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숨은 그림 찾기’

누구나 한번쯤 ‘숨은 그림 찾기’ 놀이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복잡하게 그려 놓은 그림 속에 숨겨진 물건 찾기는 언뜻 보아선 쉽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때 그 물건은 전체 그림과의 조화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여기 ‘숨은 그림 찾기’란에서는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어디선가 숨은 그림처럼 나서지 않고 묵묵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5월이 되면 사람들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산으로 들로 놀이를 떠나곤 한다.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신록이 가득한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로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5월이 되면 열사들이 바라고 염원했던 자주와 민주, 통일을 이 땅에 구현하겠다고 1년 내내 생각하면서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다짐하는 이가 있다. 1991년 5월 투쟁의 도화선이 된 박승희 열사 정신계승사업회 오창규 부회장이 바로 그 이다.

‘박승희 열사가 바꾼 운명’

▲ "박승희 열사의 분신이 내 운명을 바꿔버렸다"는 오창규씨.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전남대 심리학과 86학번인 오 부회장은 386세대 누구나가 그랬듯 자연스럽게 시대의 흐름에 물 흐르듯 투쟁에 나섰다. 80년대에는 ‘짱돌’을 들고 대열을 맞춰 시내에 나가는 것이 하나의 대학 문화이자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왔다. 대부분의 복학생처럼 열정은 있으나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많기에 공부를 열심히 할 계획으로 도서관에도 열심히 다녔다고. 14살 어린 시절, 광주에서 5.18을 겪어 그날의 모습들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곤 하지만 그래도 또래의 대학생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복학한 1991년은 정국이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였고 4월에는 강경대 사건이 터졌고 정확히 3일 뒤 박승희 열사의 분신이 있었다. 전남대에서 박승희 열사가 분신을 하던 날, 그는 그 자리에서 현장을 목격했고 지금도 전혀 퇴색되지 않은 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91년 4월 29일, 체육대회를 앞두고 체격 좋은 그에게 후배들은 축구 시합에 나서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 역시 도서관에서 공부만하다 오랜만에 기분 전환도 할 겸해서 운동장에 나왔다.

교내 중앙도서관 앞 518광장에서는 ‘강경대 추모 및 노태우 퇴진’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그는 대운장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남대 구본부(이곳은 전남대 네 분의 열사를 모신 곳으로 5.18 연구소가 있는 건물이라 했다) 건물 뒤편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연기에 무작정 달려간 그곳에는 불에 타다 남은 듯한 통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땐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충격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쓰려져 통곡을 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서 직감적으로 누군가 분신을 한 것이라 판단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박승희 열사의 분신은 그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날부터 그는 모든 일상을 접고 5월 한 달 내내 집회에 참여했다. 그뿐 아니라 전남대 학생이라면 모두다 아침이면 교문을 나서 짱돌을 던졌으며 저녁 늦게야 일과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곤 했다. 박승희 열사 이후에도 91년 5월 한 달 간 13명의 열사가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91년 5월 대투쟁’이라 부른다.

박승희 열사는 분신 이후 병상에서도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만들며 병상 투쟁을 벌였다. 이는 친구들에 의해 받아 적어져, 전달돼 결의를 드높여주곤 했단다.

5월 19일 강경대 열사의 시신이 경찰에 막혀 광주에 들어오지 못하고 지리한 싸움을 벌이던 중 박승희 열사의 사망 소식이 전달됐다. 그러자 학생들은 마치 뽕이라도 맞은 듯 힘을 내 경찰 저지선을 뚫어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운암대첩’이다.

‘보궐선거로 된 과회장부터 수배, 그리고 구속’

시국이 어지러워서인지 과회장을 맡았던 후배가 ‘잠수’를 탔다. 그러자 다른 후배들은 예비역인 “오창규 선배가 과 회장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해왔고 앞으로 다른 예비역들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그는 한사코 부탁을 거절했다.

그러나 못하겠다고 거절을 할 때마다 후배들의 실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에게 인간적인 실망을 안겨주기 싫어 출마를 결심, 1991년 5월 3일 전남대학교 심리학과 회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되기에 이른다. 이어 1992년에는 단과대 회장을, 1993년에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남총련 의장, 한총련 중앙상임위원 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1993년 5월 한총련 출범식에서 범청학련 남측본부의 일원으로 북녘의 조선학생위원회와 전화로 ‘청년학생회담’을 추진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이적단체에 가입, 회합통신죄라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유로 수배를 받게 된다.

수배 중에도 1994년에는 대학에서 특정 단위 활동을 해보고 싶어 ‘총예비역협의회’ 활동을 했다. 당시엔 예비역 협의회의 장 정도만 간단히 세워내는 정도였는데 그가 정책을 세우고 조직 활동을 하면서 8개 단위의 예비역 협의회장과 함께하는 조직책임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예비역들은 마음이 있어도 집회 등에 참여해서 뒤에서 쭈뼛거릴 수밖에 없는데 그 해에는 자체 깃발을 들고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는 기나긴 수배생활이 지속됐다. 1993년 김영삼 정권 1기에 수배된 그를 비롯한 수배자들은 김대중 정권에서는 문제가 해결될 것을 믿고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었고 이에 그들은 1998년 8월 8일 조계사에 기습적으로 모여 정치수배 해제를 농성을 시작했다.

인권대통령을 표방하는 청와대에서도 이들의 문제는 거슬려 계속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을 했고, 마침내 500여일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농성 끝에 전체 70여 명 중 6명이 구속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결국 농성장 단장이었던 그는 1999년 12월 19일 구속되었고 감옥에서 조용히 새천년을 맞고 3개월여의 수감생활을 마친 뒤 풀려나왔다.

그리고는 2000년 5월, 그는 박승희 열사의 추모제를 하는데 사회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사이에 1992년 박승희추모사업회 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이어 1998년 열사산화 7년 만에 박승희추모사업회가 창립됐다. 다시 한 번 박승희 열사와의 조우였다.

이후 2002년 5월 박승희 열사 10주기 추모제를 끝으로 추모사업회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이를 안타까워 한 그가 나서 2004년 4월 29일 박승희 열사가 분신을 한 자리에서 촛불행사를 갖고 2004년 11월에 박승희 열사 정신계승사업회로 확장해 나간다.

누가 알아주는 이 없는 데도 그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이었고 단지 내가 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큰 사람 아래서 성장하고 있는 중’

▲ 긴 수배생활 중 너무 외로워서 배웠다는 오창규씨의 하모니카 실력은 수준급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기골이 장대한 외모와 저음의 목소리를 들으면 ‘분명 누구랑 닮았는데...’할 만큼 닮은 사람이 있다. 그는 한국진보연대 오종렬 상임공동대표의 아들이다. 그는 4형제 중 둘째로, 5분 먼저 태어난 쌍둥이 형과 두 남동생을 갖고 있다.

선이 굵은 외모와는 달리 좋아하는 선후배들과 술자리라도 있으면 하모니카를 꺼내들고 한 곡조 멋지게 뽑기도 할 정도로 세심한 면도 갖고 있다. 긴 수배생활 중 너무 외로워서 배웠다는 하모니카 실력은 수준급이다.

그래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광주 집에 오시는 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10원짜리 내기 고스톱도 쳐주시곤 하는데 자신은 너무 재미가 없어 한 번도 해드린 적이 없다며 아버지가 더 세심하고 자상하다고 소개한다.

30세 이전에 장가를 갈 마음도 먹은 적이 있으나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아직 미혼이라 오 의장도 가끔씩 ‘어서 가정을 꾸렸으면 한다’고 걱정을 하기도 한다고.

그러나 그는 늘 1998년 서울에 올라간 뒤 10년 넘게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크다.(인터뷰를 하던 18일에도 그는 오랜만에 광주에 온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수행을 했다. 늘 아버지가 광주에 오면 하는 일이라고.)

그는 “아버지가 단식을 할 때마다 안타깝고 조마조마한 순간이 많다”며 “연세에 비해 무탈하고 많은 활동을 하시는 모습이 고맙고 항상 장수하셨으면 한다”고 전했다. 아울러 “정세 요구가 있고 당신의 신념과 의지가 있는 한 끝까지 정력적인 활동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가족의 입장에서는 늘 바쁜 아버지가 야속할 수도 있을 터. 그의 생각을 물어보니 “가장이자 아버지 이전에 한 나라의 지도자이기 때문에 가족의 희생이 있어도 이를 감내해야 한다”며 “그래서 옛말에 집안에 인물이 나면 그 인물을 위해 위험이나 궂은일들을 도맡아야 한다는 말이 있나보다”고 전하며 웃는다.

너무 유명한 아버지 밑에 있다 보니 아버지와 비교되면서 힘들거나 한 일이 없는지 궁금해 하니 그는 한마디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큰 나무 아래서 작은 나무는 살지 못하지만 큰 사람 아래서 작은 사람은 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성장 중이다.

‘기층 대중과 함께 하는 삶’

인터뷰 도중 그는 아버지를 ‘오 의장님’이라고 몇 번을 불러 집에서의 호칭도 의장님이냐 물었더니 ‘대답을 듣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듣기 편하도록 그렇게 부른 것뿐’이라며 집에서는 ‘아버지’라 부른다 한다. 별거 아닌 것들까지 늘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음이 느껴진다.

수배기간 동안 막노동을 하며 철근 노동자 생활을 했던 그는 당당한 ‘민주노총 광주지역 건설노조 철근분회 대의원’이라고. 아직도 한 달에 10여일 내외를 막노동 일을 하며 활동비도 벌고 노동자들과 만나 꾸준히 소통을 하고자 한다.

또한 200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지역의 2년제 대학에서 침뜸 의학을 전공한 그는 뜸사랑 봉사단의 일원으로 일주일에 한번 씩 침뜸 봉사를 했고 지난 5~6년 동안은 바쁜 중에도 간헐적으로 봉사활동을 다니곤 했다고 한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소중해 그는 앞으로 아예 침뜸 봉사실을 운영하고 싶은 소망도 갖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니 기회가 닿아 지난 2006년 5월 31일 광주 북구청장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북구청은 50만 유권자가 있는 호남에서 제일 큰 지역인데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10%가 넘는 지지를 받는 등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는 아파트 입주자 대표자회의의 회장도 맡고 있다는 그는 광주 지역의 진보적 생활인으로 주민들의 사랑에 누를 끼치지 않고 보답하기 위해 그가 필요한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삶터를 개척해 나가겠다고 밝힌다.

나침반의 자침이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가리키듯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서 난관이나 시련, 좌절은 크고 작게 다 있지만 이탈하지 않고 나아가기 때문에 인생의 참맛이 있다는 오 부회장.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가훈이기도 한 ‘사람은 시련을 먹고 자란다’라고 한다.

그는 “앞으로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한 축을 중심으로 해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진보정당이 기층 대중 저변으로 확대되도록 하고 한국진보연대의 전선을 강화한다는 두 개의 바퀴를 돌려나가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며 “이는 열사의 염원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마치며 늘 낮은 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는 그의 바람이 어서 빨리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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