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심(재일본조선청년동맹 도쿄강동지부 문화선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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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역에서 나서 자란 우리 조국의 푸른 하늘 우러러
민족교육화원속에서 참다운 삶의 길 찾았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내 젊은 청춘을 바치리라
오늘도 래일에도 이 마음 꽃피우리...
이 노래는 우리가 학생시절부터 계속 즐겨 부르던 노래이며 현재도 동창생이 결혼할때마다 반가운 식장에서 부르기도 하는 노래입니다.
<화원>이란 말그대로 우리 학교는 동급생들과 선배후배들, 선생님들, 동포들의 따뜻한 사랑의 꽃이 만발한 사랑의 요람이였습니다.
이역에서 나서자랐지만 조국의 하늘을 우러러 조선사람으로서 민족을 위하여 떳떳이 살아나갈 길을 찾게 된 것은 바로 우리 학교가 있었기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변해도 일본각지에 우리 학교가 있고 그 두리에 동포사회가 존재하는것은 결코 자연히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우리 학교와 동포사회를 위해 한몸바치는 동포들이 있고 그들이 다 우리 학교에서밖에 배우지 못하는 귀중한것을 갖고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에다가와라는 일본에서도 우리 동포들이 많고 민족애, 동포애로 넘친 특수한 지역에서 나서 자랐으며 애국지성이 강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향으로 도꾜제2학교(에다가와학교), 도꾜중고급학교를 거쳐 조선대학교를 졸업하여 지금은 에다가와지역동포사회를 위하여 일하고있습니다.
제가 에다가와학교에 입학한 해 마침 독일의 베를린 외벽이 무너지고 정세가 아주 격동된 시기였다는것을 기억하고있습니다.
그후 쏘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나라가 없어져가면서 총련이 운영하는 우리 학교는 학생수의 감소, 재정난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것입니다.
특히 90년대는 우리 나라와 일본의 관계가 최악으로 악화한 시기라서 집에 돌아가면 TV에서 나오는 싫은 소식, 조선인과 한국인을 배타하는 사회풍조가 횡행하고 우리의 민족의상인 치마저고리를 통학길에서 칼질하는 가슴아픈 사건까지 련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은 우리 학생들에게 민족을 안겨주기 위하여 일본의 불경기때문에 경제형편이 어려운 속에서도 우리들을 학교에 보내주시였던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그런 고마움을 학생인 우리가 인식하고있었던것은 아닙니다.
학교에 가기가 너무 재미있었고 친구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저 놀고 웃으면서 지내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조선사람이 살기에 너무 어려운 일본사회속에서도 자신을 조선사람으로서 부정하지 말고 살아올수 있었던것은 바로 우리 학교에서 말과 글, 우리의 력사, 우리의 문화와 풍습을 배웠기때문이고 친구들이 있었기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학교에서 얻은 가장 빛나는 보물이 <우리 친구>입니다.
우리 친구들은 조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대학교. 일본회사에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도 어려울때면 친구들을 찾고 기쁠때도 우리 친구들을 찾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역땅 일본에서 살아가지만 민족과 함께 살아가려는 우리 미더운 친구들. 민족교육의 화원에서 함께 자란 우리 친구들과 함께 앞으로도 저는 살아나갈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