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 (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밴플리트 보고서’에서 드러난 독도의 일본귀속결정

2006년 3월 26일 ‘세계일보’가 보도하여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진 미국정부의 기밀해제된 문서가 있다. 그 일간지의 특파원이 미국 버지니아주 렉싱턴에 있는 버지니아군사학원(Virginia Military Institute) 경내의 조지 마셜 박물관 및 도서관(George C. Marshall Museum and Library)에서 찾아낸 ‘밴플리트 보고서(Van Fleet Report)’이다. 한국전쟁시기에 주한미국군사령관 겸 국제연합군총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가 1954년 9월 30일에 작성한 이 두툼한 문서는, 그가 1954년 4월 26일부터 8월 7일까지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의 특사로 한국, 대만, 일본, 필리핀을 돌아보며 미국정부의 ‘1954년도 극동지역 군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수행한 ‘밴플리트 임무(Van Fleet Mission)’에 관하여 아이젠하워에게 보고한 것이다.

독도문제와 관련하여, ‘밴플리트 보고서’에 들어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정보는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공식입장이다. 관련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도 부름-옮긴이)문안을 작성할 때 한국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독도가 일본의 주권에 속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 조약에 따라 일본이 영유권을 포기하는 섬들 가운데 독도를 포함시키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독도문제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한국에게 은밀히 통보하였다. 미국은 독도를 일본영토로 생각하지만, 그들의 영토분쟁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들의 영토분쟁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당연히 제소되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제소에 관한 미국의 제안도 한국에게 비공식적으로 전달된 바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난 충격적인 사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정부는 1951년에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였다.

(위의 보고서는, 미국정부가 전후 일본의 영토문제를 처리하면서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였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한미동맹에 매달린 이승만 정부가 트루먼 정부로부터 받은 정치적 선물이 독도의 일본귀속결정이다. 1951년 9월 8일에 체결된 대일강화조약 제2조 영토조항은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제주도(Quelpart), 거문도(Port Hamilton), 울릉도(Dagelet)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한, 소유를 포기한다”고 되어있다. 일본의 영유권을 말소시키는 우리나라의 섬들을 위의 조항에 열거하면서도 독도를 빼놓은 것은, 실수나 편의적 표기방법이 아니라 미일 두 나라 정부가 사전에 공모한 행위였다. 독도를 일본의 영유권 말소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대일강화조약이 독도의 일본영유권을 인정하였음을 뜻한다.)

2. 미국정부는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자국의 공식입장을 한국정부에게 은밀히 통보하였다.

(미국정부는 그 결정을 구두로 통보한 것이 아니라 외교문서로 통보하였다. 한미동맹에 매달려있는 한국정부는 미국정부로부터 받은 그 통보문서에 발목이 잡혀있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독도침탈책동에 대응하지 못한다. 일본외무성의 지시를 받은 일본정부관리들이 1953년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해상보안청 순시선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독도에 침범하여 조난어부위령비를 깨부수고 ‘일본령’ 표식을 세우는 난동을 부려도, 이승만 정부는 보복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저들의 독도침범은 울릉도 주민들이 조직한 독도의용수비대가 막아냈다. 한국정부가 독도침탈책동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조용한 외교’라 한다. 물론 이명박 정부의 대응도 ‘조용한 외교’이다.)

3. 미국정부는 한일독도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정부의 독도분쟁 불개입정책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자기의 행위를 은폐하려는 술책이다.)

4.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한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에게 독도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라고 비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의 이러한 제소추진방침에 따라, 1954년 9월 25일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한국정부에게 보냈다. 그 외교문서에는 “이 문제는 국제법의 기본원칙에 대한 해석을 포함한, 영유권분쟁이므로 (줄임) 일본정부는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상호합의하여 이 분쟁을 국제사법재판소로 넘길 것을 제의한다”고 적혀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일본정부는 한일국교수립과정에서도 독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국과 수교할 수 없으므로 그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일본정부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는 까닭은, 그들이 재판에서 이겨 독도영유권을 합법적으로 강탈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사실은 일본정부가 독도영유권을 강탈하려고 날뛴다는 것이지만, ‘밴플리트 보고서’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의 절반이다. 세상이 모르는 나머지 절반은, 미국정부가 전후 영토귀속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이다. 만일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일본정부는 독도침탈책동을 공세적으로 밀고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을 국제법적으로 말소시킨 일차적 책임이 미국정부에게 있다는 점이 명백하다.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때로부터 아홉 해가 지났는데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1962년에 일본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만난 ‘밀실협상’에서 독도분쟁을 미국정부의 조정에 맡겨 풀어보자고 제안하였다.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미국정부에게 독도분쟁의 조정을 맡기려 한 것은, 한미동맹에 눈이 멀어버린 숭미주의자의 정치촌극이었다.

‘밴플리트 보고서’에서는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결정과 관련된 두 건의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음이 드러난다.

첫째,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작성한 미일밀약문서가 있는데, 독도가 일본에게 귀속되었음을 명기한 독도관련조항이 그 문서에 들어있다. 1951년 4월 23일 미국 국무부 특별고문이며 대통령 특사로 대일강화조약 체결을 주도한 존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일본총리이며 외상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만난 자리에서 미일밀약을 체결하였는데, 그 밀약에 독도의 일본귀속을 명기한 조항이 있을 것이다. 밴플리트가 자기의 보고서에서, 미국정부가 대일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할 때, 그는 덜레스와 요시다가 체결한 미일밀약을 상기하였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952년부터 일본정부가 독도침탈책동을 개시하였는데, 그렇게 된 까닭은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조항이 담긴 미일밀약문서를 일본정부의 손에 쥐어줬기 때문이다.

일본외무성이 1960년대에 작성한 6만쪽 분량의 한일기본조약 관련 문서철이 얼마 전에 공개되었는데, 그 문서철에는 일본외무성이 까맣게 먹칠하여 지운 부분이 25%나 된다. 그들이 지운 부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독도문제에 대한 미국의 견해’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해석에 관한 사항’이라는 대목이다. 거기에는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대일강화조약이 독도의 일본귀속을 사실상 인정하였음을 일본정부가 외교문서로 입증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결정을 한국정부에게 통보한 외교문서가 있다. 한국정부는 그 외교문서를 보관하고 있으나, 그 문서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미국정부는 1977년 7월 14일부터 독도를 서양해도에 나오는 리앙꾸르 롹스(Liancourt Rocks)라는 지명으로 표기하기 시작하였는데, 후꾸다 다께오(福田赳夫)가 일본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독도가 일본영토라고 주장한 시기도 1977년이다.

2008년 7월 23일 미국 연방정부기관인 미국지명위원회(Board on Geographical Names)는 독도를 ‘주권 미정지(undesignated sovereignty)’로 표기하였다. 그러한 지명표기문제로 한미관계에서 외교적 파장이 일자, 미국 국무부 부대변인 곤잘레스 갤리고스(Gonzales Gallegos)는 2008년 7월 28일 정례언론설명회에서 미국지명위원회가 독도를 ‘주권 미정지’로 표기한 것이 미국정부의 정책변화를 뜻하지 않으며, 미국정부는 수십년 동안 독도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곤잘레스의 해명은, ‘밴플리트 보고서’에 담긴 미국정부의 공식입장과 일치한다. 미국정부는 독도의 일본귀속결정을 바꾼 적이 없고, 다만 그러한 결정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미국정부가 독도를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가 아니라, 일본 시마네현 오끼도에 딸린 일본영토로 귀속시킨 것, 그 결과 일본정부가 독도에 대한 한국정부의 실효적 지배를 국제법상 ‘불법점령’으로 규정하게 된 것, 이것이 한미일 삼각관계의 실상이다.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한일밀약

1965년 1월 11일 서울 성북동에 있는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고급주택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의 특명을 받은 국무총리 정일권과 일본총리 사또 에이사꾸(佐藤榮作)의 특명을 받은 일본 자민당 의원 우노 소스께(宇野宗佑)였다. 정일권은 일제식민지시기에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도정신(皇道精神)’을 외치며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바친 ‘만주제국’ 용정(龍井)헌병사령부 사령(대위) 나까지마 잇껜(中島一權)이었고, 우노 소스께는 나중에 일본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의 총재로, 1989년에는 일본총리로 선출된 일본우익정파의 거물이었다.

정일권과 우노 소스께가 서울에서 만난 목적은 독도문제를 매듭짓는 것이었다. 우노 소스께는 도쿄에서 미리 작성해서 가져온 밀약원안을 정일권에게 보여주었고, 정일권은 찬동하였다. 더 정확하게는, 정일권이 밀약원안에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당시 한일은행 전무 김종락이 도쿄에 건너가 거의 두 달에 걸쳐 건설장관 고노 이찌로(河野一郞)와 만나면서 사전문안합의를 마쳤기 때문이다.

1962년 11월 12일 도쿄에서 일본외상 오히라 마사요시와 만나 대일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무상’이라는 이름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만 받는다는 굴욕적인 김종필-오히라 비망록을 작성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의 친형이 김종락이다. 독도를 강탈할 간계를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본정부 고위관리들이, 외교경험이 전혀 없는 친일파 금융인 김종락을 상대로 자기들의 간계를 관철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1965년 1월 12일 정일권은 우노 소스께가 넘겨준 밀약문서를 들고 청와대에 들어가서 박정희에게 그 문서를 보여주고 그의 서명을 받았다. 박정희의 서명을 받아낸 우노 소스께는 용산에 있는 주한미국군사령부에 가서 서울과 도쿄를 연결하는 미국군 통신망을 이용하여 도쿄에 있는 건설장관 고노 이찌로에게 박정희가 밀약문서에 서명하였음을 알렸고, 고노는 방미일정에 따라 워싱턴에 머물던 일본총리 사또 에이사꾸에게 그 사실을 즉각 보고하였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일밀약은 한국정부가 독도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은 영유권포기협약이다. 그날 한일밀약에 서명하는 박정희의 모습은, ‘대일본제국’의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그리고 ‘만주제국’의 ‘황제’가 있는 서쪽을 향해 아침마다 ‘궁성요배’를 ‘봉행’하며 항일투사들에게 ‘토벌의 총질’을 가했던 ‘황군(皇軍)’ 육군소위 다까기 마사오(高木正雄)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독도영유권문제를 불법적으로 처리해버린 자기들의 죄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꺼린 한일 양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밀약문서를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기로 약속하였고, 밀약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한일협력’을 외쳐온 역대정권들의 은폐술에 세상이 감쪽같이 속았던 것이다.

그런데 ‘월간중앙’이 한일밀약에 얽힌 비화를 알고 있는 관련자들을 취재하면서 밀약의 존재가 42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4월의 일이다. 관련자들의 회고발언을 듣고 재구성하여 보도한 한일밀약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독도영유권문제는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하므로, 앞으로 체결될 ‘한일기본조약’에 그 문제를 포함시키지 말 것.

(이 불포함 규정은 당시 한일국교수립과정에서 이행되었다. 만일 ‘한일기본조약’에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이 명기되면, 일본정부는 독도를 영토분쟁으로 끌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간파한 일본정부는 다섯 달 뒤에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면서 위의 불포함 규정을 관철시켰고, 그에 따라 ‘한일기본조약’에는 독도영유권문제가 명기되지 않았다.)

2. 한일 두 나라는 독도를 각기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어느 일방이 다른 일방의 영유권주장에 반론하는 경우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 것.

(이 규정에 따르면, 일본정부가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을 부정해도 한국정부는 외교대응을 할 수 없다.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의 독도침탈책동에 ‘조용한 외교’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위의 규정이 한국정부의 외교대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3. 앞으로 어업구역을 정할 때, 한일 두 나라가 독도를 서로 자국영토로 인정하는 선을 획정하고, 두 선이 중복되는 해역을 ‘한일공동수역’으로 정할 것.

(이 규정은 한일밀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33년이 지난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부가 제2차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이행되었다. 33년의 시차는 일본정부가 독도침탈책동을 장기전략에 따라 집요하게 추진해오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 어업협정에서 일본정부는 울릉도에 딸려있는 섬인 독도를 울릉도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 떼어내어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끌어내었다. 그 어업협정에 따르면, 원래 독도는 한일 두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해야 하는 섬인데, 한국정부가 임시로 관리하도록 일본정부가 양해한 섬으로 된다.)

4. 현재 한국이 독도를 점거한 현상을 유지하지만, 한국은 그 섬에서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시설을 증축하거나 신축하지 말 것.

(한일밀약은 독도에 대한 한국정부의 실효적 지배를 ‘점거’라고 규정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독도는 한국정부가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경찰이 ‘점거’한 것이다. 경찰의 임무는 치안유지이고, 군대의 임무는 영토수호이다. 수호해야 할 영토인 독도에 해양경찰이 아니라 군대를 주둔시켜야 마땅한 데도 한국정부가 군병력을 독도에 보내지 못하는 까닭은, 위의 규정이 한국군의 독도주둔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5. 한일 양국정부는 위의 조항을 준수할 것.

(한일 양국정부가 이 밀약을 준수하면, 독도영유권은 일본정부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다.)

독도영유권은 한일 두 나라가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인데도, 한일밀약은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도 인정하고 일본의 독도영유권도 인정하였다. 독도영유권을 한일 두 나라가 서로 인정한다는 규정은 언뜻 들으면 형용모순인 것 같지만, 국제법적으로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그 규정은 독도를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영유권 미정지’로 법적 지위를 바꿔놓은 것이다. 미국정부가 독도를 독도(Dokdo)나 다께시마(Takeshima)로 표기하지 않고 리앙꾸르 롹스로 표기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독도를 ‘영유권 미정지’로 규정한 한일밀약을 따르는 것이다.

비록 한국의 국내법이 독도영유권을 확정하였어도 국제법으로는 미정되었다는 말은,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이 국제관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독도영유권이 국내법적으로만 유효하다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한일밀약에 따르면, 독도는 이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가 아니라, 영유권을 확정하지 못한 무국적 섬이다. 그러므로 한일밀약이 남아있는 한, 국무총리가 독도에 가서 입도기념사진을 찍고 한국군이 독도 앞바다에서 독도수호훈련을 실시하면서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독도는 이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가 아니다.

어느 나라의 정부가 무국적 섬을 자국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주권침해가 아니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한일밀약에 의거하여 독도를 자국영토인 다께시마라고 주장하거나, 더 나아가 그 섬에 기습상륙한 일본자위대 병력이 울릉도경찰서 소속 해양경찰 37명을 간단하게 무장해제하고 섬을 무력으로 점령해도, 한국정부는 저들의 독도강점을 국제법적으로 영토침범 또는 주권침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박정희는 사또 에이사꾸의 간계를 알면서도 밀약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독도영유권을 포기하였고, 그 섬을 강탈하려는 일본정부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고, 같은 해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은 전두환이 김종필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대량구속하였을 때, 불안해진 김종락은 자기가 보관해오던 한일밀약 관련자료를 모두 태워버렸다.

그러나 문서를 태워버린다고 해서 비밀이 영원히 감춰지는 것이 아니고, 밀약이 무효화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한일밀약문서는 여전히 한일 양국정부의 문서고에 남아있다. 그 문서는 “한국이 다께시마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탈환해야 한다”는 일본정부의 독도강탈야욕을 부추기면서, 독도분쟁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밀약을 파기해야 그 섬을 지킬 수 있다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1951년, 이승만의 주위에 모여 있던 숭미주의자들이 부산임시수도에서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해줄 한미혈맹”을 열렬히 찬양할 때, 미국정부는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하는 외교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영토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미국정부의 외교만행이야말로 한미동맹이 동맹이 아니라 예속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일제의 괴뢰국 ‘만주제국’에서 ‘내선일체’와 ‘황도정신’을 열광적으로 추종했던 박정희와 정일권을 비롯한 이 땅의 친일파 만주군맥은,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자마자 “미국의 구호물자를 얻어먹고 사느니 일본자금을 들여와 잘 살아보세” 하고 외치면서, 독도영유권을 포기하는 대일굴종에 온몸을 던졌다. 박정희정권은 독도영유권을 포기하고 일본에게 굴종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그 정권이 이룩한 수출주도형 산업화가 독도영유권을 팔아넘긴 한일밀약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러한 산업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영토분쟁을 국제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관련당사국 정부가 작성한 외교문서인데,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을 입증할 외교문서는 없다. 한국정부가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한일밀약문서, 그리고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조항이 들어있는 미일밀약문서만 있다. 외교재앙이 아닐 수 없다.

덜레스와 요시다가 만난 회담에서 미국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미일밀약이 체결된 것은 한미동맹관계가 몰고온 외교재앙이며, 박정희와 사또 에이사꾸가 체결한 한일밀약에서 한국정부가 독도영유권을 포기한 것은 한일협력관계가 몰고온 외교재앙이다. 이 나라의 독도영유권은 미일밀약과 한일밀약에 의해 이중으로 짓밟혀버린 것이다.

예상컨대, 미일밀약과 한일밀약은 외교재앙을 대파국으로 끌어갈 것이다. 대파국이란 독도 앞바다에서 한일 두 나라가 ‘우발적인 해상무력충돌’을 일으키면, 일본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발적 충돌’을 핑계삼아 동해에서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한국의 금융시장을 흔들면서 한국정부를 강박할 것이다. 저들의 강박전술이 노릴 목표는 독도분쟁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이다. 전방위 강박전술에 버티지 못한 한국정부가 제소강요에 굴복하여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분쟁건이 제소되면, 일본정부가 합법적으로 독도영유권을 강탈하는 대파국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명백하게도, 대파국을 막고 독도영유권을 수호할 해결책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해결책은, 이명박 정부가 독도의 일본귀속을 결정한 미일밀약의 불법적인 독도관련조항이 원천무효임을 인정하라고 미일 양국정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 해결책은, 박정희와 사또 에이사꾸가 체결한 불법적인 한일밀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고 이명박 정부가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책 이외에 독도영유권을 수호할 방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게 말할 필요 없이, 이명박 정부는 미일 양국정부를 상대로 자주외교를 추진할 의사도 능력도 자격도 갖지 못하였다. 한미동맹관계와 한일협력관계가 이명박 정부의 사지를 완전히 포박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외교정책에서 자주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이명박 정부에게 자주외교를 바라는 것은, 백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을 헛된 꿈이다.

그렇다면 한미동맹관계와 한일협력관계가 짓밟은 우리나라의 독도영유권을 되찾을 자주역량은 누구에게 있을까? 그 위대한 힘은 저항의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이 나라의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에게 있다. 항일선열의 강인한 자주정신을 이어받은 노동계급과 근로대중의 밀약파기촉구운동만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증유의 대파국을 막아내고 독도를 지킬 수 있다. 이 나라 도심의 밤거리마다 촛불이 다시 켜지고 함성이 지축을 흔들 때, 한미동맹과 한일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기만당한 국민대중은 기나긴 정치적 미로에서 뛰쳐나와 밀약파기를 선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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