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호('통일맞이 나들이 - 하나를 위하여' 대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서남쪽 바로 옆에는 남측 비무장지대(DMZ) 내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대성동 마을이 있으며, 이곳에는 2007년 7월 1일 현재 58세대 190명이 거주하고 있다. 민통선 북쪽에 있는 마을 3곳 가운데 언론에도 가장 많이 보도되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마을은 바로 이 마을이다.

남측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 내에 있는 민간인 거주지이며, '자유의 마을'이란 호칭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해져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바로 다음 달인 8월 3일부터 군사정전위원회가 이곳을 '자유의 마을'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 공동경비구역 주위 안내도. 공동경비구역 서쪽 바로 옆에 남측 대성동마을과 북측 기정동마을이 서로 마주보며 위치해 있다. [사진-유영호]
해방 직후 이곳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 조산리 대성동이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부칙에 따라 정전협정이 조인될 시점 비무장지대 내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계속 거주가 허용됨으로써 현재의 마을이 존재 가능했던 것이다. 군사분계선 넘어 북측 비무장지대의 마을로는 기정동 마을이 이곳과 똑 같은 이유로 민간인 거주가 가능한 곳이다. 남쪽의 대성동 마을과 북쪽의 기정동 마을 두 곳 모두 이러한 혜택을 받은 곳이다.

당시 전쟁 발발 1년 뒤 현재의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전선이 교착되어 교전은 있었지만 이 두 곳은 정전회담이 열리던 판문점 근처라 다행히도 그러한 교전에서 제외되어 일반인들의 거주가 가능했던 것이다. 2년 넘게 지속되었던 정전회담 덕분에 당시 대치선에서 유일한 비전투 지역이라는 혜택을 받은 것이다.

정전협정 시 비무장지대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마을에 민간인이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하였지만 협정체결 당시 즉 1953년 7월 27일 그 곳에 거주하고 있지 않던 주민의 경우 비록 그곳에 본래의 집이 있었다 하더라도 귀향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약 160명이 전쟁 후 거주하기 시작한 곳이다.

이 마을로부터 바로 약 4백 미터 앞이 군사분계선이다. 바로 이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북측 비무장지대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인 기정동 마을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농사일을 하다 보면 북쪽 사람과 쉽게 마주치기 때문에 이야기는 물론 담배 정도는 주고받기도 한다고 한다.

결국 이곳 남측의 대성동과 북측의 기정동 두 개 마을은 전쟁 당시 정전회담이 열렸던 널문리(판문점) 바로 옆에 위치한 이유로 전투지역에서 제외되면서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고, 앞서 지나온 정전회담 장소로 이용되었던 널문리는 정전회담 때문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일대 3개의 마을 가운데 널문리 마을은 정전회담으로 인하여 이렇게 운명이 뒤바뀐 것이다.

그리고 비무장지대에 존재했던 나머지 마을은 당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지역이라 물리적으로 민간인들이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교전지역으로부터 멀리로 이주하였고, 전쟁 뒤에는 그곳이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어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이다.

한편 이곳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위치상 유엔사가 관할하는 비무장지대에 있으므로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유엔사의 통제 하에 있다. 이는 정전협정 제1조 10항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의 부분에 있어서의 민사 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이 책임진다"는 규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로써 대성동을 직접 관장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나 한국군이 아니라 유엔사 공동경비구역 경비대사령부이며, 이곳 사령관은 대성동주민을 관할하기 위하여「대성동 민사규정 Civil Administration Regulation for Taeson-dong」을 제정.실시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이 마을의 역사는 1950년대 말 두 개의 사건에 의하여 크게 바뀌게 된다. 1958년 7월 마을 사람들과 미군들 사이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던 이영기씨가 월북을 하고, 또 같은 해 12월 8일 이대성씨가 헌병대 5~6명에게 끌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유엔사는 이 사건에 대하여 인민군이 이영기씨를 살해한 뒤 유엔군이 살해한 것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살해 동기는 이대성이 북의 간첩이었는데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연이어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곳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집중되었고, 이후 정부지원이 집중된 것이다. 유엔사도 1959년 12월까지 대성동 마을을 '근대화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이로써 그 해 보건사회부에서 무상으로 그들에게 주택을 건설해 주었다. 또 유엔사는 미군 장비를 투입하여 그들의 경작지를 확대시켜 주는 등 이후 지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1962년 당시 마을의 벼 생산량은 2천 가마였지만 1971년에는 1만 가마, 1993년에는 3만 8천 가마까지 상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가구당 소득수준이 끊임없이 상승했다. 파주시 통계자료에 의하면 2006년 현재 대성동 '자유의 마을'은 가구당 평균소득이 6천 7백 만원이다. 이러한 소득은 현재 가구당 소득 5천 만원이 중산층으로 분류하는 기준임을 생각할 때 높은 소득 수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높은 소득수준에 이곳은 유엔사 관할지역으로 납세의 의무도 없는 까닭에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없으니 이곳 주민들의 실질적 소득수준은 훨씬 높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그곳 주민들은 얼마나 좋을까라고 상상하며 은근히 시기해본다.

한편 이러한 혜택에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은 외부인들은 이곳으로 입주할 수 없냐고 장난스레 묻지만 이곳은 다른 민통선 마을과 달리 비무장지대 내에 있어 새로운 입주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입주방법이 있기는 한데, 여자의 경우 이 곳 마을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며, 남자의 경우 아들이 없는 집의 딸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오는 조건에서만 이 곳으로의 입주가 가능하다고 안내 군인은 말해준다. 또 이렇게 데릴사위로 입주한 경우가 현재까지 딱 2명이 있었으며 그 중 한 명은 사망하였고, 현재는 노인이 된 한 명만 살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정전협정 상 유엔사의 통제를 받는 것으로 인하여 이들에게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부과되는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가 부과되지 않는다. 또 이뿐만 아니라 이곳 주민들에게 대한민국의 법률적 통제를 가하기 위해서는 유엔사의 동의가 필요하다.

예컨대 이들이 범법행위를 했을 경우 피의자가 유엔사에 의하여 대한민국 관계당국에 이첩되고 여기서 조사 받고 그 유죄가 인정되면 기소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에게 적용되는 대한민국 법률은 미군에게 적용되는 방식과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여 형이 확정되고 6개월 이상 복역을 하게 되면 이 마을의 주민권이 박탈된다. 이들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봐야 할지 미국인들로 봐야 할지 헷갈리는 구조인 것이다.

▲ 대성동초교 옆에 위치한 100미터 높이의 게양대에 걸려있는 '자유의 마을' 태극기. [사진제공-한성희]
▲ '자유의 마을'에서 바라보는 북측 DMZ에 위치한 기정동 마을의 대형 인공기. [사진제공-한성희]
한편, 이곳에는 도라전망대에서 보았던 대형 태극기가 이곳에 게양되어 있다. 2002년 월드컵경기에서 대한민국 응원단 ‘붉은 악마’의 대형 태극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곳 대성동 마을에 게양되어 있는 태극기가 남쪽에서는 가장 큰 태극기였다고 한다. 바로 그 건너편에는 북측 기정동 마을이 있고 그 곳에도 역시 대형 인공기가 게양되어 있으며 이러한 대형 깃발 2개가 서로 마주보며 그 위용과 대립을 상징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 대성동의 태극기 게양대는 1982년까지 높이 85미터였고, 북의 기정동의 인공기 게양대는 80미터였다. 뭐 이 정도면 엇비슷한 크기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남측에서 그 높이를 100미터로 설치하여 양쪽 국기의 규모에 현격한 차이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북도 인공기 게양대를 이전의 약 2배인 165미터의 높이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태극기와 인공기의 대립의 역사인 것이다. 서로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이처럼 양측의 국기게양대 높이 경쟁이 지난 냉전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 2007년 현재 전교생이 8명, 교직원이 11명인 DMZ 대성동초등학교 교정. [사진제공-한성희]
▲ 대성동 초교 정문. [사진제공-한성희]
이들 두 개의 학교는 나름대로 마을에서 문화적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특히 대성동초교의 경우 졸업식에는 1-2명에 불과한 졸업생을 축하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독위원회 대표 등 내빈과 주민 100여명이 참석해 매년 언론의 관심을 받아오고 있다.

그러나 2007년 현재 전교생이 8명으로 줄어 올해는 졸업식과 입학식도 치르지 못하게 되는 등 학사진행에 어려움이 생기자 파주교육청은 2007년 초 대성동초교를 통폐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이는 전교생이 100명 이하인 학교를 통폐합하라는 교육인적자원부의 방침 때문이다.

▲ 2007년 10월 대성동초교 전교생인 8명의 학생들이 그곳 관할부대인 캠프 보니파스 소속 주한미군과 함께 영어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대성동초교 홈페이지]
하지만 이 소식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또 교육청도 대성동초교가 남북분단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여론 등을 감안해 대성동초교를 폐교하는 대신 그보다 더 큰 규모의 통일촌 군내초교를 폐교키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두 학교 모두 적은 수의 학생이기는 해도 전교생 8명인 학교 때문에 전교생이 그 2배인 16명인 학교가 폐교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만일 폐교된다면 통일촌의 군내초교 학생들은 2008년부터 약 10㎞나 떨어진 대성동초교로 통학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학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교육정책을 보며 우리의 미래인 초등학생들의 교육에 있어서 너무 경제적 측면에서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유엔사 관할지역인 DMZ내에 존재하는 대성동초교는 재학생 수에 있어서 군내초교의 절반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혜택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혜택이 다른 한편에서 다른 이들의 불이익을 전제한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 씁쓸해진다.

▲ 군내초등학교 폐교를 반대하는 통일촌 현수막. [사진-유영호]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몇 해 전 언론에 보도된 북측 교육정책이 갑자기 생각나 한참을 인터넷을 뒤져 그 기사를 찾았다. <연합뉴스>(2005.4.5)에 의하면 2005년 현재 북측의 학교가운데 정규학교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분교가 1600여 개 있으며, 이 가운데 가장 적은 학생 수는 2명이며, 소학교(평안북도 신의주교원대학 부속소학교 수운도분교) 와 중학교(함경북도의 송산중학교 송산분교)가 각각 1개씩 있다고 조선중앙방송에서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교의 개학식에는 남쪽 대성동초교처럼 개학식에는 학생 수보다 많은 교사와 학부형들, 마을 사람들과 후원단체 간부들이 나와 축하했다고 전한다.

이 기사를 보며 남쪽도 교육행정의 편의보다는 좀더 학생들이 우선되어야 할 교육정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학생이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로 가는 것보다, 학교가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오는 그런 교육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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