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시대’와 함께 탄생한 ‘6·15 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이하 통일연대)가 통일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감했다.

한국진보연대(상임대표 오종렬, 정광훈, 한상렬)가 결성되면서 ‘발전적 해소’를 결의했던 통일연대는 지난 3월 22일 ‘해산 대표자회의’를 갖고 공식 해산했다. 2001년 3월 15일 결성 때부터 공식적으로 해산하기까지 통일연대가 써왔던 통일운동의 역사는 이후 발간될 백서 안에 고스란히 담길 예정이다.

지난달 28일 서울 광화문 인근의 한 찻집에서 전 통일연대 상임대표 한상렬 목사를 만나, 통일연대에서 진보연대로 이어지는 통일운동과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한상렬 목사는 진보진영의 '단결'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상임대표로서 7년 동안 통일연대를 이끌어 왔고, 지금은 오종렬, 정광훈 진보연대 상임대표와 함께 여전히 진보진영 대표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고 있는 한상렬 목사는 끊임없이 '단결'을 강조했다. 또 진보연대 안의 다양한 정파들을 하나로 모으고 단결을 도모하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조직적 과제'라고 말했다.

“90년대에 중앙의 전민련 의장 활동을 하다가 감옥살이 하고 단식후유증으로 몸이 아파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6.15가 터져 나왔다. 환희 자체였다. 6.15를 살리는 길이 통일의 지름길이라는 확신으로 다시 중앙활동을 시작했다. 다시 서울에 와보니 통일운동의 다양한 견해들 속에서 오는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

한 목사는 통일연대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 전체를 안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어떤 정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 그런 역할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단결단합을 호소해도 운동현실이 있기에 아픔과 고독의 세월도 있었다”고 회고한 한 목사는 “이미 진보운동은 바닥을 쳤다.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되면 안 된다”며 “(진보연대는) 공적 질서를 확실히 세우고 공조직화해야 한다. 모든 단체나 정파가 공조직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우리들 속에 끊임없이 같은 것을 찾기 보다는 다른 것을 더 잘 찾아내 자기를 내세우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며 “다양한 견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감정을 상하게 해 상처로 남고 배타적이 돼 버린다”고 진보진영을 질타했다.

▲ 한 목사는 '5.18'을 거치면서 '통일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한 목사가 통일운동에 눈을 뜬 것은 5.18 광주 민중항쟁 때문이다. 전북대 총학생회장, 전북기독청년협의회 회장 등을 지내고 엠네스티 활동 등 지역운동을 해 왔던 한 목사는 5.18 민중항쟁이 일어나자 관련자로 상무대 영창에 끌려갔다. 그는 “5.18 상무대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민주화는 통일이 되어야겠다는 각성과 더불어 자주 민주 통일의 대의에 대해서 역사적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한 목사는 5.18을 통해 분단과 통일의 문제에 천착하게 됐지만, 이후 ‘분단병’에서 오는 일종의 ‘분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상무대에 있을 때 두 가지 마음이었다. 위대한 민중항쟁에 동참 영광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용기 솟기도 하고 한편으론 매를 맡고, 특히 빨갱이라고 고문을 당할 때 비겁해졌다. 비겁과 용기의 갈등 속에서 너무나 수치스러워 죽고 싶었다. 그러나 비겁해서 죽지도 못했다. (상무대에서 나와서) 돌아가신 분들 앞에서 너무나 죄송한 마음 때문에 무기력해져 버리는 것이다. 열심히 일 하다가도 빚진 죄인으로 자책감, 무기력증이 도지면 꼼짝 못하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18년 동안이나 가슴에 멍에를 지고 살아온 한 목사가 ‘분열증’을 극복하게 된 것은 방북 때 만난 한 운전사 덕이다. 한 목사가 전한 소설 같은 얘기는 이렇다.

한 목사가 1998년 처음 방북했을 당시 묘향산에서 흥에 겨워 ‘새’라는 노래를 불렀다. 한 운전사가 그 노래를 듣고는 “노래를 들으니 ‘산 속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 닭 우는 소리에 인가를 찾았도다’라는 선시(禪詩)가 생각났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들었던 이 선시가 5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생각이 나지 않다가 한 목사의 노래를 들으니 생각이 났다고. ‘새’라는 노래는 한 목사가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을 때 자유를 갈망하며 자작한 곡이다.

“내가 다시 인가를 찾는, 그러다 보니 분단병이 치유 되더라. 18년 동안 고생스럽던 병이 인가를 찾았고 삶의 동력이 됐다.”

지금까지 40여 차례 이상 방북한 한 목사는 ‘통일의 아버지’ 故문익환 목사의 두루마기를 가지고 있다. 박용길 장로가 옥살이 중인 문 목사를 생각하며 난생 처음 손수 지은 두루마기다. 문 목사는 감옥에서 나와 이 두루마기를 얼마 입지도 못한 채 타계했고, 10여 년을 고이 간직해 온 박 장로는 2003년 한 목사에게 건넸다.

한 목사는 문 목사의 시 ‘손바닥 믿음’을 읊으며 진보진영의 ‘단결’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말했다. 그는 인터뷰에 오기 전, 22년 전 이날 전방입소 반대시위 도중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분신한 故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제에서 문 목사의 시 ‘손바닥 믿음’을 함께 나누었다고 했다.


이게 누구 손이지 / 어두움 속에서 더듬더듬 / 손이 손을 잡는다 / 잡히는 손이 잡는 손을 믿는다 / 잡는 손이 잡히는 손을 믿는다 /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 인정이 오가며 / 마음이 마음을 믿는다 / 깜깜하던 마음들에 이슬 맺히며 / 내일이 밝아온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6.15의 산물 통일연대, 민족자주화 운동의 대중화에 선봉적 역할”

▲ '6.15시대'와 함께 시작한 '통일연대'를 7년간 이끌어 온 한상렬 전 통일연대 상임대표.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뉴스 : '6.15시대'와 함께 탄생한 통일연대가 막을 내렸다. 소감은?

■ 한상렬 목사 : 먼저, 오직 감사할 뿐이고, 오직 죄송할 뿐이다. 감사함은 지난 7년의 세월동안에 통일연대에 애정과 사랑으로 격려해 주시고 함께하신 많은 분들께 감사 올리고, 죄송한 것은 명색이 통일연대 상임대표의장으로서 잘 역할을 했어야 할 텐데, 돌이켜 보면 부족한 점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 한국진보연대가 결성된 지는 좀 됐고, 최근에 통일연대 정리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이미 일찍부터 통일연대, 민중연대, 전국연합 등 주요 연대단체를 해소하고 하나로 하자는 흐름이 있어왔다. 통일연대도 진보연대 준비위의 활동시작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표자회의를 통해 발전적 해소 결의를 해놓았었다. 작년 9월 16일 한국진보연대가 출범하고 나서 바로 해소하고자 했으나, 몇 가지 정리할 내용도 있고 해서, 올해 3월 22일 해산 대표자회의를 가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말 감사한 것은 청산위원회의 활동이다. 박중기, 김영옥, 권낙기 선생님 세 분이 맡아서 상당부분 정리해주셔서 감사하고 귀한 글씨로 함께하신 신영복, 오병철 선생님과 성금에 뜻을 모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하고 있다.

백서발간이 남아있다. 일전에 상임대표자회의 결정사항은 청산위원회에서 백서발간 사업까지 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는데 이번에 어르신들이 부채정리만 하겠다고 사양하시는 바람에 저를 위원장으로 한충목 동지 등 여러 실무진들이 참여하여 백서발간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 통일연대는 역사 속에서 일단락되고 한국진보연대로 결합했다. 한국진보연대 안에서 기존 통일연대가 수행한 역할을 어느 정도 시험을 해 본 셈인데 어떻게 평가하나?

■ 한국진보연대 안에 반전평화자주통일위원회로 활동해 왔다. 여러분들이 염려하는 대로 통일연대 독자 활동 때 보다 훨씬 더 미흡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이 있다. 사실상 그렇게 보여 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단체, 민중을 몸통으로 하는 단일 연대연합을 지향하는 한국진보연대의 위상과 역할 상 그 속에서 오히려 차근차근 사업을 함으로써 늦되는 것 같지만 앞으로 더 힘차게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 통일연대가 창립 된 게 2001년이다.

■ 그렇다. 3월 15일 날, 아주 감격적이었다. 한국기독연합회관 2층 결혼식장에서 결성식을 했다. 의미가 좋지 않나? 남과 북이 하나 된다는 의미를 살려서. 그 당시 저는 6.15 민족통일 토론회를 공동으로 하자고 북녁에 제안하는 문서를 낭독한 바 있다. 바로 그것이 실행이 되어 금강산에서 6.15토론회 행사가 성사된 것은 감동이었다.

□ 통일연대가 6.15 공동선언의 산물인데, 창립배경은?

■ 6.15 선언이야 말로 분단시대, 불신시대, 암흑시대를 청산하고 통일시대, 신뢰시대, 광명시대를 열어 가는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그동안에 다양한 입장으로 남녘 진보통일운동 중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6.15가 나오니까 하나로 뭉쳐지는 계기가 됐다. 6.15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 한 목사는 '통일연대'가 "민중의 통일운동에의 주체적 진출에 기여하고 민족자주화 운동의 대중화에 선봉적 역할을 진행했다"고 평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연대는 독자적 활동도 많이 했지만, 민화협, 종단, 통일연대라는 삼자연대를 통해 민족공동행사에 앞장서 왔는데,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이 가장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 당시에 사회적 상황 속에서 통일연대가 독자적으로 북측을 접촉할 수 있는 여지가 쉽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6.15시대에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한다고 했을 때 종단과 민화협과 함께 폭넓게 해 나가는다는 의미가 컸다. 추진본부를 통해 여러 행사도 많이 했다.

□ 2001년 1차가 금강산 6.15대토론회, 2차가 평양 8.15대축전이다. 초창기 때 분위기랄까 감격을 전한다면.

■ 과연 우리 동포는 하나였다. 만나면 서로 껴안고, 서로 눈물이 글썽이고, 만남 자체가 성공이고 만남 자체가 역사였다. 서로 간에 뜨거움이 흘렀다. 여전히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에의 감동은 엄청나고 놀라운 것이었다.

□ 그게 발전해서 2005년 6.25남측위원회에 이어 3월 4일 민족공동위원회가 결성이 됐다. 2005년이 또 하나의 분수령이나 전환점인 것 같다.

■ 그동안 추진본부 시절에는 서로서로 각자가 활동하면서 행사 때 만나곤 했지만, 이제는 남북해외 3자가 연대체를 해서 공동위를 결성하지 않았나? 말하자면 범민련이 3자연대체인 것처럼 의미가 있다. 국경을 넘고 조직을 넘고 국가보안법을 넘어 오직 6.15정신으로 이런 만남이 일어난 것이다.

□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통일연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일각에서는 정부와의 교섭권이 없었기에 약간 한발 물러서 있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있다.

■ 통일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각자의 몫과 역할이 있다. 통일연대는 통일연대 대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진행한 것이 있는 것이고. 정부와 관계가 상당히 어색한 것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는 관계가 많이 풀려서 정부가 통일연대를 전폭적으로 인정하고 같이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통일연대 운동 방향상 긴장관계는 기본적인 것이었다.

□ 통일연대는 공동행사뿐 아니라 남측의 독자적 통일운동도 꾸준히 해 왔는데.

■ 통일연대가 좀 더 선도적이고 대중적인 통일운동을 진행한데 있어서는 큰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남녘 통일운동에 올바른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실천적으로 진행하고자 노력했다.

□ 지난 7년간 통일연대의 활동, 역할을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를 해 본다면?

■ 남쪽의 진보적인 통일운동을 망라하는 그런 역할이었고, 민중의 통일운동에의 주체적 진출에 기여하고 민족자주화 운동의 대중화에 선봉적 역할을 진행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미 이야기가 나온 대로 추진본부나 민족공동위원회를 통해서 남북해외가 함께 6.15정신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도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해 왔다고 여겨진다.

5.18 통해 ‘진정한 민주화는 통일’ 깨달아

▲ 지역운동을 하다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서울로 올라 온 한 목사는 "아무리 단결단합을 호소해도 운동현실이 있기에 아픔과 고독의 세월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연대 상임대표로서 큰 역사적 소명을 맡으셨는데, 통일운동의 중요한 시기를 담당한 지도자로서 목사님의 몫, 생각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 저 자신 5.18 상무대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민주화는 통일이 되어야겠다는 각성과 더불어 자주 민주 통일의 대의에 대해서 역사적 세례를 받았다. 그 후 통일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는 일심으로 기도하며 실천해오는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역사 앞에 빚진 죄인으로 늘 부끄러울 뿐이다. 그동안 교회를 개척했고 연대연합 활동을 전개해왔다.

90년대에 중앙의 전민련 의장 활동을 하다가 감옥살이 하고 단식후유증으로 몸이 아파서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6.15가 터져 나왔다. 환희 자체였다. 6.15를 살리는 길이 통일의 지름길이라는 확신으로 다시 중앙활동을 시작했다. 다시 서울에 와보니 통일운동의 다양한 견해들 속에서 오는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 이 전체를 안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어떤 정파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저에게 그런 역할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저는 정말 행운아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도 많이 계시고 실력도 없는 제가 어찌 감히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항상 단결을 호소했고 부분적으로 나마 운동의 대동단결에 역할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단결단합을 호소해도 운동현실이 있기에 아픔과 고독의 세월도 있었다. 지난 대선 이후에 너무나 괴로워서 3일간 꼬박 철야기도를 한 적이 있다. 도대체 우리민족이 어디로 가는 것인가? 물신주의에 흘러가는... 근데 가만히 보니 우리운동이 대오각성 해야겠더라. 운동을 말하기 전에 ‘너나 잘하세요. 한상렬 너는 누구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고, 자기변화를 위한 기도를 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래서 40일간 특별기도를 했다. 기도는 노동이다. 원래는 단식을 하고 싶었다. 지난날 국가보안법 철폐투쟁으로 53일간 단식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자기 자신을 비우는 장기단식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적극 만류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생식으로 준단식 같이 했다. 공식적으로는 운하백지화를 위한 기도를 했었다. 민족의 통일과 진로를 위한 기도를 왜 안했겠나? 결정적인 것은 자기변화를 위한 기도였다.

자기변혁 없이 역사변혁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변혁이 역사변혁의 기초요 동력이고 ‘밑힘’이다. 철저히 저를 분석해 보니까, 누구 말할 것 없이 관성주의, 기득권주의에 사로잡혔고, 패배주의, 물신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 말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찌듦이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뿌리 깊은 분열주의다. 늘 구동존이 과거불문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러나 우리들 속에 끊임없이 같은 것을 찾기 보다는 다른 것을 더 잘 찾아내 자기를 내세우고,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치열한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용광로 속에서 정금 같은 역사의 정로를 창출해 낼 수 있다. 다양한 견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거니와 그런데 그것이 그만 감정을 상해 상처로 남고 배타적이 돼버린다. 이것은 비과학적이요 비진보적인 것이다. 기도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열사님들을 새기며 역사를 망치는 이 뿌리 깊은 분열주의의 깊은 아픔 속에 절규하며 통곡했다. 저 자신의 통일연대 활동을 돌이켜보면서 거듭 죄송할 뿐이다.

□ 부인 이강실 목사도 전북 6.15공동위 상임대표다. 자녀도 두지 않으면서까지 부부가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실상은 지금은 이제 자녀를 안 두는 것이 애국이 아니다. 많이 나야 애국이다. 근데 당시 박정희 시대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둘이 결혼을 약속하면서 하느님 앞에, 역사 앞에 헌신하자고 자녀를 안 두었는데, 크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그만큼 살아오지를 못했다. 치열하게 살자고 했지만 열사와 역사 앞에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북에서도 기억해 주시고 남에서도 격려해 줘서 고맙다. 2005년도 였던가. 김기남 비서가 서울 8.15행사 때 왔는데, 그 이야기를 하더라 “부인 어디 계시냐”고.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지역대표라 주석단이 아니라 저쪽 아래에 있다고 하니, 직접 내려가서 격려하고. 옆에 함께 있던 지금은 돌아가신 림동옥 선생이 “통일부부로 산다는 것을 북녘동포들이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더라. 지난 11월 통일순회강연차 일본에 갔을 때도 여러 재일동포들이 이 사실을 이미 알고 격려해 줘서 기쁘고 감사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감사할 일은 범용임 장로님을 비롯한 전주고백교회 식구들의 한결같은 기도와 격려이다. 문대골 목사님을 비롯한 예수살기공동체 동지들의 격려 또한 잊을 수 없다. 남녘 땅에서 여러분들의 격려 덕분으로 더욱 정성을 다하여 통일부부로 살고자 기도할 것이다.

□ 북을 많이 오갔는데, 북측 인사를 만나면서 어떤 느낌과 변화가 있었는지.

■ 처음에 북녘동포를 접한 것은 98년도이다. 방북해서 7박 8일간 있었다. 북녘의 현실을 그대로 보고 만났었다. 그 뒤에 6.15 시대를 맞이해서 한 40여 차례를 다녀왔다. 많이 다닌 셈이다. 우선 조국은 하나요 민족은 한 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분단의 아픔과 통일조국의 꿈이 더욱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지면서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함을 느꼈다.

▲ 인터뷰는 故김세진 이재호 열사 22주기 추모제날인 지난달 28일, 광화문 인근 한 찻집에서 진행됐다.[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특별히 기억나는 북측 인사들은?

■ 2002년도인가, 금강산에서 6.15 통일대회 행사 중에 금강산 산행순서가 있었다. 마침 김영대 위원장과 함께 손을 잡고 오르내렸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김 위원장이, “잡은 손, 놓지 말고 이대로 손잡고 서울로 평양으로 통일의 길로 함께 나갑시다”고 이야기했다. 그 뒤 8.15때 서울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에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고 하며 크게 함께 웃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안경호 선생의 통일에 대한 열정과 박학다식하고 명백명쾌한 이야기들도 생각난다.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의 큰 웃음도 기억난다. 남북 실무회담의 허혁필, 정덕기, 리춘복 단장의 원만한 품성도 잊을 수 없다. 조선 그리스도연맹의 강영섭 위원장의 뜨거운 기도도 생각난다.

저는 대표의 한사람으로 연설도 많이 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2003년 8.15때 능라도의 연설이다. 기념식이 끝나고 남녘 북녘인사들이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북녘 분들이 “어떻게 힘찬 연설을 하냐?”고 하기에. 박용길 장로님이 옆에 계셔서 얘기했다. “오늘은 이 두루마기 덕분이다”라고. 감사한 것은 8월 1일 날 통일의 집으로 박 장로님을 찾아뵈었더니 옷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 옷은 감옥에 갇혀있는 문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난생 처음으로 손수 지으신 옷이라 하셨다. 감옥에서 나오셔서 잠깐 입어보시고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시는 박 장로님의 그 아픈 눈망울을 보았다. 다른 옷은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했지만 이 두루마기만큼은 10여 년간 고이 간직한 옷이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잘 다려놓을테니 내일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뜻밖이었다. 김영옥 선생님과 <통일뉴스> 송정미 기자하고 함께 다음날 찾아뵙고 받아온 적이 있었다. 실상 그 옷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처음에는 감사하고 기뻤지만, 너무나 엄청난 것이라 잘 안 입었다. 특별한 행사 때는 입기도 하지만.

그 8.15대회 기간 중에 남측 대표들이 김영남 위원장 면담을 했다. 김 위원장이 이미 여러 가지를 알고 말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후에 2- 3년 세월이 흘렀는데, 어느 지역 어느 접대원들이 그 연설내용을 기억하더라. “단결은 결단이라고 하시지 않았나?” 놀랍고 고맙고. 가는 곳곳마다 어느 이름모를 북녘 동포들이 효순이 미선이 아픔을 안고 방미 투쟁했을 때, ‘민족자주’란 혈서를 쓴 얘기를 하더라. 저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북녘 동포들이 통일을 이야기할 때 그 진정성을 느꼈다.

□ 지금은 또다시 한풍이 부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 6.15 공동행사가 될까 의문인데. 현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고, 어떻게 돌파할 생각인지?

■ 이명박 정부가 지금 모든 분야에서 반동으로 역리역천으로 가고 있다. 통일부분에서도 순 엉터리다. 철학이 전혀 없다. 늘상 경제운운 ‘실용’운운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통일이 경제다. 진짜 실용이 되려면 기존에 있었던 6.15, 10.4선언을 인정하고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것이 참 실용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의 성과를 다 까먹고 반실용으로 가면서 역사를 그르치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북.미관계의 진전에 따라 이렇게 가면 안 되고 갈 수도 없다. 소위 이명박 정부의 '7.4.7'은 어디로 갔는가? 이제 그 거품이 사라지고 그 허구가 드러나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저는 정작 염려스러운 것이 주동적으로 우리가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시대를 맞을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우리 운동의 단결이 소중하지 않나 강조하고 싶다.

□ 청년학생대표자회의에서도 불허자가 났고, 6.15공동행사도 우려되고 있는데, 공동행사는 상황이 어떻게 가고 있나?

■ 참 한심한 일이다. 불허기준이 뒤죽박죽 제멋대로이다. 그동안에도 행사를 하다보면, 통일연대 인사들에게 불허했던 경험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를 겪고 나중에 전폭적으로 인정한 때도 있었다. 불허시대가 다시 오고 있다. 불허문제 뿐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볼 때 서울에서 하기로 돼 있는 6.15대회가 솔직히 불투명하다. 5월초 실무회담 통해서 다시 확인이 될 텐데, 이명박 정부의 결정적 전환표시가 없으면 행사가 어려울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 민간영역에서는 정권교체로 6.15공동행사가 안 된다면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가?

■ 지금 6.15공동위 차원에서는 백낙청 상임대표가 통일부 장관을 만나는 계획도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정부에 대해서 설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한국진보연대는 대중적인 입장에서 투쟁을 계획하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공적 질서를 확실히 세우고 공조직화해야

▲ 한 목사는 "진보운동은 바닥을 쳤다.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되면 안 된다"며 "(한국진보연대가) 공적 질서를 확실히 세우고 공조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한국진보연대 안에서 공동대표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나?

■ 이번 2월 진보연대 총회 대표자회의에서 각 주요단체의 대표와 그간의 연대체 대표였던 오종렬, 정광훈 대표와 저를 상임대표로 다시 선임하였다. 저로서는 오종렬 의장님을 비롯해서 모든 대표와 모든 단체성원들과 함께 진보진영의 통일단결과 민중주체 평등평화 통일세상을 열기 위하여 더욱 진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분야 뿐만 아니라 종교인으로서 이웃종교인들과 함께 진보진영의 의제 확대와 영적 생활변혁운동에 있어서도 어떤 역할이 있을까 생각해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역주체화의 과제가 현안이기에 되도록 이면 지역현장에 함께하고 싶다. 전국 온 고을 방방곡곡 바닥현장을 찾아다닐 일이 많아져서 되도록이면 TV에 나올 일이 별로 없었으면 한다.

□ 통일연대가 발전적 해체한다고 할까 한국진보연대로 뭉친다고 할 때 반대한 사람도 있었고, 통일연대 때보다 잘 안된다는 말이 있다.

■ 이미 말씀드렸지만 지금도 아쉬워하고 오히려 이런 시대에 통일연대가 좀 더 존속해야 하지 않나 하는 분들도 있다. 저도 그분들의 애정과 사랑을 이해하고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해해 주실 일이 역사의 흐름과 발전 속에서 실상은 단일대오, 단일전선체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된다. 그것이 안 되니까 통일연대 민중연대 나눠서 한 것이다. 이번에 그것을 넘어서서 해보자고 한 것이다.

과연 현재 한국진보연대의 현실은 취약하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이 있으니까 흐름에 맞춰서 우리는 목적을 분명히 세우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늦는 것 같지만 바른 것이다. 범민련이나 평통사의 역할도 중요하다. 범민련은 들어와 있고, 평통사도 함께 했으면 좋겠고. 크게 하나 될 때가 오리라고 믿는다.

□ 한국진보연대가 지난해 발족했지만, 대중단체를 아우른 시너지 효과랄까 그런 점도 없어 보인다.

■ 현재는 그냥 물리적인 당위적인 결합이다. 이제 화학적으로 융합해서 조직다운 조직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적 질서를 확실히 세우고 공조직화해야 한다. 항상 모든 단체나 정파가 공조직을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 정파문제를 해결하는 등 한번 크게 넘어서야 할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 우리는 대동단결 대동투쟁 대동승리를 외친다. 과연 투쟁없이 승리없다. 단결없이 투쟁없다. 이미 진보운동은 바닥을 쳤다.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되면 안 된다. 아직도 더 바닥을 쳐야 할 일이 남아있는가 생각하면 아프다. 역사에 대한 신심으로 민중에 대한 신심으로 동지에 대한 신심으로 이제는 하나 되어 일어서야 한다. 전태일 열사, 조성만 열사, 허세욱 열사, 모든 열사님들이 우리를 똑똑히 보고 계신다. 열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열사의 심정으로 세상을 살자고 호소하고 싶다.

□ 통일연대에 그동안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다. 통일연대에 대해서나, 한국진보연대로 넘어간 이후에 대해서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

■ 통일연대는 우선 첫째는 통일의 열정을 가진 많은 어르신들 덕분이다. 돌아가신 신창균 선생님과 여러 어르신들, 지금도 항상 일선에 함께 하시는 이종린, 박정숙, 김선분 선생님들을 비롯한 범민련, 통일광장, 유가협, 민가협 여러 선생님들이 시간을 내시고 돈을 내시고 통일연대를 함께 만들었다. 박순경 박사님과 전창일 선생님을 비롯한 고문, 지도위원님들의 격려와 헌신을 잊을 수 없다. 그만큼 애정이 크시니까, 통일연대 해소에 대해서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그분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기억할 분들이 있다. 실무진들이다. 통일연대에 계속해서 일해 왔던 분들, 한충목 위원장이나 전체 일군들이, 차비도 제대로 받지 않고, 헌신과 열정으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온갖 역할을 다 해 왔다는 것에 다시 감사한다. 이분들이 진보연대 안에서 혹은 새로운 운동 일선에서 새롭게 역할을 맡아서 하므로 통일연대 정신은 계속 계승되고 있는 셈이다.

저는 오늘 특히 4월 28일, 김세진 이재호 열사 추모를 하고 오는 길이다. 추모사로 우리가 무엇에 자기 목숨을 걸만한 것이 있나 질문을 했고, 또 한 가지는 그분들은 반미자주화의 학생선봉장이 아닌가? 그분들을 본받아 반미자주화 전선의 어디에 서 있는가를 질문하자고 했다. 그 무엇보다도 두 분이 같은 날 같은 결심으로 같은 결행을 했던 그 한 몸 동지의 사랑과 믿음을 본받자고 했다.

문익환 목사님의 ‘손바닥 믿음’이라는 시를 같이 나눴다. 모든 민족민주민중통일열사들의 뜻을 이어서 통일연대의 시대를 계승하여 진보연대의 시대로 새 역사로 나갈 것이다. 지금 역사가 반동적으로 나가더라도 우공이산의 정신으로 의연하게, 백척간두진일보의 실천으로 비상하게, 혁명적 낙관으로 신명나게 전진해야 한다. 웃으면서 끝끝내 길을 같이 가야 한다.

22일 날 해산대표자회의를 마치면서 저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노래하자고 제안했다.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노래의 마지막 가사처럼 하나됨! 이것이야말로 참 진보운동의 밑힘이요 본분이요 목적이요 사명이 아니겠는가.

늦봄님의 시를 계속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이게 누구 손이지 / 어두움 속에서 더듬더듬 / 손이 손을 잡는다 / 잡히는 손이 잡는 손을 믿는다 / 잡는 손이 잡히는 손을 믿는다 / 두 손바닥은 따뜻하다 / 인정이 오가며 / 마음이 마음을 믿는다 / 깜깜하던 마음들에 이슬 맺히며 / 내일이 밝아온다

믿음이란 말의 원천적인 언어가 ‘밑힘’이다. 이것이 참 중요하다. 지금 시대 속에서 6.15공동위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백낙청 상임대표님을 비롯해서 6.15공동위가 하나가 되어 대중과 함께 전진하는 것이 역사적 과제다. 통일연대의 의미가 진보연대로만 계승하는 것이 아니고 6.15공동위로 계승해서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계승이다. 지난번 대표자 회의에서는 미군범죄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도 중요하다고 결의하였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 오늘 말씀을 하고보니 ‘또다시 자기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나’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계속 기도할 것이다. 진정성으로 운동할 수 있기를.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의 꿈을 꾸며 활동하는 가운데 위대한 꿈 하나가 잉태되었다. 그 꿈이 무엇인가. 오늘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새로운 날 새로운 때에 이 거룩하고 절묘한 꿈을 함께 나누고 싶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 함께 기원하고 싶다. “한몸이니 한몸으로 한몸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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