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와 분단시대를 겪으면서 격동기 우리나라의 악단을 이끈 바이올린계의 거목 안용구(80) 선생이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왔다. 전(前) 피바디 음대 교수(1968-2002)인 선생은 인터뷰 내내 인자하고 해박하고 그리고 열정적이었다. 한때 ‘반체제 인사’로 불린 선생은 무엇보다도 최근 뉴욕필의 평양공연에 감개무량해 했다. 선생은 특히 “음악에는 위대한 힘이 있다”며 북미관계처럼 갈등구조에서 음악의 역할을 강조했다.

선생은 북미관계나 남측 정부에 대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미국 대선과 관련 “나는 단연 오바마 편”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가 하면, 최근 북미관계의 호전에 대해서도 “내가 수십년 걸쳐 바라던 것이 오지 않나 기뻐하고 있다”고 감격해 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도자 자질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쇠고기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젊은이들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선생은 자신이 음악가일 뿐 사상가나 이론가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에 선생은 경지에 오른 음악을 통해 음악 외적인 것에도 통달해 있었다. 선생은 특히 자신의 자서전 『한 마리 새가 되어』가 많이 읽히길 원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후대에게 통일을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 팔순맞이 노신사와의 인터뷰는 5월 28일 오후 3시 30분부터 선생의 숙소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1시간여에 걸쳐 이뤄졌다. / 이계환.김치관 기자

팔순맞이 노신사의 다목적 여행

▲ 안용구 선생은 팔순을 맞아 다목적 여행차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뉴스 : 서울에 오신 걸 축하드린다.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됐는지?

■ 안용구 : 실은 제 딸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있다. 미국엔 오케스트라가 수없이 많지만 5대 오케스트라가 있다. 보스톤, 뉴욕, 시카고, 클리블랜드, 그리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다.

우리 딸이 입단한지 10여년 되는데, 한국 사람으로서는 두 번째로 들어갔다. 여자로서는 처음이었다. 첫 번째 들어간 사람은 그만 두고 한국에 들어와 있다. 요즘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있다.

그 딸이 지금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는데 일본, 한국, 중국으로 간다. 일본에서 같이 지내고 내가 한국에 일찍 오기 위해 먼저 왔고 딸은 오늘(28일) 한국에 올 것이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는 5월 30일과 31일 이틀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다.

여기서 연주 끝내고 금방 북경으로 가는데, 우리 부부는 여기 더 있다가 5일 중국 광저우로 가서 오케스트라와 같이 만나 상해로 간다.

마침 내가 금년에 팔순이 돼서 딸하고 사위가 자기네들이 팔순을 기념해주고 싶은데 비용을 댈테니 딸하고 같이 여행하라 해서 아주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다.

25일 서울서 내가 가르친 제자, 미국 피발디 음악대학 제자들 3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명단을 가리키며) 강동석, 김민 다 있다. 이것도 나한테는 여행하는 목적이었다.

금년 4월에 내가 쓴 자서전『한 마리 새가 되어』(한길아트, 2004) 책을 영어로 번역해서 출판이 됐다. 이번에 들린 이유 중 하나가 이 책의 일본어 번역 문제였다. 출판은 아직 안 됐지만 제일 중요한 번역이 끝났다. 출판을 알아보기 위해 왔다.

6월 1일 부산에서 제자들이 모인다고 그러고, 6월 3일에는 대구에서 제자들이 모이고, 6월 4일 서울로 왔다가 그 다음에 (중국) 광저우로 떠난다.

“1990년 미국에서 ‘남북 가곡의 밤’ 때 처음으로 통일운동에 나섰다”

▲ ‘남북 가곡의 밤’을 통해 통일운동에 첫발을 내딛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팔순 기념 여행도 되고 제자들도 만나고, 책도 준비하고, 이번 나들이의 의미가 많은 것 같다. 북측에 네 번 다녀오신 걸로 아는데, ‘윤이상 음악제’에도 갔다 왔나?

■ 윤이상 선생은 여러 번 북에 갔다 왔고, 북에서 윤이상 씨의 작품을 연주할 뿐만 아니라 연주해서 CD로 만드는 큰 음악회가 있었다.

보통 클래식은 북에서도 연주를 많이 하지만 현대음악, 특히 윤이상 씨 음악은 현대음악으로 북쪽 사람에게는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들 수 있으니까 같이 가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우선 윤이상 씨 댁에 가서 동독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에서 조선민항을 타고 평양에 들어갔다. 첫 번째였다.

북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연주할까 했는데, 깜짝 놀란 게 벌써 준비를 다 했는데 거의 완벽했다. 거의 할 말이 없었다. 연주하게끔 다 준비가 돼 있어 내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 그 이후 ‘범민족 통일음악회’에도 참가한 것으로 안다.

■ 그것도 윤이상 씨가 주관해서 ‘범민족 통일음악회’를 했는데, 그전에 미국에서 ‘남북 가곡의 밤’을 시작했다.

나하고 제일 가까운 제자 이준무가 있는데 그 사람은 뉴욕에 살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통일 무드를 일으키기 위해서 한 가수가 나오면 남쪽의 가곡, 북쪽의 가곡 양쪽을 다 부르고, 우리 집사람도 음악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노래를 잘해 같이 참여했다. 성과가 굉장히 좋았다. 1990년이었는데 통일운동이랄까, 직접 나서서 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이 첫 시초고, 그 다음에 윤이상 씨가 주관한 통일음악회에 세계 각국에서 전부 다 왔는데 남한에서도 왔다. 미국에 있는 음악가들도 참여했고, 미국에 있는 우리 한국사람만이 아니라 미국사람과 단체도 와있어 깜짝 놀랐는데, 동구라파, 중국, 동남아, 서구라파 여러 사람들이 와서 대성황이었다.

나도 가서 연주했는데, 내 책(자서전)에 다 써있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것이 남쪽의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6.25때 월북해서 새로 결혼해서 난 아들이 북의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됐다. 남쪽에 있던 그분의 딸은 첼리스트가 돼서 그 첼리스트와 북의 이복형제 피아니스트와 내가 합쳐서 트리오로 아주 감격적인 연주를 했다.

□ 당시 연주는 더했겠지만 모양부터가 감격적이다.

■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연주였다.

“순전히 남북화해에 도움이 될까 해서 방북했다”

▲ 한때 '반체제 인사' 불렸던 안용구 선생.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2002년 ‘통일의 문을 여는 음악회’ 참가가 마지막 방북인가?

■ 북의 교향악단이 동구라파에는 연주를 많이 가지만 공산국가가 아닌 서방 쪽 나라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왔다. 일본에 올 적에, 그때도 내가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 해서 그쪽에서 요청해서 갔다. 그때 일본에 와서 연주하는 것에 도움을 주고 그런 것이 있었다.

□ 여러 차례 북쪽을 갔다 왔는데, 한때 ‘반체제 인사’, ‘반정부 인사’로 불린 것으로 알고 있다.

■ 그 시대에 민주다, 통일이다 이야기하면 전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극도로 그걸 과도하게 신경 쓰기 때문에 남쪽에서 그런 부작용도 많았다.

사실 윤이상 씨 같은 사람은 북에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사람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무슨 정치적인 그런 것이 아니고 순전히 남북화해 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것 아닌가. 그때 정권은 전부 공산당 지시받아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국민들에게 그렇게 오도했다.

처음에 외국에 와서 보니까 미국에 있는 사람 같은 경우 훨씬 자유스럽지만, 그런데도 오히려 지금 와서 보면 이념적인 자유가 오히려 지금 남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 같다.

□ 그렇게 오해를 사면서 북쪽으로 공연 가고 통일운동도 하게 된 계기나 마음은?

■ 마음이야... 내가 무슨 북에 스파이 노릇을 한다거나 그런다면 몰라도. 사실은 그 후에 몇 번 한국에 가르칠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중앙정보부 요원이 24시간 따라다녔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무슨 뭐가 있으면 내가 북에 갔다 왔다 하는 그것 외에는 내가 양심적으로 죄진 게 없으니까 떳떳하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는데 그 사람들이 붙들어 놓고 물어보지 않았다.(웃음)

□ 북쪽에 갔을 때 월북 음악가도 만난 것으로 안다.

■ 심지어 은사를 만났다. 서울대에서 같이 공부한 사람 중에서 제일 우수한 사람들이 상당히 더 의식화된 사람들이었었다.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때 납북된 게 아니고 자진해서 올라갔다. 내 은사도 한국 신문은 납북됐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납북된 게 아니다. 다 자진해서 간 사람들이고 가서도 북의 주요한 위치에서 아주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몇 번 다녀간 동안에 대부분 선생과 동료들이 돌아가셨다.

□ 북쪽 음악가들도 많이 만나지 않았는가?

■ 많이 만났다. 제일 중요한 사람이 백고산인데, 내가 어렸을 때 들었는데 천재중의 천재였는데, 그분은 모스크바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제자고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이고 지금 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그 사람 제자다.

그 다음에 김병화란 사람은 사실 재일동포인데 부인은 일본 사람이다. 일본서 활약을 했는데 굉장히 천재적으로 기가 막힌 음악가인데, 일본에서 나서 일본서 음악 하다가 자기가 조국에 가서 활동하겠다고 일본 부인을 데리고 완전히 (북으로) 귀화해 버렸다.

“뉴욕필 평양공연 감개무량했다”

▲ 선생과의 인터뷰는 선생의 숙소인 프레지던트 호텔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이번에 뉴욕 필하모닉 로린 마젤이 평양에 갔을 때 협연한 김병화 씨인 것 같다. 북쪽에 가서 남쪽에서 월북한 음악가 그리고 북쪽의 음악가를 다 만난 것 그 자체가 의미있는 민족화해의 일을 하신 것 같은데, 북쪽의 음악적 특징과 수준은?

■ 여기서 오해가 있는데 뉴욕 필하모닉이 북쪽에 갈 적에도 일부에서 일부러 나쁘게 쓰느라 그렇겠지만 부시 정권에서 이북은 악마의 나라로 선전했고 이북 같은 데는 자기네 음악에는 완전히 막힌 것으로 선전했는데, 사실 내가 가보고도 놀랐지만 이번에 뉴욕 필하모닉이 가서 깜짝 놀란 게 사실이었다.

그만큼 물론 좀 폐쇄된 사회고 서방하고의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가 본 결과로서는 그 사람들의 수준이, 그때 많이 배운 게 구소련인데 소련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 거기서 모두 배운 거라서 그 사람들의 기술적 수준이 아무데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은 것이 시스템이 허비가 없는 것 같다. 교육을 하는데 우리 서방에서는 부잣집 아들딸이면 누구나 음악을 시킬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지만 그쪽에서는 아주 어렸을 때 어린 아이의 소질, 경향을 빨리 봐서, 그것을 잡아서 그대로 발전시키기 때문에, 조금도 허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인 면에서 어린 아이들 성장하는 것을 보면 상상을 못할 정도로 빠르다.

내가 거기 가있는 동안 여자 안내원이 있었는데, 보니까 안내를 하는데 역사적인 모든 것을 설명을 잘하는 것뿐만 아니라 노래 부르고, 기타 치고, 피아노도 치고 어렸을 때 음악을 다 배운다. 북에서는 음악이 다 필수로 돼있다. 그 안에서도 특수하다 생각하면 특수교육을 시킨다. 집중적으로. 스포츠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기 때문에 허비가 없이 효율적으로 교육시킨 것 같다.

□ 뉴욕 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을 보고 소감이 어땠나?

■ 감개무량했다. 사실 부시 정권에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뉴욕 필하모닉이 자기들이 평양에 가겠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계획이 다 돼서 가는 것이다. 일반인은 원해서 갔다고 보지만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것 아닌가? 아직도 국교 수교가 안 됐는데, 그런 걸 보면 북미관계가 상당히 진전이 있지 않나 생각하고 크게 기대하고 있다.

□ 궁금한 게 북쪽과 미국이 신뢰구축, 관계정상화로 나아가는데 뉴욕필 공연이 과연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할까였다.

■ 나는 상당히 걱정했다. 물론 공연하는 건 하는데, 북에서는 적국이라면 적국인 사람들을 불러다 공연하는데 큰 실수하지 않을까? 의외로 가서 연주한 뉴욕 필하모닉도 그렇고 북쪽 사람들도 굉장히 호의적으로,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한다.

□ 로린 마젤이 동평양대극장에서 공연하고 ‘이번 공연은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 미국이 첫 번째 구소련하고 국교 수교를 할 적에 그때 보스턴 오케스트라가 갔을 것이다. 두 번째로 중국하고 국교 수교할 때는 딸이 있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북경에 갔다. 이것이 그것과 똑 같은 과정이다. 정말 역사적인 것이다.

□ 그런 걸로 보면 이번 뉴욕필 공연도 북미관계 개선에 긍정적 역할을 했을 것 같다.

■ 틀림없는 것이다. 세계적인 무드가 그렇고, 부시 정권이 사실 인기가 없는데 이런 역사적인 좋은 결과가 나타나면서,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하나의 좋은 역사적인 일을 남겨놓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 자서전 책을 보니까 북에서 만난 김병화 씨 이야기가 나오는데, 뉴욕필 방북시 조선국립교향악단 지휘자로 나왔다. 오랫동안 상임지휘자로 활동해왔는데 인상이 어떤가?

■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아주 얌전하게 생겼고, 굉장히 꼼꼼하고 실력있는 분이다. 내가 놀란 것은 그쪽에서는 이해 못할 것 같은 그런 난해한 곡을, 연주하기 어려운 곡을 김병화 씨라는 이가 윤이상 씨의 제일 중요한 작품을 전부 녹음해서 CD로 팔리고 있다. 그건 보통 실력자가 아니다.

“나는 단연 오바마 편이다”

▲ 선생은 1968년 피바디 음대 교수로 가서 만 40년째 미국에서 살고 있다.[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선생이 1968년 피바디 음대 교수로 가서 만 40년째, 인생의 반을 살고 계신데, 올해가 미국 대선이다. 꼭 정치적이 아니라 편히 의견을 듣고 싶다. 공화당 매케인 후보와 민주당 오바마 후보가 붙을 공산이 큰데 누가 되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 나는 단연 오바마 편이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 등록을 해야 한다. 그 이유가 처음에 오바마라는 사람은 전혀 알려지지 않아 힐러리 클린턴이 나온다고 해서 민주당이니까 잘 됐다 생각했다. 사실 지금도 누가 민주당 후보가 된다면 누가 하더라도 그 편을 들겠다.

그러나 내가 우선 힐러리 클린턴의 생각이 맘에 안 든 것이 이 사람은 첫 번부터 이라크 전쟁을 찬성한 사람이어서 우선 마음에 안 들었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인기를 어떻게 얻느냐면 무식한 백인, 백인 블루칼라, 특히 여자한테 인기가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미국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힘으로 세계를 지배해야 하는데 무슨 타협이고 뭐고 있느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힐러리가 당선이 되면 자기가 국방장관 역을 해서 세계를 힘으로, 군사력으로 잡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

오바마는 뭐라 했느냐면 소위 유화정책을 써야 된다, 이렇게 미국이 2차 대전 이후에 더구나 소련이, 공산국가가 없어진 후에 미국이 아주 독단적인 정책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오바마는 지금 미국의 국력 사정도 달라졌지만 많이 약해졌다고 본다. 이런 이야기가 쉽게 나올 수 없다.

유화정책을 쓴다는데, 베네수엘라 차베스나 북한이나 이란과 모두 대화로 해결해야지 강압적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오니 극우단체들이 오바마에게 ‘너는 테러리스트와 타협하려느냐’고 트집을 잡는다.

미국 전체에서 부시 정권이 너무 인기가 나쁘기 때문에 공화당 전체 인기가 너무 떨어져 있다. 현재 이런 상태에서 선거를 한다면 무슨 변화가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나는 꼭 대부분, 더 많은 사람들이 민주당 쪽에 표를 찍지 않을까 생각한다.

□ 미국 대선 가도에서 특별한 변수가 있지는 않을지?

■ 힐러리도 매케인도 뭐 하나 기적을 바라고 있다. 현재 흐름이나 결과로 봐서는 그런 기적을 앞으로 선거에서 보는 것은 힘들 것이다.

□ 흑백대결이 잘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지?

■ 사실 숫자적으로는 아무래도 절대적인 백인사회 아닌가. 그렇지만 오바마가 흑인한테만 표를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만큼 백인한테도 표를 받아서 그러니까. 흑백문제도 2,30년 전 이야기면 들고 일어날 수 있지만 만약 흑백문제 가지고, 굉장히 센시티브한 문제인 흑백문제를 잘못 이야기하면 큰코다친다.

그런데 흑백문제뿐만 아니라 종교문제도 크다. 종교도 특히 남부 침례교, 그 사람들은 굉장히 극우다.

□ 이번 부시 지지자는 그쪽이 많지 않았는가.

■ 절대적이다. 힐러리하고 오바마를 비교해 볼 때 그 안에서도 힐러리 쪽이 종교적인 것도 많다. 종교자체도 그렇고 흑백문제도 미국이 많이 발전한 셈이다. 통계적으로 볼때 유식층 젊은이 또 종교나 이념문제를 초월한 사람들이 오바마를 지지하는 것 같다.

“음악이라는 것이 위대한 힘이 있다”

▲ 선생은 음악의 위대한 힘을 믿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선생은 ‘일제시대와 분단시대를 겪으면서 격동기 우리나라의 악단을 이끈 바이올린계의 거목’이라 표현되는데, 음악을 통해 많은 제자를 키우고 통일운동에도 참가했다. 때로는 음악이 정치적 구호나 군사적 무기보다 위력적일 수 있나? 그렇다면 음악과 예술이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가?

■ 내가 참여했던 ‘남북 가곡의 밤’, 통일음악회 그리고 이번에 뉴욕 필하모닉 등을 보면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 이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이해를 하는데 제일 먼저 들어갈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미국이 소련하고 할 때나 중국하고 개방할 때 전부 다 음악을 썼다. 똑 같은 부분으로.

음악은 정치적 구호나 군사적 무기보다 더 힘이 있다. 물론이다. 결과를 보라. 미국에서 북쪽을 악마의 나라라 생각하지만 북쪽도 미국을 악마의 나라로 생각할 텐데 서로가 음악을 통해 깨뜨렸다.

□ 지금 북미관계가 좋다. 6자회담도 열릴 것 같고.

■ 내가 수십년 걸쳐 바라던 것이 오지 않나 기뻐하고 있다.

□ 지금과 같은 한반도 상황이 오기까지 선생께서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번 뉴욕필을 통해서도 느낀 것인데, 음악과 예술의 힘이 느껴진다.

■ 음악이라는 것이 위대한 힘이 있다. 베토벤이라는 사람이 위대한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그런 음악이 그냥 음악적 재간으로만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교양이라든가, 철학이라든가, 이념이라든가 이런 것이 다 합쳐서 나온 것이다.

제9교향곡 <합창>이 베토벤의 대표적 작품인데, 거기서 나온 가사는 독일 쉴러의 시를 빌려서 썼지만, 쉴러의 시가 뭐냐면 인류가 형제라는 ‘인류애’다. <합창> 교향곡이 그런 걸 부르짖는 음악이다. 그래서 동독하고 서독하고가 합치지 않았나. 그때도 동독과 서독이 통일할 때도 제일 첫 번에 한 곡이 바로 <합창>이었다.

□ 음악이 갈등구조에서 제일 먼저 들어가서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방금 음악은 기술이 아니라 인격과 철학이라 말했는데, 어떻게 알 수 있나?

■ 느낌이 있다. 심지어 연주를 하는데 재간이 좋아서 하는 것 하고 그 사람의 정신적인 교양이라든가 자기 철학이라든가 이런 것이 아무래도 예술에는 숨길 수가 없다. 솔직하게 다 나온다.

“자서전 통해 통일 없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 "자서전을 솔직히 쓰다 보니까 구질구질한 얘기만 다 써놨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자서전에서 아주 인상적이고 철학적인 대목이 있다. “우리가 만든 소리의 파장은 점차 약해져 귀에는 안 들리지만 우주 속에 어떤 흔적으로 영원히 남아 있다고 한다면, 나의 바이올린 활을 통해서 이 우주에 퍼져나간 소리의 파장도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한 부분이다.

■ 음악이라는 것을 누가 “음악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렇게 말했다. 그걸 갖다가 일일이 말로 표현 안 된다. 그림으로도 안 되고. 느낌과 생각으로서 된 거라 생각한다.

나는 사실 일생에 일기도 한번 안 써본 사람이다. 내가 미국에 가서 34년을 가르쳤는데 은퇴하고 나서 누가 권유하기를 “당신이 이렇게 미국에 살고, 격동기를 살았으니까 자서전을 써봐라”, 그래서 내가 “여보쇼, 아직도 본처하고 살고 있는 나같은 사람의 자서전을 누가 읽겠소?” 그랬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자손들이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나 궁금해 할 것 같고. 지금 우리 음악이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 이것이 하루 이틀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선배들이 어떻게 고생해서 이만큼 끌어올렸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의 목적이 미국에 살지만 마음은 조국에 있다, 조국도 그냥 조국이 아니고 갈라져서 고통 겪고 갈등 겪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이 도움이 될까.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 통일이라는 게 없으면 우리 민족의 장래가 없다. 우리 후세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이 책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

통일이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니고 갈라놓은 것은 외국이지만 우리가 같이 통일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상호 이해하고 사랑하고 자기희생하고 그것 없이는 절대로 통일 되는 것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내게 됐다.

□ 통일 하는데 남북의 힘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에 공감한다. 책을 몇 차례 봤는데 굉장히 재미있다. 자서전이나 지나간 개인 스토리는 자기 자랑만 할 수도 있는데 하기 싫은 부끄러운 이야기도 많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더 원한다.

■ 솔직히 쓰다 보니까 구질구질한 얘기만 다 써놨다.

□ 구어체로 쉽게 쉽게 썼고, 또 ‘내 아내, 부인’이 아니라 이름을 곧바로 써버렸더라.

■ 미국식이다. ‘정현(안용구 선생 부인)은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썼다.

□ 속도감 있게 잘 읽히더라. 내용은 더할 나위 없지만 형식적으로도 부담 없이 잘 읽혀 글을 참 많이 쓰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건 거의 여담이 될 수 있지만 사실은 나도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남이 쓴 자서전을 미리 봤다. 유명한 사람의 자서전을 몇 페이지 보다 보니까 재미없어 닫아버리고 다른 책을 봐도 역시 재미없었다. ‘재간 있어서 좋은 환경에서 위대한 음악가 됐다. 업적이 어떤 것이 있었다’는 식이다. 그건 재미없다.

나는 불가능할 때 음악을 시작했고, 시기적으로도 가정환경으로도 그랬다. 이것이 개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뿐만 아니고 음악에서 하나의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자서전이 우리나라 음악발전사에 하나의 역사적인 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사람들도 꽤 있다.

촛불시위, “앞으로 살 사람들인 젊은이들의 의견이 중요하다”

▲ 선생은 인터뷰 내내 인자하고 해박하고 그리고 열정적이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그런 것 같다. 자서전 『한 마리 새가 되어』가 영문판 제목은『My Sorrows, My Joys』이다. 내용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 책 제목을 바꾼 이유는?

■ 평소 영어로 하면 제목을 다르게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의 재능과 인품을 존경해 왔다. 그래서 그가 작곡한 ‘사랑의 슬픔, 사랑의 기쁨’에서 착안해 영문판 이름을 정했다.

그리고 이번 영어책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전에 생각 못했던 것을 보충하고 새로운 내용도 들어갔다.

□ 끝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 호텔에서 잠을 충분히 못 잤을 것 같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문제로 밤마다 촛불시위가 벌어지고, 시위대가 돌아다니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전면개방에 대한 견해는?

■ 나는 정치적인 것은 잘 모르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자마자 실수했다면 실수한 몇 가지를 꼬집어보겠다. 사실은 김대중 씨나 노무현 씨나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노력을 해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오자마자 하루아침에 뒤집어엎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이 자기가 확고한 뭘 알고 하는지 그게 좀 굉장히 놀랐고,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그분이 사실, 진짜 정치가라면 앞을 내다봤어야 되는데, 북미관계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오자마자 바뀐 것으로 아는데, 사실은 그전에 이런 것이 다 이뤄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 다음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걸 아무 눈치도 못 채고 그랬다면 내가 보기엔 이 나라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그런 점에서 실망했다.

한국 젊은이들이 모두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다 젊은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젊은 아이들이 뭘 아느냐? 아무 것도 모르고 기분으로 그런 거다’ 그러지만 늙은이는 다 죽으면 그만이고 앞으로 젊은이들이 살 사람인데, 젊은이들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다.

■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그리고 넓게 이야기해줘서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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