 공기관도 아닌데 인사문제에 직접 개입을 정부가 하려고 했던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고,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는 민화협 입장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비록 정세현 의장은 개인적으로는 민화협을 생각해서 사퇴를 하겠다고 정부측 인사에게 그런 입장을 밝혔지만, 민화협 입장에서 보면 민화협이라는 단체의 인사에 정부가 개입해서 대표가 바뀌는 이런 선례를 남길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정세현 상임의장의 사임을 계속 말렸고, 만류를 정 의장이 수용해서 사퇴는 일단락된 것이다.

□ 통일부 시각은 정부 사업예산을 쓰고 있고, 정부가 바뀌었고, 정책적 흐름이랄까 이런 것으로 봤을 때는 이제 오히려 정 의장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시점이 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던데?

■ 그거야 통일부 쪽 사람들의 시각이다. 민화협이 꼭 따라야 할 문제는 아니다. 어쨌든 민화협 입장에서 보면 권력에 의해서 민화협이라는 통일운동조직의 대표가 좌지우지되는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고, 그런 뜻을 통일부에게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통일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부분은 우리에게 참고사항은 될 수 있겠지만, 여기는 엄연히 의사구조와 결정구조가 있는데 거기서 처리될 문제다,

□ 그러면 정 의장이 임기를 마치는 걸로 봐도 되겠나?

■ 당연하다.

□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3000’을 뼈대로 한 상생.공영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민화협은 과연 스탠스, 방향성을 어떻게 잡아가고 있는지?

■ 민화협 운동이라는 게 몇 가지 지점이 있다. 아까 말씀드렸던 한 가지가 사회통합적 시야에서 남남갈등 문제까지 고려하는 통일운동을 하자 이런 거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어쨌든 관은 반통일이고, 민은 통일이고 이런 식의 고정관념이 아니라 통일과정에서 거버넌스, 민과 관이 협력하고 그것을 통해서 민관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증대된 힘이 민관의 협력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통일 거버넌스를 형성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 민화협 운동의 또 한 지점이었다.

세 번째는 남측에 있는 대중에 있는 정서와 동의를 얻어내는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남측 현실 추세와 흐름에 맞춰서 통일외교안보분야에서도 그런 민관이 협력하는 거버넌스를 확대해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이명박 정부가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는 부분은 이명박 정부가 제가 볼 때는 아마 부정적으로 나올 수도 있고, 그러지 아닐 수도 있을텐데, 그렇다 하더라도 이 세계적인 흐름과 추세를 이명박 정부가 거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에 비해 민화협의 역할이 확대되거나 혹은 줄어들거나 그럴 수는 있겠지만 이 문제가 그렇게 원칙 자체가 틀리거나 이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민화협 입장에서는 정권이 대북 정책에서 어떤 정책을 쓰느냐 하는 부분은 정부가 결정하는 문제이겠지만 이 분야의 의제가 개방되고 민간과 협의하고 또 조율된 정책을 만들어가는 노력을 이명박 정부가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런 점과 관련해서 민화협이 여전히 역할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민화협 뿐만 아니라 다른 통일단체들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결론은 어쨌든 불안감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른 원칙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면 거기에 따라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은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 최근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나 민간교류에 대한 입장을 보면서 이같은 기조들을 수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나?

■ 정부가 바뀌었다고 해서 민화협 운동의 성격이 바뀔 필요는 없다. 민화협 운동이 이런 세 가지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는 운동이어서 새 정부가 개입해서 왜곡하고 문제를 발생하게 되면 민화협 입장에서 대응들이 나오게 될 것이다.

첫 번째 문제가 정세현 의장 사퇴였다. 민화협 입장에서 보면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고. 지금 정부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해 아직 어떤 구체적인 입장이나 태도를 정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 현재까지는 민간교류가 불허된다든지, 이런 상황을 맞고 있는데 민화협이 보기에 우려되는 대목이 있지 않나?

■ 우려가 있다. 지금 우려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민과 관의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하나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냉전을 청산하고 우리 사회의 냉전적 잔재를 일소해 나가는데 있어서 정부하고 힙을 합쳐서 잘 된다는 측면이고, 또 하나는 모든 추세가 거버넌스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 특히 우리나라에서 통일안보영역이라는 것은 당국이 독점했던 영역이었는데 민간이 참여하고 민간과 협의하고 정책을 하게 됐다는 것에서 민간의 역할이 중요하고, 이런 추세와 맞춰서 통일안보 분야에 민관이 협력하는 거버넌스를 확대해야 한다.

그 점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추세를 이명박 정부가 거부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 보고 있다. 민화협의 역할이 확대되거나 축소될 수는 있겠지만, 이 문제가 원칙 자체가 틀리거나 이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권이 대북정책에 있어서 어떤 정책을 쓰느냐 이런 것은 정부가 결정하는 것이지만, 이 분야의 의제가 개방되고 조율된 의견을 맞춰가는 것이 이명박 정부가 해 나가야 하고, 그런 부분에서 민화협이 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불안감보다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원칙을 가지고 추진하다 생기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 최근 6.15 행사가 정부 당국 대표단이 참여하지 못한 상태로 간신히 열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10.4 공동행사도 추진하려는 방향으로 알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 대북정책에 어려움과 혼란, 남북관계 경색은 이명박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냉온탕을 왔다갔다하는 데서 주로 발생해 왔다고 보여진다. 한편에서는 국내정치 때문에 경색된 남북관계를 이명박 정부가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지 않은가 보여진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촛불시위로 대변되는 큰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고, 다양한 지지층들을 새로 확보해나가는 과정에서 보수결집을 위해 남북관계 발전은 뒷순위로 밀려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10.4선언을 존중한다는 얘기만 하면 남북관계가 풀릴테니까 지금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는 인식이 깊이 깔려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인식이야 말로 굉장한 오판이다. 풀리지 않는 일들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기존의 6.15, 10.4선언을 존중하는 태도를 하루라도 빨리 보여서 남북관계를 타개해 나가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남북당국과 경색된 것과 마찬가지로 민간교류도 경색돼 있다는 것이다. 남측 정부가 금강산 사태를 이유로 해서 대규모 방북단을 불허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지만, 사실은 과거의 김대중 정부 시절 때에는 당국관계가 경색되어 있어도 이러저러하게 남북간의 다양한 채널의 소통들이 이루어져 왔는데, 지금은 그런 다양한 채널의 소통들이 사실상 대부분이 단절돼 있는 상황이다. 저는 오히려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국간 루트가 작동이 안 되면 정당이나 다른 여러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채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그런 부분에서 사실상 남북관계가 탄력과 활성이 없어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6.15남측위원회, 6.15공동위원회가 올해 6.15행사를 어려움 속에서 겨우 치렀는데, 치러낸 것은 중요한 성과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10.4 1주년 행사와 관련해서는 좀 더 적극적이고, 보다 진공적으로 공동행사를 추진해내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10.4를 공동행사로 하기 위해서 민화협도 그렇고, 다른 단체도 마찬가지로 노력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6.15공동위원회 자체가 남북간의 채널들이 당국관계 경색에 따라서 원활하게 가동이 잘 안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북, 새 정부에 메시지가 될 만한 언어나 행위 극히 조심”

▲ 최근 방북에서 정치적 의미를 찾고 싶었지만 북측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승환 집행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민화협이 유일하게 대규모 방북을 한 바가 있고, 최근에는 베이징 올림픽 응원단을 파견했는데, 이에 대한 성과와 한계에 대해서 평가해 달라.

■ 올해 초에 중화통일 양묘장 준공식을 한 것은 민화협 입장에서 보면 작년에 순안6.15통일 양묘장 준공에 이어서 큰 성과이고 이 사업은 꾸준하게 일단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민화협이 대규모 방북한 이후, 최근에 금강산 사태 이후에 대규모 방북이 막혀 있어 중화양묘장 준공 이후에 사업 진전은 많지는 않은 상황이다.

우리가 지원하는 양묘장 숫자를 더 늘리고, 산림 조성, 병충해 방재 사업 등등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는데, 어쨌든 남북관계의 경색상황으로 인해 사업이 진전이 잘 안되고 있고, 민화협 뿐만 아니라 환경단체들도 남북관계에서 대북 인도지원사업을 해왔던 단위들이 힘을 모아서 같이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고, 이 사업은 앞으로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물론 양묘장 사업도 중요하지만, 대규모로 방북을 했고, 정세현 상임대표의장의 정치적 비중도 있는데, 평양 방문의 정치적 의미는 없었나?

■ 우리로서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싶었다. 공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러저러한 남북관계의 변화 속에서 자기 나름의 노력이 몇 가지 있었다. 어쨌든 북이 현재 남북관계 상황과 관련해서 새 정부에 어떤 메시지가 될 만한 언어나 행위에 대해서 극히 조심했고, 그래서 사실은 그런 노력은 그냥 노력만 있었던 것이다.

남북 공동응원 문제도 그런 점에서 보면 비슷한데, 남북관계의 단절 상황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서 성공적으로 잘 진행을 못했다. 원래는 남북한의 당국간 합의사항이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공동응원을 성사시켜 우리 민간 입장에서는 10.4선언의 하나라도 민간에서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사실 북측과 접촉하는 문제가 잘 되지 않았고, 남북관계가 잘 되지 않고 있는데 공동응원만 잘 될 수 없었다. 중국 현지의 조건도 좋지 않았다.

이북 여자축구를 응원했는데, 자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남측의 응원단이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을 알렸고, 파도타기 응원이 북측 응원단까지 이어져서, 경기는 북이 졌지만 갔다온 사람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기도 했다.

지금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측면에서, 그리고 대규모 방북이 불허된 현재 조건에서 10.4공동행사를 어떻게든 성사시키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것이 남쪽 정부의 지금 정책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 작년 6.15 때도 한나라당 의원 주석단 문제로 민간끼리도 문제가 있었고, 올해 6.15 때도 크지는 않지만 행사 진행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마찰이 있었는데, 당국간 관계가 어려운 상태에서 민간이 잘 될 수 있겠느냐라는 회의도 나오는데?

■ 작년 6.15 때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문제는 정말 해프닝이다. 남이나 북이나 작은 문제가 서로 일단 양보할 수 없는 팽팽한 이런 상황으로 가게 돼서 어려움을 겪게 됐던 것이고, 올해 6.15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는 문건협의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내적으로는 평가하고 얘기할 만한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어쨌든 원칙적으로 몇 가지 점의 개선은 분명히 필요한 것 같다. 우선 문건과 관련해서 행사 직전에 문건 협의를 끝마치지 못해서 행사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런 상황은 좀 피해야 한다. 문건과 관련해서는 사전 합의를 원칙으로 하고, 행사 며칠 전에 완료를 하는 방식으로 일단 하면 좋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한나라당 의원과 관련된 문제는 북측의 정치적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에, 북이 어떤 정치적 판단을 하는 것에 대해 옳으냐 그르냐 얘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아주 일반적인 6.15공동선언의 원칙, 이런 수준에서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대표하는 자격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행사에 참여하는 것까지 막는 거는 좀 적절치 않은 거 아니냐. 그런 점에서는 조금 전향적인 판단이 있는 게 좋겠다 생각한다.

□ 그간 북측도 변화가 많이 있었나?

■ 북도 변화가 없을 수 없다. 북도 그렇고 남도 그렇고 변화가 있고, 상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이해하게 된 내부적인 풍부함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뭐랄까, 정치적인 탄력성이랄까 이런 것은 어쨌든 여전히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지금 남북관계에서 민간이 만날 때 남쪽은 여러 가지 얘기를 북에 많이 하게 되는 거고, 북은 북쪽의 정책적인 기조나 운영방향에 대해서 입장을 세우게 되는데 이런 부분에서 상호 협의하고 어떤 지혜를 만들어내고 이런 점에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는 건데, 그런 점과 관련해서 서로를 많이 이해하게 된 풍부함은 있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부분에서 작년 6.15도 그렇고, 올해 6.15에서도 나타났듯이 여러 가지 지점에서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라기보다는 사실은 남과 북이 각각 자기 사회의 어떤 흐름의 토대에 서 있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쉽사리 정리되는 문제는 좀 아닌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어쨌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는 과정은 말하자면 관리를 잘 해야 되고, 문제가 될 만한 몇몇 부분에서는 사전에 어떤 원칙을 정해놓고 남과 북이 합의해서 슬기롭게 문제를 풀어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 흔히 이명박 정부하에서 민화협 같은 경우 예산도 삭감 내지 없어질 수 있고, 정부와의 원활한 관계도 어려울 수도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또한 6.15남측위가 가장 포괄적인 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화협이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궁금하거나 일부에서는 회의적인 입장도 있는데, 어떤 방향으로 보고 있는지?

■ 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했다.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민화협 운동의 중심적인 원칙이나 이런 것이 특별히 바뀔 게 별로 없다. 여건이 좀 어려워진 걸로 이해하는 거고. 그 어려워진 여건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주체들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있는 문제라고 보고 있다. 민화협 운동이 어떤 수정을 해야 되거나, 뭔가 진로를 변경해야 하거나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새로운 운동흐름 남북관계와 결합시키는 역할

▲  통일 담론의 선구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이승환 집행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민화협이 현재 안고 있는 내적 과제는 무엇인가?

■ 하나는 지난 10년 동안 민화협 운동이 해온 성과라는 게 통일운동의 흐름과 방향 이런 부분에서 어쨌든 새로운 통일운동의 담론을 제기하고, 그게 지금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문제가 됐다는 점이 민화협의 중요한 성과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까지 민화협 운동의 큰 흐름은 이제 민간통일 진영이 지난 10년의 역사 위에서 새로 가야 되는 데, 그 점과 관련해서 통일운동의 새로운 담론, 새로운 방향,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민화협이 화해.협력 문제만 맨날 얘기해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담론적인 선구성을 다시 획득해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다.

민화협 운동이 제시했던 남남갈등의 문제라든가, 외생성이 아닌 우리 현실에 근거해서 운동을 하자라든가, 또는 어쨌든 거버넌스적인 사고를 갖고 운동해야 한다, 이런 측면은 웬만한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다 수용할 수 있게 됐는데, 결국 담론적 선구성이 없어졌다. 일반화됐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앞으로 10년의 민화협 운동은 기존의 담론을 새롭게 가다듬고,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할 수 있는 통일운동 담론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두 번째는, 운동적 담론의 확산에는 큰 기여는 했지만, 운동의 조직적 발전, 운동의 조직적 토대를 확대하는 이런 부분에서는 민화협이 굉장히 많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어쨌든 전통적인 통일운동의 흐름이나 또는 관변 보수의 흐름과는 다른, 어떤 흐름을 포착해내고 그 흐름을 조직화내는 것이 민화협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였는데, 그런 부분에서 어쨌든 조직적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부분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민화협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냈다고 얘기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런 점과 관련해서 민화협이 조직적인 대오를 늘리고 확대해나가는 조직운동적인 노력, 이런 게 앞으로 훨씬 더 중요하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현재 통일운동진영을 보면, 기존의 주요 민중운동단체들이나 통일운동단체들, 이런 것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일단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광범위한 조직적 토대를 형성하고, 이렇게 나가야 통일운동의 대중화가 이제 이뤄져 나갈 수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민화협이 감당해야 할 몫이 상당히 크다고 보는데, 그런 점에서 민화협 운동이 지난 10년 동안 한계, 또 영향의 부족, 이런 게 뼈저리게 드러난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새 정부 하에서 이런 노력이 강화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이 부분은 조직운동이라는 게 결국 사람과 돈이다. 그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딛고 조직운동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지금 민화협이 안고 있는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 현 조직 현황으로 봤을 때, 소속 단체는 얼마나 되는가?

공식적으로 200개가 조금 안 된다. 활동의 참여 정도로 나누면, 적극적인 데, 소극적인 데 이렇게 나누면 적극적인 단체는 70여개 단체라고 보여진다. 해외는 정확하게 얘기하면 우리가 조직하는 것은 아니고, 해외측에서 요청이 오는 것인데, 그래서 공식적으로 미국 서부 LA에 미주 민화협이 만들어져 있고, 여기는 우리하고는 조직적 관계가 지부, 본부 이런 개념은 없고, 다만 미주 민화협을 움직이는 분들이 대체로 민화협 운동에 대해서 동의하는 그런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이 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조직의 내포관계를 넘어서 연대관계는 일단 가지고 있다.

그 외에 중국의 경우, 재중동포 그 중에서, 북을 국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교를 제외하고, 지금 굉장히 많은 조선족도 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남쪽 동포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나 이 사람들이 앞으로 점점 숫자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중국의 특수한 사정에 의해서 통일과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유학생들을 포함해서 꽤 있지만, 어디에도 참가해서 활동하기 어려운 여건이어서 그런 사람들로부터 중국에 민화협을 만드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있고, 우리하고 조직적으로 연계가 없는 상태에서 민화협이라는 이름을 달고 모임을 하기로 한 그런 상태에 있다.

우리 민화협이 해외까지 폭넓게 활동을 전개하는 여건이 아니라서, 현재로서는 어쨌든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저는 이런 흐름이 나쁘지 않다 이렇게 생각한다. 왜나햐면 해외 통일운동이 사실은 굉장히 여러 가지 오랜 역사적 전통이 있고, 그 역사 속에서 사실은 서로 상처주고 상처받은 이런 게 많아서, 해외에서 사실은 동포 내 민족화해운동이 실제로 필요하고 지금 현재 해외 통일운동조직의 대부분이 범민련 이런 부분이 있어서 다른 방식으로 통일에 기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참가하고 싶은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통일운동의 저변을 넓혀 가는 데서도 아마 이런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 민화협 해외조직이 분열 내지는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비판도 있는데?

■ 제가 볼 때는 동의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민화협은 통합이 중심적인 것이고, 운동을 분열시키려고 한 적은 별로 없다. 이 문제는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미주 민화협이 만들어진 것 때문에 해외 운동을 분열시켰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통일에 기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러나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몇 가지 단체에 속해 활동하고 싶지는 않고, 이런 사람들을 포괄하는 틀이 만들어져야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우리가 6.15공동위원회에 참여시키게 되면 그만큼 6.15공동위원회 운동의 조직적 기반이 넓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운동의 분열이 아니라 운동이 확장되는 과정으로 판단하는 게 기본적으로 옳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해야만 우리가 정말로 품이 넓은 운동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점과 관련해서 이것을 분열로 보는 분들의 시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 향후 중점 활동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 민화협은 시민사회단체의 여러 가지 새로운 평화운동의 흐름이랄까, 환경생태문제의 흐름이랄까, 이런 부분들을 남북관계와 결합시키는 지점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담론이 생겨나고 진화시켜 나가는 이런 측면에서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어쨌든 이런 평화나 환경, 생태, 이런 의제들이 또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나무심기운동을 하는 것도 그런 일종의 환경, 생태 관련된 의제가 남북관계에서 실험 중 하나인 것이다.

또 하나는 조직적으로 보면, 어쨌든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 사실은 민화협이 조직적으로 발달해야 한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6.15남측위원회는 굉장히 진보적인 단체가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폭이 넓은 조직이나 기구라고 했을 때 폭이 넓다는 의미를 사실은 주로 종단이나 민화협이 세워야 되는 것이라 보는 거고, 그런 점에서 어쨌든 민화협이 자기 운동의 조직적 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 전체 통일운동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실제로 6.15남측위원회 내에서 사실은 보수가 함께 하고 있다는 건, 사실은 민화협 내에 있는 보수조직들이다. 그런 점에서 어쨌든 민화협이 조직적 자기발전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 민화협이 만들어질 때 모토는 정당, 사회단체, 통일운동 상설협의체라는 게 민화협 정관에 규정된 조직성격이다. 그 동안은 정당, 사회단체의 상설적인 협의체로서의 역할은 별로 못해왔는데, 매년 한 번씩 정당, 종교, 시민사회단체 공동회의 이런 식으로 어쨌든 형식적인 행사로 소화해왔는데, 앞으로는 통일외교안보에 대한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간에 네트워킹 작업을 민화협이 좀 더 적극적으로 하면서 실제 의회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통일외교안보 의제들에 대해서 민간의 목소리들이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이런 경로의 역할을 민화협이 앞으로는 좀 더 많이 해야 되지 않나 생각하고 있다.

남북관계에서는 6.15남측위원회와 6.15민족공동위원회를 강화해 나가는 데서 민화협이 계속적으로 역할을 해야 될 것이다. 어쨌든 6.15남측위원회를 통일운동, 통일과정에서 가장 폭넓은 민간 대의기구로 만들어가는 짐을 민화협이 어떤 점에서 가장 막중하게 떠맡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 발전에 민화협이 지금보다 더 어떻게 노력을 기울일까 이런 부분도 여전히 민화협이 안고 있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꿈 10년동안 현실화

▲ 변화되는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민감하고 긴장을 많이 해야겠다는 이승환 집행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개인적인 질문인데, 정당으로 진출했었는데 평가는 어떤가?

■ 말하기 부끄럽지만 진출했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안 했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그런 상태에 있었다. 과거 열린우리당 정책연구소에 있었고, 거기서 하는 역할은 민족통일운동과 전혀 관련 없는 일을 했었다. 지금은 일단 그 쪽에서 일은 정리를 다 끝난 상태이다. 5월 말에 끝났다. 정리는 사실 더 빨리 했어야 됐는데, 이러저러하게 늦어졌다.

□ 10년 간 꾸준히 가장 최일선에서 민화협을 이끌어오면서 느끼는 것들은?

■ 10년 간 해온 과정에서 곡절도 많고 개인적으로는 뭐랄까 원도 풀었달까 그런 것도 있다. 북과 처음 접촉한 게 95년 베이징 남북해외 공동회의 때 처음 북과 접촉했고, 96년에 바르샤바에서 남북간 회의를 한 것 때문에 감옥에 가고 그랬는데. 어쨌든 그 때 개인적으로 중요한 목표랄까 사업이 서울에서 남과 북, 해외가 함께 하는 공동행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고, 꿈이었는데 지난 10년 동안 그 꿈이 현실화 됐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일반화됐다. 그런 점에서 저로서는 처음 서울에서 남북해외 공동행사를 할 때 기자회견을 하면서 참 울먹이기도 하고 그랬다.

작년 6.15 행사가 파행을 이루고, 그 파행에서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 그로 인해 사실은 많은 마음 고생도 하고 그랬다. 저는 개인의 영욕의 문제를 넘어서서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느끼고 배운 점은 굉장히 많이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작년 6.15 행사과 관련해서 세월이 더 흐르면 여러 가지 얘기들이 가능하겠지만, 어쨌거나 작년 6.15 파행에 대해서 저와 한충목 위원장이 책임을 지는 것은 맞고, 당연히 그렇게 돼야 됐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 6.15남측위가 어렵고, 지금 사실은 전체 속에서 정치적인 조절이랄까 조율이랄까 이런 것들을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의 층이 많지 않아서 한 위원장이나 저나 역할은 계속하게 됐지만, 그런 점에서는 저는 통일운동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 또 훈련되고 균형감각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통일운동 속으로 들어오고 그 속에서 성장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다.

□ 오랫동안 해오시면서 특히 기억나는, 남북해외 통틀어 기억나는 사건과 인물이 있다면?

■ 가장 기억에 나는 사건은 2002년 8.15 행사 때 북이 서울에 와서 처음 행사할 때 공항에서 북측 대표단을 영접할 때가 제 입장에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거고, 기억에 남는 인물은 많이 있다. 10년 동안 남북해외 많은 분들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제 입장에서 기억나는 몇 사람을 꼽으라면 사실은 북에서는 초기에 실무접촉의 단장을 맡아서 노령에도 불구하고 하여튼 오랫동안 남북관계의 실무적인 진두지휘를 했던 허혁필 단장이 기억이 많이 남는데, 제가 95년에 베이징에서 남북해외 민간회담을 할 때, 북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허혁필 단장이 왔다, 부단장이었던 것 같다. 당시 단장은 지금 외상하고 있는 백남순 선생인 거 같다. 그 때 만나고 다시 만나게 된 거니까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느낌도 있고, 그 이후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북측의 현재, 실무적으로 여러 가지 진두진휘를 하고 있는 리충복 선생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이다. 한번은 금강산 실무접촉 때 내 생일이 있었는데, 생일을 위해서 특별히 독한 북쪽 술을 맥주 컵에 부어주고, 아무튼 남북이 함께 축하를 해주기도 했고, 창원에서 노동자대회를 할 때 남쪽 집행위원장들을 비롯해서 리충복 위원장이랑 즐겁게 마신 적도 있고, 어쨌든 여러 가지 점에서 남쪽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존경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없는데 로마에 가 있는 김종수 신부가 남쪽 사람들 중에는 가장 기억이 남는다. 개인적으로 김종수 신부님 좋아하지만, 이 분이 민화협과 종단을 처음으로 연결했던 분이고, 교단의 보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통일과정에서 종교인들과 종교계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책임의식, 문제의식, 이런 게 분명했던 분이고, 보통사람의 시각에서 통일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부분에서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던 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분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인 것 같다.

어쨌든 함께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때론 많이 싸우고 이랬지만, 우리 한충목 위원장은 저한테는 오랜 동지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아마 여러 가지 점에서 제가 많이 도움을 얻고 의지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 통일운동을 하면서 가정적으로 어려움 있지 않나?

■ 운동하는 사람이 다들 겪을 것이다. 생활의 어려움, 또 집안에서 부모나 처, 자식들한테 자기가 하는 활동에 대한 이해를 얻는 문제는 누구나 겪는 어려움일텐데, 그런 점에서는 저는 남들에 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지금도, 95년에 베이징 회담에 가고, 96년에 바르샤바 갔을 때, 그 때 부인한테 해외여행 가는 것처럼 이렇게 일단 얘기하고, 나와서 들어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안기부 직원들과 같이 곧바로 안기부로 직행했는데, 그것 때문에 평생 계속 죄인처럼 살고 있다.(웃음)

□ 10년 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 되돌아보니까 이런 게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런 하고 싶은 말은?

■ 운동이라는 게 사실은 열정이 중요한 것이다. 열정이 있어야 운동이 성공하는 것이고. 반면에 좀 냉정하게 판단하고 또 그래야 되는 게 같이 있어야 되는 거다. 열정이 앞서는 운동은 좋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편을 너무 많이 가르고, 좋다 나쁘다 또는 선악에 대한 판단을 쉽게쉽게 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런 점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과거의 운동이라는 것은 사실은 권력을 향해서, 불의를 향해서 했던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앞으로 하는 운동의 성격은 사회적 발전과 변화 자체가 중심이 되는 운동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적을 향한 운동이라기보다는 그런 점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운동이 계속 좀 긴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촛불집회 같은 경우가 어떤 점에서는 참 예상치 못한 것인데, 과거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자라나고 성장하는 공식이 대부분 동일했고, 그렇기 때문에 운동권이라는 사회가 형성된 것인데, 사실 지금은 그런 부분에서 운동권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약화되고 쇠퇴했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사람이 만들어지고 커가는 과정은 옛날 운동권 성장방식은 쇠퇴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어디서 사람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촛불집회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런 점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긴장을 많이 해야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라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게 평생 가지 않기 때문에 늘 변화에 민감하고 긴장하는 이런 게 필요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고.

그런 점에서 때론 나태하고 치열하지 않은 자세나 모습들이 저 개인적으로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저도 나이를 먹을만큼 먹어서 단점이 잘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단점을 최소화해 나가려는 노력은 해야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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