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호('통일맞이 나들이 - 하나를 위하여' 대표)


민통선 안에서의 마지막 기행장소였던 대인지뢰사고지 및 스토리사격장에서 이곳 <북한군, 중국군 묘지>는 전진교를 이용했을 경우 무척 가까운데, 민통선에 처음 들어올 때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와야 했으므로 그 신분증을 되찾기 위하여 처음 들어왔던 통일대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30분쯤은 시간을 절약했을 터인데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을 허비하며 먼 길로 돌아와야 했다. 통일대교로부터 이곳 묘지까지는 약 20분이 소요된다.

▲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에 위치한 북한군, 중국군 묘지 제1묘역. 바로 옆에는 제2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이곳 묘역에는 총 201구의 시신이 묻혀있다. 이곳의 묘는 망자들의 고향인 북을 향하여 안치되어 있다. [사진-유영호]

민통선을 벗어나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6번지에 있는 <북한군, 중국군 묘지>. 이곳도 예전에는 민통선 내에 위치했지만 지금은 민통선지역에서 해제되어 그 위치를 알면 누구나 쉽게 찾아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민통선 밖으로 놓이게 되었어도 지난 2007년 봄까지 그 일대의 지리를 잘 알지 않고는 쉽게 찾아가기 어려웠다. 차량으로 근처에 도착해서도 논길을 따라 걸어서 꽤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문산에서 연천으로 이르는 37번 국도가 확장 개통되면서 무척 편리하게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문산에서 연천방면으로 37번 국도를 따라 파평면을 지나 적성면으로 들어가자마자 도로 좌측 낮은 언덕 너머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모든 생명체의 죽음 앞에서는 숙연해지듯 이곳 묘역에 왔을 때 필자도 그들의 사상과 이념을 떠나 먼저 묘역의 맨 앞에 서서 머리를 숙여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들 묘는 모두 고향 땅인 북쪽을 바라보며 안치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슬픔을 더하게 한다. 이런 현실에서 어서 하루라도 빨리 남북이 통일되어 고향 땅에 이들이 안치되고, 가족들이 묘들 돌볼 수 있어 좀더 편안한 저승길이 되기를 빌어보았다.

이 묘역은 조성 당시 '적군 묘지'로 불리다가 '북괴군-중공군 묘지'를 거쳐 1999년부터 '북한군, 중국군 묘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름이 길고 하여 아직도 사람들은 관성적으로 그냥 '적군묘지'라고 부르고 있다.

현재 이곳은 총 3천2백여 평의 규모에 제1묘역(1996년 조성)과 제2묘역(2000년 조성)으로 구분되어 전체 173묘, 201구의 시신이 묻혀있다. 제2묘역에는 모두가 지난 전쟁 당시 사망한 인민군, 중국군들이 안치되어 있으며, 제1묘역에는 이들 외에 전쟁 이후 이곳 남쪽에서 사망한 북측 사람들, 즉 간첩들이 안치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간첩사건들의 이름이 이곳 묘비에 새겨져 있다. 1.21 사태 무장공비, 대한항공 폭파사건, 남해안 반잠수정 침투사건 등. 이처럼 이곳은 전쟁 때 죽은 자들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북에서 첩보활동을 위해 남파되었다 사살된 사람들이 묻히고 있는 것이다.

▲ 제1묘역에 묻혀있는 간첩단 사살자들 명단. 대한항공폭파범 김승일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유영호]

민통선 안에서 살펴보았듯이 민통선 일대의 땅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을 노려보고 있는 대인지뢰와 이곳 묘지를 보니 아직도 전쟁이 끝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 당시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였던 만큼 인민군들의 시신을 묻어둔 묘지는 전국에 널려 있었다. 그런데 탈냉전에 접어들면서 북미간 유해 송환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이에 남측 정부도 제네바협정 정신에 따라 한 곳에 이장함으로써, 나중에 남북간 유해 인도 협정이 맺어지면 빨리 인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차원에서 이곳 파주시에 묘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 묻혀 있는 누구의 유골도 북으로 간 적은 없다. 정전협정이란 용어에서도 알 수 있지만 1953년 양측이 맺은 협정은 종전(終戰)협정이 아닌 정전(停戰)협정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전쟁의 당사자였던 남측은 아예 정전자체를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외쳤기 때문에 정전협정에 참가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것은 인민군과 중공군이 유엔군과 합의한 협정이다.

'정전'을 헤이그 육전규칙(陸戰規則)에서는 부분적인 혹은 일시적인 평화 상황이 아닌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한 잠시 동안의 군사 행위 정지 상태일 뿐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전쟁 중인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정전체제의 장기화 속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발성에 대하여 무뎌져 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정전체제에 대하여 최근 종전선언을 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또한 이번 제2차 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하니 여기서 필자는 희망섞인 기대를 가져본다.

한편, 묘비명에 '무명인'이라고 쓰여진 묘 앞에서는 왠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에 안타까움 마저 더하게 된다. 죽어서도 자기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 이들. 생전에 무슨 원한이 있었든 죽어서는 서로가 화해하고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듯이 이들도 죽어서는 편안히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어서 하루라도 빨리 종전선언이 이루어지고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이곳 묘지에 더 이상 묻히는 북측 사람들이 없기를 빌어보며, 해방 후 북에서 반동으로 낙인 찍혀 남으로 도망친 시인 구상이 전쟁 직후 인민군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지었다는 <초토(焦土)의 시 8 - 적군 묘지 앞에서> 을 떠올려 본다.

시인 구상은 지난 해방 전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비판받으며 1947년 월남하였다. 그리고 전쟁시기 국군의 종군시인으로 활동했으며, 박정희와는 절친한 사이로 박근혜에 의해 "아버님의 오랜 친구이자 저에게는 정신적 선생님"이라고 불리었을 만큼 우익인사였다. 하지만 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망자 앞에서는 그저 그들의 영혼에 평온이 있기를 빌었던 사람이다.

<초토(焦土)의 시 8 - 적군 묘지 앞에서>

▲ 무명인의 묘. [사진-유영호]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이곳 <북한군, 중국군 묘지>에 묻혀있는 사망자 가운데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은 전쟁 중 사망한 사람들을 빼고는 1968년 1월 21일 남녘 땅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32명의 무장간첩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로 남측 군경과 대치 속에 사살된 30명이 이 이곳 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바로 이곳 묘지가 위치해 있는 곳은 이들 간첩단 32명이 북에서 남파되어 서울로 진입한 길이기도 하다. 이곳을 지나 서울시 한복판까지 무장한 채로 진입에 성공하였지만 그들 가운데 30명이 사살되고 유일하게 체포되어 생존한 김신조는 그 뒤 전향하고 지금은 헌신적인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또 한 명의 간첩은 검거 및 사살되지 못한 채로 행방불명 되었다. 아마도 다시 월북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당시 이들 간첩단 124군 부대의 침투로는 행정적으로는 파주와 연천의 경계이며, 군사적으로는 미 2사단과 국군 25사단의 경계인 고랑포를 통하여 월남하였다. 이곳은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후에 38선에서 분단을 확정한다는 계획이 가장 정확히 관철된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전쟁 전후 두 번이나 분단선이 지나갔던 곳이다.

▲ 김신조 간첩단의 군사분계선 일대 침투로. [자료-중앙일보 2008.1.21]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특히 이곳이 미군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었다. 국군으로 오인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미군 지역의 철책이 구형 철조망이었기 때문이다.

1967년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였고 이 공사는 그 해 248㎞ 휴전선 전 지역에서 완성되었지만 미군 지역 4㎞정도는 제외되었다. 美 2사단 측은 철주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대적하려는 한국군의 대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또한 124군 부대가 이곳을 택한 것은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 관할지의 경계선으로 사각지대가 되기 십상인 부대간 경계지역으로 빠진다는 침투전술의 기본을 따른 것이다.

한편, 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들 124군 부대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들로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렸기에 파주시 법원읍에서 간첩신고를 받고도 이들을 추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특수훈련에 잘 단련된 부대였지만 이들은 몇 가지 이유로 실패하고 만다.

▲ 1.21사태 관련자 32명 가운데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 그는 현재 서울성락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자료사진-유영호]
첫째로 당시 산 속에서 나무꾼 형제를 만나서 자신들이 노출되었을 때 이들을 사살하지 않고 풀어준 것이며, 둘째로 방향을 잃자 산행을 포기하고 산에서 내려섰던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 정문으로 바로 돌진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도보로 걸어가자는 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되며 이러한 여러 요인들의 결합하여 이들의 청와대 습격은 실패로 끝나고 거의 모든 부대원이 사살되고 만다.

이 가운데 최대의 실수는 나무꾼 형제를 살려줌으로써 이들이 마을 파출소에 신고를 하게 되고 이러면서 이들의 침투가 노출되었던 것이다. 이들 나무꾼은 이 사건으로 뒤에 크게 표창을 받는데 당시 이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정부측 관계자의 질문에 이들은 "경찰이 되고 싶다"는 말을 하여 최근까지 파주시 법원읍에서 경찰직 공무원으로 채용되어 일했다.

이렇게 당시 남쪽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2002년 5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씨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접견했을 때 김 위원장은 이 사건에 대하여 정식으로 사과하여 역사를 정리하였다. 비록 냉전시대의 일촉즉발의 무모한 행위였지만 이렇게 지난 과거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우리는 새로운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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