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 정책을 이끌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나 참여정부 시절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 - 통일뉴스 박현범 기자]
참여정부가 막을 내리고 이명박 정부가 불안한 첫 걸음을 떼고 있는 2월 29일, 참여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이종석(50)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나러 세종연구소로 향했다.

그는 참여정부 외교통일안보분과 인수위원으로 시작해 2003년 2월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 2006년 2월부터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으로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여파로 공직을 물러나기까지 명실상부한 참여정부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핵심 책임자였다.

공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는 그의 연구실에는 북한관련 자료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어 그가 저명한 북한학 학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는 이라크 파병이나 북한 미사일 실험발사 후 쌀 지원 중단 문제 등 참여정부 시절과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답변이 길어졌다. 그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특히 그는 현안이 되고 있는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UEP) 신고 문제와 관련해 지난해 2.13합의는 미국의 대북정책을 전환을 의미한다며 부시 행정부가 “북핵정책의 시행착오를 자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당시 미국 측으로부터 북한의 HEU(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과 관련한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며 “미국의 정책전환 이면에는 기존정책의 잘못을 인정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고 말하고 “(HEU 정보가) 대단히 과장됐거나 일정하게는 부풀려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따라서 그는 “더 두고 봐야”한다는 전제를 달았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진전된, 프로그램을 진전시켜서 공장을 건설하거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미 국무부도 결과적으로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며 “그런 점에서 본다면 HEU 신고문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합의점, 절충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미 미국이 2.13합의를 계기로 정책 방향을 바꾸었으나, 그전의 잘못된 정책의 폐해에 대해서 그 책임론을 시민사회에서는 따질 수 있지만 지금 국가 대 국가로서야 따질 수 있겠느냐”면서도 “우리가 한미동맹을 깬다라는 식의 정말 터무니없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런 것들은 상당히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최근 뉴욕필하모닉의 평양공연에 대해서는 “과거 냉전시대에 뉴욕필하모닉이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했던 그러한 영향과 지금 북한을 방문해서 하는 활동의 영향이 같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북핵문제라는 것이 걸려있다”고 지적했다.

‘싱송(Sing-Song)외교’가 북핵문제라는 현실적 장애물을 거저 넘어서게 해줄 수는 없으므로 결국 북미관계는 북핵문제 해결의 진전 여부에 달려있다는 현실주의적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보진영이 참여정부의 외교안보통일정책을 비판할 때마다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구도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수 있고 국민들에게도 우리가 나름대로 이 전쟁에 참여하는 방식이나 참여해서 하는 활동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절충점, 균형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으며, 미사일 시험발사 이후 쌀 지원 중단 문제에 대해서는 “쌀문제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엄격히 이야기하면 관례적으로 어느 정도 북한의 대남 전향적 조치와 맞바꾸면서 차관으로 제공되어 왔던 것”이라며 대북정책의 지렛대로 사용해왔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2006년 5월 경의선 열차시험운행이 실행 하루 전에 취소된 사태에 대해서 “그 당시 열차시험운행을 두고 군이 반대했고, 또 한쪽에서는 대남 쪽이나 경제 쪽에서는 하려고 했다는 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는 판단이다”고 말한 그는 “통일부와 북한의 통일전선부가, ‘통-통라인’이 밀실협상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사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과거의 정보기관인 국정원과 북한 통전부 사이의 밀실 협상을 오히려 법제화시키고 제도적으로 절차화시킨 것이 통일부와 통전부의 관계”라고 반박했다.

인터뷰는 2차 남북정상회담과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 등으로 이어졌고 1시간 40여분에 걸쳐 진행됐다. 이종석 전 장관의 생각을 차분히 따라가 보기 위해 다소 길지만 인터뷰 내용을 2회에 걸쳐 전재한다.

“HEU, 미 국무부도 회의적으로 보고 있어”

▲ 인터뷰는 2월 29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소재 세종연구소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사진 - 통일뉴스 박현범 기자]
□ 통일뉴스 : 뉴욕필하모닉의 평양 공연이 있었는데, 의외로 미국 정부는 필하모닉 공연은 북핵문제와 별개라는 듯이 너무 기대감을 갖지 말라고 하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 이종석 전 장관 : 뉴욕필하모닉의 연주가 과거와 같은 냉전시대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진영 사이의 동서 해빙, 관계개선의 중요한 계기가 됐음에 틀림없고, 그런 역사적 경험 때문에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도 새로운 관계개선의 큰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기대들을 당연히 할 수 있고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문제는 과거 냉전시대에 뉴욕필하모닉이 사회주의 국가를 방문했던 그러한 영향과 지금 북한을 방문해서 하는 활동의 영향이 같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불신하는 두 개의 세력이 불신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도 있었고 불신해소 이외에 다른 장애요인이 가로막지 않은 상태에서 ‘싱송외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큰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북핵문제라는 것이 걸려있다.

북핵문제가 이미 2.13합의 10.3합의를 통해서 서로 주고받기가 합의됐고, 지금 사실상 북핵불능화 단계, 그리고 거기에 맞는 조치로서의 테러지원국 해제나 몇 가지 조치들을 미국이 하게 돼있다. 서로 이렇게 첨예하게 양국간 관계개선이나 현안을 풀기 위해서 구체적인 것을 가지고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핵과 관련된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뉴욕필하모닉의 북한 방문 자체만 가지고 중대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은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그래서 가능성과 한계는 명확히 구별이 돼야 한다고 본다.

북핵문제가 이런 뉴욕필하모닉 방문을 통해서 촉진되는 측면이 있지만 지금은 워낙 명확하게 구체적인 실천을 두고 서로 시소게임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 자체가 일단 관계개선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아닐까 싶다.

□ 참여정부 출범 직전에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 문제가 제기되면서 참여정부의 대외정책에 상당히 큰 압박이 됐는데, 지금도 북핵 신고문제에서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신고문제가 핵심 현안이 돼 있다. 북의 입장에서도 미국의 입장에서도 서로가 양보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있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 미국의 힐 차관보가 언론을 통해서 얘기한 것을 보면 북한이 알루미늄관 수입한 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 것을 확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이 그것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해명했는데 핵 문제와 관련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힐 차관보가 이야기한 것이다.

HEU 문제에 대해서는 2002년 10월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민의정부도 그런 입장을 취했고, 참여정부도 미국한테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진위가 파악되기 전에 그 문제를 가지고 상황을 악화시켰을 때 HEU에 대한 진실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이 플루토늄을 더 생산하거나 해서 결국은 핵무기를 만드는 불행한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래서 HEU 문제에 대해서 보다 정확한 진상을 우리가 좀 알아야겠고, 그걸 기초로 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야기했다.

그 당시 미국의 네오콘들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장악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미국의 그 당시 태도는 마치 “우리를 의심하느냐?”는 식의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HEU 정보가 정확히 있었다면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승복하고 받아들이고 “아, 그렇구나” 이해하고 대처할텐데 우리는 그럴 정도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미국한테 물어봐도 자기네들을 믿지 못하겠냐고 하거나, 아니면 북한이 스스로 밝혀야 할 일이라고만 하면서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으며, 북한은 자기네들은 갖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은 힐 차관보의 발언 같은 것을 보면 HEU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진전된, 프로그램을 진전시켜서 공장을 건설하거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미 국무부도 결과적으로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HEU 신고문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합의점, 절충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HEU(고농축우라늄) 용어도 요즘은 UEP(우라늄농축 프로그램)로 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2002년 10월 이후에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핵 프로그램 개발을 이유로 제네바 합의도 다 깼는데 그럴 만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는다면 미국에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고 명분에 문제가 많이 생기지 않겠나?

■ 사실은 미국이 지난 2007년 2.13합의를 통해서 정책을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그 당시 벌써 미국 부시 행정부의 북핵정책의 시행착오를 자인하고 정책전환을 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정책전환을 해서 제자리로 돌아온 그 자리가 그동안 한국 정부가 주장해온 바로 그 지점이다. 그동안 한국정부는 북미간의 직접대화, 북핵문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고 정책을 펴야 된다는 것, 그 다음에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고만 한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과감한 주고받기 조치를 취해야 된다라고 미국 측에 줄기차게 주장해왔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그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물론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보기 보다는 미국의 자체적 판단으로 선회했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입장이 미국의 정책적 전환의 준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책전환 이면에는 기존정책의 잘못을 인정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본래 HEU 문제가 그 당시 미국 네오콘의 계산에 따르면 북한이 HEU를 통해서 이미 핵무기를 생산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크게 의도적으로 부풀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히 과장됐거나 일정하게는 부풀려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니겠나.

한편으론 이미 미국이 2.13합의를 계기로 정책 방향을 바꾸었으나, 그전의 잘못된 정책의 폐해에 대해서 그 책임론을 시민사회에서는 따질 수 있지만 지금 국가 대 국가로서야 따질 수 있겠느냐. 다만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과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정책적 쟁점, HEU에 대한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기초해서 이 문제에 접근하자는 한국의 입장 때문에 한미간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것 때문에 한국의 일부 비판언론과 여러 사람들한테 우리가 한미동맹을 깬다라는 식의 정말 터무니없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런 것들은 상당히 유감스럽다. 이 분들은 미국이 그 정책을 결국 다 바꿨고 또 미국이 어떻게 보면 과장된 HEU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한 것을 놓고 그 진상들을 정확하게 보지 않고 오히려 참여정부를 몰아세웠다.

“이라크파병, 동맹이 요구하는 것 다 들어줄 수 없어”

▲ 그의 연구실에는 북한 관련 자료들이 빼곡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박현범 기자]
□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2003년 6월 전쟁위기설까지 있었는데, 직접 느끼기에는 생각보다 위기의 강도가 셌다라고 가끔 표현했는데, 그 체감위기의 정도가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나? 참여정부가 보수와 진보 양측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특히 진보진영이 이라크 파병이라든지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게 미국의 입장이 관철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한반도 위기가 생각보다 부담이나 하중이 컸다라는 표현들과 연관되나?

■ 글쎄 뭐 새삼스럽게 공개할 수가 있는 게 있는 건 아니고, 200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 시점에서 미국 조야에서의 북한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여러 가지 논의가 나오지 않았나. 그런 것들이 실제 우리한테는 상당히 위기의식으로 느껴졌고, 그것이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의 삶을 대단히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국민들이 불안해했고, 그런 것들이 실제 주식시장에도 상당히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그 짧은 시간에 한미동맹을 나쁘게 한 것도 없고 이제 한미관계를 보다 발전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2003년 2월 25일 시점에 이미 마치 한미동맹을 출발도 안한 참여정부가 엄청나게 악화시킨 것처럼 그렇게 여론을 일부에서 몰아갔고, 그런 것들이 미국 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대외정책을 구사하는데 많은 한계로 작용했고, 특히 이라크 파병과 관련해서는 북한 핵문제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위기를 고조시키고 그것이 또 경제적인 불안정성으로 자꾸 연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미관계를 안정적으로 끌고 있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는 생각은 했었다.

사실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이라크 전쟁은 정의의 전쟁도 아니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하는 전쟁도 아니고 우리한테 엄청난 이익이 걸려있는 전쟁도 아니었을 것이다.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만든다는 의혹을 주장하면서 미국이 공격했지만 결국은 발견 못했다. 그것이 전쟁의 성격을 알려주고 있어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그런 개인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 부정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가를 운영하는 국정운영 지도자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는 다양한 구성요소의 국민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반도에서 보다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우리의 도덕적 기준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 한미관계와 미국의 역할, 미국의 영향이라는 것이 북한과 함께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안정하게 만드는데 그 당시로서는 아주 중요한 요소로서 북한 핵문제가 있었고, 한반도 평화와 안보상황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런 것들 속에서 미국이 이라크 추가파병을 요청해온 것이고 그때 한국의 대통령 입장에서는 동맹국 미국이 요구하는 파병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나 동맹이라고 해서 동맹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는 게 우리의 사정이다. 그래서 국민적인 정서나 우리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역량이나 중동지역과의 관계나 또 한반도 평화문제, 안전문제를 풀어가는 데에 필요한 여러 가지 비전이나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우리가 이라크에 전투병은 파견하기 어렵겠지만 평화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는 파병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정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입장에서는 특정지역을 맡아서 한국군이 그 지역 문제를 도맡아 처리 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러면 치안은 어떡할 거냐?”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때 우리는 “치안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우리 방식으로 책임지겠으니 미국은 걱정말라”고 했다. 그게 우리가 이라크 지역 민병대나 이런 걸 나름대로 잘 활용하겠다는 거였다.

아무튼 그래서 3천명의 평화재건 지원부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얘기했다. 그것은 미국의 희망과는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다. 맨 처음 미국이 파병규모를 이야기할 때는 3천내지 5천이라고 언질했지만 미국이 본래 파병을 희망했었던 인도와 터키가 파병을 안 하겠다고 거부함으로써 한국에 대해서는 1개 사단급까지도 희망이 늘어났다.

그런 희망을 늘린 데는 대한민국 보수진영에서 강력하게 대규모 파병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미국의 정책에도 역으로 반영돼서 미국도 한국이 대규모 파병을 하지 않겠느냐는 상당히 실현가능한 기대를 갖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미국이 원래 요구했던 만큼의 규모나 성격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걸 통해서 미국의 요구도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수 있고 국민들에게도 우리가 나름대로 이 전쟁에 참여하는 방식이나 참여해서 하는 활동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절충점, 균형점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억할지 모르지만 2003년 9월에 시민운동 단체들이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 주장한 것은 ‘전투병’ 파병반대였다. 파병반대가 아니었다. 당시 전투병 파병반대는 비전투병 파병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고 본다. 우리가 평화재건 지원부대 3천명을 내놓는 초기 과정에서 시민운동 진영에서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과정에서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은 보수진영 아닌가. 왜냐하면 그 분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적은 숫자에 전투병도 아니고 평화재건 지원부대였으니까 말이 되느냐. 오죽했으면 외교부 안에서 “떡 달라는데 아이스크림 주는 격”이라는 소리까지 나왔겠나.

그런데 그로부터 1년, 2년이 지난 뒤에 가니까 시민단체들은 이제 파병반대로 격렬하게 돌아서고, 그 다음에 “이게 말이 되느냐? 이렇게 적은 인원을 보내면서 이것을 동맹의 도리라고 보느냐”고 주장하고 우리를 질책했던 보수진영이나 비판언론들은 파병이 상당히 잘된 거라는 평가가 나오지 않았느냐. 우리는 3천명 파병을 통해서 쭉 가고 있는데 한국사회의 두 개의 갈등하는 진영의 입장은 상당히 시간이 가면서 바뀌는 것을 보고 겪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가 이라크 파병과 관련돼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그러한 균형을 향한 노력이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 오히려 우리 정부를 굉장히 코너로 몰아갔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김선일 씨 사건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난번에 아프간에서 선교활동하다가 여러 사람들이 피살당했다. 그때 국민들이 보여준 반응을 보라. 그때 반응은 정부가 절대 가면 위험하다고 말리는 곳에 가서 화를 당했을 때 화 당한 건 불행한 것이지만 그 부분에 대한 정부의 책임이나 개인이 져야할 책임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전보다 훨씬 구별하여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김선일 씨 사건 때는 사실 정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간곡하게 이라크 들어가면 위험하다고 경고했고, 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정말 그 지역 요르단 대사관, 이라크 대사관에서 한국인 출입국 동향을 항상 체크했으며, 들어가 있는 사람들한테는 위험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잡혀서 살해됐을 때, 그때 그 상황을 놓고 우리 사회는 우리 정부를 솔직히 거의 잡았다. 정부를 잡았다. 아니 뭐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다 그랬다. 변명조차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정부의 무능, 무책임, 파병을 단행한 대미 사대주의’ 등 각자 취향대로 정부에 몰매를 가했다.

나는 정부에 책임이 있고 정부가 거기에 대해서 받아야할 비판의 몫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도가 한참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파병반대 쪽에서는 파병반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정치력, 화력을 집중해서 “봐라, 가지 말라는 이라크 파병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피살되지 않았느냐” 하면서 정부를 맹공격했고, 또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들은 호재니까 진보진영과는 전혀 반대 입장에 있지만 공격하는데 있어서는 하나가 돼 가지고 심지어 외교부, 국정원, NSC 사무처가 국회에서 국정조사 받고 감사원 감사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안 있다가 일본인 두 사람 피살됐을 때 일본에서 보여준 반응을 보라. 한국에서는 김선일 씨 유해가 왔을 때 외교장관이 가서 엄숙하게 영결하고 뭐하고 다했다. 일본에서는 시신 운구 비용까지 개인한테 물리지 않았나.

나는 국가가 최선을 다해 할 수 영역의 바깥에 것을, 마치 신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요구하고서 그것을 못했을 때 정말 국가를 거의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까지, 그로키 상태에 빠질 만큼 그렇게 난타를 했던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우리 사회의 현상에 지금도 비애를 느끼고 있다.

쌀은 대북 지렛대, “일방적으로 제공한 적 없었다”

▲ 통일부 장관 재직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이라는 시련을 겪었다. 사진은 19차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권호웅 북측 단장과 환담하는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재임 기간 중 여러 가지 큰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중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이 제일 마지막에 제일 큰 사건이라고 보여진다. 그때가 가장 논란에 휩싸였던 시기로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이 실패했다라든지 미사일 발사 후 과연 쌀과 비료까지 끊어서 핵실험을 막을 수가 있었느냐라든지 상당히 논란이 있었는데, 그 정점의 시점을 지금 되돌아보면 어떤지?

■ 나는 이 일들은 대북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건 아니면 그 반대에 있는 사람들이건, 우리 사회가 균형적으로 사고하고 또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상황을 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쌀 지원을 중단한 것에 대해서 적지 않은 비판을 받고 심지어 그것이 참여정부의 정책이 오락가락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 자체가 사물을 너무 일방적으로 보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사실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 말하면 미사일 발사했을 때 우리가 비료를 지원하고 있었고 비료가 그 당시 아마 한 2,3만톤 정도가 전달이 덜 되었을 때였다. 약속을 하고 진행이 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비료에 대해서 미사일 발사 뒤에도 계속적으로 제공했다. 그래서 국회에서 그것 때문에 내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굉장히 공격을 많이 받았다. 신문에도 나지 않았느냐.

다만 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만약 미사일 발사했을 때 통일부 장관으로서 내가 주고 싶어도 당신들한테 쌀지원 하기가 어렵다는 점, 쌀 지원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미 북한 측에 고지했다.

“왜 미사일 발사도 막을 수도 없고 핵실험을 막을 수도 없는데 했느냐”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과연 대북 포용정책의 임계점이 어디까지인가. 포용이라는 것은 포용의 범위가 있을 것이다. 포용을 일탈하는 점이 어디고, 일탈 됐을 때 다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행동,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걸 생각을 해야 된다고 본다.

북한이 정말 어떤 부정적인 행동을 해도 우리가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쳐다보고만 있어야 한다면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의 지렛대, 레버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무슨 수로 있겠느냐. 오로지 말로, 구두선으로서 신뢰회복 밖에 얘기할 게 없을 것이다. 신뢰를 어떻게 형성해 나가겠나.

신뢰라는 것은 나름대로 상대방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가고 또 상대방이 예측을 벗어난 불합리한 행동을 했을 때 그것에 대해서 나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입장을 명확히 하는 것은 그것이 적건 크건 간에 상대방에 대해서는 일종의 징계행위가 될 것이고, 또 한편으로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제재적인 성격을 갖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라는 일을 당했을 때 과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미국은 우리한테 그 당시에 넌 페이퍼(Non-Paper)를 보내서 경제적인 남북간의 협력 문제, 이런 것들의 중단을 포함한 여러 가지 미국이 바라는 입장들을 개진했던 게 사실이다. 물론 우리가 미국의 희망대로만 행동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에게 대북 포용정책을 구사하는데 도대체 그 레버리지란 무엇인가, 또 어느 정도까지 우리가 포용의 범위를 두고 끌고가야 할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았겠나.

또 하나는 북한이 단순히 미사일 시험발사로 상황을 종료시킬 문제라면 달랐겠지만 이 문제는 북한 핵문제와 연결돼서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기 때문에 그 다음 수순인 핵실험이라는 수순이 존재하는 것이다. 북한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핵실험까지 갈 것이라는 전략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를 염두에 두고 우리가 북한에게 쌀을 제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되는 거다.

바로 그래서 우리가 쌀을 무조건 중단한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왜? 6자회담에 복귀한다라는 것은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으면 핵실험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그 당시에 쌀문제를 걸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어떻게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는 데, 이 말에 대해서는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쌀문제는 인도주의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엄격히 이야기하면 관례적으로 어느 정도 북한의 대남 전향적 조치와 맞바꾸면서 차관으로 제공되어 왔던 것이다.

북한에게 우리가 쌀을 매년 정례적으로 보내기로 합의된 것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뒤에 남북장관회담에서다. 북한이 처음에 100만톤 요구한 것이 50만톤으로 정리됐지만 그 쌀을 제공해달라고 요구할 때 쌀을 차관으로 제공해주면 이산가족문제, 경제협력문제 이런 것들을 자기들은 그 대가로 해주겠다고 사실은 북한이 먼저 우리한테 제안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쌀 문제는 단 한번도 사실은 그것이 일방적으로 북한한테 그대로 제공한 적이 없었다.

비료는 달랐다. 비료는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서 우리도 인도주의 문제니까 그런 것들을 반드시 일 대 일로 교환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그런 얘기 해가면서 인도주의적으로 지원했다. 쌀은 그거 보다는 조금 더 분명하게 남북관계의 진전이나 이런 걸 걸었다. 물론 핵문제를 건건 아니지만 남북관계와 관련된 걸로 서로 느슨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걸 상호주의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왜? 그거는 일 대 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남북관계의 진전이나 화해협력에, 특히 평화증진에 도움이 되는 어떤 요소들이 있으면, 우리 국민들에게 쌀을 지원하는 정당성을 알려주기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북한을 설득해서 서로 알게 모르게 주고받기를 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2004년 6월 30일에 있었던 남북 장성급회담에서 NLL(서해상 북방한계선) 관련해서 서해상에서의 신호체계가 합의된 것 아니냐. 그것은 대통령이 서해상에서의 평화정착에 굉장히 관심이 컸고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특별지시도 있어서 남북장성급회담이 설악산에 열리고 있었던 똑 같은 시간에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어서 서해상에서의 신호체계가 합의된 직후에 40만톤 쌀 지원을 사인했다.

북한한테 지원하는데 40만톤 쌀과 관련해서 그러면 우리가 상호주의를 건 것인가? 건 것은 아니고 결국은 우리가 북한한테 쌀을 지원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상응하게 평화를 증진하는 무엇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런 것들이 있었다. 쌀 지원 문제를 둘러싸고 지나치게 마치 무조건적으로 북한에게 지원해야 하는 것을 무분별하게 끊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쌀을 끊겠다고 하는 것은 7월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에 북한한테도 얘기했고, 사전에 국민들께도 보고했다. 다 얘기했다. 남북관계가 쌀 때문에, 북핵문제 때문에 경직될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도 남북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고 동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또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로부터 2006년 10월에 핵실험까지 있었지만 그 다음해 2.13합의가 나왔을 때 남북관계가 즉각 복원되지 않았나.

만약에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를 완전히 경색시켜서 다 끊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쌀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그 다음에 수해 있을 때 수해물자도 지원하고 이러면서 남북관계가 다시 복원될 수 있는 최소한의 동력들을 유지하는 관리를 해왔다.

그 다음에 나는 아직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는데 우리가 심각하게 우리의 안위와 평화를 위협을 받을 때는 평화도 인권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 평화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가 북한한테 그렇게 얘기했던 것이고 북한에게 끊임없이 쌀문제까지 이야기했던 것 아니겠나.

핵실험 후 미국 금강산관광 중단 압력, “팬티까지 벗으라는 것”

▲ 북한 노동신문을 스크랩해둔 자료집을 들춰보는 이 전 장관. [사진 - 통일뉴스 박현범 기자]
□ 핵실험 이후인 것 같은데, “미국 정부가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전면 중단을 요구했고, 한국 측이 이를 거부하자 마지노선으로 금강산 관광 중단을 요구했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이종석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직접 요구했다”는 보도들이 나왔는데.

■ 그 문제는 내가 확인도 부정도 안 하는 NCND로 처리했으면 좋겠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나를 찾아 왔었고 언론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핵 실험후 한국 정부 내에서도 적어도 금강산관광은 중단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상당히 강했고 정부 몇 개 부처에서도 그랬고 청와대 안보실 내에서도 그런 의견이 강했었고 어쩌면 그때는 내가 정부 안에서는 둘러싸인 고립된 섬 같은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그때 국회에서 나의 입장을 강하게 지원해줬다. 지금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또 대통령께 말씀드렸을 때 정부 내에서 조차도 부처간에 다수 의견이기 어렵지만 “그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전략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금강산관광이나 이런 것을 손댈 수 없다” 이런 결정을 내리셨다. 그때 우리더러 사실 끊으라는 게 얼마나 많았겠나.

그래서 내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에게 직접 설명했다.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제와 관련하여 내가 이런 표현을 썼다. “다른 나라들은 자기들이 입고 있는 옷 중에서 외투 하나 벗어제낀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이미 사실 런닝셔츠까지 다 벗고 팬티 하나만 입고 있는 상태에서 당신들이 이것마저 벗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는 북한 미사일 발사했을 때 쌀 지원 중단했고 그 다음에 상황이 교착되면서 북한한테 경공업 원자재 지원하는 것 안하고 있고, 기타 여러 가지를 합해서 중단된 대북 지원 혹은 제공물품이 3억 5천만 달러가 넘는다는 것을 얘기했다. “이것을 라이스 장관과 부시 대통령한테 보고해라. 일본이 북한에 대해서 제재한다지만 우리가 하는 것의 3분의 1도 안 되는 거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데 왜 우리한테 다시 또 요구하느냐?”

그랬더니 힐 차관보가 “그럼 그걸 나한테 정리해서 주시오” 그러더라. 나중에 우리 대통령이 우리가 북한한테 얼만큼을 줄 것 안 주고 끊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부시 대통령이 “나의 친구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이런 조치를 취했다”고 한 말들이 다 우리 통일부가 영문으로 그 당시에 핵실험에 직면해서 금강산관광 끊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서 그동안 한 조치들을 쫙 설명하고 그 다음에 개성공단은 어떤 성격이고 금강산관광은 뭐다라는 것을 만들어서 미측에 제공한 자료에서 나왔다.

그중에 특히 우리가 대북 쌀 지원 유보한 것부터 해서 얼마만큼 현재 끊고 있는가를 만든 표가 있었다. 그 표를 힐한테 전달해서 라이스한테 보고했다. 여러 가지 노력을 통해서 그 당시 상황을 돌파했는데 그때는 굉장히 어려웠었다. 대북 포용정책을 지킨 것하고 금강산관광을 지킨 것이었는데, 그걸 지킨 것도 우리 통일부였고, 또 쌀지원을 중단한 것도 통일부였지만 그 하나하나는 대북 포용정책이라는 일관된 틀 속에서 추진해왔으며, 아직도 확신을 갖고 있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지금도 잘 안 알려졌는데,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 결과에 대해서 정보들이 각각 달랐고 구체적으로 나온 것도 없었다. 핵실험만 하더라도 “실패다, 폭발력이 적었다, 실제로 한 것은 맞느냐”, 또는 “성공이다, 진보된 차세대 핵무기 실험이다” 등 여러 가지 설들이 있었는데, 미국 측으로부터 정보제공이 원활치 않았는가?

■ 글쎄, 미국의 판단도 여러 가지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 분명한 것은 핵실험을 했다는 것이지 핵실험의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내가 그 논란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할 입장은 아니다.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서는 실패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아마 그 당시에 우리들 입장에서 대포동미사일 시험발사 하나만 했다면 상황을 정리해 나가는데 오히려 조금은 더 나았을텐데 스커트미사일, 그것도 사정거리가 우리 남한 밖에 올 수 없었던 것도 발사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또 우리 정부의 정책적 범위도 그만큼 제한시켰다.

□ “핵실험을 했다” 이걸로 그냥 정리된 것인가?

■ 핵실험을 했다라는 것 자체는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거나 추정할 수 있는 것이고, 추정에서 입증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자체가 군사력 시위의 측면도 있지만 더 큰 것은 정치 전략적, 외교 전략적 측면에서 그들이 어떤 시위를 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이 그 당시에 어떤 정책을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논의의 중심에 있기가 어려웠다. 또 북핵문제라는 것 자체는 우리 혼자 푸는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미국이 주도해서 푸는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분위기가 있지 않은가 싶다.

□ 어쨌든 북이라는 까다로운 상대를 대상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전문적으로 일해 왔고, 참여정부에도 참여해 왔는데, 북이라는 체제, 핵실험을 하고 특히 요즘은 선군정치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체제의 특성, 내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 참 어려운 게 내가 북한 공부를 한 사람인데, 통일부 장관을 지내고 나니까 이제 북한 체제 자체에 대한 평가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는 상당히 부담을 느낀다. 그렇지 않겠느냐.

아무튼 뭐 북한 체제 자체도 상당한 변화의 시기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변화는 지도부가 자체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 그리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능동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해나가는 그런 변화도 있고, 또 하나는 지도부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체 사회구조나 사회저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북한사회, 북한체제의 내구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튼 일단 변화의 시기에 도래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런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구체적인 얘기는 공개적으로 하기 어렵다..

□ 장관급 회담을 몇 차례 했나? 마지막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의 회담이 제일 어려운 회담이었을텐데, 장관이 돼서 직접 대화를 해보니 이론과 실제랄까, 막상 부딪쳐 보니까 어떠했나?

■ 두 번 했다. 이론적 영역만을 추구하는 학자들이 있을 것이고 또 실천과 연결된 학자들도 있을텐데 나 같은 경우는 일단 정책적인 것들도 그전에 좀 다뤘고, 또 역사연구를 상대적으로 많이 했다. 그런 것들이 상대방을 대하는데 여러 가지 도움을 줬던 것 같다.

내가 민간에 있을 때인 91년부터 북한 사람들을 대했다. 물론 적법하게 정부의 허가를 받고 만났다. 그리고 NSC에 있을 때는 직접 북한 사람들하고 협상하고 이런 건 안했고 다만 2005년 6.17면담 직후에 림동옥 통일전선부장이 서울에 왔을 때는 정동영 장관과 같이 포괄적인 남북문제와 북핵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

그리고 북한의 협상에 나온 분들이 나를 잘 알고 있고, 나도 그들을 잘 알고 있어서 협상 자체에 상대방에 대해서 느끼는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 대표들도 상투적인 선전적인 것을 가지고 나를 몰아세우거나 그런 건 없었고, 그래서 뭐 이론과 실천 사이에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또 그동안에 많은 회담 회의록을 봤다. 회의록을 본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항상 내가 그 회의장에 앉아있다고 생각하고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도움이 됐다. 그래서 통일부 장관은 나름대로 대북문제에 대해서 전문적 식견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뭐 내가 잘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통-통라인’이 밀실협상?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 2006년 7월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직후 냉랭한 분위기 속에 부산에서 열린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 모습.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미사일 실험이 있고 나서 부산에서 열린 남북장관급 회담이 상당히 힘든 회담이었는데.

■ 그때는 사실 우리가 회담을 연기하거나 안 하겠다고 하면 남북관계는 판이 다 깨지는 것이라 우리는 하겠다고 했지만, 북한이 안 내려오기를 내심 바랬다. 그렇게 되면 덜 격렬하게 부딪치면서도 어느 정도 판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당시 국면에서는 미사일, 북핵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됐었고 그 이슈는 남북관계 만으로는 안 되는 이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 온 세계가 여기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우리는 장관회담을 통해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었고 북한은 이것을 회피하고 싶었고, 북한이 내려온 건 쌀 지원을 받을 요량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협상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것은 명료했던 것이다.

다만 마무리가 안 돼도, 결렬이 돼도 이렇게 넘어가면 그 다음 회담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담을 해야 되지만 회담의 결과는 명백해서 사실은 굉장히 착잡했다. 그래서 남북장관급회담 하는 날 부산 내려가기 전에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만나 이야기했다. “이번 회담은 이럴 것이다.” 물론 그런 걸로 모두 다음의 결과들을 합리화 할 수 없고 합리화 되지도 않지만, 굉장히 착잡했다.

그리고 들어오는 북한 대표들도 그렇게 얼굴이 경직됐고, 정말 내려오기 어려운 걸 내려오는 그들도 얼마나 힘들었겠나. 그들도 남한을 빤히 아는데 내려오기 싫었을 것이고 내려와 봤자 별로 얻을게 없다고 생각했겠는데 군이나 이런 데서 내려가라고 하지 않았겠나.

□ 당시 북측 단장인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는 그 뒤로 만나 봤나?

■ 만났다. 열차시험운행 때 개성에서 만나 권 참사가 나한테 와가지고 술도 한잔 따라서 같이 마시고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모 신문에서는 그때도 북한에서는 내가 쌀 지원 중단한 것에 기분 나빠서 시험운행 열차에 탑승했는데 권호웅 참사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냉대했다는 식으로 아주 소설을 썼다. 나빠도 그렇게 나쁘면 안 된다. 사실에는 기초해야 되는 것 아닌가.

□ 언론과의 관계가 계속 불편하지 않았나?

■ 내가 뭐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었다. 참여정부가 기본적으로 불편했고, 참여정부가 불편한 그 분열의 대척점에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외교안보통일 문제를 중요한 걸로 삼았기 때문에 항상 언론이 공격해 들어오기 좋았고, 또 나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을 참여정부에 대한 공격의 한 부분으로 보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 불편했었다. 언론 기자들 개인적으로는 서로 나쁜 사람이 없었겠지만 그들이 자기 언론사의 이해에 따라서 글을 쓰다 보니까 그러지 않았겠나.

□ 흔히 ‘통-통라인’(통일부-통일전선부 라인)이라는 말이 많이 나왔는데, 북측 군부와 통일전선부 입장이 다르다고 해석하는 틀도 있다. 열차시험운행이 안 되면 통전부 라인에서는 하려고 했는데 군부가 안 된다고 했다는 분석과 같은 것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인가?

■ 정부 입장에서는 추정을 갖고 말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래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정책적 행위에 대해서 “그 내면에서는 군부가 이러이러했을 것이다. 군부가 반대했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기는 어렵다. 물론 북한 내에 군의 생각이 다르고 경제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좀 다르고 이러겠지만 그런 것들이 내부적으로 하나로 조정이 되거나 아니면 지도자가 결정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크게 부각되기는 어렵다. 그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 않겠나.

그러나 지난번 열차시험운행 같은 경우는 그렇게 단순히 부처 간의 생각이 다르고 그런 것들이 조정되는 것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 “대남 협상하는 쪽하고 군부는 다르다” 이런 정도의 추정의 문제가 아니고, 실제 그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하고 우리가 열차시험운행 합의를 해서 북한 당국과 사인했고 발표됐다. 그러면 북한에서 열차시험운행이라는 것이 김정일 위원장의 결제 없이 불가능하지 않나. 그리고 그걸 군부도 처음에 인정했는데 몇날 며칠 협상을 해가는 과정에서 자꾸 뒤트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 추정에는 군에서 계속 김정일 위원장한테 열차시험운행의 문제점을 계속 보고하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틀어진 것이라고 보는 거다.

그것은 사실상 참 있기 어려운 것이다. 아마 내각 쪽에 누군가가 김정일 위원장한테 철도연결의 필요성을 건의했을 것이다. 경공업 원자재가 필요하고 그러니까 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겠나. 그들의 지도자가 한 결정이 번복되는 경우는 내부적으로 시행이 되기 전이라면 모르지만 대남관계에서 더욱이 공개적으로 발표된 것을 번복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데 결국은 번복이 마지막 날 되었다. 그 전까지 우리는 군과 협상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열차시험운행을 두고 군이 반대했고, 또 한쪽에서는 대남 쪽이나 경제 쪽에서는 하려고 했다는 것은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 남쪽 내부에서는 통일부와 국정원의 역할분담을 두고 계속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심지어는 회담을 하면 첫날 얼굴마담만 통일부가 하고 실제 협상은 국정원이 물밑에서 다 해버린다는 이야기가 많다.

■ 어떻게 본다면, 72년 남북공동성명이 이후락 정보부장하고 김영주 조직부장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나. 남북관계라는 게 특성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우리 정보기관하고 북한 노동당 사이에서 처음에는 밀실에서 시작됐다. 이런 밀실 협상은 절차적으로도 그렇고 실제 합의된 내용들에서도 하자가 많이 발생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더 투명하게 절차에 따라서, 공개적으로 하고 남북관계를 공론의 장과 법적 틀 속에 법제화시켜온 것이 통일부였다. 그리고 남북장관급회담이 만들어진 뒤부터 사실상 국정원이 대북협상이나 이런 전략에서 했던 역할들이 상당부분 통일부로 넘어온 것이다.

2000년 이후에는 통일부, 특히 수석대표들의 접촉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남북 장관회담을 갔을 때 통일부와 국정원이 다 같이 가지 않느냐. 물론 공식적인 수석대표 접촉이나 실무대표 접촉도 있고 그것도 안 되면 또 하나의 다른 접촉도 할 수 있겠지만 그 모든 판단과 기준 이런 것들을 다 수석대표가 지정을 해주고 회의를 통해서 결정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거의 남북관계에서 국정원과 북한 통전부와의 관계가 특사문제라든가 초기의 비공개가 철저히 필요한 남북정상회담 같은 것 등은 국정원이 같이 깊이 개입돼서 하지만 나머지 분야들에 대해서는 통일부가 모든 것을 주도한다. 물론 비공개라해서 절차를 무시하고 이런 건 아니다. 당연히 절차가 있다. 한미 간에도 비공개로 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또 당연히 특사문제나 이런 것도 통일부가 통일부 장관이 지휘해서 하게 돼있는 그런 구조로 변화돼 왔다. 어떤 사람들은 통일부와 북한의 통일전선부가 통-통라인이 밀실협상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사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과거의 정보기관인 국정원과 북한 통전부 사이의 밀실 협상을 오히려 법제화시키고 제도적으로 절차화시킨 것이 통일부와 통전부의 관계고, 또 이것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계속)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