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사회의 희망

아이들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희망이자 씨앗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는 것은 종족본능 이외에도 여러 가지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술에서도 아이들이 작품의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서구미술에서는 주로 천사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예수가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한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동양에서도 아이는 신선세계나 무병장수(長壽)와 같은 의미로 그려진다. 화가들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속에서 찌들고 병든 사회의 희망을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나도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적이 있는데 밝은 모습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웃고 있지만 세상을 조롱하고, 순진한 표정이지만 어둡고, 원망하는 느낌이 났다. 사실 아이들은 어른들을 닮을 수밖에 없다. 내가 그린 아이는 아이의 순진한 모습이 아니라 어른들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부모는 아이들을 도서관이나 미술관보다는 갈비집에 훨씬 많이 데려가고, 어른들은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지만 아이들은 싸구려 인스턴트 햄버거나 피자를 사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치원, 보육원, 초. 중. 고 교사는 박봉에 허덕이거나 대학교수에 비해 상대적 가치가 떨어진다.

대중문화는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우려내려고 안달한다. 가출한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벌고, 심지어는 아이들의 청춘을 흡정귀(吸精鬼)처럼 빨아먹기도 한다. 아이들에 대한 좋은 얘기는 입바른 소리 좋아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고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과 능력`이다. 사람들은 `품안에 자식이 사랑스럽다`는 말을 한다. 다른 말로 부모의 품을 떠난 자녀는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뿐더러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부모와 공감하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은 초등학교 5~6학년이면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고 한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에게 질질 끌려 다닌다. 결론은 단순하다. 부모의 능력이 자녀의 능력보다 적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다. 아이들은 속성상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고 적응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부모들은 자신의 것만 고집하고 적응하는데 느리다.

내가 보기에 요즘 아이들은 출생한지 15년 정도면 거의 부모의 수준을 넘어 버린다. 단지 경제적 능력이나 정서적으로 불안한 것이 약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돼지갈비나 열심히 먹이고, 원하는 것을 다 사주는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사랑하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것은 기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부모 수준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능력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부모가 앞서가야 자식이 앞서간다`는 말은 단순한 광고카피가 아니라 정석이다. 나는 아이들의 미술적 재능을 죽이는 부모를 많이 보았다. 반대로 전혀 재능이 없는 아이를 천재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도 꿈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꿈을 꾸지 못한다. 고작 조작된 허상을 쫓을 뿐이다. 자녀를 둔 어른들의 희망과 꿈을 뭘까? 아이들 교과서에서는 세상의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고 사람과 사회에 이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가르친다.

북한의 아이들

▶누구 키가 더 큰가?
정현웅/수채화/38.5*54/1963

이번 작품은 수채화 소품이다. 북한화가 정현웅이 그린 <누구 키가 더 큰가?>라는 작품이다. 작품의 내용은 보는 그대로이다. 아이들이 키재기를 하고 있다. 키를 재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고, 혹시 까치발을 하지 않나 확인하는 아이의 설정도 재미있다. 어찌 보면 수채화와 아이들은 잘 맞는 관계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수채화에서 맑고 투명한 느낌을 좋아하듯이 말이다.

내가 느꼈던 북한의 아이들은 좀 부담스러웠다. 경직된 자세와 목소리로 `경애하는 수령...`으로 시작하는 연설조의 말과 경악스러울 만큼 세련된 악기연주 솜씨나 연기능력을 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디서도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저 고만 고만한 또래의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예전의 TV방송 중에서 `통일전망대`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통일과는 별 관계가 없고 주로 반공교육의 또 다른 형태로 보였다. 그래서 친구들은 `통일절망대`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북한 여자아이가 소개되었는데, 모형 총을 들고 어딘가를 노려보면서 `미제의 가슴에...`라는 구호를 외쳤고 어른들은 박수를 쳤던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나라 아이들이 정말 행복하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그 다음날 친구 집에 놀러갔다 본 것은 두 세살 아이가 방송에 나오는 대중가수의 `오늘밤 단 둘이서...`라는 노래와 춤을 따라 추고, 주변사람들은 잘한다고 손뼉 치며 좋아했었다. 그 때 나는 `우리 아이들도 별로 행복하진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도 분단은 현실이다. 그 고통의 무게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교육되고 전가되고 있다. 우리가 아이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분단의 고통을 물려주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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