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지(도쿄조선 제3초급학교 18기생)
 

<조선학교> 연재를 시작하며

2005년 <에다가와 조선학교 재판>으로 한국사회에도 일본 내 조선학교가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최근의 다큐멘타리 영화 <우리학교>는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며 한국사회에 참신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으며, 지난 5월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이 결성돼 대중적 모금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사회가 조선학교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 잊혀진 60년의 역사, 700만 재외동포의 삶과 역사가 있다. 그 가운데 우뚝 솟은 탑이 있다면 그것은 조선학교이다. 통일을 비롯, 한국사회가 큰 그림을 그리며 바른 사회를 지향해 나간다면 조선학교는 반드시 우리가 이해하고 껴안고 가야 할 곳이다.

조선학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우리의 인식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3부에 걸쳐 <조선학교>를 기획 연재한다. 1부 <한국사회와 조선학교>, 2부 <조선학교가 걸어온 길>, 3부 <일본 안에서의 조선학교>를 8월 말까지 총 10여회에 걸쳐 <통일뉴스>와 <민중의 소리>에 공동으로 연재하고 또한 조선학교를 다닌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함께 전달하고자 한다. 조선학교에 초점을 맞춘 한국사회내의 첫 기획일 것이다.

<내가 다닌 우리학교>

<내가 다닌 우리학교>란 제목으로, 1940년대부터, 50,60,70,80,90년대에 초중급학교를 다닌 6명과, 현재 다니고 있는 학생의 글을 차례로 매주 월요일에 연재한다. 구체적인 한 개인을 통해 당시 조선학교의 생생한 모습과 조선학교의 역사적 흐름 등이 자연스레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재의도와는 벗어나는 글이라 해도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포함, 원문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게재할 것이다.

3회째인 60년대의 글은 예정된 필자의 사정 등에 의해 부득이 아래의 번역글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아래 글은 최근, 2007년 4월에 간행된 <우리들의 도쿄조선제3초급학교 이야기>중에 실린 글로, 60년대 학교를 다닌 윤수지 씨와의 대담을 정리한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편저자이며 기획자인 김일우씨의 양해를 얻어 게재함을 알려 드립니다. 
/에다가와조선학교지원모금

1960년에 두 오빠와 함께 편입했습니다. 2학년 때입니다.
집근처의 일본소학교에 다녔을 때, 스즈키라는 동급생이 “히라오카平岡는 조선인이지”라는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선인이 뭔지도 몰랐었습니다. 근처에 사는 도모코 선생님 집에도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 선생님은 “조선인은 金이나 朴과 같은 성을 쓰니까 히라오카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린애라서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틀림없이 ‘아보지’(아버지)는 尹이라고 하고 또 전화할 때는 일본어가 아닌 말로도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 해에 아버지는 두 오빠만 조선학교에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사는 곳에서 제3초급학교까지 가려면 전차 역에서 내려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지부위원장을 했지만 조선학교에 보내는 것을 망설였던 듯합니다. 하지만 큰오빠가 6학년, 둘째 오빠도 4학년이기에 조선학교에 보낼 결심을 한 듯합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전해에(1959년) 귀국사업이 시작되어 민족교육에 대한 관심이 급속이 높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 조선학교에서 무용부의 위치는 중요하다. 사진은 삿포로조선고급학교 학생들의 공연장면. (사진제공 - 우리학교)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조선학교를 다니는 데는 반대했습니다. 몸도 작고 튼튼하지 못한 나를 먼 학교로 보내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결국 오빠들하고 같이 다니게 되었지만 전차를 타면 속도 메스꺼워지고 늘 큰오빠 등에 업혀 학교를 다녔습니다. 내 책가방은 앞으로 메고, 큰 오빠 가방과 자기 가방은 등에 메고 걸어가는 둘째 오빠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 꼴을 보기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는 집근처 학교에 다시 다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모두가 다른’ 일본학교에 갈 마음은 나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졸업한 뒤에는 우리 동네에서 학교까지 가는 학생들로 조직된 ‘통학반’의 6학년 오빠가 업어 주었습니다. 걸어서 학교에 간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통학반은 15,6명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였으니 전차나 버스로 가는 소풍에 대한 기억은 없습니다. 단지 어머니가 싸주시는 벤또를 넣고 다니던 가방이 녹색이었다는 것은 기억납니다.

강추록 선생님과의 만남

2학년과 3학년 담임선생님은 강추록 선생이었습니다. 4,5,6학년은 홍순봉 선생입니다. 키가 크고 코등이 뚜렷하게 서있어 어린 마음에 외국인일거라 생각했습니다. 소학교 3학년까지는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해 잘 울었던 것 같습니다.

강추록 선생님 집에 자러 간 적도 있습니다. 혼자 아파트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빨리 결혼 시켜야 하는데”하던 아버지의 말이 기억납니다. 방과 후에도 편입생인 저를 가르쳐주시던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날 저녁도 차려주시고 또 같은 이불에서 재워주셨습니다. 그 이불안의 따스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점심은 벤또나 빵을 주문했습니다. 달걀 부침 등을 넣어 어머니가 정성껏 싸 주었지만 왠지 다시마 두 조각만 달랑 기름에 뛰긴 옆 동무의 반찬이 맛있어 보였습니다. 우메보시 하나만 들어 있는 벤또를 먹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에게 자신의 반찬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朝高(조선 고급학교)를 졸업하고는 선생님이 보고 싶어, 선생님이 돈벌이 하는 야끼니쿠집에 찾아 간 적도 있습니다.

활발했던 합주부와 무용부

4학년 때까지는 학교는 낡은 목조건물이었습니다. 가운데 정원이 있어, 거기에서 열심히 청소하는 어머니들과 오빠들을 보았습니다. 오빠와 함께 집에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었겠죠. 쌀겨가루를 넣은 주머니로 복도와 교실을 왔다 갔다 하며 몇 십번도 닦고 또 닦았으며, 신문지를 둥그렇게 말아 닦은 유리창은 정말 반짝반짝 거렸습니다.

▲ 대부분의 조선학교는 60년대에 종전의 낡은 목조건물에서 콘크리트식 건물로 바뀐다. 교육원조금과 귀국운동으로 민족교육은 활성화되어 학생수가 급증하여 교사건설운동이 일어난다. 58년부터 68년 사이 151개교, 매월 평균1.3개교가 신증축되었다. 사진은 이바라기 조선초중고급학교 건물. (사진제공 - 우리학교)
새로 된 콘크리트 건물에서 기억나는 일은 복도에 물을 뿌리고는 스케이트놀이를 했던 일과
그 당시부터 합주부와 무용부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일요일에 연습하러 갔던 일입니다. 저는 합주부였습니다. 피리나 하모니카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코디언이나 거문고, 북과 소고 등도 있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 성적이 좋아서, 소피아 합창단이 조선대학교에 왔을 때, 그곳에 가서 합주도 했습니다.

무용연습은 이미순 동무 집에서 했습니다.
“밝아오는 새 아침에... 붉게 타는 넥타이를 훨훨 날리며...”
이런 노래에 맞춰 저는 춤을 췄습니다. 나중에 홍순봉 선생님과 결혼하신 분이 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전국대회에서 망사를 들고 ‘나비의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학예회에서의 연극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그 때 저는 그 밖의 마을사람들 역을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무대에서 입을 치마저고리를 열심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매스게임의 ‘배경판’을 만들던 고생

공화국 대표단에게 꽃다발을 전해 주기 위해 소년단 넥타이를 매고 하네다 공항에 갔습니다.
<원주 - 조선총련의 주요일지에 의하면, 1963년 2월에 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세계스피드스케이트 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선수단이 일본에 입국, 다음 해인 1964년 10월에는 올림픽 도쿄대회에 참가할 조국선수단이 방일했다. 윤씨가 꽃다발을 건네주었다는 것은 이 대표단이라 여겨진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집단체조, 마스게임을 위해 배경판을 만들던 일입니다. 밥으로 만든 풀을 신문지 위에 얹어놓고 손으로 문질러 바르는 일입니다. 얼마 안 있어 풀을 사용했지만 지독한 밥 냄새를 참아가며 몇십장의 신문지를 붙였습니다. 하나의 두께가 20센치 정도인데 몸이 작아서인지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연습이 시작되어 결석하거나 결원이 생기면 이를 메우기 위해 애쓰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 마스게임은 제3초급을 졸업하고 주우죠에 있는 중학교 1학년에 들어가서 했습니다. 저는 편입생의 도우미였기에 경기장 스탠드에서 이를 지켜보았는데 놀랬습니다. 감탄의 연속이었습니다. 배경판을 힘들게 만들던 보람을 만끽했습니다.
<원주 - 앞의 주요일지에 의하면 조선총련 결성 10주년을 축하하는 매스게임 <조국에 바치는 노래>는 윤씨가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65년 5월에 거행되었다.>

조고3년 당시, 조고위원회에서 활약했던 친구들은 제3초급학교 동무들이었습니다. 축구부에 신진언, 취주부에 정일영, 그리고 무용부의 저, 이렇게 핵심 클럽의 주장이 모두 제3학교 출신들이 차지해 조고의 ‘황금시대’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고를 졸업한 후, 조고의 무용부 지도원과 사이타마의 청년동맹을 거쳐, 급비생(우리의 장학생)으로 조선대학교 사범학부를 나오게 되어 꿈에 그리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모교인 도쿄 제3초급학교에서 14년간 근무한 것은 저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결혼해서는 2년 정도 가나가와현의 나마무기에서 2시간 걸려 통근했습니다. 전국대회를 앞두고는 독무, 쌍무, 중용, 그리고 군무의 춤사위를 고안하느라 임신의 무거운 몸으로 학교 소파에서 자던 일은 지금은 모두 좋은 추억입니다.

▲ 삿포로조선고급학교 무용소조실에 걸려있는 작품들. (사진제공 - 우리학교)
교원이 된 덕분에 무용과 미술부문의 교원대표단으로 공화국을 방문하여 평양에서 제3초급 당시 사이좋게 지내던 친구와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집까지 데리고 가서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편입해온 나를 이것저것 보살펴 주었던 윤정숙 동무입니다. 학교 뒤 집합주택에 살고 있던 그녀의 집에 자주 놀러 갔었습니다. 어머니가 여성동맹의 일을 하고 계셔서 집에 돌아가면 늘 그녀는 어린 두 동생을 보육원에서 데려 오고 또 저녁 준비도 했었습니다. 조대 1학년 때 귀국했는데 그 후 10년 동안 왠지 모르게 그녀를 만나는 꿈만 꾸었는데 아마 그 꿈이 이루어졌나 봅니다.

제3초급학교에서 ‘뼈를 묻고’ 싶었지만 요코하마 학교를 거쳐 쯔르미에 온지 18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히 가나가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교직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일본학교에서 제3초급으로 편입하여 강추록 선생님과의 소중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담 : 김일우('우리들의 도쿄조선제3초급학교 이야기' 편저자)  
* 번역 : 황의중(에다가와지원모금 공동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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