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아태평화재단 연구위원, 정치학)


평화와 화해의 21세기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끊이지 않은 국지전,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숨막힐 듯한 `냉전`과 각국에서 벌어진 혁명과 쿠데타, 유혈시위와 테러 등 갈등과 대결은 하루도 쉬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으면서 우리는 폭력적 대결의 세기가 아닌 화해와 공존의 새 세기를 기대하고 있다. 대량생산의 기계제 장치산업이 퇴조하고 지식과 정보의 유연한 가치가 우선시되는 지식기반사회가 도래하는 것과 맞물려 이제 21세기는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지난날과 달리 평화와 조화의 가치를 앞세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대결주의 유령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도 대결주의의 유령은 세계 곳곳을 배회하고 있다. 특히 전세계적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에서 대결주의의 목소리는 더욱 크게 들린다. 아슬아슬한 투표결과로 어렵사리 출범한 부시정권은 대명천지 21세기에 고색창연한 20세기적 가치를 연일 되뇌이고 있다.

지구상에 자신을 적대할 나라가 남아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우리 자신의 의제를 우리가 제시하지 않으면 해외의 적들에 의해 제시될 것`이라며 예의 대결시대에 어울리는 `미국의 힘과 권위`를 국가목표의 최우선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은 주위의 정당한 반대마저 묵살하면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와 힘없는 `불량국가`를 겨냥해 우주전쟁시대를 방불케 하는 공격적 미사일체제를 강행하고 있다. 이는 과학과 기술의 무한한 진보를 고작해야 군사적 위협과 군비경쟁에 악용해버리고 마는 버릇없는 `카우보이`식 으름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미국은 먹을 식량마저 부족하다는 북한을 상대로 `상호주의`와 `검증`이라는 시비를 걸어 합리적인 대화와 협상마저 머뭇거리고 있고 최근에 와서는 아예 1994년 자신이 북한과 서명한 제네바 합의마저 내버리려 하고 있다.

평화와 화해 대신에 대결과 갈등으로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대결주의의 유령은 미국에서만 그치지 않고 조그만 나라 한국에서도 출몰하고 있다. 남북화해시대의 개막으로 전전긍긍하던 과거 대결주의 세력들이 미국의 정권교체와 부시의 대결주의 고창에 힘입어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고 일제히 반격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미국의 대결주의가 남북관계 교착의 원인임을 말하지 않고 북한의 대화거부만을 욕하는가 하면 현대 그룹의 경영부실이 현대건설의 자금악화를 결과한 사실은 숨긴 채 마치 금강산 사업이 현대의 부실을 가져온 것인 양 여론을 호도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은 북한의 점진적, 누적적 변화를 외면하면서 햇볕정책이 `과연 북한의 외투를 벗겼는가`라는 의심을 연일 제기하는가 하면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적 성과를 지속시키기 위해 미국의 대결주의적 입장을 설득하는 것이 급선무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외면한 채 되려 우리가 미국을 따라 대북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한다.

한동안 잠복해 있던 남북대결주의의 유령들이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사회 전면에 나서서 대북 강경입장을 연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살아난 한국의 대결주의는 급기야 일부 언론에 의해 명백한 사실마저 왜곡하는 방자함마저 보이고 있다. 대결언론의 선봉장인 조선일보는 지난 3월 27일자에 미 외교협의회 한반도 태스크포스팀이 부시 대통령에게 건의한 5개항의 대북정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북한 군축-인권 개선이 목표`라는 기사제목을 뽑아 썼다. 마치 이 보고서가 북한과의 대결을 건의한 것처럼 연상케 하는 교묘한 제목이었다.

그러나 실제 건의서 내용은 `미국이 한국의 포용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북한 군사력 감축과 인권개선은 정책의 목표이지 한국정부의 긴장완화 노력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남북대결주의를 정당화하고 이를 독자들에게 은연중 강요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조선일보는 보고서의 내용마저 왜곡하는 후안무치함을 내보인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대결주의

미국 부시정부의 대결주의와 한국 수구세력의 대결주의는 그 시끄러움과는 달리 정작 정당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구시대적 유물임에 틀림없다. 세계제일의 슈퍼파워임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불량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이유로 자신의 영구적인 `패권주의`를 온존시키려는 미국의 부시정부나 남북화해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북한불변론을 이유로 `남북대결`을 조장하는 한국 수구세력은 시대를 역행하는 반동적 흐름이라는 점에서 둘이 너무나도 닮아 있다.

맹목적인 대결주의는 우선 대화보다 위협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反평화적이다. 미국의 군사대결주의와 한국의 남북대결주의는 공히 상대방과의 대화와 협상보다는 강요와 위협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는데 익숙하다. 이들은 특히 대화가 결렬된다면 상대와의 전쟁마저도 불사한다는 군사편의적 입장에 더 친화적이다.

애초부터 대화에는 관심이 없는 대결주의는 상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빌미로 하여 대화결렬을 선언하고 군사적 위협과 압박으로 상대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려는 입장이다. 결국 대결주의는 상대와의 대화가 아니라 협박에 익숙한 무식한 군사주의의 소산인 것이다. 

대결주의는 또한 상대방을 악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反대화적이다. 대화라면 응당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방의 의견 역시 타협가능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대결주의와 한국의 남북대결주의는 애초부터 상대방을 대화가능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결주의 철학에는 상대와 자신을 악마와 천사로 구분하는 과격한 이분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대결주의는 자신이 힘이 셀 때 더욱 큰소리 치는 비겁주의이다.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강행은 사회주의가 붕괴된 유일 패권 상황에서 바로 그 절대적 우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헤게모니를 영구히 유지하려는 뻔뻔한 비겁주의이다. 자신의 횡포를 막을 견제국가가 없다는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미국을 군사적 대결주의로 유혹하는 독약인 셈이다.

한국의 남북대결주의 역시 지난 해 남북화해의 기세가 높을 때는 숨죽이고 있다가 부시정부의 출범으로 북미관계가 삐걱거리자 때를 만났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비겁주의이다. 가장 강해 보이는 대결주의 이면에는 기실 가장 비겁한 기회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평화와 공존을 우선시하고 상대와의 대화와 타협을 시대적 가치로 삼고 있는 21세기에 반평화적이고 반대화적이며 비겁하기까지 한 작금의 대결주의야말로 당연히 유령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유령은 마땅히 무덤에 가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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