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권재혁선생 38주기 행사에 참여한 유족과 동지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4일 오전 11시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모란공원)에서는 이른바 ‘남조선해방전략당’(이하 전략당)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故 권재혁 선생의 38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고인의 아내인 이종덕 여사와 가족들, 그리고 이일재 선생를 비롯한 고인의 동지들 20여명이 참석했다.

묘역은 지난해 동지들이 묘비석을 설치하였고, 올 초 가족들이 묘에 지대석을 설치하여 깨끗이 단장되어 있었다. 3년 전 이일재 선생과 추모연대에서 묘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이름만 간단히 적힌 오래된 묘비만 있는 등 아무도 찾지 않던 잊혀진 묘였다.

고 권재혁 선생의 추모식은 98년에야 시작되었다. 그것도 묘역을 찾지 못해 고인이 사형당한 서대문독립공원 형무소터에서 29주기 추모식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고인의 유족과 동지들이 함께 준비하고 모여 추모식을 진행한 것은 이번 38주기 추모식이 처음이었다.

▲ 고 권재혁 선생의 부인 이종덕 여사.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38년 전, 무슨 일이 있었길래, 고인이 목숨처럼 아끼던 유족과 동지들이 그동안 연락을 취할 수 없다가 이제야 만날 수 있었던가?

고 권재혁 선생을 사형대에 세운 '남조선 해방 전략당 사건'은 1968년 8월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한 사건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5.16군사혁명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67년 두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베트남전 참전(66년)에 따른 남북간에 긴장관계가 높아지고(1.21일 김신조 사건, 1.23일 프에블로호 사건), 국내에서는 반전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에 박정희는 자신에게 불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3선개헌(69년)과 유신헌법(72년)제정을 통해 종신집권 계획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반공이데올로기로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막걸리 한잔에 박정희를 욕했다가 반공법에 걸려 무수한 고초를 당해야 했던 '막걸리 반공법'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고 권재혁 선생은 미국 유학(1956~1961년)을 마치고 국내에 귀국하여 육사와 건국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는 한편, '민주사회동지회' '한국경제문제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자 조직 건설'을 통한 사회민주화운동을 적극 펼쳐나가고 있었다. 또한 통일혁명당의 김종태씨와 만나 조직통합을 논의하고 있었다. 68년 큰딸 병희씨의 여름방학이 끝나는 8월말, 통혁당사건의 한 갈래인 ‘임자도 사건’을 조사하던 중앙정보부는 권재혁 선생의 활동을 감지하고 선생을 비롯한 수십명의 동지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전략당 사건 관련자(괄호안은 당시 형량)>

권재혁(사형) 이일재(무기징역) 이형락(징역10년) 이강복(징역10년) 노연훈(징역10년) 김봉규(징역7년) 박점출(징역10년) 조현창(징역3년/집유5년) 김병권(징역5년) 오시황(징역3년/집유5년) 나경일(징역3년/집유5년) 김판홍(징역3년/집유5년)

결국 1968년 11월 4일,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나락에 젖어 오로지 이땅의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쳤던 한 유능한 경제학자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그의 평생동지들은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고, 남은 가족들은 서로를 찾지 못한 채 소식도 모르고 지금까지 지내 와야 했던 것이다. 전략당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살고 78년 출옥하여 모진 고문으로 인해 생긴 병으로 십여년을 고생하다 운명을 달리한 고 이형락 선생(85년 작고)의 부인 한기명씨(범민련 대경의장)는 "한번은 딸애와 이사를 얼마나 했나 헤어봤어요. 그랬더니 한 서른한번이더군요. 그러니 그 일이 있고 난 후, 일 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했습니다. 주변에서 제 아이들을 보고 '간첩의 자식'이라고 놀리니 이사를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 전했다.

▲ 이일재(좌), 권오봉(우)씨. 권씨는 당시 권재혁 선생과 같이 체포되었으나 기소가 되지 않았다.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이날 추모식의 추도사에 나선 고인의 동지 이일재씨는 61년 '민주사회동지회'에서 권재혁 선생을 처음 만나던 날을 회고한다.

"그 날 세미나장에는 여러 인사들이 와 있었습니다. 유관순의 오라버니, 장준하, 김성숙등 당시 내노라하는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 인사들이 여럿 와 있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자본주의의 한계시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공황을 거듭하던 자본주의가 그 위기를 잘 극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한계시점에 도달하면 만성공황에 빠지게 되고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라는 내용이었죠. 당시로서는 자본주의의 구체적 패망 경로를 밝힌 획기적인 이론이었습니다."

이 강연 후, 이일재 선생은 권재혁 선생을 만나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이야기하고 이에 공감하여 평생동지로 지내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또 고인의 묘를 찾기 위해 서울시 주변의 공원묘지를 찾아다녔고, 결국 3년 전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현재, '남조선 해방 전략당'사건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이하 진실위)'에 접수되어 있다. 이날 참석한 진실위 관계자는 "정황상 조작사건이 분명한데, 이를 입증해 줄 재판기록이나 조사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법원 자료실에는 전략당사건과 관련된 자료목록이 있는데, 자료실에 가보면 자료가 없다. 아마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파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입수한 판결문을 보면, 결정적인 증거로 권재혁 선생이 68년에 작성한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논문-중앙정보부는 이 논문이 남조선해방전략당의 강령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으로 적시하고 있는데, 전략당이 결성된 것은 67년으로 나와 있어 당결성시기와 강령채택시기가 1년의 시차를 가지고 있음으로 조작의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 부친의 묘소에 술을 올리고 있는 장남 권병덕씨. [사진-통일뉴스 이창훈 통신원]
추도식에 참석한 유족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회자가 유족을 불렀지만 끝내 앞자리에 나서지 않았다. 오랜만에 고인의 동지들이 모여 함께하는 추도식이 어색도 할테지만, 그동안 강요당한 침묵에 선뜻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 부친이 옳은 일을 하다 억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침묵의 38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유족들과 마주하여 선 이일재씨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곧 진실이 밝혀 질 것입니다'

두번째 추모사에 나선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은 고인이 살아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분신이라는 극한 투쟁으로 몰아가는 현실을 개탄하며, 고인이 살아 계셨더라면 신자유주의 어둠을 거둬내고 노동자 참세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박정희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죽였습니다. 그것도 나라의 큰 동량이 될 분들만 골라 죽였습니다. 그렇게 민족의 역량을 파괴하고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20년 장기독재였죠. 97년 IMF사태였죠. 반민주사회였죠. 반통일이었습니다."

지난 1월, 박정희가 여덟명의 생목숨을 앗아 갔던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한 현재 법원에서는 '61년 민족일보'사건의 재심이 진행되고 있다. 묻혀진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고 밝혀질 것이다. 이날 추모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고 권재혁 선생의 억울한 죽음이 밝혀져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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