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일보 다시보기’ 연재를 시작하며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부터 5월 19일까지 지령 92호의 짧은 삶을 살았다. 단명(短命)했지만 민족일보는 당시 저 유명한 ‘양단된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 등 4대 사시(社是)를 내걸고 사월혁명 직후 “한국사회의 새로운 발전과 모색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이어받고 특히 ‘민족일보 다시보기’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뉴스의 창간 정신이 민족일보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며, 다른 하나는 양사의 최대 관심인 통일문제와 관련해 민족일보가 활동했던 사월혁명 후 한국상황과 통일뉴스가 활동하고 있는 6.15공동선언 이후 현재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일보를 널리 알리는 일은 역사를 두 번 겪는 이로움을 줄 것이다.

‘민족일보 다시보기’ 란에는 민족일보에 실린 여러 가지 내용이 게재될 것이다. 사설, 논단을 비롯해 인터뷰, 기획연재, 세계의 동향 그리고 생생한 사회면 기사들이 매주 한두 편씩 실릴 것이다. 게재 방식은 첫째 원본을 싣고, 둘째 그 원본을 현실에 맞게 수정해 싣고, 셋째 가능한 경우 해설을 덧붙일 것이다. 특히 이 작업을 주도하는 경희대학교 총민주동문회에 감사드린다. / 편집자 주

<창간사> 우리는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오늘날 우리 생활주변을 돌보면 번영의식 대신에 불안과 위기감이 충일되어 있다하겠다. 그리고 그 불안과 위기감의 실체가 양식에 의해서 구명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임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안과 위기에 대해서 시시각각으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아니 될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안과 위기와 대결하는 길은 방관이나 침잠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유와 전망적인 지식뿐이다. 퇴폐와 도피의 문화가 그리고 반동과 우매한 정치가 때에는 우리들의 대결을 저해할런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불안과 위기와 대결하는 것을 기피하여서는 아니 된다.

오늘날 우리의 불안은 생활에서 오는 것이고 또한 위기는 싸움(戰爭)에서 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주변을 돌보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인 대중들이 말할 수 없는 생활의 절박감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비비꼬이고 뒤틀인 현실속에서 내일이 아니라 오늘의 삶(生)을 위해서 허덕인다는 말이다. 한편에는 사치와 낭비가 마음대로 뒹굴고 있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메마른 삶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것이다. 한편에는 기름진 포식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바닥까지 다다른 궁핍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이 결코 건전한 양상일 수는 없을 줄 안다.

그러나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비단 이 생활에서 오는 불안뿐만은 아니다. 중세기에 있어서는 『종말의 날』을 계시하였다는 『요하네의 묵시록』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인류의 종말을 현실화할 수 있는 『핵무기』의 발전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묵시에 그치는 종말이 아니라 현실화할 수 있는 종말이다. 그것은 또한 과거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허무적인 종말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종말』을 의미하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유의하여야 할 것은 과거의 종말관에 있어서의 계기는 『신의 분노』이었지만 오늘에 있어서의 계기는 『인간의 수중』에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근본적인 틀림이 있는 것이다. 신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고 할 때에는 허무한 이야기지만 「구제의 약속」이 있었지마는 인류자신의 수중에 그 계기가 장악되고 있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구제의 약속은 없는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전쟁을 운위하는가 하면 일부 몰지각한 사이비문화인들이 도발적인 언사를 쓴다는 것은 시대의식을 지니지 못한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인류를 구제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로 이끄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할 때 인류를 위한 평화적인 노력같이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좁은 이 땅이라는 지역에 있어서나 또는 널리는 세계라는 지역에서 있어서나 같게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민족일보」를 창간하는 바이다. 우리는 앞으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다수의 사람들의 생활과 그 자유를 억압하는 일에 동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다수의 생활과 그 자유에 대해서 억압과 공격을 가하는 소수의 특권과 그 자유를 위해서는 가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일보는 다수의 생활과 자유와 그 문화에 이바지하는 것이지 소수의 그것에 이바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것을 천명하여 둔다.

그리고 또 우리 민족일보는 앞으로 「민족은 하나」라는 의식과 그 하나인 민족의 번영된 장래를 저해하는 여하한 세력과도 과감하게 싸울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이 같은 우리의 심정은 불행하였던 이 민족의 내일의 행복까지 파괴하여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족의 내일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와는 항상 대결하지 않을 수 없을 줄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폭력의 위협과 핵무기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에 노력하여야하겠다. 파국이 온 후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위협에 대한 도피적인 성질은 도리어 보다 더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 일이다.

우리는 사실을 정시하고 일반대중들의 인식을 높여가야 하겠다. 무기의 파괴능력은 과거 십오년 동안에 일만이천오백배로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될 줄 안다. 과학자들이 「핵무기에 대한 무감각」을 경고하는가 하면 또한 높은 지성인들이 「(정치인들의 휴매니티」를 요청하는 이유도 이 같은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옳은 생각과 옳은 노력이라도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고 또한 이루어지는 데에 있어서는 한 사회에 있어서 힘(力)을 형성할 수는 없는 줄 안다. 모든 옳은 생각과 옳은 노력은 대중들의 감각과 생활속에 침투되고 그 대중들의 의욕을 결집하게 하였을 때만 하나의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대중과 유리된 독선과 독단의 세계에서 자기도취는 하지 않겠다. 이 민족일보는 언제나 다수의 자유를 위한 것이고 또한 이 민족의 오늘의 번영과 내일의 행복에 봉사하는 신문이 되기를 맹서하는 바이다.

우리는 대중과 먼 곳에 떨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중 속에서 성장하기를 자기하는 바다. 양식있는 인사들과 불우한 대중들의 편달과 지도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민족일보 1961.2.13 창간호)

▲ [사진 - 민족일보 영인본 캡쳐]
오늘날 우리 生活周邊을 돌보면 繁榮意識 대신에 不安과 危機感이 充溢 되어 있다하겠다. 그리고 그 不安과 危機感의 實體가 良識에 依해서 究明되지 않은 채 그대로 放任되어 있을 다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不安과 危機에 對해서 時時刻刻으로 決斷을 내리지 않으면 아니 될 位置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不安과 危機와 對決하는 길은 傍觀이나 沈潛이 아니라 理性的인 思惟와 展望的인 智識뿐이다. 頹廢와 逃避의 文化가 그리고 反動과 愚昧한 政治가 때에는 우리들의 對決을 沮害할런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不安과 危機와 對決하는 것을 忌避하여서는 아니 된다.

오늘날 우리의 不安은 生活에서 오는 것이고 또한 危機는 싸움에서 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周邊을 돌보면 헐벗고 굶주림에 시달인 大衆들이 말할 수 없는 生活의 切迫感에서 呻吟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비비꼬이고 뒤틀인 現實속에서 來日이 아니라 오늘의 삶(生)을 위해서 허덕인다는 말이다. 한편에는 奢侈와 浪費가 마음대로 뒹굴고 있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메마른 삶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것이다. 한편에는 기름진 飽食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바닥까지 다다른 窮乏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一聯의 現象이 決코 健全한 樣相일 수는 없을 줄 안다.

그러나 우리를 威脅하는 것은 非單 이 生活에서 오는 不安뿐만은 아니다. 中世紀에 있어서는 『終末의 날』을 啓示하였다는 『요하네의 黙示錄』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人類의 終末을 現實化할 수 있는 『핵무기』의 發展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黙示에 그치는 終末이 아니라 現實化할 수 있는 終末이다. 그것은 또한 過去社會에서 볼 수 있었던 虛無的인 終末이 아니라 『世界 그 自體의 終末』을 의미하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留意하여야 할 것은 過去의 終末觀에 있어서의 契機는 『神의 忿怒』이었지만 오늘에 있어서의 契機는 『人間의 手中』에 있다는 點이다. 여기에 根本的인 틀림이 있는 것이다. 神의 意思에 달려 있었다고 할 때에는 虛無한 이야기지만 「救濟의 約束」이 있었지마는 人類自身의 手中에 그 契機가 掌握되고 있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救濟의 約束은 없는 줄 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오늘날의 一部政治指導者들이 戰爭을 云謂하는가 하면 一部 沒知覺한 似而非文化人들이 挑發的인 言辭를 쓴다는 것은 時代意識을 지니지 못한 錯覺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人類를 救濟할 수 없는 暗黑의 世界로 이끄는 結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點에서 생각할 때 人類를 爲한 平和的인 努力같이 高貴하고 價値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點은 좁은 이 땅이라는 地域에 있어서나 또는 널리는 世界라는 地域에서 있어서나 같으게 高貴하고 價値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 같은 問題意識에서 「民族日報」를 創刊하는 바이다. 우리는 앞으로 少數의 사람들에 依해서 多數의 사람들의 生活과 그 自由를 抑壓하는 일에 同調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多數의 生活과 그 自由에 對해서 抑壓과 攻擊을 加하는 少數의 特權과 그 自由를 위해서는 加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 民族日報)는 多數의 生活과 自由와 그 文化에 이바지하는 것이지 少數의 그것에 이바지할 생각은 秋毫도 없다는 것을 闡明하여 둔다.

그리고 또 우리 民族日報는 앞으로 「民族은 하나」라는 意識과 그 하나인 民族의 繁榮된 將來를 沮害하는 如何한 勢力과도 果敢하게 싸울 것을 말해두고 싶다. 이 같은 우리의 心情은 不幸하였던 이 民族의 來日의 幸福까지 破壞하여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民族의 來日의 幸福을 沮害하는 要素와는 恒常對決항상 대결하지 않을 수 없을 줄 생각한다. 또한 우리는 現實的으로 存在하는 暴力의 威脅과 核武器의 威脅을 除去하는 데에 努力하여야하겠다. 破局이 온 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威脅에 對한 逃避的인 性質은 도리어 보다 더 惡化되는 結果를 招來하기 쉬운 일이다.

우리는 事實을 正視하고 一般大衆들의 認識을 높여가야 하겠다. 武器의 破壞能力은 過去十五年동안에 一萬二千五百培로 上昇하고 있다는 事實을 잊어서는 아니 될 줄 안다. 科學者들이 「核武器에 대한 無感覺」을 警告하는가 하면 또한 높은 知性人들이 「政治人들의 휴매니티」를 要請하는 理由도 이 같은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옳은 생각과 옳은 努力이라도 個別的으로 分散되어 있고 또한 이루어지는 데에 있어서는 한 社會에 있어서 힘(力)을 形成할 수는 없는 줄 안다. 모든 옳은 생각과 옳은 努力은 大衆들의 感覺과 生活속에 浸透되고 그 大衆들의 意慾욕을 結集하게 하였을 때만 하나의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點에서 우리는 大衆과 遊離된 獨善과 獨斷의 世界에서 自己陶醉는 하지 않겠다. 이 民族日報는 언제나 多數의 自由를 위한 것이고 또한 이 民族의 오늘의 繁榮과 來日의 幸福에 奉仕하는 新聞이 되기를 盟誓하는 바이다.

우리는 大衆과 먼 곳에 떨어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大衆 속에서 成長하기를 自期하는 바다. 良識있는 人士들과 不遇한 大衆들의 鞭撻과 指導가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民族日報 1961.2.13 創刊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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