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우(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조사팀장) 


북미간의 현안으로 떠오른 KAL858기 사건

1987년 미얀마 해상에서 폭파되었다고 알려진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이 마침내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했다. 바로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문제가 북미간의 당면현안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2002년 10월 미 국무부 켈리 특사의 방북으로 재차 야기되어 무려 5년여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북미간의 2차 핵 공방이 지난 2월 베이징에서의 2․13합의를 분수령으로 대전환기에 접어든 후 이제 가시권에 든 북미 관계정상화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정세추이를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이란 관점에서 주시해오면서 이제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다. 그 구체적 상황을 최근에 나온 일련의 보도를 통해 살펴보자.

“익명의 미 관리는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의 관건은 KAL858기 사건 개입에 대한 해명을 포함, 몇몇 사안이 될 것이란 견해를 밝혔다.” “KAL기 사건이란 현안이 해결되면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될 것이다.” (연합뉴스 9.5자)

“북이 KAL기 사건 개입을 부인하고 있어 … KAL기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확실시된다.”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 9.4자)

“톰 케이시 국무부 부대변인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을 삭제하기 위해 ‘민감한 절차(delicate process)’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프레시안 9.6자)

위 기사 모두 지난 9월 1~2일에 개최된 제네바 북미 실무회담 직후에 나온 미국 행정부와 언론의 반응들이다.

현재 북미 간에는 지난 2.13합의에 따른 북의 영변 핵시설 불능화와 그에 대응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및 대적성국교역법 적용 명단에서 북을 삭제하는 단계에 놓여 있다.

미국의 북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이나, 대적성국교역법 적용은 나름대로 명분이나 이유를 내세웠듯이 그 해제를 위해서도 반드시 합당한 근거를 마련해야함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당초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계기가 바로 KAL858기 사건 때문이다. 그러므로 KAL858기 사건에 대해 북미 간엔 어떠한 과정의 입장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제네바 북미회담 직후 위 보도 내용과 같은 미국의 반응이 나온 것이다.

바야흐로 KAL858기 사건이 사건발생 20년 만에 북미간의 현안이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상황에 주목하며 미국 국무부의 케이시 부대변인이 말한 ‘민감한 절차(delicate process)’란 의미를 되새겨 본다.

필자는 KAL858기 사건이 북에 의한 것이란 아무런 증거가 없을뿐더러, 실상 사건의 본질은 남의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가 외세와 결탁하여 조작한 사건이라 확신한다. 필자의 이러한 확신은 객관적 근거에 의해 확고히 뒷받침되고 있다.

미국의 북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는 이제 기정사실로 다가왔다. 국내외의 여러 언론매체가 북미 제네바회담에서 연내에 실현할 것을 북미 간에 상호 확약했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는 가운데, 얼마 전 “핵 폐기가 검증되기 전이라도, 북이 핵 폐기 의지만 확고히 보인다면 북을 방문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그 전망을 더욱 굳게 하고 있다.

더하여 지난 9월 18일 미국 백악관이 ‘연례 마약활동평가 보고’를 발표하면서 북을 명단에서 제외했음이 확인됨에 따라 더욱 그러하다.

사실 북미 간에 있어 KAL858기 사건은 이번에 갑작스레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난 3월 6자회담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의 뉴욕방문 직후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입을 통해서 언급된 사안이다.

“우리는 정치적 법적인 면에서도 논의했고, 솔직히 말해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 처음 오르게 된 역사적인 측면도 논의했다.” (경향신문 3.7자)

여기서 힐 차관보가 말한 역사적인 측면이란 다름 아닌 KAL858기 사건이다. 당시 힐 차관보의 발언은 뉴욕 북미양자회담에서 북이 KAL858기 사건을 거론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미국은 1988년 1월 20일 처음으로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 근거로서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KAL858기 폭파사건 수사결과’와 미국이 KAL858기 사건에 대해 독자적으로 확보한 움직일 수 없는 북한 개입 증거를 내세웠는데 어찌 된 까닭인지 미국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1월 20일은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 불과 닷새 후였다.

어쨌든 필자는 KAL858기 사건을 둘러싼 지금까지의 상황을 나름대로 예상해올 수 있었는데 그것은 2․13합의 직전인 2.6자 조선신보 시론을 통해서이다. 조선신보는 재일 조총련 기관지로서 북의 입장을 비교적 정확히 대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조선신보가 최근 몇 년 동안 시론을 통해 주기적으로 KAL858기 사건에 대해 주목해온 것을 필자는 알고 있었다. 특히 2․13합의의 배경이 된 지난 1월의 베를린 북미 양자회담 직후에 나온 위의 2.6자 시론은 필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KAL858기 사건은 2.13합의 이후 북미 간의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맞물려 이제 북미간의 당면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얼마 전부터 KAL858기 사건의 진상조사를 시작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과 더불어 ‘KAL858 가족회(이하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에게 있어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고 있다. 지금까지 가족회와 대책위의 부단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KAL858기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국정원과 검찰의 비협조와 냉대, 그리고 언론의 무관심으로 인해 진상규명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해 있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필자의 견지로는 가족회와 같이 이북 또한 KAL858기 사건의 직접적 피해자이자, 관련자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KAL858기 사건의 피해자는 우리 민족 전체라 함이 마땅하리라. 그러므로 현재의 정세 하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은 이제 관련자 전체의 참여가 요구되는 바, 이북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할 때라 여겨진다.

가족회와 대책위는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에 있어 이제 이북이 자신의 역할을 다 하리라는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지난번 이북이 보여준 BDA(방코 델타 아시아) 동결자금의 해결과정을 통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처음에 미국은 2.13합의에 따라 BDA 동결자금에 대한 해제조치로 일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북은 무려 3개월의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국제금융시스템을 통한 송금을 요구했다. 이북의 입장은 단순히 동결자금의 해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자금이 불법자금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북의 의지대로 관철되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양대 대국이랄 수 있는 미국과 러시아의 중앙은행을 통해서 말이다. 한 마디로 미국의 입장에선 불법자금을 자신들이 세탁해준 꼴이 된 것이다.

KAL858기 사건과 미국

필자가 그동안 KAL858기 사건의 의혹을 제기해오는 과정에서 겪은 주위 반응의 변화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초기의 반응들은 대부분 ‘그렇다 해도 어떻게 안기부가 오스트리아나, 바레인 등 그 많은 나라들로부터 사건조작에 대한 동조 내지 묵인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라며 사건의 전면적 조작을 부인했다.

그러던 것이 9․11 사건과 미국의 이라크 침공, 또 방송을 통한 의혹제기가 공론화 된 이후엔 이구동성으로 ‘미국이 개입한 사건이 틀림없다.’라며 사건의 본질에 대한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것이다. KAL858기 사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건이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가 낳은 국제적 모략사건임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KAL858기 사건이 일어났던 1987년 전후의 시대적 배경으로 눈을 돌려보자.

당시의 국제정세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에 의해 주도된 신 데탕트 무드가 고조되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신사고(新思考)를 앞세운 고르바초프의 대외정책은 유럽에서의 미소 간 핵무기 및 전략중거리미사일 감축협상에 이어, 1986년 7월 고르바초프의 블라디보스톡 선언으로 극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냉전체제의 와해를 불러오고 있었다.

당시 극동에서의 냉전구도는 미국의 대소전진기지인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냉전의 약화는 필연적으로 주한미군의 위상이나, 주둔명분 등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게다가 1980년대 내내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의 주도에 의해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체제를 강화해온 미국으로선 소련의 평화공세에 대해 삼각군사동맹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있어 새로운 명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한편으로 당시 국내정세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 군사정권의 상대적 약화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의한 민간정치 세력의 집권 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또한 이듬해 있을 올림픽 경기의 공동 개최를 요구하는 이북의 공세가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KAL858기 사건은 이러한 국내외적인 상황에서 발생했다. 여기서 사건의 의혹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건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사건 발생 이후 전개된 상황으로도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이 얻은 이익은 소연방 붕괴 및 냉전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의 냉전지속, 이에 따른 한반도와 극동에서의 미국 군사지위의 공고화이고, 남한으로선 무엇보다도 군사정권의 연장과 단독 올림픽 개최를 통한 북의 고립화 및 소련, 중국과의 수교로 이어졌다.

이에 비해 이북은 공동 올림픽 개최의 무산과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됨으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고립화로 이어졌고, 1990년대엔 이북 건국 이후 최대의 시련기라는 고난의 행군을 맞아야 했다.

KAL858기 사건에 대한 미국의 동요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은 국무성에 의해 ‘연례 테러리즘 유형보고서’란 이름 하에 매년 테러지원국 명단과 사유를 갱신․발표해오는 것인데, 북은 1988년 이후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명단에 올라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일이 나타났다. 지난 1999년의 미국 국무성 동(同)보고서는 북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지속시키면서도 그 사유에서 KAL858기 사건을 삭제한 것이다. 그 대신 ‘무기 수출 의혹’이란 대목을 새롭게 추가하곤 그것을 이전까지 KAL858기 사건과 함께 사유의 하나로 내세운 ‘일본적군파 요원의 피신처 제공’이란 대목과 더불어 테러지원국 지정의 사유로 삼았다.

무기 수출이 테러지원국 지정 사유라니! 이것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KAL858기 사건이란 결정적 사유가 빠짐으로서 이북에 대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은 주변적인 것을 억지로 꿰맞춰 테러지원국이란 형식만 들씌운 꼴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KAL858기 사건은 2002년까지 4년간이나,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사유에서 삭제되어오다, 2003년에 다시 등장하는데 그 배경을 살펴보자.

위에서 보았듯이 KAL858기 사건이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 사유에서 빠진 때는 2000년에 발표한 ‘1999년 연례 테러리즘 유형보고서’에서부터이다 이는 두 가지 배경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1998년 이북의 광명성 위성 발사 후 이듬해 전 미국 국방장관이자, 당시 대북정책조정관이던 윌리엄 페리가 내놓은 페리보고서이다. 알다시피 페리보고서는 이후 클린턴 행정부가 끝나기까지 대북정책의 지침으로 작용했는데 2000년에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이나, 북의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과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방문으로 이어졌다.

둘째는 남한에서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해인 1998년 10월 당시 이종찬 안기부장이 이끄는 안기부가 스스로 과거 안기부가 관여한 사건 중에서 4대 의혹사건을 제기했는데 놀랍게도 그 중의 하나가 KAL858기 사건이었다.

위와 같은 배경 하에서 한동안 사유에서 제외되었던 KAL858기 사건이 2003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대북 강경노선에 의해 다시 부활했다. 그러다 2․13합의 이후인 지난 4월에 발표된 ‘2006년 연례 테러리즘 유형보고서’에선 KAL858기 사건이 사유에서 배제된 대신, 전체 평가에서 ‘1987년 KAL기 사건 이후 어떠한 테러행위도 지원하지 않았음’이라고 모호하게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의 이런 변화를 통해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은 남한 정부의 의지나, 북미간의 관계변화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판단해 왔다. 그러므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현재 활동에다, 연내에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목표로 한 북미간의 현 상황에 큰 기대를 갖고 있다.

여기에다 가족회나, 대책위의 분발이 더해진다면 진상규명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신한다.

자기모순에 빠진 국정원 과거사위의 중간발표

지난해 8월 1일 국정원 과거사위가 KAL858기 사건에 대한 중간발표를 한 바 있다.

그런데 발표의 내용은 가족회와 대책위에 있어 아무런 실속이 없는 것이었다. 아니, 국정원 과거사위에 참여한 일부 민간위원과 민간조사관에 대해 나름대로 가졌던 기대를 놓고 보자면 거저 참담한 결과였을 뿐이다.

그 이유는 제기된 의혹 중 핵심적 사안은 모조리 배제된 채 일부의 의혹에 대해 거저 두루 뭉실한 답변으로 일관한 데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간보고서의 전체적 인상은 미리 결론을 내어놓고 그것에 억지로 꿰맞춘 꼴이자, 조사결과라기 보다 하나의 견해 또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다.

예를 들어 국정원과거사위가 당시 의기양양하게 내세운 ‘KAL858기 추정 인공조형물 발견’에 대해 논의해 보자.

국정원과거사위는 ‘KAL858기 폭파사건 조사결과 중간보고서’란 제하의 총 94쪽에 걸친 보고서에서 10여 쪽에 걸쳐 잔해발견 내용을 할애했는데, 미얀마의 수도 양곤 동남방 약 300km 해상에 위치한 헤인즈복 군도(북위 14도24분, 동경 97도46분)의 타웅파라 섬 앞바다에서 KAL858기 동체임이 유력한 물체를 발견했다며, 매몰체의 크기, 모양, 재원을 KAL858기의 그것과 비교한 도표와 함께, 발견 경위 및 목격자 증언 등의 조사내용을 여타 의혹사항에 비해 상세히 보고했다.

결론적으로 바위로 밝혀져 한순간의 해프닝에 그쳤지만 필자는 발표당시에 이미 그 매몰체와 KAL858기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확신했다. 필자의 견해는 졸저 ‘배후’의 내용에서부터 지금까지, KAL858기의 소실점이 그보다 훨씬 서쪽인 뱅골만 한가운데임을 확신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정원과거사위의 그러한 주장엔 커다란 모순점이 놓여 있다. 국정원과거사위가 그 모순점을 인지했는지 아닌지는 필자로선 알 수 없지만 국정원과거사위는 그것에 대해 침묵했다.

그 모순점이란 1990년 3월 초 KAL858기 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진 김현희의 대법원확정판결을 불과 보름여 일 앞두고 인양.수거된 (올림픽 로고가 선명한) KAL기 동체와의 관계이다. 당시 그 동체는 국정원에 의해 KAL858기의 동체로 발표되어 방송과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문제는 이 동체잔해의 발견 위치인데 그것은 국정원과거사위를 자기모순에 빠뜨린다. 이유는 1990년 당시 동체의 발견지점이 미얀마 남방에 위치한 타보이 앞바다로 북위13도30분, 동경98도 인근인데 이는 지난해 국정원과거사위가 ‘KAL858기 잔해 추정, 인공조형물 발견’이라 발표한 내용의 위치와는 무려 100여km 이상이나 떨어진 곳이란 사실이다.

더하여 2003년 KBS가 현지취재를 통해 확인한 바, 1990년 동체 발견 당시 수거된 량은 항공기의 전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내로 이송된 서울올림픽 로고가 선명한 동체 외에 다량의 나머지 잔해가 태국 현지의 고물상을 통해 처분되었다는 것이다. (이 동체는 국과수 감정결과 어떠한 폭파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마모’와 ‘압축’으로 변형된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동체가 폐기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상의 증거물 영구보존이란 의무를 방기한 것이다.)

앞서 필자가 언급했듯이 비록 해프닝에 그쳤지만 지난해 국정원과거사위가 발표한 해인즈복 군도 해역의 KAL858기 잔해 추정 인공조형물의 크기 또한 거의 KAL858기 규모에 비교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중대한 의문을 느낀다.

그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 KAL858기 이외 어떠한 KAL기도 안다만 해상에 추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국정원과거사위가 해인즈복 군도 해역의 잔해를 KAL858기의 동체로 인식했다는 것은 한편으로 1990년 타보이 앞바다에서 인양된 동체가 사실 누군가가 갖다놓은 가짜라고 판단했음을 의미하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서울올림픽 로고가 새겨진 KAL기 동체를 그곳에 뿌려놓았겠는가? 국정원과거사위는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혔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현재까진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KAL858기 사건의 본질은 기존의 안기부 수사발표와 일치한다’고 발표한 국정원과거사위의 그러한 인식이야말로 KAL858기 사건이 중대한 의혹사건임을 스스로 논증해 주는 셈이다.

국정원과거사위는 지난해 8월 중간발표 당시 연말까지 최종발표를 할 것이라 알린 바 있다. 그러나 무려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무런 내용의 조사발표도 없다. 심지어 국정원과거사위가 존속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국정원과거사위가 공식해체된 것도 아니고, 또 동同위원회 위원장직에서 공식 사퇴했다는 소식도 없는 가운데 지난달 초 오충일 국정원과거사위원장이 돌연 통합민주신당의 대표에 취임했다. 어떤 행보라도 그분의 자유에 속하긴 하지만 대책위의 입장에서 볼 때 기존의 직무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비춰져 심히 유감을 금할 수 없다.

사전 각본에 따른 안기부의 수사발표 내용

KAL858기 사건에 대한 안기부 수사발표의 내용은 대부분 실체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전의 각본에 의한 것임이 정황상 드러났다.

수사발표 내용을 들여다보자. 지금까지 수사발표 내용을 통해 확인되는 진실은 고작 다음과 같은 것일 뿐이다.

첫째는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858기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을 이륙하여 방콕으로 향하던 중 사라졌다는 것이며,

둘째는 김현희와 김승일로 알려진 두 사람의 존재와, 두 사람이 위조여권을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비엔나와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를 거쳐 이라크의 바그다드 공항에서 KAL858기에 탑승한 뒤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 내렸다는 것, 그리고 다시 바레인 마나마로 향했다는 것과, 이틀 뒤 그곳의 공항에서 한 사람은 체포되고 한 사람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떤 것도 검증된 바가 없다.

지난해 국정원과거사위가 내놓은 유일한 성과라 할 수 있는 것이 이른바 ‘무지개 공작’의 확인이었다. 국정원과거사위는 무지개 공작에 대해 단지 기 발생한 KAL858기 사건을 대통령 선거 등의 정치공작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무지개공작이야말로 국정원의 KAL858기 사건 사전 각본의 증거라 보아진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지개 공작은 사건발생 불과 사흘 후인 12월 2일부터 시작되었는데, 12월 2일은 당시 하치야 마유미로만 알려진 김현희가 바레인의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놓여 있다고 알려져 있을 때이다. 그런데 그날부터 동아, 조선, 중앙, 경향 등의 일간지에 사건의 구체적 정황이 보도되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다음 달인 1988년 1월 15일의 수사발표 내용의 거의 전부가 이때의 보도 내용에서 고스란히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단지 하치야 마유미와 하치야 신이치란 이름이 김현희와 김승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욱 놀라게 하는 내용은 김현희, 김승일이 KAL858기 폭파에 사용했다는 콤포지션4에 대해서, 또 타이머에 의한 폭발물 작동 시간을 (6시간 전 또는 9시간 전이라며) 구체적으로 보도했는데 이 사실은 수사발표 내용(9시간 전 타이머 작동시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폭발물의 타이머 작동시간에서 9시간 전은 출발지인 바그다드를 기준한 것이고, 6시간 전은 중간기착지인 아부다비를 기준한 것임)

그 외에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된 후 사건을 진술하면서 알려질 수밖에 없는 내용조차 이미 언론의 보도내용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최근에 와서 국정원조차 위의 폭발물 콤포지션4에 대해 임의로 추정하여 발표한 것이라 실토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당시 언론은 어떻게 한 달 보름 뒤의 수사발표 내용과 일치하는 폭발물 종류를 보도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위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의 요즘 반응은 한결같이 ‘국정원에 물어보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무지개공작’에 대한 의문이 높아진다.

필자의 판단으론 당시 언론보도의 내용이 바로 무지개공작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해 보인다. 즉 무지개공작의 범위는 국정원과거사위의 인식범위를 넘어서 사건 수사내용에까지 미친 것이 분명하며, 이 사실은 나아가 KAL858기 사건이 사전에 기획된 조작사건이란 결론으로 이어진다.

사안이 이러하므로 국정원과거사위는 그동안 입수한 무지개공작에 관한 정보의 전부를 즉각 공개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사법부의 전향적 시각

필자는 지난 8월 1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국정원 전현직 수사관이 필자에게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1심)에서 승소한 바 있다. 이는 무려 4년 만의 일로서 지난 2003년 필자는 졸저 소설 ‘배후’(창해, 2003간)로 인해 국정원 전현직 수사관 6인에 의해 민형사상 피소되었다. 소설 ‘배후’의 내용이 KAL858기 사건이 당시 안기부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시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판결문의 내용엔 ‘KAL858기 사건은 반드시 진상이 규명되어져야 할 사건으로…’라는 법원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이미 3년 전 일본의 저널리스트 노다 미네오(野田峯雄)의 ‘파괴공작’(창해, 2004간)에 대한 법원의 시각과 동일한 것이다. ‘파괴공작’은 KAL858기 사건 수사발표 내용을 현장취재를 통해 검증한 취재기인데 당시 국정원 수사관이 제기한 판매금지가처분 소송에 대한 결정문에서였다.

필자의 경우, 얼마 전 필자에 대한 1심판결에 대해 원고 측이 항소를 포기함으로서 1심 판결이 확정되었다. 한편으로 필자에 대한 형사고소 건은 필자로 하여금 무려 4년 째 형사소송법상 피고소인 신분으로 방기되어 있는 상태다. 검찰은 필자에 대해 기소는 고사하고 단 한 번의 사실관계 조사 이후 어떠한 수사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원고 측인 국정원 전현직 수사관의 항소 포기와 검찰의 이러한 태도에서 KAL858기 사건에 대한 의혹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동시에 진상규명의 법적 잣대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필자에 대한 판결․선고에 이어 지난 9월 4일엔 서울고등법원이 가족회가 검찰을 상대로 제기되어 5년간이나 진행되어온 KAL858기 사건 수사기록 공개 요구에 대해 ‘일부 신상관련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를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은 대법원에서 환송된 것으로 판결내용엔 대법원의 의사가 관철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확정된 것이라 볼 수 있는데 가족회와 대책위는 곧 기록을 접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자기고백 없는 정형근 의원의 진정성

최근에 한나라당 소속의 정형근 의원이 한나라당으로선 파격적인 신 대북정책을 입안하여 당론으로 채택한 것에 뒤이어, 그로 인해 정형근 의원이 반북․수구단체로부터 달걀 투척을 당했다는 언론보도를 접했다.

사실 정형근 의원의 이러한 변신은 두어 해 전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 정보통인 그가 거스를 수 없는 정세변화 때문인지 어떤지 필자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의 변신이 진정성을 보이기엔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알다시피 정형근 의원은 과거 안기부 재직 당시 KAL858기 사건의 수사책임선상에 있었으며 또 숱한 고문 의혹을 받아온 인물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KAL858기 사건의 수사에 대해 진솔한 자기고백과 자신에게 제기된 여타 고문의혹에 대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필자는 2003년 7월 정형근 의원에게 KAL858기 사건에 대한 내용의 공개질의서를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여태까지 그는 묵묵부답일 뿐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그가 어떤 변신이나 어떤 행보를 보인다 할지라도 결코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순 없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이제 두 달 후엔 KAL858기 사건 20주기를 맞게 된다. 두 번이나 강산이 변하는 동안 희생자가족회는 진상규명을 향한 외로운 싸움을 이어왔다. 또 다른 한쪽 희생자인 이북 또한 그동안 온갖 국제적 제재와 고립 하에서 단독으로 미국에 맞서 지금에 이르렀다. KAL858기 사건을 놓고 볼 때 가족회와 이북은 동병상련을 겪어온 셈이다.

올해는 20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선거가 놓여 있는 해이다. 한편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세는 그때와 달리 급변해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며칠 앞으로 다가와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올해가 가기 전에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길 기대해 본다. 그로 인해 희생자 가족들의 맺힌 한이 풀리고, 이북 또한 테러지원국이란 굴레에서 벗어나 한반도에 평화의 새 기운이 일어나길 필자는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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