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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 시대, 냉전세력에 의해 파괴된 <비전향장기수>묘역유영호의 '민통선-DMZ' 통일맞이 나들이 (22)
유영호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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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8.02.18  13: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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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의 묘가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약 15분 정도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보광사란 천년 고찰이 있다. 두 곳 모두 파주시 광탄면에 소재하고 있다. 보광사는 신라 진성여왕의 명으로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는 국가의 비보사찰로서 한강 이북의 6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필자가 이 곳을 찾은 것은 불교사적 의미에서 찾은 것은 아니며, 이곳에 얼마 전까지 연화공원이라는 <비전향장기수들의 묘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보광사로 오르는 길로 약 50미터쯤 올라가서 좌측 언덕 위에 자그마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  장기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 우익단체에 의하여 파괴되고 난 뒤 연화공원의 현재 모습. ‘연우지석’만 홀로 남아 있다. [사진-유영호]  
 
그런데 비전향장기수들의 영혼의 안식처였던 이곳 연화공원은 그 앞에 이것을 수식하고 있는 ‘통일애국투사 묘역’라는 말 때문에 지난 2005년 12월 보수단체에 의해 파괴되어 버리고, 이제는 청화스님의 시가 새겨진 연우지석(戀友之石)이란 시비만 남아있으며, 이곳에 안치되었던 봉분들은 모두 옮겨진 채 외로이 빈터로 남아 낙엽이 어지러이 쌓여 냉전의 상처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죽어서도 사상검증과 전향을 요구받은 꼴이 되었다.

연화공원에 안치되었던 비전향장기수들

한 인간이 자신의 사상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임을 우리는 안다. 이들은 한 평생 감옥 속에서 목숨을 걸고 폭력과 회유를 뿌리치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켰고, 또 그러한 신념 속에서 하나된 조국을 꿈꾸었던 사람들이다. 지금은 보수 우익세력에 의해 혼령이 되어서도 쫓겨갔지만 파괴 당시 이곳 연화공원에는 남파간첩 출신 금재성, 최남규와 빨치산 출신 류낙진, 정순덕, 손윤규, 정대철 등 비전향장기수 6명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 최남규 선생 묘비. [통일뉴스]  
 
최남규(사망 1999년)
<이력> 스스로 “백두산 장군(김정일)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힌 최남규(1912생)는 청진대학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 57년 남파 후 57년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출소 후 3년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돼 89년 석방. 그는 출소 직전인 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그날 그때가 올 때까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비문>“해방 후 청진 교원대학 지리학교수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하시다가 57년 구속되어 29년의 감옥생활에서 지조를 지켜내신 민중의 벗! “백두”옹 여기에 잠드시다”

(사진 5-4-3)
   
  ▲ 금재성 선생 묘비. [통일뉴스]  
 
금재성(1998)
<이력> 1924년 충남 대전 출생. 보통학교 졸업 후 원산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44년 금촌 소년 형무소에 투옥. 출소 후 45년 공산당에 입당해 독찰대(헌병) 원산지구 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인민군으로 참전. 정전 후 원산 주을전기전문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중 56년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돼 고향인 대전에서 간첩활동. 그는 이듬해 체포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72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
<비문> “일제강점하 민족해방투쟁으로 3년의 소년옥과 해방 후에는 조국통일을 위해 57년 투옥되어 30년의 형옥 속에서도 전향을 하지 않고 당신의 지조를 지키며 빛나는 생을 마치다”

   
  ▲ 류낙진 선생.
[사진-통일뉴스]
 
 
류낙진(2005)
<이력> 1928년 전북 남원 출생. 전쟁 때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뒤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구속돼 67년 석방됐고, 71년 다시 ‘호남통혁당재건위’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가석방. 출소 후 94년 ‘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돼 8년형을 선고받고 99년 광복절특사로 석방. 2002년 백운산지구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5년 사망.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
<비문> “민족자주 조국통일의 한길에 평생을 바치신 선생님, 우리민족사에 영원히 빛나리라”

   
  ▲ 정순덕 선생.
[사진-통일뉴스]
 
 
정순덕(2004)
<이력> 1933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스스로 빨치산이 됐다. 국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쫓겨 가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다 63년 11월 체포. 이후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하다 1985년 8월 가석방.
<비문> “마지막 빨치산 영원한 여성전사, 하나 된 조국 산천의 봄꽃으로 돌아오소서”


   
  ▲ 손유규 선생 비석. [통일뉴스]  
 
손윤규(1976)
<이력> 전북 부안 태생.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6.25사변 당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 이후 그는 55년 경찰특무대에 구속돼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76년 강제전향공작에서 단식투쟁으로 저항하다 강제급식으로 옥사(獄死).
<비문> “조국통일을 위해 투쟁하시다가 비전향으로 옥중에서 생을 마친 열사! 여기에 잠들어 계시다”

정대철(1990)
<이력> 빨치산 출신으로 21년 6개월간 수감됐다가 1990년 사망.
<비문> 없음 

연화공원의 조성과 우익세력에 의한 파괴

이 연화공원이 조성되기 전에는 그늘진 산비탈에 비석만 초라하게 서있던 곳이었지만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과 실천불교승가회 그리고 시민사회활동가들이 한평생 조국통일 운동을 해오다 운명한 비전향장기수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노력하였고, 또 이들의 노력에 당시 보광사 주지 일문 스님이 흔쾌히 사찰의 땅을 일부 내 주어 100평 내외의 조그마한 이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하지만 연화공원은 운명한 비전향장기수들의 임시 안식처일 뿐, 영원한 쉼터는 아니었다. 통일광장을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남북평화협상 등을 통해 비전향장기수 2차 송환과 함께 유해송환을 추진할 방침이었던 것이다.

보광사 주지 일문 스님은 “보광사에 장기수 묘역을 마련한 것도 북한땅에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 묻히고 싶은 그들(장기수들)의 바람 때문이었다”면서 “사상 동조 여부를 떠나 우리 사회가 이제는 한국 현대사 속에서 희생된 이분들을 포용할 여건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또 "공동묘역 마련은 불교 자비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며 흔쾌히 묘역부지를 제공해 준 것이다. 이처럼 비전향장기수의 묘지와 비문 조성의 내력을 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을뿐더러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 파주 광탄면 보광사입구에 2005년 5월 27일 조성된 연화공원. 안내석의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묘역’이란 문구가 보수단체에 의해 문제제기된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보수세력은 그리 넉넉하지 못한 것 같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에서 연화공원의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묘역’이란 묘역 안내석의 문구를 문제삼은데 이어 한나라당이 “비전향장기수를 통일애국지사로 받드는 이 묘역이 파주에 조성된 것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라며 논란을 확산시켰다.

이렇게 조선일보에 의해 논란이 시작되고 이를 통해 연화공원의 존재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면서 수구단체들은 묘역을 찾아가 묘비를 발로 차고 붉은색 페인트로 칠하는 등 묘역을 훼손했으며, 급기야 2005년 12월 5일 수십 명의 북파공작원 HID회원과 광탄면 영장2리 마을주민들이 해머로 묘비를 산산조각 내고 곡괭이로 무덤을 찍어 묘역을 심하게 훼손시켜버렸다.

이 과정에서 류낙진 선생의 유골함이 드러나는 등 유해가 훼손되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분단의 틈바구니 속에서 일생 고난을 받은 장기수분들에게 몸 뉘일 한 평의 땅 조차 허용하지 않는 극단적인 냉전의 사고, 폭력적인 태도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법원이 묘역을 조성하고 비석에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를 새겨넣은 통일광장 공동대표 등에 대해 무죄를 판결한 것이다. 보수단체들은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소한 바 있다.

   
  ▲ HID 회원들이 쇠망치로 장기수묘역의 비석을 부수는 모습. [사진-파주시청]  
 

   
  ▲ 파주시 광탄면 노인회원들과 주민들이 보광사입구에서 묘비철거를 요구하는 시위 장면. [사진-파주시청]  
 

   
  ▲연화공원 안내석의 글 내용에 불만을 품고 망쳐놓은 모습. [사진-오마이뉴스 김준희]  
 

   
  ▲ 2005년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한 김기남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측대표단 일행이 14일 국립묘지 현충탑 앞에서 참배하고 있다. [사진출처-국정홍보처 홈페이지]  
 
이 사건에 앞서 같은 해 8.15 민족대축전 당시 북측 대표단은 자신의 적으로 한 때 총부리를 겨누었던 국군이 안장되어 있는 현충원을 참배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우리 남쪽은 그 사상적 편협함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찹찹한 마음 가눌 길이 없다.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어느 한쪽의 이름으로 이렇게 역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인간다운 가치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최소한 그 신념과 의지만이라도 박수를 받아야 할 일이지만 이 시대 우리의 정치논리는 그들에 대하여 용서할 수 없는 악마로 손가락질하며 무지막지하게 매도만 하였다.

오랜 세월 가족들의 고통과 설움은 또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이에 대해 무슨 말을 하랴. 시비만 외로이 남아 텅 빈 채 낙엽으로 뒤덮힌 이곳 연화공원에서 필자는 두 손을 모으고 한동안 눈을 감았다. 옥고를 치르면서도 전향을 강요받았던 이들이 죽어서도 이렇게 전향을 강요받아야 하는 현실에 이제는 좀더 넓은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봤으면 하는 바람 간절할 뿐이다.

비전향장기수의 발생연원

그렇다면 우리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인 ‘비전향장기수’란 말이 생기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과연 무엇이 이들을 ‘신념의 화신’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은 바로 국가기관의 폭력과 강압에 의한 강제전향이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가 한창이던 1930년대 시작된 이 고약한 제도는 일본에서는 패전과 함께 사라져버렸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 시대를 거쳐 박정희 집권기간에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이 야만적인 제도는 비전향장기수라는 100여명의 독특한 인간군을 낳았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가장 직접적인 성과로 이들 비전향장기수 중 63명은 2000년 9월 수십 년 옥중생활에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 북으로 돌아갔다. “만약 꿈길에도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면 문 앞의 돌길이 다 닳아 모래가 되었을 것을”(若事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砂)이란 시를 남쪽의 벗들에게 남겨두고서.

분단 이후 일제잔재를 더욱 악랄하게 발전시킨 강제전향제도를 이겨낸 비전향 장기수들과 출소 이후 사망자를 포함한 총 94명이 산 징역 기간을 합하면 모두 2854년, 한 사람당 평균 31년이다. 27년간 징역을 살고 나와 지구촌을 놀라게 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도 이 땅의 비전향장기수 집단에 데려다 놓으면 반 평균을 깎아먹는 처지가 된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이들은 0.7평 독방에서 보냈다.

세계 최장의 장기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닌 김선명 선생은 1951년 투옥되어 45년을 옥중에서 보내고서야 사회로 돌아왔다. 김선명 선생보다 며칠 앞서 투옥된 분으로 지난 2000년 북에서 돌아가신 이종환 선생이 계셨지만, 김선명 선생보다 2년 먼저 출옥하셔서 김선명 선생이 그런 타이틀을 안게 되셨다.

(참고로 북쪽에서는 김선명 선생의 삶을 그린 영화 <내 삶이 닻을 내린 곳>(2004)이 영화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송환된 이인모 선생의 삶도 <민족과 운명>의 11편~13편에 영상화되었다.)

분단정권으로 출현한 이승만 정부는 일제의 사상보국연맹을 본받아 보도연맹을 만들어 전향자들을 대거 가입시켰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약 30만 명에 달하던 보도연맹원들 중에서 한강 이남 지역의 맹원 대부분은 경찰 소집으로 조직적으로 ‘처리’되었다. 이남에서의 강제전향공작은 이렇게 전향자들을 한번 싹쓸이한 토대 위에서 1950년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전향제도가 극심하게 작동되었던 것은 박정희 정권이다.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전국의 각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수 800여명을 이남의 모스크바라 불리게 된 대전형무소로 집결시켰다. 그 뒤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1월 21일), 푸에블로호 나포사건(1월 23일) 등이 연이어 일어나자 북의 특수부대가 대전형무소를 공격하여 좌익수들의 탈출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박 정권은 대전에 좌익수 일부를 두고 광주, 전주, 대구, 목포 등지로 분산시켰는데, 1년 뒤 목포는 취약지대라고 수용자들을 다시 대전으로 이감했다.

박정희 정권의 강제전향공작이 본격화한 것은 1973년 6월 대전, 광주, 전주, 대구 등지의 교도소에 중앙정보부의 지휘와 책임 아래 ‘사상전향공작반’이 설치되면서였다. 1960년 4월 민중봉기 이후 장면 정권은 간첩죄를 제외한 모든 무기수들을 일률적으로 20년 형으로 감형시켰는데, 70년대 초반이 되자 이들의 출옥이 임박한 것이다. 또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등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진전을 보자, 박정희 정권은 합법공간이 열릴 것을 우려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을 전향해야 내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박 정권은 한편으로는 강제전향공작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형기를 마쳤으나 전향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계속 구금하기 위해 사회안전법을 준비했다.

이 당시에 강제전향이 그토록 폭력적으로 실시된 데에는 어쩌면 박정희 자신의 열등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남로당의 군사부 핵심간부였다가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함께 사회주의 혁명투쟁을 전개했던 동지들의 명단을 넘겨주고 살아남은 박정희에게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는 장기수들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돼오고 있는 전향거부투쟁은 단순히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양심’을 지켜내기 위한 소극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선 식민지해방투쟁의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었고, 반공과 반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분단을 영구화시키려 했던 독재정권과의 목숨을 건 정치투쟁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꿈과 한 인간의 실존적 터전에 자유가 넘치는 봄날은 정녕 어렵기만 한 일인가. 국민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미래의 민족과 역사를 위한 일이라는 참으로 그럴싸한 명분 아래, 아부하지 못하는 양심과 힘 약한 개인들의 인간다운 권리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이 꺾이고 피 흘리고 통탄의 절규 속에 죽어가기도 한다.

여전히 정치 논리가 힘이 되고 정의가 되는 세상에서, 사람 사이의 순수한 인연과 여러 사상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봄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인가. 여러 색깔과 각기 다른 모양의 꽃들이 자유롭게 피어 아름다운 꽃 세상을 이루듯 사람들의 다양한 몸짓과 목소리는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으로 될 수는 없는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 아래 인간의 꿈들은 참으로 무참히 정치 폭력에 희생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외세의 역사를 벗지 못하고 냉전 이데올로기로 동족끼리 처절한 응어리를 만든 우리 민족이 지금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참으로 잔인한 세월을 살고 있다. 그리고 지난 냉전시대의 논리인 ‘빨갱이 논리’는 아직도 가장 확실한 시대의 선악관이 되어 우리를 한없이 맥 빠지게 한다.

하지만 지난 지대가 물러나고 새로운 시대가 앞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모든 만물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지난 시대의 추억에서 못 벗어나는 최후의 저항인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이지만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비록 소수일지라도 다치는 일이 있을까 걱정해보며 이제 모든 기행을 마치고 서울로 되돌아 간다.

<장기수 가족들 삶의 이야기>

   
  ▲ 민족자주 조국통일의 한길에 평생을 바치신 류낙진 선생님 영결식. 국민배우 문근영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여 일반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사진-통일뉴스]  
 
필자가 찾은 보광사 장기수묘역 연화공원에 안치된 분 가운데 류낙진 선생은 국민배우로 우리에게 알려진 문근영의 외할아버지이다. 최근에는 밝고 청정한 이미지로 전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 문근영의 가슴 아픈 가족사가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문근영 가족이야기로 장기수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하여 나눠보고자 한다.

문근영의 외할아버지는 ‘통혁당 재건 사건’, ‘구국전위 사건’, 등으로 30년 넘는 세월을 장기수로 복역했던 통일운동가 류낙진 선생이다. 장기수 류낙진 선생 일가에 대한 아픈 가족사는 광주 지역의 재야계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었다.

특히 아내인 신애덕 여사의 지나온 50여년 세월은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신애덕 여사 역시 전쟁이 발발한 1950년 류낙진 선생과 함께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였으며 1953년 전신에 4발의 총탄에 맞으며 체포되었다. 그 뒤 류낙진 선생도 체포·구속되어 그를 면회간 것이 계기가 되어 류낙진 선생인 석방된 뒤 1958년 둘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 뒤에도 계속 수배, 구속, 투옥을 반복하다 1971년 보성의 중학교 교사였던 남편 류낙진 선생이 ‘통혁당 재건사건’으로 고정간첩으로 몰려 구속된 이후, ‘빨갱이 가족’이라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남편을 대신해서 시장 행상과 보험 외판원 등으로 어린 시동생 두 명과 네 남매를 교육시켰다.

그러던 80년 광주항쟁 당시 자식과 다름없는 시동생 영선씨(당시 전남대 재학)가 진압군의 총탄에 사망하고, 역시 경찰에 연행돼 간 큰딸(문근영의 큰이모·당시 조선대 재학)과 막내아들(당시 고교생)의 생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초도 겪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신 여사가 최근 문근영의 외할머니로 매스컴에 이따금씩 등장하면서 광주의 재야계에서 조심스레 “문근영이 장기수 류낙진 선생 일가의 외손녀”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신 여사는 광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문근영의 부모를 대신해 촬영장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외손녀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사실상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근영 또한 이런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문근영이 최근 연기활동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성금으로 기부하고 있고, 또한 북녘 동포 돕기 운동에도 나서는 등 선행이 잇따르고 있다.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남들보다 더 아팠던 만큼 남들보다 더 반듯해야 한다는 가정교육 때문인 것 같다.

실제 문근영은 고향인 광주시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운영중인 ‘빛고을장학회’에 2천만원을 기탁한 것을 비롯해 사회복지공동기금 성금 1천만원, 광주국제영화제 성금 1천만원, MBC <느낌표> 순천 ‘기적의 도서관 짓기’ 성금 5백만원 등을 잇따라 냈다.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것만 이 정도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북의 용천 대참사가 일어나자 그는 용천참사동포돕기 바자회에 직접 참여했고, 북에 연탄 보내기 자선행사에 동참하여 북녘 땅을 밟은 가장 어린 연예인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CF 수입 등으로 번 돈은 거의 예외 없이 성금으로 썼다. 특히 학생복 모델로 받은 돈 3억원은 전액을 소아암 환자 돕기와 ‘책읽는사회운동본부’에 기부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에 대해 문근영은 “엄마는 내게 ‘어려움을 아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께서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두 분 모두 공무원이어서 충분히 능력이 있는데, 어린 제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속상해 하신다. 그래서 그 돈을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다고 하신다. 나도 아빠 엄마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근영의 소속사 관계자 또한 “근영이는 부모님과 외할머니의 교육 영향으로 행동이나 생각이 또래 연예인에 비교해 두드러질 만큼 어른스럽고 아주 반듯하다. 영화 <어린 신부> 이후 모델료가 많이 올라 수익이 상당했으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을 기부하고 있다. 근영의 부모님 역시 근영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재산을 불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신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오며

필자의 통일기행은 보광사의 옛 장기수묘역인 연화공원을 마지막으로 정리되었다.
이번 통일기행의 출발은 6.15 공동선언의 참뜻을 새기고자 <김대중도서관>에서 시작하였고, 또 이동경로로 김대중도서관에서 가까운 강변도로를 따라 ‘자유로’를 이용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은 통일의 상징적인 길로 알려진 1번 국도 ‘통일로’를 선택한 것이다.

앞서 기행 속에서 살펴보았듯이 ‘자유로’가 갖고 있는 배타적 의미를 잊어 버리고 이제 7.4 공동성명이 발표되던 1972년 개통된 통일로를 이용함으로써 마음 속으로라도 조국통일 3대원칙이 우리가 통일을 이루는데 그 이정표임을 다시 한번 가슴속에 새겨보기 위함이었다.

비록 통일로가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화해의 길로 자리매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 곳곳에는 각국의 참전기념비등 전쟁을 상기시키는 기념물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이제 냉전시대의 잔재로써 앞으로 사라져야 할 모습이기에 더 이상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오직 그 이름 ‘통일로’라는 세 글자만을 가슴에 넣도록 해보자는 생각에 통일로를 달리며 오늘 하루 돌아본 여러 곳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약 3~4분쯤을 달렸을까? 자동차가 파주시와 고양시를 차례로 벗어나고 서울로 접어들 즈음 검문소앞 신호등에 걸려 정차해 있는 동안 좌측 고양시 지축마을 입구에 놓인 비석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짧은 한 줄의 문장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을 祖國統一에 바치리라”.

   
  ▲ 고양시 지축마을 입구에 놓인 비석. [사진-유영호]  
 
이제 이 비석에 새겨진 글처럼 조국통일이란 우리 민족의 대과업을 이루기 위해 7천만 우리 겨레가 모두 하나되어 이루어 낼 것임을 약속해 본다.

한편 필자는 자기라는 ‘개인’과 민족이라는 ‘집단’을 하나로 통합시킬 때만이 인간은 그 속에서 새롭게 되어난다는 것을 이번 기행에서 느끼게 되었다. 결코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속에서 그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집단 속에서 자신의 행복과 존엄이 지켜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가 모두이며 모두가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불교의 핵심사상인 ‘一卽一切, 一切一卽(하나가 전체, 전체가 하나)’의 화엄사상과 같다. 이제 우리는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우리의 통일운동은 전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제는 비록 서로의 생각과 방법이 다르더라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란 목표만 같다면 널리 서로 손잡고 어깨 걸고 함께 그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임을 느꼈다. 지난 날 적대와 증오를 접고 이제 한 민족으로서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여야 우리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은 가능할 것이다.

벌써 2차에 이르는 남북 정상간의 만남이 있었듯이 이제 통일의 시대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결에서 그것에 거역하는 행태들이 간혹 일어난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그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일제시대 후반기 친일로 돌아선 소설가 이광수가 해방을 맞이하여 “이렇게 빨리 해방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한 말처럼, 지금의 반통일세력들이 “이렇게 빨리 통일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이제 모든 통일세력은 하나가 되어 힘차게 통일의 역사를 열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민통선이 해제되고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무너져 비무장지대에서 남과 북 모든 우리민족이 통일의 기쁨을 함께 할 날을 기다리며 필자는 이번 '통일맞이 민통선-DMZ기행'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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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보기(7)
한가람 () 2008-02-27 10:00:12
통일조국의 날은옵니다.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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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통 () 2009-08-02 00:29:35
양민이 학살됐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과거이자 그들의 &#45329;은 반드시 보상돼야 마땅하지요.그들을 위로하고 보람을 드리는 길은 남북이 한시바삐 통일을 하는 것 뿐이외다.냉전의 산물로 전쟁이 생겼고,미국이 쏘련을 얼러서 분단을 조성한 것이 오늘의 불행을 불러온 직접원인이지요.분단은 이미 전쟁을 예견했지요.민족화합 외에는 행복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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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라 () 2009-08-02 00:21:47
해방직후에는 좌익세력이 절대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당시는 민족이 당면한 과제가 일제에서 해방되는 것인데,조국해방운동을 가장 줄기차게 했던 세력이 바로 좌익세력이지요.그리고 쏘련의 혁명에 고무도 됐지만 실제로 그들의 지원이 독립운동에 커다란 힘이 됐던 것이지요.따라서 당시 좌익사상은 해방운동사상이기에 이를 멀리한자들은 모조로 일제에 복무하거나 양다리를 걸치려는 눈치꾼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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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차 () 2009-08-02 00:11:47
삼천리강토를 40년이 넘도록 지배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안겨준 일본놈과 짝짝궁 한패가 돼서 반북,반통일,반민족 작태를 벌리는 것을 먼저 규탄해야 합니다.지금 멀쩡하게 잘 구러가던 남북관계를 전쟁일보직전으로 몰고가 일본을 기쁘게하는 일에 온 정열을 쏟아붇는 세력들이 더 큰 문제입니다.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떤사상과 주장도 용인되는 것이지요.불구대천의 원수는 일본이지 북의 동족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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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 2009-08-01 04:59:02
양민을 학살한 자들은 외세의 주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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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G () 2009-07-31 18:24:07
통일운동가라구요? 김일성 김정일 정권 찬양하는 사람이 통일운동가라니 어이가 없을 따름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정권을 위해 싸운 사람들입니다. 남한을 북한이 먹도록 평생을 일한 사람인데 북한에겐 통일운동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은 나라 말아먹을려구 작정한 적입니다.
어이가 없군요. 빨치산에게 억울하게 죽어간 대한민국 양민들의 혼은 누가 위로해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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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nSumbfub () 2009-04-29 11:32:42
Hello, I can't understand how to add your blog in my rss r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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