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숨은 그림 찾기’

누구나 한번쯤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그려 놓은 그림 속에 숨겨진 물건 찾기는 언뜻 보아선 쉽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때 그 물건은 전체 그림과의 조화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여기 ‘숨은 그림 찾기’란에서는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어디선가 숨은 그림처럼 나서지 않고 묵묵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지난해 9월 타계한 고 표문태 선생과 함께. 윗줄 왼쪽 노세극, 아랫줄 오른쪽 표문태 선생.
[사진-강소영 통신원]
최근 이른바 ‘안산통일장승’이 법원의 ‘공작물 설치금지 가처분 신청’ 기각 판결로 6개월여 계속된 이념공방을 끝내고 처음 세워졌던 그 자리를 지키게 됐다.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에서 안산통일장승에 새겨진 ‘자주통일’이라는 문구가 북한이 내세우는 선전문구라며 철거를 요청, 보수단체의 협박에 안산문화원이 가처분 신청까지 내자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두 달 여 동안 밤낮으로 장승을 지킨 결과다.

안산지역은 또한 보수단체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과 함께 통일이야기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해마다 6.15, 8.15때에는 김밥 만들기, 걷기대회 등 주민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하고 최근의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처럼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지역에서 활발하게 주민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현재 안산은 매주 금요일마다 광우병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가 개최되고 있다.

이처럼 안산지역은 보수단체의 갖은 훼방으로 통일운동을 하기에 척박한 환경이지만 활동가들의 노력으로 진보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 20여 년 전 안산에 정착, 안산을 진보도시로 바꾸고자 하는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안산본부(이하 6.15안산본부) 노세극 대표를 만났다.

‘동생의 죽음, 사회의 부조리에 눈 떠’

재수를 하고 동국대 행정학과에 78학번으로 입학한 노 대표는 소위 일류대에 입학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워 몇 번이나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단다. 그러다 사법고시까지는 아니라도 행정고시라도 패스를 하면 일류대학에 대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고시공부를 할 계획으로 고시반에 들어갔다.

과 유일의 고시반 장학생으로 촉망받던 그는 졸업 전 고시패스를 목표로 공부만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으나 같은 과 동기가 자꾸 향린교회를 데려가거나, 사회과학서적 등을 빌려주며 학생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거창고 출신의 이 과 동기는 학생운동 출신의 선생님 덕에 이미 전환시대의 논리 등 리영희 교수의 책을 다수 읽었던 터였다. 그의 덕에 다른 삶에 대해서 알게 되긴 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이라 장학금을 받아야만 해 학생운동에 참여하자는 부탁을 한사코 거절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1979년 6월, 비가 오던 날이었다.

그 에게는 3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5살씩 터울이 있어 막내 여동생과는 총 15살 차이가 났고 대학교 2학년생인 그는 6살짜리 막내 동생을 늘 안아주고, 볼을 맞춰주는 등 끔찍이 예뻐했다. 그렇게 예뻐하던 여동생이 비가 오던 그날, 집 앞에서 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집은 약간 비탈진 경사 길에 위치한 곳으로, 평소 차가 다니지 않는 골목길인데 그곳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아보니 언덕 위에 있는 부잣집 별장에서 평소에는 넓은 흙길로 다니는데 그날은 비가 와 차에 진흙이 묻을까봐 좁디좁은 골목길로 들어서다 사고가 난 것이었단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고, 가진 자에 대한 분노에 그 집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두 다 깨부술 정도였다. 인생이 참 허무한 마음에 한 달 정도 학교에 가지 않고 시험도 보지 않았더니 성적은 엉망이었고, 그렇게 방학을 맞았다.

한 달간 칩거하다시피 한 그는 ‘개인을 위해 입신출세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고시반에서 이 공부를 해서 뭐하나’하는 마음에 공부를 포기하고 부조리에 대항해 사회를 바꾸는 일에 나서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는 고등학교 후배 등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만해 한용운의 정신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의 사상 연구회 ‘만당’이라는 서클을 조직, 운동을 하는 선후배들을 모아내는 등 1979년 가을, 그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항상 믿어주던 든든한 아버지’

▲ 촛불은 들고 청계광장에 서 있는  6.15 남측위 안산본부 노세극 상임공동대표.[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객원기자]
그러던 중 10.26 사건으로 교문 앞에 탱크가 주둔하기 시작했고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러다보니 밖에서 세미나를 하곤 했는데 오히려 책도 많이 읽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계기가 됐다고.

이 시기, 부평지역의 민주노조 반도상사의 야학을 6개월여 진행하기도 했다. 그의 활동범위는 넓어지고 겨울 방학 이후에는 조직이 잘 갖추어지기에 이른다.

3학년이 되던 1980년 개학을 하자마자 그는 의도적으로 나서 과대표에 당선이 됐다. 과대표가 된 그는 처음으로 학회 사무실도 만들고 ‘학원 민주화, 어용교수 퇴진’ 등을 요구하며 과 단위의 최초 집회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우리가 할 일은 싸워서 교도소에 갈 일 뿐이다’라는 마음으로 적극 싸우곤 했다.

그러다보니 형사들이 찾아다니고 아버지를 협박하기도 했고 그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의 봄’으로 유명한 서울역 집회에서 아버지와 삼촌을 만난다. 학생회 일에 야학에 몸이 열 개라도 바쁜 그가 2주 정도 집에 들어오지 않자 부모님이 걱정되는 마음에 직접 만나러 나오신 거였다.

그는 ‘나를 잡으러 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아버지와 삼촌도 투쟁에 동참하려고 나온 줄 알았다’고 회상한다.

강제로 끌고 가려는 아버지에게 그는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나서는데 비겁하게 도망을 가서야 되겠습니까?”했고, 그제야 아버지는 “네 뜻대로 하거라” 했다.

대한전선의 노동자인 아버지는 진보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곤 했단다. 당시 진보신문인 동아일보의 1면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읽어내고 국회의원 200여명의 명단은 물론 어떤 이라는 것을 다 외울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아버지는 후에도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믿어주었고, 그만두라고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한다.

‘구속, 그리고 할아버지의 월북 사실인지’

그렇게 4학년이 되어서 1981년 3월 20일 경, 집회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운 살벌한 분위기에 ‘광주학살 주범 전두환 살인마 타도’ ‘미국은 우방이 아니라 학살의 배후다’며 성조기까지 태울 계획을 세우고 유인물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성조기를 방화하면 당장 반미, 반국가 행위로 되기에, 주변에서 그가 속한 조직이 뿌리째 뽑힌다며 만류가 있었기에 그는 성조기를 태우는 대신, 좀 더 효과적인 집회 방식을 고민했다.

교내에 경찰이 상주하다시피 하던 그 시기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면 10분도 되지 못해 바로 끌려가기 때문에 그가 생각한 방법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유인물을 뿌리고 집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경찰들이 나무로 기어오르면 쳐내고 하면서 2시간이 넘도록 나무 위에서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한 그는 이 사건으로 1981년 5월 6일 중부경찰서에 연행되면서 허리띠로 채찍질을 당하는 등 많이도 맞았다.

연행 후 할아버지의 월북 사실을 알게 됐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월북을 했고 그 일 때문에 집안이 고초를 당하고 집안이 기울어진 것이다.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 집에 가끔 ‘이상한 놈’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알고 보니 중앙정보부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노 대표의 가족들이 사는 게 궁상맞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사찰을 중지했던 터였다.

어려서 “친구들에게는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난 왜 없냐”는 그의 질문에 부모님들은 늘 얼버무리곤 했단다.

감옥에서는 할아버지의 경력 때문에 빨갱이의 씨앗이라며 더욱 괴롭혔고 이에 맞서 싸우던 그는 징벌을 받고 순화교육도 수차례 받아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단련이 되어야 나와서 힘들지 않다고 마음을 먹었고 할아버지 덕분에 분단문제에 관심이 높아지며, 그렇게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쳤다.

‘노동운동에 첫발 내딛어’

출소한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명학역 근처의 한 박스공장에 입사를 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힘들어 조직은커녕 매일 집에 와 쓰러져 자기 바빠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겠다고 판단한 그는 영등포에 위치한 서울직업학교에 다니며 냉동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그러나 취직을 하려니 냉동기능사는 호텔이나 큰 건물의 공사하는 현장으로 돌아다녀 사람들을 조직하고 운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무조건 군포에 위치한 범양냉방을 찾아갔다.

당시 인사담당자는 이렇게 직접 찾아와 일을 하겠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며 그를 무척이나 환영했다. 그렇게 1984년 6월 범양냉방에 입사했으나 그는 1년여 만에 대학 제적이라는 사실을 감췄다는 이유로 이력서 허위기재로 해고를 당한다.

그는 한국노총 안양지역본부를 찾았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오창환 위원장의 권고로 한 달 만에 복직을 하게 됐다. 다시 들어간 그는 스타가 되었다. 그가 지날 때마다 동료들은 박수를 쳐주며 환영을 했고 그는 당시 회사 김윤주 노조위원장으로부터 교육부장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가 노조 간부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회사 측에서 일방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전출시키거나 부서를 옮기거나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웬일인지 김 위원장은 약속을 차일피일 미뤘고 그는 서울 AS파트로 발령이 났다. 그 후 그는 대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그것마저 김 위원장의 선거구 조정 등 방해로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김 위원장은 자신이 운영하는 목장을 떼 주겠다며 목장을 운영해보라고 하기도 하고 유학을 하라고 회유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회사 측은 아무 연고도 없고 또 업무와도 연관이 없던 부산 영업소로 발령을 냈고 그는 이를 거부, 또다시 명령불복종으로 해고됐다.

한 달 여간 출근 투쟁을 벌이고 밖에서 조직 활동을 한 그는 학생운동출신의 비합법노동자써클 ‘A그룹’을 만들었다. ‘A그룹’은 안양지역 노동자회의 모체로 87년 6월 항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지역 진보세력의 대표 역할 수행 중’

▲ 촛불문화제 참가한 6.15 남측위 안산본부 노세극 상임공동대표.[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객원기자]
그리고 1988년 현장에 계속 남아 있느냐 안양에서 조직 활동을 하느냐를 고민했던 그에게 한 선배가 안산의 노동상담소장 자리가 공석이라며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고, 그렇게 그는 안산에 정착을 했다.

1995년까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무료상담을 했고, 조직보다는 노동자 스스로 일어나야한다는 마음에 순수지원을 목적으로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성심으로 하는 상담에 전국적으로 임금, 산재, 해고 문제 등이나 노조설립 상담 등을 하곤 했다.

지금도 길을 걷다보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라고.

그러다가 민통련, 전민련 등의 모임에 나가게 되면서 조직의 필요성이 커져 ‘안산 산재노동자회’를 만들었고, 1992년에는 노동 활동가 조직인 ‘한벗 노동자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역임한다.

이런 것들을 발판으로 1994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안산시의원에 당선, 1998년까지 활동을 한다.

시의원을 하면서 지방정치에 눈을 뜨면서 정치세력화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기성정당보다는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국민승리21’의 발기인 안산대표로 참여를 하고 1999년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안산시흥지부장을 역임하고 2000년 2월 민주노동당 당원 지구당위원장을 맡는다.

또한 전국연합 안산지부장 등을 맡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지역의 진보세력의 대표 격이 됐다.

그러나 1998년 지자체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다. 그는 ‘자만했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상대후보가 동창, 선후배 등을 동원한 조직 선거로, 정책대결에서 노 대표가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60여 표 차로 낙선을 했다. 낙선을 하며 얻은 것은 조직화하지 않으면 정치적 성공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란다.

이후 그는 총선에 출마를 했었고 지난 총선에도 주변의 권유가 많았으나 선거의 휴우증이 컸고 ‘이기는 선거에 나가자’는 생각에 올해는 한사코 고사를 했다.

특히 그는 이번 민주노동당의 분당에 참 마음이 아팠단다. 정치가 우리나라의 사회와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많기에 진보정당이 중요한데 당이 전체의 운동진영을 아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한 현장 노동자뿐만 아니라 일반주민들까지 포괄하는 조직 기반 있어야 당에 힘이 실린다는 생각에 그는 지난해 12월, 생활, 경제, 정치, 문화 등을 모두 포괄하는 공동체운동을 만들어 볼 생각으로 ‘안산주민연대’를 만들었다.

생활운동을 하려면 경제생활을 해야 하기에 공동체를 만들어 경제적 기반을 만들자는 취지로 정치지향을 끊임없이 하며 함께 경제적인 자립기반을 세우자는 생각에 식당, 고물상, 학원 등을 추진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 현재 100여명의 회원을 모집한 그는 공동체에서 경제든, 정치든 주민의 요구에 맞는 훈련을 할 생각이다.

‘생활 속에서 느끼는 통일 중요’

안산은 현재 다른 지역에 비해 활동가가 많고 지역성이 있는 곳으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이 양축으로 발전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난 1995년 그가 시의원으로 재직 당시 지역의 진보진영이 결집해 8.15행사를 성황리에 끝냈고 이후 8.15행사가 지속되다가 2000년 6.15이후에는 6.15, 8.15행사를 지역의 민간행사로는 큰 규모로 진행하고 있다.

그는 특히 민족화합운동연합(이하 민화련)에서 공동대표를 맡으며 지역의 활동뿐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적극적이다.

통일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고 부르짖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는 노 대표는 생활 속에서 운동을 해야 확산이 잘되고 정치적으로 발전하며 힘이 커진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그는 민화련에서 통일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기획한 개성공단에 평화의 숲 만들기에 큰 애착을 갖고 있다.

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이 ‘통일이 미래인 줄 알았는데 가까워 너무 설레는 마음에 잠이 안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하는 그는 “이런 행사들이 이북 돕기보다 통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처럼 남과 북의 민족경제의 고리를 만들어 흔들리지 않도록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는 ‘미군철수’가 통일을 위해 당연히 선행되어야 할 일이지만 단순 구호만으로는 대중의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며 생활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로의 교류와 만남이 중요하고 경제 사업들의 영역이 확대돼 북에서 생산된 생필품이 확대된다면 남북관계가 경색이 돼 교류가 단절되더라도 우리의 생활이 어려워져 저절로 교류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안산에 처음 들어올 때 20년 정도 분골쇄신하면 많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하긴 했지만 진보가 보수를 능가하기는커녕 진보세력을 성장시키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안산은 현재 반월, 시화 등에 중소기업들이 다수 밀집해 있어 노동자들이 많고 또 분신 사건도 많지만 워낙에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라 노조가 없는 곳도 많고 노동자들의 이직이 잦아 노조의 유지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안산을 울산, 창원 못지않은 진보적이고 민주적이며 역동적인 개혁의 도시로 만들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 20여년 동안 안산에서 살고 활동한 그의 소박한 꿈, 지역에 직접 민주주의가 살고 안산이 평화통일의 도시로 자리 잡길 바란다고 하는 그의 바람이 이루어질 날이 머지않음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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