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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 20년만에 베일벗은 KAL858 사건 수사기록김현희 안기부 조서에 많은 ‘수정’ 가해져, 의혹점도 수두룩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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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11.29  00: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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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L858기 사건의 범인 김현희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4천여 쪽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87년 11월 29일 중동지역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벵골만 상공에서 사라진 KAL858기 사건이 발생한지 20년이 다 되어 마침내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검찰의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이 대부분 공개됐다.

‘KAL858기 가족회’(회장 차옥정)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위원장 김병상)가 일체의 수사 및 공판 자료 공개를 요구한 2002년으로부터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을 거쳐 5년여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서울고등법원 제1특별부는 지난 9월 4일 판결선고를 통해 최종적으로 공판자료를 공개하라고 판결하고 공개 목록을 적시하면서 일부 자료와 “국가안전기획부 소속 수사관과 통역인의 성명 및 외무부, 경찰청, 대한항공 소속 직원들의 성명, 주민등록번호, 연령, 생년월일, 주거, 전화번호, 직업, 학력, 가족관계 등의 인적사항에 관한 정보” 등을 제외토록 명시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서울지방법원 형사소송기록 중 서울지방검찰청(실제로는 대부분 안기부)이 작성한 수사기록(214-4333쪽) 중에서 일부를 제외한 내용과 대법원 형사상고소송기록 중 서울고등법원 형사항소소송기록(46-912쪽, 이하 자료Ⅱ) 중에서 일부를 제외한 총 4천여 쪽 분량이다.

자료에는 모두 일련 쪽(페이지)번호가 매겨져있지만 일부 중복된 쪽이 있는가 하면(2061쪽), 2063쪽 다음 쪽이 2604쪽으로 건너뛰는 등 일련번호가 잘못 매겨진 부분도 있다.

   
  ▲ 김현희가 작성한 바그다드 사담공항 행동도.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서울고법은 이번 공개 대상에서 제외된 주요 자료는 탄원서와 진정서들이 많고, ‘일본 경찰 수사결과 회보서 번역문 및 그 원문’(3206-3213쪽), ‘일본 경찰 수사결과 회보서 번역문 및 그 원문’(3478-3485쪽) 등이라고 밝혔다.

공개된 수사자료에는 당시 안기부에서의 김현희 신문조서 17회분과 김현희의 자필 진술서 12회분이 포함돼 있으며, 검찰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 6회분과 안기부 ‘1국’과 '3국'에서 작성한 ‘수사보고’가 여러 건 첨부되어 있다. 또한 김현희 자필의 '반성문'을 비롯해 ‘지금의 심경’, ‘현재의 심경’ 등이 들어있다.

소송기록(이하 자료Ⅱ)에는 검찰 공소장과 공판조서, 항소심조서 등이 포함돼 있다.

이외에도 관계자와 증인들의 진술서와 진술조서, 유족회 탄원서, 김현희가 그린 도면 등 갖가지 관련 자료들도 첨부돼 있어 전문가들의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승일 사망 하루 전 모습 포함 사진 25장 모두 공개

먼저 이번에 공개된 자료 중에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과 자료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KAL858기 폭파범이자 ‘북한 공작원’으로 발표된 김현희와 김승일이 88년 12월 1일 체포당시 지참하고 있었다는 지금까지는 4장 밖에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 25장 전체가 처음으로 공개됐다.(3930-3954쪽) 바레인 수사당국(CID)으로부터 김현희가 음독자살을 시도한 후 입원한 바레인 병원에서 찍은 사진 2장과 함께 우리 정부가 인수받은 사진이다.

   
  ▲ 김승일이 사망하기 하루전 바레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북한의 정예 공작요원이라는 김현희와 김승일이 KAL858기 폭파를 위해 이동 중이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2장,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2장, KAL858기 폭파 후인 11월 30일 바레인에서 11장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밝혀졌다. 바레인에서 찍은 김승일 사진은 다음날 그가 자살함으로써 이승에 남긴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유시야 당시 주아랍에미리트 대사관 참사관은 KAL858기 나우식 부기장과 우연히 사고 하루 전날인 11월 28일 저녁식사를 하며 ‘긴급시 통신연락 방법’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나타났다. 유시야 당시 참사관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그가 부기장이란 사실에 호기심이 생겨 비행기 항속거리, 긴급시 통신연락 방법 등에 관해 문의하자 그로부터 동항공기는 아부다비에서 방콕까지 6시간이 소요되며 방콕에서 재급유를 해야 하는데...”라고 진술했다.(346쪽)

시신으로 국내에 들어와 부검을 받은 김승일 사체는 안전기획부의 ‘사체처리 계획 품신’(3508쪽)에 따라 매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한 쪽에 12군데 수정도, 검사도 ‘규률’ 노이로제

이외에도 처음으로 알려진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방대한 분량의 공판자료를 일별하면서 가장 먼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 것은 김현희가 지문을 찍고 고쳐쓴 이른바 ‘수정’ 사항들이다.

   
  ▲ 한 쪽에서만 무려 12군데가 수정됐다는 지문이 날인돼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김현희의 자필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북한식 표기법과 다른 점이 많아 김현희가 북한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된 점을 의식해서인지 여러 군데 고쳐쓴 ‘수정’ 사항들이 눈에 띈다.

노태우-> 로태우(908쪽), 영수증-> 령수증(918쪽), 여권-> 려권(3737쪽), 요해-> 료해(3738쪽) 등 두음법칙을 고쳐쓴 대목이 가장 많고 심지어 한 쪽(페이지)에 12군데를 수정한 경우까지 있었다.(761쪽)

두음법칙을 수정한 대목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고, 특이하게 검찰신문조서에서 “피의자는 동북리 10호 초대소 규률에 관하여 정지도원등으로 부터 교육을 받은 사실이 있나요”(3771쪽)라고 검사가 ‘규률’이라고 묻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나타난다. 거의 두음법칙 표기 문제로 노이로제에 걸린 듯한 양상이다.

그러나 단순히 두음법칙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북측 표현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북측 표현으로 바꾼 흔적도 많았다.

   
  ▲ 김승일 씨가 김승일 선생으로 바뀌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한국인이 남조선 사람으로 바뀌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상자속-> 곽속(1477쪽), 팬티-> 빤쯔(922쪽), '김승일 씨를-> 김승일 선생을'(1675쪽), 부장-> 부장동지(1676쪽), '영희 아빠'-> '영희 아버지'(3067쪽) 등은 북한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표현을 북한 식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현희가 직접 쓴 안기부 진술서(12회)에는 한국인이-> 남조선사람이, 한국외교관-> 남조선 외교관(3635쪽)이라는 수정사항까지 발견된다.

비엔나 남역은 모두 서역으로, '비닐쇼핑백' 해명도

내용상 불일치하는 대목을 수정한 대목들도 상당히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84년 김현희가 1차 유럽 현지적응 훈련을 했을 당시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도착한 장소를 ‘비엔나 남역’에서 ‘비엔나 서역’으로 수정(762쪽)한 것은 물론 87년 KAL858 폭파여정에서도 ‘비엔나 남역’을 ‘비엔나 서부역’으로 일관되게 수정(875쪽)하고 있다.

이는 일본인 저널리스트 노다 미네오 씨가 『파괴공작』에서 김현희가 주장했던 폭파여정을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제됐던 대목이다.

김현희가 머물렀다는 ‘엠파크링 호텔 603호’(노다 미네오 씨의 확인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호실임이 밝혀진 바 있음)가 ‘암파크링 호텔 322호’로 수정(3080쪽)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84년 해외여행에 관한 김현희의 안기부 진술서(8회)는 여행 동반자 수, 부부장 직책, 여행 일정 등이 모두 수정돼 있다.(1823-1856쪽)

KAL858기에 탑승한 김현희의 행적을 캐묻는 안기부 피의자신문조서(10회)에는 '졸다가 보니' -> '기내 상황을 파악하다 보니'(3130쪽)라는 수정사항도 있다.

김현희의 평양 외국어대 입학 일자도 1979.9-> 1978.9로 (937쪽) 수정돼 있는데, 원문대로라면 “1979.9 평양 외국어대학 일본어과에 입학, 그학교 2학년 재학 당시인 1980.3 중앙당 조사부에 소환되어”라고 돼 있어 물리적으로 2학년 재학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동안 제기되어온 몇 가지 의혹들에 대해서는 안기부와 검찰 스스로도 나름의 해명을 시도한 대목들도 눈에 띈다.

조선노동당 당원이라고 밝힌 김현희가 당증에 명시된 당원 번호를 모르고 있는데 대해서는 김현희 스스로 안기부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1982.4.15 조선노동당 정당원으로 입당하여 당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당원증을 지도원에게 보관시키고 있으므로 당증번호도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진술한 것이 대표적이다.(947쪽)

   
  ▲ 김현희가 작성한 '비닐쇼핑빽' 도면. 국정원 과거사위는 지난 10월 24일 최종발표에서 비닐쇼핑빽과 그 안에 든 액체폭약인 '약주병'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법정에서 이른바 '오리지날 콩글리쉬'인 '비닐쇼핑백'에 대한 문답이 오갔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또한 “비닐쇼핑백이란 말을 북한에서도 사용하는 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김현희는 “북조선에서는 그와 같은 말을 사용하지는 않고 그냥 비닐주머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일본어와 영어를 할줄 아는데다가 해외여행을 하는등 그정도의 말은 알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진술한 것입니다”(검찰 피의자신문조서, 3732쪽)라고 해명하고 있다.

외국관련 주요자료 비공개, 불리한 주장은 아예 무시

주요 자료 중 공개되지 않은 것은 법원이 공개적으로 밝힌 ‘일본 경찰 수사결과 회보서 번역문 및 그 원문’(3206-3213쪽), ‘일본 경찰 수사결과 회보서 번역문 및 그 원문’(3478-3485쪽) 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 88년 1월 9일자 안기부 1국 수사보고서 마지막 부분. 첨부자료로 Najat Ahmed Ghani 진술서 사본이 적시돼 있지만 공개된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특히 안기부 1국의 수사보고(88.1.9)에서 김현희와 김승일이 바그다드 사담공항에서 시한폭탄으로 쓸 위장라디오의 건전지를 빼앗겼다가 다시 되찾았다는 중요한 사실에 대한 첨부 문서로 ‘이라크 바그다드 사담공항 여직원 Najat Ahmed Ghani 진술서 사본 1부’(1815-1822쪽)가 명시돼 있지만 공개된 자료에는 통째로 빠져있다.

주로 일본 등 외국과 관련된 자료들이 대부분 비공개 처리된 점이 특징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된 우리 외무부 장관이 주버마 대사에게 보낸 대외비 ‘발신전보’에는 “ICAO 제출 사고조사보고서 작성에 대한 자문”을 지시하고 있어(4220쪽), 당시 버마(미얀마)에서 ICAO(국제민간항공기구)에 제출한 조사보고서 역시 우리 정부의 입김이 미쳤음을 시사하고 있다.

공개된 자료는 일련번호 중 몇몇 곳이 아예 빠져있어 어떤 자료들이 비공개 대상이 됐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해명이 안되는 의혹들 중 일부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김현희와 김승일이KAL858기를 내려 바레인에 도착한 뒤 그들이 머물고 있던 리젠시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도쿄로부터 걸려온 의문의 2통의 전화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 대표적이다.(875쪽)

또한 외부에서 KAL858기 사건과 관련돼 제기된 불리한 증거나 사실들에 대해서는 조사와 재판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김현희가 스스로 자신이라고 지목한 사진속 화동이 북한 정희선 여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은 전혀 없다.

88년 2월 유엔안보리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으나 한국 안전기획부의 수사결과 발표가 신빙성을 얻지 못해 공정한 방식의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규탄 결의안이 채택되지 못한 사실도 언급돼 있지 않다.

12월 23일 첫 고백, 24일 첫 ‘완벽한’ 진술서

이러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대목들이 재판기록 도처에 나타나고 있지만 보다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도 눈에 띤다.

먼저 김현희의 초기 진술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다.

김현희가 87년 대통령선거 하루 전날인 12월 15일 김포공항에 도착해 12월 23일까지 3회에 걸쳐 진술한 진술조서가 첨부되어 있는데 1,2회분은 일자 부분이 가리워져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고 3회는 김현희가 12월 22일 서울시내 외출을 한 다음날 진행된 관계로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다.

김현희는 1회 진술조서에서 일어로 자신은 일체의 범행사실을 부인하고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라고 주장했으며, 2회 진술조서 작성시에는 중국어로 자신은 백취혜(百翠惠)이며 시력이 나빠 외출할 때는 안경을 쓴다고 말해 안경을 받아 썼는가 하면, “1984.9-1987.11 간 약 3년 2개월간 평양에 가서 일본어와 일본생활 풍습 등에 대한 일본인화 교육을 받고...”라고 진술했다.

87년 12월 23일 3회 진술조서에서는 뒷부분에 “진술인은 여 수사관 옆으로 다가가서 손으로 여수사관의 가슴을 밀치면서 ‘언니 미안해!’ 하면서 최초로 우리말을 하다”라고 기록돼 있고 이후 한국어로 “이름은 김현희, 생년월일은 1962.1.27생 소속은 조선로동당 조사부 소속 공작원”, “‘KAL858기’는 공화국의 지령에 따라 제가 폭파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돼 있다.(528쪽)

그러나 나중에는 "언니 미안해" 역시 극적 효과를 위한 '대국민용 카피'였음이 드러난 바 있다. (동아일보 인터넷판 2004년 7월 9일자, "당시 실무수사관이었던 A씨는 최근 본보에 “언니 미안해”는 대국민용 카피(copy 광고선전용어)였다고 털어놨다")

   
  ▲ 새로 공개된 21장의 사진중 김현희가 비엔나에서 찍은 사진. 좌측 차량이 인상적이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따라서 김현희가 처음으로 한국말을 하고 자신이 김현희라고 고백한 날짜는 12월 23일인 것이다. 물론 한국 언론들은 12월 2일부터 당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로 불리운 김현희와 김승일의 유럽 행적은 물론, 폭파장치를 9시간 이후로 맞춘 사실까지 훤히 꿰뚫고 대서특필하는 놀라운 ‘추리력’을 선보인바 있지만.

아무튼 김현희가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라고 고백한 바로 당일인 87년 12월 23일, 그간 3차례의 진술조서와는 다른 성격인 첫 안기부의 공식 ‘피의자신문조서’가 작성됐는데, 60여쪽에 걸쳐 범행 전반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그런데 김현희는 법정에서 변호인반대신문 시 1987.12.23. 20:00 경 첫 조선말을 사용했고 “저는 북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진술했다.(자료Ⅱ 351쪽) 김현희의 법정진술이 맞다면 김현희는 최소한 이날 밤 8시 이후부터 60여쪽에 걸쳐 첫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고, "언니 미안해!"가 아니라 "저는 북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안기부 3회 진술조서는 신뢰하기 어렵고, 인위적인 조작 가능성까지 제기될 소지가 있다.

또한 당시 안기부 수사관은 “피의자는 그 당시 직승기에서 내리는 두 번째 아측대표에게 화환을 증정한바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사람 얼굴이 기억나는가요”라는 질문도 던지는데(595쪽) 당일 처음으로 고백중인 김현희의 입에서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사실을 수사관은 어떻게 알고 물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현희는 바로 다음날인 87년 12월 24일 최초의 진술서(1회)를 자필로 100쪽이 넘는 분량으로 작성한다. 마치 하룻밤 사이에 완벽한 준비를 갖추기라도 한 듯이 매우 세밀한 내용까지 완벽하게 적어낸 것이다.

이때 그 유명한 ‘평양시 문수구역 문수 1동 65반 무역부 아파트 7층 1호’라는 틀린 평양 주소는 물론 친인척 인적사항 등이 세밀하게 적시됐다.

서두른 수사결과 발표, 유럽여정도 추후 파악

이후 신문조서 17회(88.11.9)까지와 자필 진술서 12회(88.1.22)까지는 김현희의 성장과정에서부터 특히 공작훈련 과정 등을 세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그런데 88년 1월 15일 KAL858기 사건 수사결과 발표 당시는 안기부가 사건의 전모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보다 상세한 내용을 담은 신문조서와 진술서의 진도가 아직 KAL858기 폭파에도 미치지 못한 때이다.

수사결과 발표 이후인 88년 1월 19일에 작성된 11회 진술서는 김현희가 KAL858기 폭파여정에 오르기 전 동북리 2호 초대소에서 머물던 시절을 진술하고 있으며, 피의자신문조서도 1월 말(10회)에 가서야 KAL858기 폭파여정이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안기부 1국의 수사보고는 88년 1월 27일자로 유고 체류관계 사실을 확인하고 88년 2월 15일 오스트리아 체류관계를, 88년 2월 21일 헝가리 체류관계를 보고하고 있어 수사결과 발표 당시는 김현희, 김승일의 유럽 여정이 정확하게 파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를 단정해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 김현희 진술서에 메트로폴호텔은 메틀폴리탄호텔로 수정되어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따라서 김현희가 유고 베오그라드에서 묵었다는 메트로폴호텔(실존)은 수사결과 발표 전부터 언론에서 시종 ‘메트로폴리탄호텔’(실제는 없음)로 수없이 보도됐고, 김현희의 자술서에서조차 ‘메트로폴리탄호텔’이 등장한다. 특히 메트로폴호텔이라고 바르게 적힌 부분도 굳이 메트로폴리탄호텔이라고 수정한 곳들도 많이 발견돼 흥미롭다.(3027쪽 등) 공판조서에도 메트로폴리탄호텔이라는 진술이 나올 정도다. 

한마디로 안기부의 뒤늦은 현장 조사에 따라 메트로폴리탄호텔이라는 가상의 호텔이 김현희가 진술을 시작하기도 전인 87년 12월 2일부터 언론보도에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안기부에서의 김현희 신문조서와 진술서, 공판조서 도처에 깔려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 그렇습니다”와 “대한민국을 위해 이 한목숨 바쳐”

김현희에 대한 공판기록 역시 매우 흥미로운 사안들이 많이 담겨져있다.

서울형사지법에서 87년 3월 7일에 열린 제1회 공판 조서에 따르면 검사는 범죄사실을 주욱 나열하고 맞느냐고 하면 김현희는 단지 “예, 그렇습니다”로 일관했다.

   
  ▲ "피의자는 사진을 보는 즉시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신기한 표정을 짓더니 (답) 이 사진을 어디에서 구했나요. 이것은 틀림없는 저 입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네. 틀림없는 저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때는 뺨에 살이 올라 통통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북한 정희선 여인으로 밝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특히 유명한 김현희 ‘칼귀’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화동사진과 관련해서도 “이 사진 속의 화환을 전달하는 화동이 피고인인가요”라고 검사가 묻자 김현희는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했고, “이 사진은 당시(1972.11.2.경)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끼하라’('아까하타'의 오기)의 평양 주재 특파원이던 ‘하기하라’('하기와라 료'의 오기) 기자가 화환을 들고 대기중이던 화동들을 촬영한 것으로 1988.3.6.자 일본 사진잡지 ‘그라프 곤니찌와’에 게재된 것인데, 화살표로 표시된 사람이 피고인인가요”라고 묻자 또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나와있다.

물론 첫 번째 사진 속의 화동의 귀볼은 김현희의 ‘칼귀’와 달리 두툼해서 추후 김현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고, 두 번째 사진 속의 화동은 북한 정희선이라는 여성이 그 주인공이 자신이라며, 주변에 함께 찍힌 화동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거론하며 반박해 거짓으로 판명난 바 있다.

김현희는 진술조서 작업이 진행될수록 점차 타겟을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저는 이제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임을 깨달았고, 어떤 처벌이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만, 북에 계시는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김일성 김정일에게 속아 살고 있을 것 같아서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피의자신문조서 13회, 88.5.25, 3552-3553쪽)

나아가 그간의 신문과정을 총괄하는 15회 신문조서(88.10.12)에서는 자신의 사면을 요구하는 듯한 입장으로 발전한다. “제가 지은 죄는 백번 죽어 마땅하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한민국을 위해 이 한목숨 바쳐 일하고 김일성을 쳐부수는 일과 북의 인민들을 구제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3638쪽)

이 외에도 김현희는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반성문(88.1.27)을 비롯해 검찰에서 ‘지금의 심경’(88.12.26), ‘현재의 심경’(88.12.26, 89.1.31) 등을 서술했다.

   
  ▲ 김현희가 작성한 북한 룡성 40호 초대소 평면도. 그녀는 수많은 도면을 그렸고, 비치품 목록도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해내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줬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또한 김현희는 자신이 머물렀던 북한 내의 초대소와 해외 대사관 및 초대소, 호텔 등에 대한 도면을 작성함은 물론 비치품 목록까지 작성했으며, 자신의 인민학교 시절부터의 세세한 교우관계(피의자 신문조서 16회)와 선생관계(피의자 신문조서 17회) 등에 대해서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공작원 교육시 일과표와 교습내용, 매일매일의 일정 등을 상세히 적시해 탁월한 암기력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

물론 조선노동당 당원 번호를 외우지 못한다든지, 유럽지역 북한대사관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해 점자방식의 암호로 수첩에 적어 가지고 다니다 붙잡히기도 했지만.

의혹공방 또다른 국면 맞을 듯

지난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의 조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숱한 의혹만 제기된 채 사건 발생 20주기를 맞고 있는 KAL858기 사건의 공판기록이 대부분 공개됨으로써 의혹을 둘러싼 공방은 또다른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6자회담을 통해 북미간 관계정상화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북한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된 계기가 된 KAL858기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풀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서현우 조사팀장이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서현우 조사팀장은 “김현희 공판기록이 공개되고 나서 언론에서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며 “기록의 양이 방대하고 전문적 검토가 필요한 만큼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현우 조사팀장은 “아직 꼼꼼히 공판기록을 분석하지는 못했지만 허술하고 의혹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며 한 가지 의혹점을 제기하는 것으로 입장표명을 대신했다.

김현희는 1987.10.7.남조선 비행기 폭파를 준비하라는 지령을 받을 당시 최 과장이라는 사람이 “1월 17일까지 올림픽 참가 동의 서신이 오게 되어 있는데, 칼기를 폭파하여….”라고 진술했지만 (자료Ⅱ 2차 공판조서 반대신문 336쪽) 실제로는 올림픽 참가 신청이 저조하여 1987년 11월 말에서야 참가신청 기한을 50일 연장하여 1988.1.17을 신청마감일로 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김현희가 지령을 받았다고 진술한 87년 10월 7일 당시에는 올림픽 참가 신청마감일이 88년 1월 17일까지라는 사실이 확정되기 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김현희는 1987.11.10. 친필지령을 받을 시 "858기로 확정지어 줬습니다"라고 진술했지만 (자료Ⅱ 2차 공판조서 반대신문 337쪽) KAL858기는 미국에서 수리를 받고 1987.11.29 사고 당시 첫 취항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그렇다면 과연 북한 지도부는 어떻게 KAL858기가 그 날짜(87.11.29)에 그 노선(바그다드-아부다비-방콕-서울)에 취항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지령을 내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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