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일 서울 종각의 한식당에서 문경식 전농 전 의장 환송식이 열렸다. 문 전 의장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는 원로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된장처럼 부담 없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나타나는 인상,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우리 민중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농민을 그대로를 표현하는 그런 분입니다."
"학벌, 경력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이런 사람이 대중 지도자로 성장했다는 것은 우리 운동사에서 소중한 성과입니다."
"누구든지 떠날 때 이렇게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문 의장님 부럽습니다."

문경식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 의장이 서울에서 4년간 아스팔트 농사를 갈무리하고 떠나는 날, 통일.민중진영 원로어르신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28일 저녁 서울 종각 근처 식당에서 조촐한 환송회가 열렸다. 서울을 떠나기 전, 그가 평소 존경하던 '원로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기도 하고, 원로들이 그동안 수고한 문 전 의장을 위해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주객을 구분할 수 없는 자리였다.

"문 의장님,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참 많으시네요." 평소 집회에서도 다 뵙지 못할 원로들이 식당 큰방을 다 채우고 넘칠 정도로 한 자리에 모이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 물었다.

"나는 어르신들이 죽어라 그러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사람이여." 구수한 전라도 말투와 문 전 의장 특유의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어울린다. "통일운동 하는데 용기를 주신 분들이지, 저 어르신들만 만나면 힘이 없다가도 힘이 팍팍 솟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도 고쳐먹고 그러제."

그는 농민운동가지만, 통일운동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4년 동안 남북농민대회, 못자리용 비닐박막 등 대북농자재지원을 비롯해 올해에는 남측 농민들이 직접 '통일쌀짓기운동'을 통해 200톤을 북으로 보냈다.

지난해 북핵실험 이후, 금강산 관광이 위기에 처해있을 무렵, 전농 회원과 가족 등 1800명이 금강산에서 '대의원 대회'를 갖고 남측 농민들의 활기를 금강산에 불어넣기도 했다. 이만하면 그의 말대로 "농민들의 통일운동에 조그마한 돌멩이로 주춧돌을 놓았다"는 자부심도 가질 만하다.

'전용철.홍덕표' 두 농민열사를 가슴에 묻고

▲ 울음을 터뜨린 문 전 의장과 그런 그를 보며 손을 꼭 잡은 오종렬 대표.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4년 동안 꿋꿋하게 달려온 문 전 의장이었지만, 농민들 앞에서 훔친 눈물도 많았다. 원로어르신들 앞에서 인사하는 자리에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 올라와서 어려울 때마다 선생님들 삶을 보고 느꼈다"며 "그런데도 능력이 없어 성과를 못 내고 오늘 인사를 드린다"며 울컥 올라오는 슬픔을 삼켰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그의 솔직한 심정이 흘러 나왔다. 그는 2005년 11월 여의도에서 '쌀협상 국회비준'을 막다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하늘나라로 보낸 전용철.홍덕표 두 농민 열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다.

당시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 청와대, 경찰청 가리지 않고 농민들이 농성을 벌이고, 청년.학생들이 하루도 안 빠지고 촛불집회, 지하철 선전전, 모금활동을 진행해 줬다. 쌀개방은 막지 못했지만, 경찰청장을 사퇴시키고 대통령의 사죄도 받아냈다.

▲ 통일광장 권낙기 선생과 문경식 의장.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집회에 나올 때마다 어르신들이 손을 부여잡고, '문 의장만 믿어. 전농만 믿어'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냥 이대로 가야 하나." 4년간 활동을 마치고 서울을 떠나야 하는 문 전 의장 가슴에 아쉬움으로 가득 찼다.

"나보고 가라고. 나 안가요. 나 가기 싫어."
결국 그는 한국진보연대 오종렬 공동대표 가슴에 안겨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술자리 내내 "사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라는 말을 연발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어느새 원로어르신들에 대한 호칭은 '형님', '아버지'로 바뀌어 있었다.

"나한테는 권낙기 선생이 아니고, 낙기 성(형)이지. 낙기 성! 인간의 정,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낙기 성이랑 술 먹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정의 그것 때문이지 않나."

"자주 만나면 정이 들고, 정이 들면 뜻이 통하고, 뜻이 통하면 동지야." 통일광장 권낙기 공동대표가 깔끔하게 둘의 관계를 정리했다.

초졸 출신이 전국 농민단체 의장이 되기까지

▲소탈하게 웃은 모습에서 그는 농민임을 숨길 수 없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문경식 전 의장은 초등학교 출신이다. 집에서 아버지보다 열심히 일하면서 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십대가 되면서 우연히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열심히 일만 해서는 사람대접 못 받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을 시작한 그는 70년대 말 전남 기독교 농민회를 조직하는 등 제 역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90년대 보성군 농민회 회장, 전남도연맹 의장을 거쳐 전농 의장까지 맡게 된 것이다. 그것도 연이어 불어오는 '쌀개방', 'FTA' 강풍 속에서 남들은 2년씩만 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을 두 번 지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도연맹 의장을 맡고 전농 의장을 해?" 자신이 전농 의장까지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까지 지켜온 그의 삶에는 한 가지 철학이 있다.

"내가 뭘 해야 되겠다라는 목표를 두고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이 세상은 그 보다 더 나은 일을 맡겨 주더라. 그것이 내가 체험으로 얻은 철학이지."

그에게 초등학교 출신이라는 것도 부끄러운 부분이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 출신은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거냐, 그래서 더 열심히 했고, 대학 나와서 공부한 사람만이 이 사회에서 좋은 일을 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성에서 농촌공동체, 협업 사례를 만들고 싶다"

▲문 전의장은 고향 보성에서 '농촌공동체'를 꾸리고 싶은 소망이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주영 기자]

전농 의장을 마친 뒤, 그는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내려간다. 그에게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농사짓는 일이다. 그것이 그의 천직이다.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아내' 혼자서 키우고 있던 한우 70마리 정도의 축산업도 다시 확장시킬 생각이다.

그는 고향에 내려가서 '농촌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꿈꾸고 있다. 그는 "보성에 내려가면 같이 술 먹고 하던 친구들과 생산도 같이 해서 나눠먹고, 남는 것은 돈으로 바꾸고 그러면서 살고 싶다"며 "보성에서 하나의 농촌공동체, 협업 사례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농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협업으로 공동으로 농사짓고 이렇게 나가야지, 그렇지 않고 겸업농이라든지, 개별 분산적으로 농사를 지으면 농업은 상당히 어렵게 될 것"이라며, 농민단체 전 의장으로서 농촌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을 떠나는 아쉬움은 어찌할 수 없다. 문 전 의장은 "어르신들이 서울에서 통일운동, 민족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만한 능력이 없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역할이 주어지면 하고, 역할을 주어지지 않으면 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이 세상은 그 보다 더 나은 일을 맡겨 주더라'라는 그의 생활 철학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책을 선물한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 문 전의장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사진-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이날 문 전 의장 환송식에서 오종렬 대표는 '민족과 민중의 문 담살이'가 되길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담살이’란 머슴살이의 방언이다. 옛날, 가난해서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심부름하고 밥얻어 먹고 살면 '성씨'는 있어도 이름은 '담살이'라고 불렀단다.

특히, 머슴 출신으로 보성에서 의병활동을 일으켰던 '안 담살이' 장군의 이름을 본 따, 오종렬 대표가 문경식 전 의장에게 민족과 민중의 '문 담살이'가 되라고 한 것이다.

이날 문 전 의장은 "행복하다"고 말했다. 평소에 존경하는 어르신들 다 모시고 식사 한 끼를 대접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단다. 이날 원로들도 '대접받을 것이 아니라, 고생한 문 전 의장에게 자신들이 밥을 사야한다'고 만류했으나, 결국 문 의장의 황소 같은 고집을 꺾지 못했다. 문 의장 고향가는 선물을 마련하겠다고 원로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도 그의 고집으로 '한국진보연대' 후원금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만난 문 전 의장은 “그날 못 나오신 어르신이 많아 죄송하고, 기회 닿으면 농사 지어서 만든 쌀로 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는 기회 갖고 싶다”며 한술 더 떴다.

환송식날, 문 의장은 그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으로부터 책 선물을 받았다. 정수일 선생이 쓴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우보천리(牛步千里), 그의 인생에 참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소처럼 우직한 발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세상이 또 다른 일을 그의 어깨에 메어주면 그는 또 우직한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 일 역시 그의 천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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