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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L858사건 ‘진실게임’ 끝나지 않았다 -정연규<기고> 진실규명에 실패한 국정원 과거사위 종합보고서 ③
정연규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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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11.26  15: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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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위원, KAL858기 진상규명 모임 카페 공동운영자)


오는 11월 29일은 KAL858기 실종사건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사건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특히 지난 10월 24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KAL858기 사건 조사 최종결과를 발표했지만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는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KAL858기 사건 의혹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정연규 씨가 국정원 발전위의 최종결과 보고서에 대해 자세한 반박 내용을 담은 기고글을 보내왔다.
국정원 발전위의 최종결과 발표 이후 첫 본격 반론인 셈이다.

정연규 씨는 "이 기고문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www.kal858.or.kr) 게시판과 KAL858기 진상규명 모임 다음카페(http://cafe.daum.net/kal858notice)에 올라온 네티즌 의견들을 최대한 반영했다"며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의견을 바란다"고 밝혔다.

정연규 씨의 기고문을 3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12. 바레인서 호텔 투숙직후 걸려온 2통의 ‘도쿄 전화’


김현희, 김승일 일행은 각각 SHINICH와 MAYUMI 명의의 항공티켓으로 빈->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로 이동한 뒤, 아부다비에서 암만 항공편을 포기하고 바레인으로 이동하면서 1987년 12월 29일 오전 HACHIYA 명의로 바레인 리전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리전시 호텔 투숙직후 일본 도쿄(東京)로부터 2통의 전화를 받는다. 이 건은 그 다음날인 12월 30일 김현희가 호텔측과 한국인 그리고 일본 대사관 등으로부터 걸려온 4통의 전화와는 별개다.(종합보고서 Ⅲ, 249쪽 도표).

바레인 수사당국은 김현희, 김승일 일행이 ‘사전 예약 없이 직접 리전시 호텔에 투숙’했으며, 일본 관계당국에서도 이들과 접촉하지 않고 있던 때 도쿄에서 ‘하치야` 앞으로 두 차례의 국제전화가 걸려와 교환수는 그들이 머물렀던 611호 실을 연결시켜 주었다. 바레인 당국은 김현희 일행이 소속된 범죄조직과 사전 계획된 통화일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일보, 1987.12.5) 이 같은 전화는 2004년 9월호 ‘신동아’에 번역 게재된 <바레인경찰 수사보고서(1987.12.31)>에서도 재확인됐다.

   
  ▲ 1987년 12월 5일자 국내신문은 김현희와 김승일 일행이 바레인 리전시 호텔에 투숙중 2차례 ‘東京전화’를 받았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김현희 자필진술서와 안기부 수사발표문 어디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은 없었다. [한국일보 1987.12.5. 1면]  
 
이 같은 사실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위는 ‘1987.11.29 두 통의 Mr. 하치야를 찾은 동경발 전화의 발신자’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아 발신자가 김승일˙김현희의 배후 세력이었는지, 사건을 사전 인지한 제3의 세력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며 사건 당시 同件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가 미흡했던 이유 또한 파악하지 못했다고 대단히 ‘궁핍한 답변’을 내놓았다. (종합보고서Ⅰ총론 267쪽, 종합보고서 Ⅲ, 350쪽)

13 ‘이은혜’는 북한에 납치당했다는 ‘다구치 야에코’인가?

김현희 진술에 따르면, 1981년 7월부터 1983년 3월까지 북한 <동북리 초대소>에서 ‘이은혜’라는 일본어 담당 지도원와 동거생활을 하며 일본어와 일본문화 등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일본과 군사정부 수사당국은 ‘이은혜’는 1978~79년경 일본 해안에서 ‘납치’된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에서 김승일이 사망하자 ‘이경우’에게 자신의 여권을 도용당했다고 주장한 일본의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1987년 11월 4일 자신의 집에서 촬영한 ‘하치야 마유미’ 사진과 1984년 9월 26일 태국 방콕 <라자호텔>에서 촬영한 ‘이경우’와 ‘다구치 야에코’ 사진을 2004년 1월 일본의 한 언론매체(山高新聞)가 전격 공개했다.

동 신문에 의하면 진짜 하치야 신이치에게는 ‘하치야 마유미’라는 딸이 있었으며 KAL기 폭파사건 당시 이 사실을 숨겼고, 일본 경시청 역시 하치야 신이치의 딸 하치야 마유미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표했으나, 그의 딸은 KAL사건 직전인 87년 11월 중순경에 사라졌다고 한다. 진짜 하치야 신이치와 김승일 그리고 ‘하치야 마유미’는 일본 도쿄도 시부야구 에비스 4-10-6 나가사와장 2층과 103호실에 각각 거주했다며 부동산계약서도 공개했다.

   
  ▲ 일본 언론매체가 공개한 진짜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 사진. 우측 상단의 김현희 얼굴 인상과 비슷하고 헤어스타일 등이 유사하다. [일본 山高新聞, 2004.1.30]  
 
이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위는 동 언론사 ‘야마모토 다케시’와의 면담에서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사진속의 여성을 처음에는 범인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한국의 여배우 김서라(신상옥 감독 반공영화 ‘마유미’ 여주인공)라고 말을 바꿨으며, 진짜 하치야 신이치는 김승일이 ‘괜찮은 여자’라고 소개했다고 말했다며 ‘김승일의 딸’이라고 생각한다는 진술을 얻었으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종합보고서 Ⅲ, 327~328쪽)

한편 동 신문은 1984년 9월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태국 방콕 라자호텔 방에서 촬영한 파란 와이셔츠의 ‘이경우’와 반팔 소매의 ‘다구치 야에코’ 그리고 흰색 블라우스의 <코리아하우스> 여종업원 등이 담긴 3장의 컬러 사진을 공개했다. 3장의 사진은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업무노트’에 보관했던 것으로, 다구치 야에코가 1990년에도 방콕 <코리아하우스>에서 근무했다는 물증, 증언이 있다고 보도했다.

   
  ▲ 좌측 사진은 일본 <문예춘추>가 공개한 다구치 야에코 중,고교 시절 모습. 가운데와 우측 사진은 각각 1984년 9월 방콕 라자호텔서 찍힌 ‘다구치 야에코(이은혜)’와 ‘미야모토 아키라(이경우)’ 그리고 흰색 블라우스의 <코리아하우스> 여종업원. [일본 山高新聞, 2004.1.30] 김현희는 수기 등에서 ‘다구치 야에코가 의자에 앉을 경우에는 으레 다리를 꼬았다’고 진술했다.  
 
이 같은 보도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위는 진짜 하치야 신이치의 업무노트와 일본 경시청의 수사보고서 내용으로 볼 때 1984.9 촬영된 사진 속의 여인은 ‘다구치 야에코’가 아니라 방콕 <코리아하우스>의 한국인 여종업원인 것으로 판단된다는 ‘모호한’ 결론을 내렸다. (종합보고서 Ⅲ, 409쪽)

노다 미네오의 <파괴공작>에서 태국 방콕의 한국 식당 <코리아하우스>에 대한항공과 한미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주인 ‘마담 장’의 부친이 대한항공 중역을 역임했고, 남편 ‘미타니 다다시’는 첩보원으로 KAL기 수색작업을 교란시키기 위해 버마 카렌족 지배지역 추락설을 유포시켰다고 주장, <코리아하우스>가 韓美日의 공작거점이었다는 기술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위는 ‘사실무근’이라는 판단과 함께 ‘북한 스파이’로 지목됐던 이경우가 <코리아하우스>에 출입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이경우와 <코리아하우스>는 ‘특수 관계’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종합보고서 Ⅲ, 338~342쪽)

KAL858 사건 당시 김승일 일본여권을 조총련계 ‘북한 스파이’ 이경우가 위조했다는 ‘설’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유포시켰던 일본 정부와 전두환 군사정부, 그렇게 ‘테러 배후’로 지목됐던 이경우가 방콕 <코리아하우스>에 출입했던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수사를 하지 않았다니! 게다가 김현희 일본어 선생이었다는 ‘다구치 야에코(이은혜)’가 북한에 ‘납치’당했다고 너절하게 소란을 떤 일본 자민당 정부는 실제 그녀는 <코리아하우스> 여종업원으로 진짜 하치야 신이치가 사망 직전에 사진까지 공개한 ‘팩트’에 대해서는 왜 함구하는 것일까?

14. 87.12.1 음독자살 소동, 87. 12.2 무지개 공작?

국정원과 국정원 과거사위가 일부 공개한 일명 <무지개공작> 문건에 의하면, 공작기간은 1987.12.2-1988.5.31이었으며, 1항 ‘목적’에서 “11.29 버마 상공에서 '폭파 실종'된 대한 항공 여객기 사건이 북괴의 테러 공작임을 폭로, 북괴 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대선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이라고 했다.

1987년 12월 1일 바레인서 일본 여권을 지닌 김승일과 김현희의 석연치 않은 음독자살 시도를 설령 '북한 간첩'으로 강하게 ‘의심’ 내지 ‘추정’한다 하더라도, 안기부는 어떻게 그 다음날부터 KAL858 여객기가 ‘폭파 실종’ 된 것을 알고 곧바로 ‘북괴 만행을 전 세계에 규탄’, ‘대선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 등의 <무지개공작>을 전개 할 수 있었을까?

또 동 문건 ‘라. 국내 홍보 방향’ 항목에서 “금번 사건은 '북괴가 아국의 대통령 선거 및 '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해 자행한 사건'으로 북괴가 또 다른 만행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 폭로” 한다고 하면서 KAL858기 사건을 '북괴가 아국의 대통령 선거 및 '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해 자행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음독자살 시도로 바레인 병원서 혼수상태에 빠져있다는 ‘정예공작원’ 김현희가 놀라 자빠질 일이다.

적어도 1987년 12월 2일 이전에 제5공화국 군사정부는 KAL858의 '폭파 실종'을 인지했고, 뿐만 아니라 1987년 12월 16일 대선 하루 전날 바레인서 서울로 압송되는 ‘드라마틱’한 상황이 연출되고 안기부 생활을 하던 ‘테러범 김현희’가 8일 만에 “언니 미안해”라며 사건 전모를 자백하기도 전에 '대통령 선거 및 '88 서울 올림픽 방해를 위해 자행한 사건' 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니, 참으로 ‘해괴망측’한 사건이다.

뿐더러 당시 군부정권의 <무지개공작>의 출발 시점인 1987년 12월 2일 부터 일본과 국내 언론들은 KAL858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1987.12.29 김현희의 <자필진술서>와 1988.1.15. 안기부 수사발표 내용과 조응하며 일치하는 내용들이 속속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가?

87년 12월 2일부터 언론은 동시 다발적으로 ‘수상한 두 남녀’를 ‘조총련이나 평양 공작원일 가능성이 크다’며 빈->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에서 바레인까지의 낱낱의 행적과 함께 빈의 ‘암파크링’, 베오그라드 ‘메트로폴’ 투숙호텔(경향신문 1987.12.2)은 물론 X-레이에 탐지되지 않는 콤포지션 C4 폭약 기내 반입(조선일보, 동아일보 87.12.2.), 바그다드 출발 9시간 뒤 폭파(중앙일보 1987.12.2)등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기사들이 대량 보도되기 시작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에 의하면 이런 보도들은 대부분 기자들의 ‘추정’ 혹은 ‘우연’에 불과하고 수사기관, 대한항공, 외무부 등에 의존하다보니 그런 기사가 나왔을 것이라 판단했다.(종합보고서 Ⅲ, 250-256쪽)

특이 사항은 <무지개공작> 시점인 1987.12.2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KAL 사건은 북한 배후 소행이라고 일본이 추측한다”고 주장했으며, 국내 언론은 일제히 “KAL기 탔다 내린 남녀는 일본인 위장 북한계 추정” 또는 “조총련이나 평양공작원 추정”이라 보도했으며, ‘東京협약’을 들어 군사정부는 두 남녀의 재판 관할권을 주장하고 신병인도 교섭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동아일보 1987.12.2 1면)

   
  ▲ 1987.11.30 미국 AP통신은 KAL858(보잉 707)기 ‘최후 교신’ 지점을 타보이 서쪽 약 150마일 떨어진 버마 해상이라고 보도했다. [DAILY HERALD]. 그러나 1987.12.1 부터 국내 언론은 태국과 버마 접경지역인 칸차나부리 밀림지대에 KAL기가 추락, 동체를 발견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5. UN안보리서 망신당한 미국과 일본 그리고 군사정부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1988년 1월 20일 KAL858기 사건을 북한에 의한 국가지원 테러 사건으로 규정했다. 근거는 역시 ‘김현희 진술’과 안기부 수사발표문이다. 미국 국무부는 1988.1.15 군사정부의 수사 발표가 되자마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며 북한에 의한 테러 사건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1988년 2월 4일 미 하원 아시아 태평양 소위원회에서 개최된 <KAL858기 사건 청문회>에서 미 국무부는 이른바 ‘독자적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미 국무부 테러 담담 직원의 안기부와 김현희 면담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월간조선>에 자주 인용되어졌는바 ①김현희의 일본여권은 위조된 것이다 ②김현희는 미국측이 제시한 사진서 북한공작원 2명(이용혁, 한송삼)을 지목했다 ③김현희 소지 자살용 캡슐은 과거 체포된 북한공작원의 청산캡슐과 동일한 것이다 ④김현희는 암호로 위장한 빈과 베오그라드 북한 아지트 전화번호 수첩을 가지고 여행했다 ⑤김현희가 그린 부다페스트 한송삼 아지트는 미국이 보유했던 정보와 일치했다 등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미 국무부의 31쪽 짜리 <The bombing of Korean Airlines flight KAL-858(미국 의회 문서번호 H. Con. Res. 246)>이 유일한 KAL858 조사보고서다. 당시 미 하원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사람은 미 국무부 테러담당 클라크 윌리엄 (Clark William)과 맥나마웨이 클레이튼(McNamaway Clayton) 두 사람이다.

KAL858기 사건은 익히 알려진 대로 일본과 남한 군사정부의 요구로 UN안보리 의제로 채택(1988.2.10. 의장국 미국), 1988년 2월 16, 17일 이틀 동안 15개 참가국들이 격론을 벌인 사건이었다. UN안보리 회의결과 KAL858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는 결론이나 ‘대북 비난결의안’은 커녕, 유엔 주재 박길연 북측 대사에 의해 동 사건은 ‘한,미,일의 모략극’임이 폭로됐다. 이에 안보리 참가국들은 군사정부의 수사결과를 강하게 불신, UN이나 독립된 국제기구에서 독자적, 심층적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반응들이 터져 나오자 미국은 서둘러 회의를 종결시켰다.(자세한 내막은 박강성주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 도서출판선인, 2007.7 참조)

KAL858기 사건과 관련 미국의 연구논문이나 독립된 책자를 살펴보면 한마디로 ‘전무(全無)’다. KAL858기 사건은 민간인 115명- 중동근무 근로자 93명과 승무원 20명, 외국인 2명-이 블랙박스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세계 최악의 여객기 테러 사건’중 하나로 손꼽힌다. 테러와 인권문제에 민감한 미국 지식 사회에서 KAL858기 사건을 파헤친 책자나 학술논문이 없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KAL858기 사건과 관련, 미국서 출판된 책자는 김현희가 특별사면 이후 자서전 형식으로 썼다는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번역서 <The Tears of My Soul>(William Morrow & Co, 1993.10)이 유일하다. 김현희 <고백록>의 허구성은 익히 알려졌으며, 아마존 닷컴(amazon.com)에 올라온 편집자 리뷰에서 조차 이 책의 진실성에 커다란 의문을 제기했다(“always doubts about its authenticity” Roland Green).

16. 불행했던 과거사는 진상규명되고 치유되야

국정원과 국정원 과거사위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국가기관이 저지른 인권 유린과 고문, 살상, 간첩 조작과 불법 정치공작 등 불행했던 과거사를 반추하고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건의 실체 진실 규명을 위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본다.

그러나 국민 최대의 의혹 사건 가운데 하나인 KAL858기 사건에 있어서 근거 없는 ‘예단’과 불합리한 ‘심증’을 내세우며, 국민 앞에 ‘나약한 모습’을 보여 준 끝에 진상규명 실패를 자인하는 이율배반, 자가당착의 엉터리 <종합보고서>를 내놓아 우리 민족은 물론 이 사건을 지켜 본 국제사회에 커다란 실망을 안겨주었다.

돌이켜 보건데, 1987년 11월 KAL858기 사건의 배경에는 미,소 냉전의 극단주의 행태의 국제 관계가 한반도를 지배하며, 남과 북의 갈등과 대결을 부추겼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특히 미 레이건 행정부의 무모하고 무책임한 팽창주의 군확노선은 1979.12.12 군사반란과 1980.5.18 민주화를 염원했던 광주시민을 무참히 살륙하고 등장한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집권에 손을 들어 주고, 일본 나카소네 내각의 신군국주의 재무장 노선과 맞물리면서 이른바 한,미,일 ‘삼각안보 동맹’을 구축을 시도했던 반인륜, 반평화의 패역한 시기였다.

학살과 불법의 제5공화국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은 한반도 ‘분할과 통치(divide and rule)'에 기초한 군사 개입과 주한미군 영구주둔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남북간 갈등과 대결 고취는 절정에 달했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은 좌절과 혼란과 재도전의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했다.

1987년 새해, 우리 국민은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악명 높은 ‘대공분실’서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싸늘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부조리한 권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기막힌 거짓말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그러자 안기부는 이른바 ‘수지김 간첩’ 사건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사건발생 15년 만인 2002년에야 실체 진실이 밝혀졌지만, 악랄한 정보기관에 의해 ‘북괴 간첩’으로 둔갑한 ‘비운의 여인’과 그녀 가정의 참담한 ‘풍비박산’ 뉴스는 또 한번 국민의 가슴을 때렸다.

그해 겨울, 반독재 반외세 6월 민주항쟁과 평등 사회를 요구하는 7.8.9월 근로자 대투쟁을 거쳐 다다른 ‘대선’ 와중에서 KAL858기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앞서 보았듯이, 미국과 일본이 오히려 ‘혈안’이 된 사건이었다. KAL기는 미국이나 일본 국적의 여객기도 아니요 또 자국민이 희생당한 사건도 아니었다! 게다가 법원서 테러범 재판이 시작도 되기 전에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해 버렸고, 일본은 전격적으로 유엔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KAL858기 사건은 단지 ‘대선’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IOC 중재로 일부 종목 북한 개최를 통한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는 산산조각 나버렸고, 북한은 졸지에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혀 ‘경제 봉쇄’를 당했다. 이로 인해 남과 북의 불신과 증오는 심화됐으며, 미국은 이 사건을 ‘핑계’로 주한미군의 군사 훈련을 강화시켰다. KAL858기 사건으로 소련과 중국 역시 커다란 충격과 자극을 받았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론 KAL858기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인 실종자 가족들은 정보당국의 감시와 미행을 당하면서 고난의 진상규명 운동을 지속해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빨갱이’로 몰려 폭언, 폭행, 협박까지 당했던 통한과 울분 맺힌 삶들은 말해 무엇하랴! KAL858기 가족회 차옥정회장은 “나는 이미 1987년 11월에 죽었다”는 말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잃은 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을 표현했다.

작년 8월 국정원 과거사위 <중간보고서>에 분노한 KAL858기 가족회와 시민대책위의 청원으로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로 넘어 갔다. 다행히 지난 9월 말경 대법원의 김현희사건 수사, 재판기록(약 5000여쪽)의 공개가 확정 판결됐다. 또 대선을 앞두고 정보기관에 의해 다량의 TNT로 KAL858기가 폭파됐다는 충격적 내용이 담긴 서현우 추리소설 <배후>(2003.5. 도서출판 창해)에 대해서도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차제에 ‘사법부’ 스스로도 ‘김현희사건’의 재판에 오점이나 부당한 판단이 없었는지 재검토를 하고, 지식 사회도 KAL858 사건의 실체 진실규명에 많은 도움을 주길 소망한다.

더불어 ‘입법부’인 국회는 각종 국가 기관의 자발적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이 △정보 접근의 어려움 △사건 관련자들의 비협조 △수사권 없는 비효율적인 조사 등이 문제점으로 드러났는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완 입법은 물론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반인륜의 국가범죄 사건은 ‘공소시효’를 당연히 배제하는 특별법의 조속한 입법을 반드시 추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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