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고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여사가 삼청동 극동문제연구소에서 '40년만의 고향 방문'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저의 이번 고향방문은 윤이상 선생의 고향방문이다. 저는 선생의 영령을 모시고 4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1일 오후 2시 서울 삼청동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층 국제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낸 故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 여사(80)의 음성은 떨렸다.

이 여사의 방문 목적은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박재규) 주최 '윤이상 탄생 90주년 페스티벌' 참석이다. 윤이상 선생이 '베를린간첩단사건(1967)'으로 옥고를 치른 뒤 40년만이며, 지난해 진실화해위(위원장 송기인)가 이 사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간첩단으로 확대포장한 것이라며 '국가의 포괄적 사과'를 권고하고, 이에 따라 올해 5월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공식 사과'와 함께 고국 방문을 초청한데 따른 것이다.

'이제는 조국이 선생에 못해준 일 갚을 때'

▲ 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어 회견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 여사는 "윤이상 선생의 고향방문인 만큼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선생의 이야기를 조금 할 생각"이라며, "윤이상 선생은 과거 정부에서 온갖 굴욕을 다 겪었지만 실제는 민족의 아들로서 부끄럼없이 살아 세계 방방곡곡에 민족의 이름을 선양한, 조국의 아들로서 자기 임무를 다하다 살아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세계적인 예술가들에게 있어, 조국은 그의 예술을 가꾸고 꽃을 피웠다. 그의 예술의 영광은 조국의 기상이고 자랑이고 긍지이다. 독일의 베토벤이 그렇고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소련의 차이코프스키가 그렇다. 그러나, 조국은 선생의 앞길만 가로 막았다"고 과거 군사독재의 소행을 비판하는 한편, 현 정부의 명예회복 노력에는 감사를 표시했다.

나아가 "정부는 선생의 방대한 예술작품을 갈고 닦아서 세계 여러나라에 전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과거 선생에게 못해준 일을 갚는 것"이라고 촉구했다. 또 평양 윤이상 음악축제와 같은 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에서도 이같은 뜻을 전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유골 이장'에 대해서는 "선생이 고향땅에 묻히기를 무척 희망했다"고 전제하면서도 타국에 묻히게 된 상황이나 윤 선생의 위상 등을 생각할 때 "단순하게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으며, 이 여사 자신의 정착에 대해서도 "독일에 집이 있고 평양에도 집이 있다. 외국에도 오래 살면 정이 들어 살게 된다. (그런데) 40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너무 낯설다"는 말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북 최고책임자, 충분히 보고 마음을 풀고 오라 했다"

▲ 회견 직후 기념사진. 왼쪽부터 정원, 박재규, 이수자, 송기인. [사진-통일뉴스 이광길 기자]
이번 고향방문에 대한 북측 분위기에 대해서는 "대단히 환영하고 있다"고 전했다.

"저는 항상 윤이상 관현악단이 서울에 와서 공연해주길 원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윤이상 선생의 이름을 가진 관현악단이 남에서 정치적 명예회복이 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남에 보낼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그래서 저는 주저했다. 그런데, 이번 통일부 장관의 초청 받고 서울에 돌아가야 겠다 말하니 모두 기뻐했다."

특히 "최고책임자(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도 '오래도록 고향 방문 못했는데 충분히 보고 마음을 풀고 돌아오라' 했다"면서 "(북측 관계자들이) 적으나마 여러가지 선물도 보냈다"고 전하기도 했다.

'윤이상 선생이 생전에 '나의 땅 나의 민족'을 김일성 주석에게 헌정했다'는 질문에 대해서는 "군사독재에서 민주인사들이 생사의 경계선을 오가던 험악한 때였다. 작품을 썼을 때가 그 무렵이었다. (저항)시인들의 시를 전부 묶어서 하나의 장시로 묶어 '나의 땅 나의 민족'을 썼다. 기자 선생에게 묻고 싶다. 그걸 서울에서 공연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없죠. 그래서 평양에서 연주했다. 그때 주석께서 살아있어서 연주회에 나오셨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헌정 여부'와 관련해서는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답변드릴 수는 없고 확실하게 아는 것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와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윤이상평화재단 관계자는 "선생이 곡 해설을 직접 만들어놓으신 것이 있으니 가장 정확한 것은 그것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회견은 40분간 계속됐다. 박재규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과 정원 감사, 송기인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배석했다. 많은 취재진이 회견장에 몰려 '윤이상의 영령과 함께 온' 이수자 여사의 40년만의 고국방문을 카메라에 담았다.

10일 입국한 이 여사는 '윤이상 탄생 90주년 페스티벌' 참가 외에 윤이상 선생의 고향 통영을 방문, 남편의 선산묘에 참배할 예정이다. 고국 일정을 끝내면 10월 예정된 윤이상음악축제 참석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다.

이수자 여사 기자회견(요지)

<모두발언>

저의 이번 고향방문은 윤이상 선생의 고향방문이다. 저는 선생의 영령을 모시고 4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윤이상 선생의 고향방문인 만큼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선생의 이야기를 조금 할 생각이다.

윤이상 선생은 과거 정부에서 온갖 굴욕을 다 겪었지만 실제는 민족의 아들로서 부끄럼없이 살아온 세계 방방곡곡에 민족의 이름을 선양한, 조국의 아들로서 자기 임무를 다하다 살아간 사람이다. 선생은 생전에 현재 음악계에서 세계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베를린필하모니 지배인 자리에 있던 이의 찬사이고 평가이다.

세계적인 예술가들에게 있어 조국은 그의 예술을 가꾸고 꽃을 피웠다. 그의 예술의 영광은 조국의 기상이고 자랑이고 긍지이다. 독일의 베토벤이 그렇고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소련의 차이코프스키가 그렇다. 그러나, 조국은 선생의 앞길만 가로 막았다.

윤이상 선생의 작품은 고향에 있을 때 쓴 작품하고 유럽에 나가 쓴 것을 합해 150곡에 달한다. 그의 작품은 동양의 정신철학과 기상, 우리나라의 생활문화에 기반을 둔 고도의 예술작품이다.

정부는 선생의 방대한 예술작품을 갈고 닦아서 세계 여러나라에 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과거 선생에게 못해준 일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을 진행하기 위해 오랫동안 진행하고 노력해온 여러 선생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현 정부의 선생에 대한 명예회복 노력에도 감사드린다.

저는 오늘 40년 동안 품고 있던 한을 간단하게 말씀드렸다.


<질의응답>

- 질문 : 한국에 정착 의향?

= 이수자 : 외국에 산지 50년이 된다. 독일에 집이 있고 평양에도 집이 있다. 외국에도 오래 살면 정이 들어 살게 된다. (그런데) 40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너무 낯설다. 현대화된 도시도 낯설고 마음이 어떻게 정주될 수 있는지 앞으로 왕래하면서 제 마음을 추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확답을 못드려) 미안하다.

- 방한기간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 행사 끝나면 어디로?

= 남편의 고향인 통영을 한번 방문해야 겠다. 남편의 선산묘를 찾아뵙고 조상님께 절을 올려야 된다. 그리고 이번 고국방문을 위해 노력해주신 여러 선생님들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 드리는 일 남았다. 예전에는 여행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제일 남단인 제주도를 한번 가보고 돌아올 생각이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일단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다. 해마다 평양에서는 10월달에 윤이상 음악축제가 있다.

- 이번 방문 두고 고민 없었나?

= 윤이상 선생이 살아있어서 같이 오셨으면 얼마나.. 고향에 간다 생각하고 비행기를 타니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기뻐서라기보다 남편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향이라. 물가에 가서 고기 낚는데 옆에 앉아 있었을 것이고 산에 올라가 조국의 산을 마음에 새겼을 것이고 그리움에서 행동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향 방문하게 된데 대해서는 꿈같았다.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먼 꿈의 세상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초청에 대해 감사한다. 들어오면서 정말로 남편 생각하고 그저 가슴이 아팠다. 여러분 모시고 간담회 하는 것도 저 때문이 아니라 남편 때문에 하는 것이다. 마음이 무겁다.

- 서울에서 윤이상 음악회 하실 계획은 있나?

= 미술가는 자기 개인이 쓰는 것이지만 음악은 많은 단체를 동원하기 때문에. 윤이상 선생을 기린다면 국가에서 뒷받침해줘야 한다. 그것이 돌아가신 예술가에 대한 국가의 당연한 예우라고 생각한다.

- 윤 선생 뼈라도 고향땅에 묻어드릴 계획?

= 고향땅에 묻히기를 무척 희망했다. 선생이 돌아오고 싶다해서 되는게 아니었으니. 윤이상 선생은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실 때나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업적이 있고 예술가로서 방대한 재산을 우리 민족에게 남겨놓고 가셨다. 그것들 생각하면 (이장문제를) 단순하게 할 수 없는 일이다.

- 대통령 면담 예정인데, 가서 하고픈 말이나 듣고 싶은 말은? 고국 방문시 평양 분위기?

= 만약에 가능하다면 윤이상 선생이 세계 정상에 오를 때까지 홀홀단신 국가에서는 아무 뒷받침도 해준 일 없고 그의 앞길을 막고 나섰다. 늦기 전에 예술가로서 윤이상 선생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일을, 민족을 위해서 제가 부탁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북에 윤이상 관현악단이 창립 23년째다. 그 음악단이 해마다 음악축제를 했고 윤이상 살아있을 때부터 지도해 어려운 기교 충분히 연마해서 정신을 파악하고 정진에 오랜 세월이 걸렸다. 저는 항상 윤이상 관현악단이 서울에 와서 공연해주길 원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윤이상 선생의 이름을 가진 관현악단이 남에서 정치적 명예회복이 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남에 보낼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그래서 저는 주저했다.

그런데, 이번 통일부 장관의 초청 받고 서울에 돌아가야 겠다 말하니 모두 기뻐했다. 최고책임자께서도 '오래도록 고향 방문 못했는데 충분히 보고 마음을 풀고 돌아오라' 했다. 적으나마 여러가지 선물도 보냈다. 대단히 환영하고 있다. 제가 고향방문하는데 대해서.

- 최고책임자는? 이 여사의 윤이상 관현악단 직함은?

= 최고책임자는 국방위원장이다.

옛날에 고문이라는 직함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저는 남북문제가 어려운 상태에 있는데 제가 공공연하게 직함 맡으면 상당히 힘들것 같아 안맡았다. 공식적으로는 안맡고 있으나 윤이상관현악단 일에 힘을 쏟고 있다.

- '정치적 명예회복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음악적으로는 아쉽다' 언급, 이번 페스티벌에서 바라는 바는?

=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답변했다. 작곡가는 (바라는바는) 자기 작품을 연주가들이 연주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대량적으로는 국가시책의 뒷받침 없이는 잘되지 않으면 어렵다. 선생이 남긴 예술을 가꾸고 꽃을 피우고, 우리나라에나 국내외에 알려서 민족의 정기를 꽃을 피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밖에 말씀 못드리겠다.

- 11.3 봉은사에서 선생 추모제 있다. 참석 여부?

= 대단히 참석하고 싶은데 평양에서 윤이상음악축제 맞춰서 떠나야한다. 연주자도 절친한 친구이고 '견우 직녀'의 뜻을 담은 협주곡이다. 참석 못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 선생 작품 중 김 주석에게 헌정된 곡이 있나? '나의 땅 나의 민족'?

= '나의 땅 나의 민족'은 군사독재에서 민주인사들의 생사의 경계선을 오가던 험악한 때였다. 작품을 썼을 때가 그 무렵이었다. 시인들의 시를 전부 묶어서 하나의 장시로 묶어 '나의 땅 나의 민족'을 썼다. 기자 선생에게 묻고 싶다. 그걸 서울에서 공연할 수 있었겠는가. 어림없죠. 그래서 평양에서 연주했다. 그때 주석께서 살아있어서 연주회에 나오셨다. 그렇게 답변드린다.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답변드릴 수는 없고 확실하게 아는 것도 없다. (재단관계자) 선생이 곡 해설을 직접 만들어놓으신 것이 있으니 가장 정확한 것은 그것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

<정리-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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