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한국기자협회 부회장, 한겨레신문 기자)


 

▲ 8일 저녁 남북언론인대표자회의를 마친뒤 금강산 목란관에서 만찬연회가 열렸다. 왼쪽이 필자.
[사진-김동훈 기자]

“아버님 통일이 되는 날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리하여 통일이 돼서 고향 평양에 꼭 오셔야 합니다. 그날까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칩시다.”

평양에서 온 ㄱ기자는 필자의 ‘취재수첩’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그리고는 “돌아가시기 전에 통일이 돼서 꼭 평양에 오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8일 저녁 금강산 목란관. 남북 언론인 47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6.15 공동선언과 10.4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북남) 언론인 대표자회의’에 참가한 남쪽 언론인 27명과 북쪽 언론인 20명이 그들이다. 원탁 테이블마다 남쪽 언론인 4명과 북쪽 언론인 3명이 사이사이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 옆에는 ㄱ기자와 ㄴ기자가 앉았다. 모두들 평양에서 온 기자들이다. 평양은 필자 아버지의 고향이다. 9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평양사범학교에 재학중이던 1951년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왔다. 고향인 평양시 선교리에는 부모님과 누님 1명, 동생 7명을 남겨둔 채 홀로 남하한 것이다.

아버지(김상용)는 올해 일흔다섯이다. 아버지의 부모님(김준명.어정모),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살아계셔도 100살을 훌쩍 넘기셨을 연세다. 대신 아버지의 동생들은 생존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아버지의 막내 동생은 쌍둥이(김상철.김상윤)인데, 이제 60살 정도 되셨다.

아버지가 가족과 헤어진 지 5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평양에서 온 사람들을, 그것도 20명이나 한꺼번에 만났다. 필자의 가족사를 들은 ㄱ기자는 즉석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썼다. 나는 고마움에 마음이 찌릿해졌다.

북측 기자가 실향민 남측 기자 아버지에게 쓴 ‘통일 편지’

▲ 6.15언론본부 소속 남측 대표단은 기자를 포함해 27명이 참가했다. 9일 모든 일정을 마친 뒤 남쪽으로 출발전 금강산 온정각에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 남측 대표단.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번 대표자회의는 5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남쪽 언론인 대표단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언론본부’에 소속된 한국기자협회, 한국피디연합회, 전국언론노동조합, 인터넷기자협회, 언론재단 등 5개 단체 대표들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언론노조가 내부 사정상 참가하지 못해 총 참가자는 27명이었다.

각 단체는 남북언론인대표자회의를 보도할 취재진도 일부 포함시켰다. 필자는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자격으로 참석했지만, <한겨레>에 보도할 ‘의무’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연합뉴스>, <기자협회보>, 인터넷신문 <통일뉴스>와 <대자보>, 월간 <민족21> 등에 소속된 언론인도 취재를 겸했다. 특히 피디연합회는 <한국방송> ‘시사투나잇’ 제작진을 동행시켜 남북언론인의 만남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았다.

통일부 ‘확약서’ 요구로 출발 전부터 술렁

▲ 7일 오후 고성항이 내려다 보이는 금강산 비치호텔에 남측 대표단이 도착했다. 맨 앞이 필자.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7일 오전 8시30분 출발을 위해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 앞에 일행들이 모였다. 그러나 통일부가 출발 전날 저녁, 일행 중 5명에게 ‘확약서’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일행들이 술렁였다. 통일부는 김경호 한국기자협회 회장, 양승동 한국피디연합회 회장, 정일용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등 공동상임대표 3명 등 모두 5명에게 확약서를 받아낸 뒤에야 방북을 승인했다. 참여정부 때는 없었던 일이다.

오전 9시 광화문을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쯤 강원도 고성 남쪽 군사분계선에 도착했다. 수속을 밟고 다시 버스를 타고 비무장지대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금강산을 처음 방문한 젊은 기자 등 일부 언론인들은 군사분계선을 넘어설 때 저마다 회한과 탄식을 쏟아냈다. 금강산 온정각은 평화로웠다. 예전에 비해 북측 군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관광버스가 지나는 길목에 지키고 서 있거나,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온정리 마을 들머리 초소에만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8일 대표자회의를 앞둔 7일 저녁, 실무진 몇몇이 북측 실무진과 공동결의문 문안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대표자회의는 8일 오후 3시 금강산호텔에서 예정돼 있었다.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7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북측 대표단도 남측 대표단(27명)과 맞먹는 26명이 왔다는 말이 전해졌다.

드디어 8일 오후 2시 40분. 금강산호텔 앞에 남과 북의 버스가 나란히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린 양측 대표단은 나란히 도열해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금강산호텔 1층 공연장에서 남과 북 언론인들이 나란히 앉아 남북언론인 간 공식 만남으로는 3번째인 남북언론인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기사교류와 연대활동 등 3개 항의 공동결의문을 채택했다.

다음은 <통일뉴스>에 보도된 대표자회의 내용이다.
[남북언론대표들, “6.15통일시대 선도하겠다”]

남과 북 언론인들이 하나가 된 목란관 만찬

▲ 8일 뒤풀이 자리에서 북측 기자가 써준 글귀를 발표하고 있는 필자.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북 언론인이 써준 글귀. [사진-김동훈 기자]

다소 어색했던 대표자회의가 끝나고 남과 북 언론인들은 잠시 헤어졌다가 오후 6시 목란관 만찬장에서 재회했다.

목란관 들머리에서 만난 남과 북의 언론인들은 계곡을 따라 목란관까지 거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과 북의 기자들은 평양냉면 등 북한 음식을 먹고 북한 맥주와 소주를 마시며 정다운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로 이름과 나이, 언론사에서 하는 일 등을 물었다. 필자 옆에 앉았던 기자는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외모가 돋보였다. 필자보다 되레 두살이 많았지만 훤칠한 외모 덕분에 젊어보였다. 그는 인터넷매체 <우리민족끼리> 편집국 간부였다. <우리민족끼리>는 <노동신문>과 <민주조선> 등 북한의 유력매체들을 온라인으로 전파하는, 북한 최대의 온라인 매체였다.

두시간 여의 짧은 만찬이 아쉬웠는지, 남쪽 대표단 뒷풀이 자리에 북쪽 대표단 실무진 4명이 참석해 친교의 시간을 이어갔다. 북측 언론인들은 잔을 들고 “쭉 내밉시다”(“위하여”)를 외쳤고, 이 말은 이날 술자리에서 유행어처럼 번졌다. 남북 언론인은 다음날 삼일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아쉬운 이별을 나눴다.

삼일포에서 나눈 정겨운 이야기들

다음날 아침 9시. 남북한 기자들은 삼일포에서 다시 만났다. 삼삼오오 삼일포를 거닐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자는 세 명의 북측 기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에는 필자 아버지의 고향인 평양시 선교리에 사는 이도 있었다. 그는 선교리가 지금은 선교구역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아버지가 다니던 평양사범학교는 지금은 김형직사범대학으로 바뀌었다고 전해 주었다.

아버지가 어릴 적 대동강에서 여름에는 수영을 하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탔다고 했더니, 대동강이 선교리 바로 앞에 있다고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선교리라는 지명에 대해 설명했다. 선교리는 대동강변에 있어서 대동강을 배나 다리로 건넌다고 해서 배 선, 다리 교 자를 써서 ‘선교(船橋)리’라고 했다. 또 선교리 인근 평양시 중구 오탄동은 옛날에 까마귀가 떼죽음을 당한 데서 지명이 유래돼 까마귀 오, 탄식할 탄 자를 써서 오탄(烏歎)이 됐다고 했다.

 

▲ 9일 오전 삼일포관광을 기념해 남북의 언론인들이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했다. 왼쪽 두 번째가 필자.
[사진-김동훈 기자]

북측 언론인들은 무엇보다 언론인의 사명감을 강조했다. 언론이 실상을 제대로 써야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기자는 1996년 평양을 방문해 취재.보도한 <중앙일보>의 오보를 거론했다. 평양을 거니는 시민들 중에 맨발로 걷는 여학생 사진을 게재한 것이었는데, 사진에 화살표까지 해가며 맨발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맨발이 아니었고, 투명한 샌들을 신었다고 한다. 이 기자는 “평양까지 초청해 취재를 허락했는데, 실상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않았다. 이런 기사가 통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이들은 또 남측의 통일세력이 단결하지 못하는 것도 아쉬워했다. 통합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노선 차이 또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을 의미하는 듯 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아쉬운 이별

▲ 8일 남북언론인대표자회의를 마친 뒤 기념사진. [사진-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남북 언론인들은 두시간 여 동안 진행된 ‘삼일포 만남’을 끝내고 온정각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었다.

필자와 내내 함께 했던 북측 기자들 중 한명이 “본관이 전주”라고 했다. 필자는 “황해도 연안”이라고 했다. 서로 남과 북이 엇갈렸다. 북측 기자는 “우리 버스 바꿔타고 갈까요?”라며 농담을 던졌다. ‘평양 90-1147’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평양 일행들을 태우고 온 버스였다. 저 버스를 타면 7시간 뒤 아버지의 고향 평양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는 북측 기자에게 “평양에는 필자의 조카들도 많이 자라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 북측 기자는 “우리도 잘 따져보면 먼 친척쯤 될 수 있겠다”며 껄껄 웃었다.

북측 언론인들과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평양으로 향하는 버스를 향해 남측 언론인들은 손을 흔들었다. 남측 언론인들도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 안에서 현대아산 안내원이 노래를 불렀다. 북 가수 전혜영의 ‘다시 만나요’가 버스 안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나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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