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일보 전직 기자로서 민족일보 복간운동을 주도해온 전무배 선생. [사진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통일뉴스가 현재보다 더 강력한 통일언론을 펴면서 민족일보를 복간시켜서 언론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민족일보’.
1960년 4.19혁명의 결실로 탄생한 민족정론지로 지령 92호 만에 5.16쿠데타에 의해 강제 폐간당하고 조용수 사장이 사형당한, 우리 언론사에 지울 수 없는 꽃봉오리이자 아픔의 이름이다.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이어받는다’.
11월 1일 창간 7주년을 기념식을 갖는 인터넷신문 통일뉴스가 시대를 뛰어넘어 민족일보의 명맥을 고스란히 떠안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내 평생을 사는 동안 민족일보에 근무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긍지로 삼는다”는 민족일보 전 기자 전무배(76) 선생은 민족일보 폐간이후 ‘민족일보 복간 공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줄곧 복간운동을 전개해왔다.

그러던 중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가 지난해 11월 28일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에 대해 “조용수에 대한 사형 선고는 중대한 위법이 있다”며 “국가는... 피해자 조용수 및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며, 피해자 조용수 및 유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 상응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고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은 법원에서 재심이 진행중이며, 앞서 법원에서 인혁당 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로 판결받았던 전례에 비추어 명예회복의 날도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29일 통일뉴스 창간 7주년을 앞두고 민족일보의 얼을 통일뉴스가 이어가게 된데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지난 29일 오후 2시 30분부터 통일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한 전무배 선생은 “민족일보의 재심에서는 조용수 사장이 무죄로 사법적인 명예회복이 되고 유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확신한다”며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국가는 민족일보를 복간시키라는 판결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민족주보’는 어렵다, 접자.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받아준다면 통일뉴스를 환영해마지 않고 그런 마음씨를 존경한다. 아주 반가운 일이다”며 당분간 민족일보 복간을 위한 전 단계로 추진해온 ‘남북해외 민족주보’ 창간 활동을 중지하고 통일뉴스를 통해 민족일보의 정신을 이어가기로 했다.

민족일보의 4대 사시(社是)인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근로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이라는 정신을 통일뉴스가 고스란히 이어간다는 것이다.

전무배 선생은 “아무쪼록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받겠다는 맘을 변치 말고 잘 이어서 이 땅에 참된 통일언론, 민족언론의 중심에 서서 통일운동에 앞장서 주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이제 민족일보에 직접 관계를 맺었던 분들도 얼마 남아있지 않고 그나마 고령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는 민족일보 전 기자 김자동 선생, 조용수 사장의 동생이자 민족일보 기획실장을 맡았던 조용준 선생 등이 알려진 분들이다.

내년이면 희수(77세)를 바라보는 전무배 선생은 “‘자나 깨나 안 되는 민족일보 하느냐’고도 하지만 일제하 독립운동 하는데 막강한 왜놈을 상대로 독립운동 하겠느냐고 패배심에 빠지는데, 언제 이길지 승리에 대한 약속도 없는 싸움을 하는데, 꼭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대목에선 민족일보 기자시절의 청년 전무배 그대로였다.

그의 희망대로 조용수 사장의 명예회복과 유족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민족일보의 복간 판결이 내려져 “핵과 같은 폭발력”을 가진 민족언론의 개화기가 도래하길 기대해본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민족일보는 4월혁명의 소산이다”

▲ 민족일보는 4.19혁명의 소산이라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민족일보에 대해서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데, 간략히 소개해 주시죠.

■ 1960년 4월혁명 시기 가장 통일운동이 격렬하게 고조된 때 가장 상징적인 것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 하느냐’, 이것이 전 민족적인 절규였다.

한민족의 절실한 절규, 전쟁을 지양하고 평화로,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절규를 담을 만한 신문이 없었다. 이것을 민중에게 알리고 민중의 요구를 담을 만한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 민족일보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절규가 있었을 때 민족일보는 있는 그대로 일면 톱으로 전면기사를 냈는데 다른 신문은 극히 소극적으로 겨우 사실보도를 하는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사실보도 한두 줄 낼 정도지 민족일보 같은 신문 외에는 전혀 그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 민족일보가 지령 92호로 단명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시죠.

■ 한마디로 민족일보는 4월혁명의 소산이다. 그래서 민족일보가 탄생했고 박정희 쿠데타로 함께 뒤집어졌는데, 굳이 말하자면 민족일보가 자주평화통일 언론을 보다 강하게 펴나갔다는 것이 하나고, 쿠데타 세력이 미국의 인정을 받고자 조용수를 제물로 바쳤다.

민족일보가 나왔을 때는 그야말로 민주민족 세력의 영향이 축적되면서 그러한 통일세력, 민족세력, 민주세력이 자라남으로써 활동터전을 잃은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민족을 배반하고 민주를 거부하고 통일을 반대해서 일으킨 것이 바로 5.16 박정희 쿠데타다.

그 사람들이 4월혁명 당시 민주민족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 조직화되니까 반대세력들이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 역으로 4월혁명을 뒤엎는 세력이 일어나면서 그 일환으로서 민족일보도 당했다.

그래서 민족일보만 폐간시키고 민족일보를 이끌어간 조용수 사장을 없애버리면 민족통일세력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는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46년전, 1961년 10월 31일 소위 우리가 말하는 ‘통일언론의 영웅’으로 추대했던 조용수가 소위 민족을 배반하고 민주를 거부하고 통일을 반대하는 쿠데타 패거리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는다.

그것이 알려지자 전 세계 언론인이 들고 일어났다. 제발 사형만은 말라는 항의문, 탄원서를 보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언도한지 50여일 만에 박정희는 조용수를 죽이고 만다.

조용수를 죽이고 민족일보를 폐간시키면 다시는 통일열기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1962년 1월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국제기자협회에서 국제기자상을 서훈하게 된다. 거기서부터 발단되어서 남은 우리들도 이를 갈면서 천인공노할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시키기 위해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그때부터 복간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평생 민족일보 근무를 자랑과 긍지로 삼는다”

▲ 민족일보 1961.4.20일자 1면. 4.19 1주년을 탑뉴스로 다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선생께서는 어떤 계기로 민족일보 기자로 뛰어들게 되었는지요?

■ 그때 당시만하더라도 올바른 신문, 참다운 언론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을 우리가 느껴오던 참에 민족일보 신문사가 민족이라는 말을 들고 나왔다. 4월혁명의 얼을 담고 전 민족의 소리를 내는 신문을 내야겠다는 소망으로 내자마자 참여하게 됐다. 실제 참여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참여자 이상으로 관심을 갖고 우리와 연결되기도 했다.

□ 입사시험 같은 것을 거쳤는지요?

■ 기성 기자로 있었다. 다른 신문에 여기저기 있었다고 서울신문에도 있었다. 61년 폐간되고 나서 직장이 쉽지 않아 서울신문에 있다가 사고가 났다. 민족일보에서 나와 서울신문에 갔다가 64년도에 1차 인혁당사건에 걸려들어 집행유예로 나온 뒤에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 민족일보 기자로서 활동하던 시절을 회고하신다면?

■ 3개월 전후 92호까지 냈는데, 참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민족일보에 있었다는 것에 긍지를 갖는다. 민족일보 시절은 3개월밖에 안됐지만 3년, 30년 이상의 긍지와 보람을 갖고 있다.

민족문제에 대해서 전혀 도외시하고 외면했던 그런 신문사에서 30년 근무한 것보다 민족일보 3개월 근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정말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고싶은 말도 다 했고, 듣고 싶은 말도 듣고, 쓰고 싶은 것은 다 썼다. 그러한 시기에 사는 기자로서는 제대로 기자로서 살았다.

통일뉴스가 6.15시대의 통일뉴스라고 하듯이 4월혁명 당시 기자로서의 시대의 사명을 제대로 했다는 긍지를 갖는다. 민족자주, 평화통일에 대한 사명을 갖고 신나게 활동하면서 일을 했고 현재까지도 내 평생을 사는 동안 민족일보에 근무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긍지로 삼는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나 기사가 있으시다면?

■ 영인본에 보면 있지만 제목이 ‘잃어버린 거성을 추모한다’ 란이 있다. 백범 김구부터 쭉 나오는데 몽양 여운형에 관한 글을 썼다. 최근호로 돼있지만 글은 내가 썼다. 지금 볼 때 좌우합작과 남북합작, 단정단선반대를 주장한 그분 글을 내가 썼다는 것은 잘 썼다 생각한다.

기억나는 활동을 예를들면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했는데 서민호 국회부의장할 때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일반적인 질문을 했지만 우리는 일부러 통일문제, 남북문제를 끄집어내서 묻고 소개했다.

한병글 기자와 정당과 사회단체를 출입한 이재문 기자, 나중에 남민전 사건으로 옥사했는데, 이들과 함께 기자회견이 있으면 문제제기해서 질문하고 답을 받아내고 했다.

서민호 국회부의장이 민간인 교류를 하자고 했는데, 외국 가보니까 세상이 바뀌고 있다, 자꾸 반공논리가 아니라 남북교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귀담아 들어 심도있게 취재하고 보도했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당시 벌어진 사건만 인터뷰하는데 일부러 유도해서 물어서 부각시킨 것이다.

3년에 걸쳐 민족일보 모아 영인본 만들어

▲ 민족일보 영인본.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조용수 사장의 사형집행은 큰 충격이었을 텐데요.

■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세계 전 언론계가 일어나 항의문을 보내고 탄원서를 보냈다. 세계언론사상 신문사 사장을 처형한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것도 역적 노릇한 것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조용수 사장은 인도주의자다. 사상적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니다. 싸움 말리고 불난 집에 불 끄고... 우리 옛말에 ‘흥정은 붙이고 싸움은 말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 생각이 발전해 이론화 된 것이다. 남북이 싸우지 말고 하나 돼 살자. 일본서도 죽산 조봉암 구명운동, 재일동포 북송반대 운동을 했던 분으로 사상적으로 좌가 될 수 없고 중도우파 민족주의자, 인도주의자였다. 과격한 사람도 아니었다.

□ 선생께서는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셨는데.

■ 64년에 들어가서 65년 집행유예로 나왔다. 인혁당 사건은 이미 지난번에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났다. 2차 인혁당 사건 유족들이 무죄판명으로 보상을 받게 됐다.
□ 민족일보 복간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 오셨는데.

■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민족일보 복간 공동추진위 위원장이 되어서 고생하면서 영인본을 만든 것이다.
영인본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한겨레가 나오던 무렵인데 복간을 위해서 월간지를 먼저 내자, ‘민족일보 소사’ 책을 만들어 출판기념회를 하자, 1만원 짜리 1만부를 풀어 1억을 모아 월간지 내고, 주간지 내고, 그러면서 일간지 복간운동을 해보자는 얘기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자료가 필요하다, 민족일보 영인본을 만들어내자.

민족일보가 집에 있었는데 인혁당 사건 등으로 엉망이 된 것을 누가 갖다 버려버렸다. 이것을 찾느라고 신문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고 여기 몇 개, 저기 몇 개 3년에 걸쳐 다 모았다. 그래서 1990년에 영인했다.

그 사이에 죽은 박현채가 강만길이 도서관장할 때 마이크로필름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전해줬다. 서울대도서관에도 민족일보는 없다고, 강만길에게 마이크로필름이 있다고 해 갔더니 있더라. 그런데 빠진 게 많았다.

진상규명과 복간을 위해 세미나도 갖고 단행본도 만들어 출판기념회도 열고, 통일운동이 여러 갈래가 있어 각 단체 대표들과 지방 여러 동지들을 모아 복간을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해마다 5월 19일 민족일보 폐간된 날 특별히 모아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자꾸 논의하고 복간운동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그런 진행중에 지난해 여름 인사동에서 부산경남지역 김상찬, 대구경북지역 강창덕, 광주전남지역 임동규, 대전충남지역 이규희와 서울 여러 통일운동단체들이 서울 인사동에 모여서 그날 ‘민족일보 복간 공동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민족일보 복간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자고 해서 찬조금을 받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민족일보 재심이 이처럼 빨리 될지 모르고 오래갈 것에 대비해서 전국 순회강연회도 하고 진상규명과 복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민족의 날’이라고 해서 매달 15일 한번씩 만난다, 민족산악회를 발족시켜보자며 민족일보 복간추진을 위한 분위기조성을 위해 노력해왔다.

오래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민족일보를 추진하자는 사람들끼리의 소식, 복간 추진과정, 복간홍보를 위해서 하다못해 월간지는 너무 시의성이 떨어지고 주간지를 내자고 해서 ‘남북해외 민족주보’를 등록까지 했다.

그 와중에 과거사위에서 민족일보의 진상을 규명하고 국가는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민족일보사건을 재심의하라는 결의를 했다. 이리되면 일단 조용수 사장은 무죄로 사법적 명예회복이 되고 유족들도 빼앗긴 재산을 되찾아 일단락된다.

2단계는 복간이다. 재심의 추세를 봐가면서 할 셈치더라도 당분간 복간운동은 재심이후에 보자고 관망하고 있다.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받아서 통일언론 펴내야”

▲ 민족일보와 통일뉴스의 사시는 일맥상통한다. [사진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통일뉴스가 창간 7주년을 맞아 민족일보의 정신을 이어 간다는데 뜻을 모았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 민족일보의 재심에서는 조용수 사장이 무죄로 사법적인 명예회복이 되고 유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국가는 민족일보를 복간시키라는 판결을 기대하고 있다. 죽인 사람은 살려내지 못하지만 국가가 합법적인 신문을 고의적으로 폐간시켰다면 당연히 복간시켜야 한다. 조용수가 무죄라면 민족일보 폐간도 잘못된 것이고 당연히 복간시켜야 한다.

재판부에서 복간 판결이 안 내려지면 ‘민족일보 복간 공동추진위원회’(민복공추)에서 조직적으로 다시금 가동시켜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제2의 민족일보 복간 투쟁을 벌일 것이다. 그 일에 통일뉴스가 함께 할 수 있다.

통일뉴스가 주도해서 민족일보의 얼을 받아서 통일언론을 펴내는 한편 민족일보 복간운동에 함께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서로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4월혁명을 배경으로 태동한 민족일보와 6.15공동선언 시대에 등장한 통일뉴스가 내건 사시(社是)가 일맥상통 한다는 데 공감하십니까?

■ 공감한다. 대단히 우리에게 격려되고 고맙고 환영한다. ‘민족주보’는 어렵다, 접자.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받아준다면 통일뉴스를 환영해마지 않고 그런 마음씨를 존경한다. 아주 반가운 일이다.

통일뉴스가 현재보다 더 강력한 통일언론을 펴면서 민족일보를 복간시켜서 언론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민족일보가 복간되면 이땅 위에 언론혁명이 일어난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위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나’라는 민족적인 절규를 실현하는데 손가락도 꼼짝 않던 언론, 조용수 사장이 사형언도를 받고 죽을 때까지 세계언론은 항의했는데 침묵으로 일관한 국내언론은 우리 신문도 아니고 자주평화통일의 신문도 아니다.

그런 언론과 맞서서 민족일보를 복간시키고 언론혁명을 일으켜서 그러한 언론과 유착돼 있는 반민족, 반통일, 반민주 세력들을 역사 밖으로 몰아내는, 그래서 통일에 앞장서 나가는 그러한 역할을 하고자 할 것을 다짐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환영한다.

□ ‘민족일보 복간 공동추진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신 분들은 누구인지요?

■ 현재 주도적으로 하는 사람은 추모연대 박중기 의장, 통일연대 김영옥, 전창일 선생, 지방으로 강창덕 김상찬, 임동규, 이규희 등이다. 또한 강희남 목사, 이기형 민족시인, 사월혁명회 노중선, 서정복 선생, 백낙청 선생, 박현서 선생, 조용수 평전을 쓴 원희복 선생이 있다.

의외로 실제 현재까지 민족일보 복간에 대해서 얼굴을 안 나타내도 찬조금으로 애정을 보여온 사람들이 있다.

□ 민족일보 복간을 일단 접고 통일뉴스로 이어가는 것에 대해 시원섭섭함도 있을 것 같은데요.

■ 아니, 아니 없다. 현재 일본에 민족일보포럼이 있다. 이번에 접자고 이야기하니 잘 됐다, 보다 더 발전적이다, 안 되는 주간지에 낑낑거리기 보다는 여기에 마음으로나마 힘을 보태자고 했다.

복간기금 조성을 위해 찬조금 받은 것이 통장에 적립된 것이 있다. 돈은 얼마 안 되도 사무를 일원화 한다는 뜻으로 넘겨주고 ‘남북해외 민족주보’ 등록증도 넘겨주고 영인본과 평전도 넘겨주고, 나도 여기를 키워야 한다. 그래야 맥을 잇는다.

통일뉴스가 중심을 잡아서 민족언론, 통일언론의 중심에 서서 민족일보를 복간하든 여러모로 단행본이나 월간지도 낼 수 있을 것이다.

제일 어려운 것이 찬조금 내라는 것이다. 참 힘들다. 차라리 거점이 여기다, 이리 모으자 하면 말하기도 편하고 보람도 있고 좋다.

“민족일보 복간운동을 계속해나가겠다”

▲ 통일뉴스가 통일언론의 중심에 설 것을 당부했다. [사진 -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지나온 길을 회고해 보신다면?

■ 32년생으로 76살이다. 내년이면 77살 희수가 된다.

사실은 민족일보가 폐간되고 난 뒤 그래도 서울신문사에 갈 수 있었다. 그것보다 치명적인 것은 인혁당 사건이다. 다시 서울신문사에 입사하겠다고 했더니 “전 기자, 인사권은 내 맘대로 못한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내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민족통일문제, 반전평화문제 이러한 선에서 마음을 모았던 사람들이 많다. 사선을 넘나들며 운동한 사람들도 많다.

저는 저 나름대로 그런 길을 살아온 것이 자랑스럽다. 신명대로 살아왔고, 단 하나 먹고 살기 위해 경제행위를 해야 하는데 서툴렀다. 돈벌이에는 이것도 저것도 실패했다.

“자나 깨나 안 되는 민족일보 하느냐”고도 하지만 일제하 독립운동 하는데 막강한 왜놈을 상대로 독립운동 하겠느냐고 패배심에 빠지는데, 언제 이길지 승리에 대한 약속도 없는 싸움을 하는데, 꼭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 아니냐?

민족일보 (복간은) 안 된다고 하는데 몽양의 말처럼 우리 민족통일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1차적인 무기다. 그 많은 중에서도 우리를 대변하는 신문이 없다. 있다면 핵과 같은 폭발력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이번에 조용수 사장이 명예회복되고 유족 보상을 확신하지만 민족일보 복간 판결이 내려지지 않을 경우 법정투쟁하겠다고 했더니 “쉽나, 안 된다”라고들 말한다. 그러면 “야, 왜 그리 패배적인 의식에 사로잡혀있나, 얼마나 살겠나? 나머지 인생을 민족일보 복간운동에 쏟겠다”라고 답한다. 당연히 복간시켜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 우선 민족일보의 얼을 받겠다는 통일뉴스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우리가 민족일보 복간추진 공동위원회에서 미약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참여하고 성원하고 지지할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하도록 운동도 전개하겠다.

아무쪼록 통일뉴스가 민족일보의 얼을 받겠다는 맘을 변치 말고 잘 이어서 이 땅에 참된 통일언론, 민족언론의 중심에 서서 통일운동에 앞장서 주기를 부탁드린다.

앞으로 나는 계속해서 민족일보 복간운동을 계속해나가겠다. 계속해서 재판에서 국가가 민족일보 복간시키라는 판결나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복간추진위를 가동시켜 백만 서명과 함께 제2의 법정투쟁을 해서 민족일보를 복간하는 것이 소신이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 건강하셔서 끝까지 뜻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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