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차공판을 마치고 법원 앞에서. 좌측 두 번째가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씨이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11월 28일(수) 오후 2시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형사법정 311호에서는 민족일보 3차 공판이 개최되었다. 이날 공판에서는 검사측에서 신청한 강창덕(81세)씨와 조용준(73세)씨에 대한 증인신문이 진행되었다.

증인 강창덕씨는 1960년 7월 29일 민의원선거에서 사회대중당 경북 경산군당위원장이었으며, 5.16군사 쿠데타가 발발하고 나서는 고 조용수 사장를 구속시켰던 ‘특수범죄처벌법’에 의해 구속 후 옥살이를 하였다. 또한, 얼마 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은 1974년 이른바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아 1982년까지 무고한 옥살이를 하였다.

검사는 강창덕씨와 조용수 사장의 동생 조용준씨에게 당시 조 사장이 사회대중당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위치에 있었지를 집중 질의하였다.

조용수의 민의원선거 낙선

▲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여 동안의 힘든 증언을 마친 강창덕씨.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1960년 6월 17일 혁신계는 진보당(당수 조봉암) 이후 혁신정당 재건을 목표로 ‘사회대중당 창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사회대중당은 정식 정당등록을 하지 않은 채, 창당준비위원회로 7월 29일 민의원선거에 129명의 후보를 내고 참여하였다. 이중 경북 청송지역에서 고 조용수 사장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조 사장은 4월혁명 이후 민주당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3위로 낙선하였다.

원래 조 사장의 집안은 영남 명문가였다. 또한 삼촌 조경규씨는 4선 국회의원으로 자유당 원내총무를 지냈으며, 외삼촌 하만복씨는 과도정부 입법의원, 반민특위 위원, 2대 국회의원을 지내 조 사장도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4월 혁명이 일어난 후 민족재건의 뜻을 품고 일본에서 10년만에 귀국했을 때 그 첫발이 정치쪽이었다.

조 사장은 귀국 후 경남 함안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던 삼촌 조경규씨를 찾아 지역구를 물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4선에다 자유당 원내총무까지 지낸 삼촌 조경규씨는 개혁적이고 젊은 조카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하였다. 삼촌의 정치적 배경에다 집안의 힘을 보태면 쉽사리 참의원에 당선될 것을 기대했던 조 사장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국내기반이 없던 조 사장은 자유당을 비롯한 기성정당이 아닌 당시 새롭게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사회대중당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또 이미 일본에서 조 사장의 본국 귀환을 도와주던 이영근씨가 사회대중당 윤길중씨에서 조 사장을 추천한 상태였다.

조 사장은 출마 인사말을 통해 ‘보수세력과 결탁한 민주당’을 강력 규탄하면서 자신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①국민의 권리를 제안하는 모든 법률을 개정할 것이며 ②3.15부정선거 주모자를 엄중히 처벌하고 ③이승만의 재산을 환수하여 국고에 편입하여 민중생활향상을 위해 사용하고 ④거창사건을 비롯한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⑤김구 여운영 조봉암 선생 등 정치적 살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였다.

조 사장의 선거공약은 청송지역의 젊은층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선거는 조 사장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민심은 민주당에 대한 기대로 모아졌으며, 게다가 자금력에서도 민주당에 딸린 혁신계는 전국적으로 4명의 민의원과 3명의 참의원을 당선시키는데 그쳤다. 40여명의 민의원을 당선될 것이라는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진 것이다.

민족일보 창간 과정

▲ 3차 공판을 알리는 벽보.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1960년 11월, 민의원선거에서 낙선한 조 사장은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민족일보’에 대한 구상은 이때 이루어졌다. 모국에서의 정치인으로 나서보려는 꿈을 접고 일본내 거류민단시절 관여했던 ‘민주신문’의 경험을 살려 기성신문과는 다른 ‘새로운 목소리를 전달할 신문’을 창간할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신문창간에 필요한 자금은 재일동포들로부터 마련하였다. 이때 조 사장에게 자금을 대준 사람들은 주로 이영근씨가 소개하였으며, 재일동포사회의 재력가였던 박용구, 정동필, 이희원씨 등이 자금을 댔다.

국내에서도 친척들과 진주중학 동창들을 만나 자금을 모집하였다. 또 장건상, 최근우, 서상일, 윤길중씨 등 혁신계인사들을 만나 ‘혁신계를 대표하는 신문’을 만들자고 설득하였으며,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송지영씨를 만나 신문사 설립에 따른 기술적 자문과 실무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편집국 구성은 부산대 이종률 교수가 주도했다. 이때 이종률 교수는 정부여당 인사를 비롯하여 보수세력까지 참여하는 범 통일운동단체인 ‘민족자주통일협의회’(이하 민자통)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종률 교수는 민자통 건설을 위해 민족일보 창간에도 적극 나섰다.

민족일보는 마침내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가 창간됐다. 민족일보는 창간되자마자 민주당 정부가 추진하던 한미경제협정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수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2대악법 반대투쟁)에 반대입장을 사설을 통해 표명하였다. 이렇게 기성정치권에 대한 쓴소리가 연일 민족일보에 실리자, 일본의 조총련계에서 신문사 자금이 들어왔다는 등의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민족일보는 4만여부를 발행했고, 가판부수 1위를 차지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던 중 5.16군사 쿠데타가 터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은 조 사장을 쿠데타세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강창덕 “조 사장의 억울한 죽음은 밝혀져야 합니다”
조용준 “이영근을, 재판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증언을 마친 강창덕씨는 “조 사장의 억울한 죽음은 밝혀져야 합니다. 나도 조 사장과 같은 법에 의해 피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조 사장은 박정희가 권력을 잡기위해 희생된 억울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재판은 잘못된 법에 의해 진행되었다. 조 사장을 구속시킨 ‘특수범죄처벌법’은 소급법이었다. 법이 만들어지기 전 3년 6개월 전의 일까지 처벌할 수 있었다. 이는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사회대중당의 주요간부가 아니고 언론기관의 대표였던 조 사장을 구속한 것은 ‘특별법’의 내용(6조-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의 지위에 있는 자로 국가보안법 상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 동조한 자를 처벌할 수 있다)과도 맞지 않는 처벌이었으며, 간첩으로 몰린 이영근으로부터 자금을 수수했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민족일보에 대한 혐의사항과 그 진실 

혐의사항

혁명 검찰부 

진실화해위원회

특수범죄처벌법에 의한

소급적용

국가재건비상조치법

22조에 근거

입헌민주주의에 정면으로

위배

조 사장이 사회대중당

간부였나?

원심의 착오일 뿐 형량에

영향 없음

사회대중당의 주요간부 아님

이영근은 간첩이었나?

1951년 간첩혐의로 재판중

일본으로 밀항

간첩을 입증할 증거 없음

사설이 북한을 고무

동조하였나?

북한괴뢰집단에 이익이

되는 행위

제목만으로 판단한 것은 위법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 보고서 참고)

이영근씨에 대한 증언을 한 조용준씨는 “저는 이영근을, 재판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라고 증언을 하였다. 조용준씨는 당시 민족일보의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민족일보의 주요 업무를 처리하였으나, 이영근을 알 수 없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이영근은 조 사장의 정치진출을 도왔으며, 신문창간 당시 상당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북 또는 총련계의 자금을 조 사장에게 전달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영근씨는 재일 민단계에서 활동한 경력이 인정되어 1990년 남측정부로 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상’을 받은 인물로 간첩이었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형사소송법상 구속기간을 넘겨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재판은 정당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당시 재판정 분위기를 묻은 판사의 질문에 조용준씨는 “재판정 입구에는 헌병들이 무장한 채 서 있었으며, 피고인들 주변에는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피고인들이 무슨 말을 할라 치면 ‘이미 서면으로 제출하지 않았느냐’며 검사가 말을 막고 나섰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혁명재판부는 변호사측에서 신청한 증인을 법정에 세우지 않았으며, 2심제로 운영된 혁명재판부는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이렇게 하여 1961년 12월 20일 재판이 시작된지 5개월 만에 박정희는 조 사장 등의 선고판결을 확정하고 다음날 21일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사형이 있었던 날, 아침 동생 조용준씨는 형을 면회하였다. 그리고 오후 형의 사형집행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소식을 듣고 나서 저는 다른 사람의 사형인줄 알았습니다. 당일 아침에도 면회를 하였고, 형은 웃으며 ‘잘될 것이니 걱정마라’는 소리를 듣고 난 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사형수라도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재심 3차공판은 3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검사는 정규근, 박진목, 김충섭, 윤 식, 전창일, 정태영씨를 다음 재판의 증인으로 신청하였다. 다음 재판 기일은 12월 21일 오후 2시로 정해졌다.

■ 박희영 : 조용수 사장의 사형집행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좌익전력을 가진 박정희를 의심의 눈치로 바라보는 미국의 눈치를 의식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 사장을 그토록 급히 죽인거죠. 이번 재심은 이제라도 국가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죠. 진상규명을 통해 조용수 사장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

□ 조용수 사장의 생애를 어떻게 보시는지?

■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분의 생애를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참 억울한 삶을 사신 분 같다. 민족일보 사건은 황당한 사건인 셈이죠. 신문 창간 3개월 만에 폐간되고, 재판을 시작한지 5개월 만에 사형이 집행되고... 조용수 사장은 정말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아픈 민족분단사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저리 통일을 위해 애쓰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셈이죠.

□ 현재 과거사 규명운동의 현황은?

■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건수가 1만여건을 상회한다고 한다. 그중에 대부분이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사건이다. 현재까지 진실위에서 많은 부분의 진실을 밝혀내고 있으며, 조사가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좀 더 빨리 진실이 규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재판에서도 본 것처럼 관련자들이 이미 사망하였거나 고령인 분들이 많거든요. 문서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증언할 사람들마저 없어진다면 진실이 묻힐 수 있거든요.

□ 오늘 재판을 보고 느낀 점은?

■ 증인으로 나섰던 조용준 선생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특히 면회를 하고 왔는데 그날로 사형을 당했다고 증언하시는 부분에서는 눈물이 다 났다. 게다가 그런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그 기록조차 없다는 거에요. 도대체 국가가 우리에게 무슨 존재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하루빨리 진상이 규명되어 조용수 사장의 명예가 회복되고, 그리고 국가가 조용준 선생에게 사죄해야한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