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대 총선에서 민노당 비례대표 후보 3번으로 출마한 이정희 민변 변호사. 이 변호사는 재판부를 국민들로 바꿀 준비에 한창이다.[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 소속 이정희 변호사(39)는 민주노동당의 18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군에서 주한미군.여성인권.국가보안법 문제에 전문가이다.

특히, 1992년 윤금이씨 사건과 1993년부터 사회적 이슈로 일기 시작한 주한미군기지촌 성매매업소 문제는 이 변호사를 주한미군과 여성인권 문제에 천착하게 만들었다.

"기지촌에 갔다가 한 예쁜 여자아이를 봤어요. 여섯 살인가 그랬는데, 어머니는 성매매 여성이고 아버지는 미군이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어디론가 가버렸고, 아이 어머니는 업소에 2천만 원인가 빚이 있었죠. 근데 그 빚을 못 갚아서 어머니는 시달리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어요. 아이는 두고. 업소의 포주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죠.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엄마가 올 것이다 이런 생각인 거죠. 아이는 그런 사정을 알 지 못할 텐데. 그게 굉장히 가슴에 남았어요."

격동의 87년, 법과대학에 입학한 이 변호사는 "변호사가 제3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사회운동'을 하려고 했지만, 이 일들을 계기로 94년부터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전체 사회를 바꿔야 없어지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하나 하나의 일을 해결하고 싶었고 개별의 일을 해결하기에 변호사라는 직업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가 주한미군.여성인권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해 온지는 벌써 20여 년째다.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 총여학생회장을 지냈고, 이후 여대생대표자협의회에서 3년 가까이 활동했다. 그 이후에는 민변에서 여성위원회, 미군문제위원회에서 줄곧 이 문제들에 집중해 왔다.

민변 여성위원장직을 맡아온 이 변호사는 지난해 9월 이를 그만뒀다. 변호사 일을 쉬려고 했기 때문.

"변호사를 하면서 일단 많이 지치기도 했고,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단계 올라서려면 한.미관계 문제, 인권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전문적이고 스스로 계획해서 줄기차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했죠."

변호사 일을 쉬면서까지 '공부욕심'을 냈던 그가 덜컥 거친 정치무대로 데뷔하게 된 이유가 뭘까? 시종 여유 있는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에 단호함이 스쳐간다.

"10년 만에 한나라당 정부가 오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긴 호흡으로 쌓아가면서 가야지 했는데, 진보세력, 당으로서도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 같고, 그것은 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라는 현실에서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기로 한 겁니다."

정치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이 변호사가 총선에 출마하게 된 이유도 또 있다. '굉장히 답답한 한.미관계' 때문이라고. 그는 평택미군기지확장이전에서 보여지 듯, 불도저처럼 밀고 가는 정부와 이를 통제.견제 하지 못하는 국회, 알 권리를 차단당한 국민들을 보면서 변호사로서 하는 일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은 단순히 기지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 전체를 재편하고 동북아에서 미국의 군사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가 바뀌는 것"이라며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정부도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조약체결' 말하자면 전략적유연성을 허용할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날카롭게 말했다.

"원칙부터 시작해서 다시 한 번 짚어가고 싶어요. 외교안보분야를 정부의 조약체결, 정부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드는 것도 해야 되는 문제이죠. 외교안보분야의 정보도 완전히 차단돼 있는 것을 풀어낼 수 있도록, 제도의 개선을 하던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그 분야를 시민의 것으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 주한민군.여성인권 등에 천착해 온 이 변호사는 이시우 사진작가 사건을 무죄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이정희 변호사의 이미지는 변호사라기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가깝다. 그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은 재판에서 변론을 할 때도 차분하고 여유 있는 어조로 재판부를 설득해 나갔다고 전한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첨예하게 부딪치는 쟁점들을 특유의 감성과 부드러움으로 받아 넘겼다. 폭로전과 비방이 오가며 홍역을 겪었던 민노당의 모습이 불현듯 스쳐간다.

민주노동당을 분당 사태로까지 치닫게 만들었던 이른바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에 대한 견해를 묻자 이 변호사는 '정말 잘 해봐야 집행유예'라는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이시우 작가의 얘기를 꺼냈다. 이 변호사는 이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법원의 전향적 판결을 이끌어 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작가님이 최후진술 때 일리야 레핀이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림을 가지고 나왔어요. 유배를 떠난 혁명가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은 정작 이 사람으로 인해 풍파가 닥치지 않을까 하면서 반겨주지도 못하고, 내치지도 못하는 고뇌에 찬 표정을 짓죠... 뒤늦게 저도 '아! 내가 너무 무감했나보다' 했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서 사건을 잘 진행해 오더라도 결국 국가보안법이 가져다주는 당황스러움, 막막한 심정..."

그는 이 작가가 '2.3당대회'에서 '국가보안법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쓴 말을 되뇌며 "이런 느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여론에서 민주노동당이 친북적이다 추종적이다 얘기하더라도 강건한 마음을 가지고 설득해 나갔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안타까워했다. '진보신당'에 대해서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인 일을 같이 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차이는 시간이 지나고, 그만큼 진보세력이 같은 힘으로 가야 될 시기가 오면 서로 이해하면서 합쳐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의 남편은 민변의 통일위원장을 맡고 있는 심재환 변호사. 심 변호사는 아내의 국회의원 출마 소식에 "민주노동당이 살아나야 하고, 새로 시작해야 되는데, 시민사회와 가깝다는 사람이 좀 더 들어가서 진보정당의 폭을 넓히는 일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전체를 바꾸는 일은 못해도 법률가가 하는 것이 하나를 바꿔서 전체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부부의 생각이다.

이 변호사는 비례대표 후보 3번으로 비교적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위치다. 그러나 당장 50%이상의 당원지지를 얻어야 한다. 이번 전략공천과 함께 민노당에 가입한 이정희 변호사를 아는 이들이 많지는 않을 터. 더욱이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다른 당 후보를 지지한 전력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20여 년을 여성, 인권, 주한미군, 한.미관계 등을 키워드로 살아 온 이 변호사는 지금 국민들을 재판부로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민노당이 정파간 대결로 생긴 생채기를 파스텔톤의 정치색을 띤 외부수혈로 치유할 수 있을지는 당원과 국민들이 판단할 몫이다.

다음은 지난 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정평 사무실에서의 인터뷰 전문이다.

재판부가 국민들로 바뀌었다

▲ 이 변호사는 민주노동당이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믿음직스럽게 다가가기 위한 변호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통일뉴스 : 당원도 아닌데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추천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정희 변호사 : 제가 주로 해온 것이 여성, 인권, 한.미관계, 국가보안법 이런 것인데요. 민주노동당의 정책하고 거의 들어맞는 일을 해 온 것 같고요. 실제 일의 해 나가며서 사회단체와 많이 만나고, 또 협조해서 협력해서 일하게 돼서 아무래도 민주노동당이 조금 더 많은 분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게 지지하고 관심가질 수 있게 한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방향은 같으면서도 약간 외곽에 있던 사람으로 불러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결국 그동안 주로 피해자들의 일을, 재판부에 차근차근 설명하고, 무엇이 정의에 맞느냐, 보다 형평에 맞느냐를 주장하고 인정하게 하는 일을 해 왔다고 생각해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 특성을 살린다면 민주노동당이 국민들에게 편안하고 쉽게 믿음직하게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 뭐랄까, 재판부를 국민들로 바꾸었다고 해야 하나요, 좀 더 편안하고 쉽게 설명하는 일종의 변호인 역할이랄까 이런 것을 맡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강금실 후보를 지지했는데.

■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한, 애쓰고 일해 온 분들은 어렵지만 없는 월급 쪼개면서 일해 온 열심히 하셨던 당원 분들입니다. 노동자 농민이 국회의원이 되게 하는 굉장히 좋은 생각, 정당으로 보면 굉장히 훌륭하고 모범적인 것을 민주노동당이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에 가치를 두고 계신 분들이 생짜 초보 당원이고, ‘이전에 다른 당 사람을 지지했던 사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문이라고 생각해요. 의문의 초점은 ‘이 사람이 내가 아끼는 당하고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냐’ 이것일 텐데, 이것을 판단하시려면 사람의 행동 전체를 보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가 했던 일이 민주노동당이 해왔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고 나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기준에 보시면 크게 우려하실 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금실 변호사님 하고는 호주제 위헌 소송을 같이 했어요. 호주제 위헌 소송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준비하고 신청서 쓰고, 한 1년 동안 변호사 일을 하실 때 굉장히 노력해서 만들었죠. 사실상 위헌 신청해 놓고, 굉장히 정체상태에 있었는데 강금실 변호사님이 법무부 장관하시면서 법무부의 의견이 싹 바뀌었죠. 호주제 존치에서 폐지로. 저는 그만큼 강금실 장관님이 고루하다고 느꼈던 법무부 검사를 설득하는 힘, 지도력이 있다고 느꼈고 실제로 그 힘에 바탕 해서 호주제가 폐지됐고, 여성인권분야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진전이죠. 올해 1월부터 새로운 가족관계 등록이 시작됐고. 그래서 서울시장 나왔을 당시에는 개혁적인 여성법률가로서 뚜렷한 성과를 보였을 때고, 그런 성과를 이어나가길 바라는 게 같이 여성 인권을 위해 일했던 사람으로서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해요.


“민주노동당, 좀 더 현실적이어야”

▲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은 이 변호사.[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민변 얘기가 나왔으니, 그때 주로 활동한 것들을 말씀해 주시죠.

■ 여성인권위, 지금의 여성복지위원회인데, 여성 분야 일을 변호사 시작했을 때부터 해왔고, 그리고 다양한 인권분야, 양심적 병역거부라든가,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문제, 이것도 강금실 변호사와 같이 했었네요. 그리고 국가폭력피해자들 소송 등을 했고, 2001년에 만들었는데 미군문제위원회, 한.미관계, 주한미군지위협정 문제, 효순이 미선이 사건 진상조사라던가 그런 일들을 계속해 왔어요. 그게 폭이 넓어지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던가 RSOI 훈련에 대한 헌법소원, 전략적 유연성 문제, 평화협정에 대한 연구까지 이어져 왔죠. 여성분야에서는 주로 했던 것은 호주제를 중심으로 한 문제, 성매매 문제를 주로 했어요. 작년 9월까지 여성위원회 위원장을 하다가 그만 뒀죠. 변호사 일을 좀 쉬려고.

□ 덕수에서 정평으로 옮긴 것도 변호사 일을 쉬려는 이유인가요?

■ 네. 변호사하면서 일단 많이 지치기도 했고, 공부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 단계 올라서려면. 한.미관계 문제, 인권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전문적이고 스스로 계획해서 줄기차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을 했죠.

□ 민변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 가장 좋은 것은 시민사회하고 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좋은 변호사하고 같이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호주제 문제도 그렇죠. 여성단체들이 진보적 단체 보수적 단체도 있는데 그런 걸 하나로 모아서 어떤 과제를 함께 해 갈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는 좋은 변호사를 만났어요. 그리고 민변이 제가 보기엔 내부에서 별로 의견대립이 크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을 가지고도 자유롭게 의뢰인 입장에 서서 조금 더 개혁적일 수도 있고, 덜 개혁적 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사회진보에 현실적 기여를 할 수 있는 단체라서 그런 것이 힘이 많이 됐죠. 여성위원회나 미군문제위원회를 하면서는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는 집단이어서 변론을 나누어 맡고, 단체들과 같이 의논하고 그런 일들이 늘 가능했어요. 그런 일들이 늘 좋았던 기억이에요.

사건으로는 최근에는 이시우 선생님 사건이, 미군문제위원회에서 같이 일을 나눠서 함께 힘든 소송을 재밌게 했죠. 당사자나 변호인들의 노력은 일단 뒤로 물러놓고, 재판부가 전향적인 판결을 해서 사법부의 어떤 고루한 생각,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뒤바꿀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시민사회 입장에서 보면 이시우 선생님 개인이 문제되는 사건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활동은 개인이 했지만, 결국은 ‘시민운동이 평화문제, 안보문제에 어느 정도 관여할 수 있느냐’ 감시의 권리랄까 그런 것을 최초로 어느 정도 합법적이다고 인정받은 판례죠. 법률적으로는 헌법재판소가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것을 말로는 인정을 했는데 한번도 받아들인 적은 없어요. 이 사건은 비록 1심판결이기는 하지만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것을 조금 더 구체화 시켜서 권리로 인정해 주는 판결이라고 볼 수 있어서, 사법부로서 시민사회에서 매우 긍정적인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사자께서 노력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겠죠. 이시우 작가가 아주 치열하게 자기의 행동에 근거와 정당성을 열심히 설명했고, 그게 굉장히 조용하고 평화롭게 다른 분들께 울림을 가져왔다고 생각해요. 방청객은 사실 보수단체 어른들이 많이 오셨는데 법정에서 크게 충돌하지 않았어요. 이시우 작가님이 늘 설명 드리는 태도로 재판을 진행했고, 재판자체로도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아요. 변호인들이 다들 고생했고. 많은 분들이 관여해서 최선의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죠.

□ 비례대표로 출마한다는 것에 이시우 작가는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 항소심하고 손해배상이 잘 진행돼야 하는데, 변호인단이 계시니까 제가 아니어도 잘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웃음)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너무 고맙게도 선거 홍보물에 들어가는 것에 사진을 찍어주셨습니다. 정말 영광이죠.

▲ 민노당을 밖에서 지켜봐 온 이정희 변호사는 당이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밖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켜봐 오셨는데, 의회활동 4년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나요.

■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기도 하고 참 적기도 한 것 같아요. 민주노동당이 사실 기대를 많이 갖고 들어갔죠. 그 당시 지지율이 총선에서 급상승해서 들어갔으니까 어떻게 보면 국민들이 성과에 대해서 인정했다기 보다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성과를 쌓아 가려면 국민들하고 계속 대화하고 개혁과제에 대해서 여론의 지지를 얻는 것이 많이 필요하죠. 근데 여론의 지지를 얻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국가보안법 폐지도 열린우리당도 한다고 하고, 민주노동당도 고생했는데 안 된 것을 생각하면 확고한 여론의 지지를 완전히 따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정말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 기대는 많이 했지만 성과를 기대만큼은 미치지 못했던 것 아닌가. 결국 새롭게 시작해야겠죠. 기대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 여론을 확실히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구체적인 개선 방법 같은 것이 조금 더 현실적인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고, 훌륭한 원칙, 장기적으로 우리가 이뤄야 될 사회에 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가려면 한 단계 한 단계 잘 밟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과제들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한.미동맹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문제에서는 워낙에 정보가 독점돼 있는 것도 있지만, 당 자체가 그 분야에서 큰일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같습니다. 성과를 남기려면 그 분야에서는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평화, 안보 이런 분야가 정부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같이 알고 국민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주장하고 받아들여지게 해야 하겠죠. 그래서 세세한 정보들을 많이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이런 일들이 필요합니다. 이시우 작가님 사건에서도 그 문제를 검사가 얘기했는데 ‘권영길 의원이 작계5027을 밝혔다고 아직 수사 중’이라고, 그것 자체는 굉장히 훌륭한 활동이죠. 그것 아니면 이 시우 작가 사건에서 못 이겼을 것 같아요.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 비대위에서 재창당을 준비하고 있는데, 비례대표 후보로서 민주노동당이 가장 개선돼야 할 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 이 변호사는 '종북주의' '일심회 제명안' 등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도 특유의 감성으로 부드럽게 받았다.[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되게 어려운데.(웃음) 민주노동당 조직과 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기에 밖에 사람에게는 잘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야 접하는 것이긴 하지만, 조직에서 아픈 일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새로 들어간 사람들이니까 그 아픈 것들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그것보다는 아파하는 것 보다는 빨리 앞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국회에서 하나씩 계단을 올라가겠다는 모습을 잘 보여드려야 할 것 같아요. 국회가 열리면 몇 명이 당선되든 간에 방법을 잘 찾아서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은 사실 갑자기 한 순간에 떨어졌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조금 더 노력하고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드리면 언제든 회복되고 갑절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빠른 시간 안에 많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이른바 ‘종북주의’, ‘일심회 제명안’ 등 당내 논란이 있었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 국가보안법 사건을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국가보안법 사건에 맞닥뜨리게 되면 당사자도 되게 힘들어하고. 아주 잘해봐야 집행유예니까,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받는 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니까요. 구속기간도 일반사건은 30일인데, 국가보안법 사건은 50일이고, 계속 진술하라고 가족들, 당사자한테 회유하고, 가족들이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을 다른 일반 변호사사무실에 가져간다고 변호해 주는 것도 아니고, 결국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하는데. 민변 변호사들도 일반 사건처럼 수임료를 받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고 기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사실 쉽지 않죠. 그리고 사회의 인식이 있는 것 같아요. 이시우 작가가 저는 굉장히 의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체포, 구속되고 진술거부하고 단식하고 이런 과정에서 마음의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저도 마음 편히 변론했죠.

이시우 작가님이 나중에 변론 때 최후진술 할 때 그림을 가지고 나왔는데, 일리야 레핀이라는 러시아 미술가가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그림을 가지고 나와서 설명을 했어요. 유배를 떠난 혁명가가 돌아와서 집에 막 들어선 광경입니다. 혁명가는 지치고 힘든 상황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가족들은 정작 이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풍파가 닥치지 않을까 이러면서 반겨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치지도 못하는 고뇌에 찬 표정을 가족들이 보여주는데 이 작가님이 스스로 국가보안법이 생기면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어요. 뒤늦게 저도 ‘아! 내가 너무 무감했나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서 사건을 잘 진행해 오더라도 결국 국가보안법이 가져다주는 거대한 장벽으로써 당황스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참 막막한 심정, 그런데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다면 결국 난감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무죄판결 받으면 가장 좋은 것이고, 변호사가 해 줄 일이 그 난감한과 막막함에서 당사자와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변호사로서 한 사람을 지켜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심회 사건 보면서는 사실관계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참 안타까웠죠. 어쨌든 국가보안법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굉장히 힘든 일을 겪은 분들인데 그 문제 때문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던 당에서 그 문제 때문에 제명되느니 마니를 겪었으니 참 아쉬웠고. 이 작가님이 본인이 결심한 행동이지만, 민주노동당 당대회 가서 글씨 쓴 것 봤어요. ‘국가보안법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썼던. 전 굉장히 귀중한, 본인이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낸 열매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것이지만, 이길 수 있다 이런 느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여론에서 민주노동당이 친북적이다 추종적이다 얘기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이 북한에 대해서 정말 지령을 받아서 한 것도 아니고, 평화, 통일을 위해서 일을 해 왔으니까 강건한 만음을 가지고 설득해 나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 진보신당과 경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향후 민주노동당과의 관계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민변이라는, 시민단체 성격이 강한 곳에서 일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의견대립이 심한 곳도 아니고, 좀 더 다양한 생각을 가진 변호사들이 사회진보, 민주적인 사회, 이런 어떤 큰 틀에서 공유하는 가치를 갖고 움직이는 곳이니까, 저는 조금씩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사회에서 진보적인 일을 같이 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진보신당 가신 분들도 공동변호를 하신 분도 많기에 언제든 다시 차이는 시간이 지나고 그리고 그만큼 진보세력이 같은 힘으로 가야 될 시기가 오면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하면서 합쳐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갈등의 아픔이 크긴 하겠지만 나중에 좋은 더 큰 하나가 된다면 좋지 않을까.

정치에 뛰어든 키워드 ‘한나라당’ ‘한.미관계’

▲ 정치는 전혀 생각지 않던 이 변호사가 국회의원 출사표를 던지게 된 키워드는 '한나라당' '한.미관계'이다.[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원래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 (단호히) 아니요.

□ 출마 제의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 되게 죄송한 말씀인데, 변호사로써 10년 일해 왔는데 좀 더 정제되고 의미 있는 성과 있는 일을 하려면 한 단계 쉬었다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을 제가 스스로 제 안에서 풍부해 지는 과정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현실정치라는 곳에 뛰어들 게 된 것이 좀 스스로는 약간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그렇게까지 다 된 상태가 아니라, 죄송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근데, 계획한대로만 인생이 가는 것은 아니니까...

□ 사무실까지 옮겨서, 변호사 일을 쉬고 공부를 할 생각을 하다가 더 거친 정치현장으로 가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 10년 만에 한나라당 정부가 오니까... 저는 처음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긴 호흡으로 쌓아가면서 가야지, 개인으로도 그렇게 가야지 생각했는데. 진보세력, 당으로서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고, 그것은 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이라는 현실에서 가까운 곳에서 함께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참여하기로 한 겁니다.

한편으로는 욕심도 있죠. 욕심이라면 한.미관계는 굉장히 답답했으니까, 워낙 국회도 통제역할을 못하고, 청와대, 정부는 마음먹은 대로 일사천리로 가고 그 문제를 조금이라도 더 견제하고 시민들 편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면이 있죠. 인권이나 여성분야 일은 기본으로 갈 테고.

□ 한.미관계에서 답답한 면이라면?

■ 가령,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같으면 굉장히 중요한 사안인데, 그게 단순히 기지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주한미군이 전체를 재편하고 동북아에 미국의 군사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가 바뀌는 것이 기본에 있는 것인데,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정부도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조약체결’, 말하자면 전략적유연성을 허용할 수 있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개정이 먼저 이뤄지고, 그 실행단계로 평택미군기지확장, 이렇게 가야 정부로서도 절차가 맞는 것이죠. 근데 정부는 앞의 것을 안 하고 뒤의 것을 했어요. 미국도 이것을 먼저 시작했죠. 명분자체는 정부가 예전에 용산 기지는 이전하라는 요구가 있었으니까 미국이 옳다구나 하고 용산기지에 미2사단까지 얹어서 확장이전을 먼저 시작한 겁니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했다면 국회에서 단순한 미군기지를 이전해서 용산기지를 이전해서 민족적 자존심을 살리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합의가 있다는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서 정부로 하여금 처음 절차부터 국민에게 설명할 수 도록 하는 것이 맞는 것이겠죠. 근데 그것을 못한 채로 미군기지확장문제는 통과되어 버리고 당연히 전략적 유연성은 합의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죠.

한.미관계에서 진행되는 일들이 미국의 계획에 따라서 미국이 세워놓은 일의 순서에 의해서 진행돼 왔는데, 국회가 그것에 대해서 우리의 방식대로 우리의 법과 헌법에 따르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고, 한.미간 협상도 어떤 절차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통제 했어야 한고 민주노동당이 역할을 했어야 했죠. 근데 제대로는 못했어요. 결국 한.미 군사관계는 굉장히 어려운 상태에 와 있습니다. 공사가 한창이고, 키리졸브도 하고. 이런 게 그대로 이명박 정부의 5년 가고, 만약에 10년을 더 간다면, 북.미관계는 어쨌든 해결의 기미로 가고 있는데 한.미관계가 거기에 따라가지 않으며 북.미관계가 완전히 뒤집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서 원칙부터 시작해서 다시 한 번 짚어가고 싶어요. 외교안보분야를 정부의 조약체결, 정부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드는 것도 해야 되는 문제이죠. 외교안보분야의 정보 분야도 완전히 차단돼 있는 것을 풀어낼 수 있도록, 제도의 개선을 하던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그 분야를 시민의 것으로 가져오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 국회에 입성해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일단은 민주노동당이 처한 환경이 지금 아주 좋은 것은 아니니까, 민주노동당 해야 하는 주된 정책이 있다고 보여 져요. 서민들의 생활문제, 조금이라도 더 빨리 생활이 나아지게 하고, 신뢰를 얻게 하는 일들이 필요하죠. 그런 분야의 일도 민주노동당이 힘을 모아서 해야 하니까, 한 몫을 해야 할 것이고, 기본일 것 같아요. 한.미관계 문제, 여성, 인권분야, 이것은 민변에서 계속 경험했던 일들이니까, 많은 시민단체의 도움 받아가면서 협력해 가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전략명부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습니다. 또, 몇 %가 나올지도 모르는 데 이렇게 전략명부를 작성하는 것이 현실적이냐는 비판도 있는데.

■ 이미 후보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후보에 대해서 이런 저런 평을 하기는 조심스러운데, 민주노동당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전략명부추천을 하기로 했는지 정확히 이해 못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당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밖에서 바라본 사람으로써는 장애여성, 비정규직 노동, 학생.청년계층, 농민, 문화, 시민단체 이런 분들이 당의 전체적 색깔을 만들어 내는 데는 필요한 분들이고 좋은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색깔이 어떻게 모여져서, 그 이후의 일반명부, 여성명부에는 당에서 계속 일하신 분들이 계시니까, 전략명부 후보자들만 달랑 들어가서는 민주노동당이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고, 당에서 열심히 일해 오셨던 일반명부 여성명부까지 같이 들어가야 구색이 맞는 의정활동을 할 수 있겠죠. 지역에서도 올라오셔서 지역구 당선자가 나오고 그래야 지역구 기반도 있고, 비례의원으로써 특색도 있고 당의 정치적인 운영경험도 있고, 이런 분들이 모여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례후보가 10번까지 나오는 데 다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 총선 예상치는?

■ 기대치는 당에 계신 분들의 아픈 기억이 묻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이제 간다’ 이런 느낌이 올 수 있는 기간이었으면 좋겠고, 개인 개인으로 보면 굉장히 노력해 오셨고, 귀한 분들이기에 꼭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일단 어제 광주시당 결의대회에 갔다가, 광주 학생분들 하고 잠깐 말씀 나눴는데, 20대 실업이 굉장히 심각하다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분명한 것이더라고요. 적어도 20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까지는 가야하지 않겠나 생각했고, FTA, 민주노동당이 그나마 막아낸 것인데, 농민의원 없다면 말이 아니니까, 적어도 5-6번까지는 가능하지 않겠냐고 생각했어요. 학생들한테는 얘기했어요. 이주희 후보가 5번인데 하여튼 5번까지는 해야겠다고. 현실수준에서 5-6번까지는 가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당원 투표에서 과반을 넘어야 하는데.

■ 저를 아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가 해왔던 일들이야 민주노동당에 계신 분들이면 늘 관심을 가지고 같이 했던 분들이기에 문제자체는 어떻게 진전되고 해결돼야 할지는 아시겠지만, 구체인물로 들어와서 ‘이정희가 누구냐’에 대해선 잘 모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당에 오랫동안 계신 분들과 공감하고 있고, 같이 갈 것이고, 이런 믿음을 드리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믿음을 드리는 기간이 짧기는 한데 어쨌든 변호사로서 10년, 학생운동까지 하면 20여 년 계속 사회개혁진보의 가치에서는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게 지내 왔으니까, 믿음을 드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법률가는 하나를 바꾸어 전체를 바꿀 수 있으니까...”

▲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인 두 아들을 둔 이정희 변호사. '아줌마' 이정희에게선 소녀같은 말투와 감성이 배어나온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 변호사 이전에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 학교에서는 여학생회에서 주로 일 했고, 서울대학교 총여학생회장을 했습니다. 총여학생회장 마치고는 여대생대표자협의회에서 3년 가까이 했고, 94년부터 사법을 준비해서 97년에 연수원에 들어갔다.

□ 원래 법조계로 나갈 생각을 했나요?

■ 대학 들어갈 때는 부모님은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는데, 직접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서 법과대학에 갔어요. 제가 87학번인데 87년이 오죽이나 변화의 시대 아니었습니까? 변호사가 제3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직접 뛰어들겠다고 생각해서 운동을 하려고 생각했는데, 변호사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랄까, 92년 윤금이 사건, 93년부터 기지촌 성매매업소 밀집지역을 몇 번 가보기 시작했는데, 한 예쁜 여자아이를 봤어요. 여섯 살인가 그랬는데, 어머니는 성매매여성이고 아버지는 미군이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이미 어디론가 가버렸고, 아이 어머니는 업소에 2천만 원인가 빚이 있었죠. 근데 그 빚을 못 갚아서 어머니는 시달리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갔어요. 아이는 두고. 업소의 포주가 아이를 데리고 있었죠.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엄마가 올 것이다 이런 생각인 거죠. 아이는 그런 사정을 알 지 못할 텐데. 그게 굉장히 가슴에 남았어요. 전체 사회를 바꿔야 없어지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하나하나의 일을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개별의 일을 해결하기에 가장 좋은 직업이 변호사라고 생각해서 했죠.

□ 배우자가 심재환 변호사인데요. 총선 나간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 ‘필요할 것이다.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민주노동당이 살아나야 하고, 새로 시작해야 되는데, 시민사회와 가깝다는 사람이 좀 더 들어가서 진보정당의 폭을 넓히는 일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얘기했죠. 그리고 법률가가 가는 게 의미가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노동, 농민, 이런 계층에서 국회의원 하는 게 굉장히 좋은 사례인데, 거기에 국회라는 게 나라의 정치와 법을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법률가가 기술과 방법을 좀 더 조언해 주고, 막힌 데가 있으면 뚫어주는 역할을 하면 훨씬 더 민주노동당이 잘 해나갈 있지 않겠냐는 얘기였습니다. 전체를 바꾸고 이런 일은 못해도 법률가가 하는 것이 하나를 바꿔서 전체를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일 것 같습니다.

■ 아닌 것처럼 보이죠? 애들한테는 화도 냅니다.(웃음) 다 같이 싸울 땐 싸워야 할 것이고, 말로 안 되면 화도 내겠죠. 일단 필요한 것은 국회의원과 대화하는 게 필요한 것 같고, 먼저 필요한 것은 국민들하고 대화하는 일인 것 같아요. 국민들하고 대화하는 데 화낼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웃음) 좀 더 편하고 쉽게 부드럽게 가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 다들 어떻게든 잘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실 것 같고, 여러 사람, 다양한 사람들의 힘이 모여야 그 안에서 작은 차이로 싸우지 않아야겠죠. 좀 더 폭 넓게 큰 길로 가고 그런 방향에서,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믿고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 오랜 인터뷰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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