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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달라졌다”<참관기사3> 이계환 기자의 ‘겨레하나 평양-백두산 참관’
이계환 기자  |  khlee@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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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7.13  02: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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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이계환 기자가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주최 ‘평양-백두산 참관’(평양문화유적참관단, 6월28일-7월2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아울러 겨레하나는 주요 대북 협력사업 중에 하나인 김일성종합대학에 있는 항생제 공장도 현장방문하였다. 이 기자가 겨레하나와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느낀 소감을 참관기사 형식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특히 이번 백두산 참관은 3년만의 일로서, 북측 민화협 정덕기 부회장은 “(겨레하나의) 백두산 참관 등반은 처음이라서 특혜”라고 말했다. 백두산은 그간 보수공사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겨레하나 관계자는 “겨레하나가 지난 2005년 ‘아리랑’ 축전 첫길을 연 이래 이번 백두산 참관을 계기로 앞으로 남측 사람들에게도 백두산 참관의 첫 문을 열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 편집자 주

평양의 6월,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

   
  ▲ 평양시내 전경. 평양은 녹지 비율이 전체 면적의 30% 이상인 전원도시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 겨레하나]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라 했던가. 평양의 6월 말은 그야말로 ‘우거진 신록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은 때’였다. 꽃보다 아름다운 수풀이 있다는 걸 느꼈다. 비온 뒤 갠지라 평양의 하늘은 맑았고 초여름 기온은 무덥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평양행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여유롭고 넉넉했다.

이러한 느낌은 6월28일 남측 ‘겨레하나 평양-백두산 참관단’이 탄 고려항공 JS616 비행기가 도착지인 평양공항의 상공을 날 때 창 밖 풍경에서 덥썩 다가왔다. 기창(機窓) 밖으로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과 논밭은 온통 푸름에 싸여 있었다. 논이야 모내기를 금세 한지라 그럴 수 있지만 공항 근린의 야산은 풀들이 자란 녹색 바탕에다 키 작은 나무들이 셀 수 있을 정도로 틈틈이 자라 있었다. 최근에 식수(植樹)한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산이 푸르러졌다”고 말했다. 아니 그리 말하지 않더라도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북녘의 산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1990년대 중반 북측의 자연재해와 큰물 피해를 떠올리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신록의 계절 탓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이후 모든 참관 일정을 통해서도 느낀 것이지만, 북녘 산은 분명 몇 년 사이에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녹색지대로 바뀌고 있었다.

기자는 이번 방북이 2003년과 2005년에 이어 세 번째 평양행이었다.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가 풀려 동결된 자금이 북측에 들어와서 인지, 아니면 6월의 녹음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평양은 여유롭고 넉넉해 보였다. 한마디로 이전과는 확 다른 새로운 평양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참관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평양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몇 차례 안 되는 평양행이기에, 특히 북측 내부의 시스템과 그 변화를 전혀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변화 운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측에 몇 번 와보았거나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산에 나무가 생기고 푸름이 짙어지는 것 하나만으로도 ‘북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이번 참관단의 4박5일간 일정은 6월28일(목) 양각도호텔에 여장을 푼 후 오후부터 만경대고향집 방문과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예술공연 참관, 29일(금) 백두산 참관, 30일(토) 김일성종합대학 사적관 참관 및 항생제공장 현장방문, 동명왕릉 참관, 대동강 유람선 탑승 등이고, 7월1일(일) 묘향산 참관 그리고 2일에는 귀환을 하는 것이었다. 크게 보면 평양-백두산-묘향산으로 짜인 일정이라 볼 수 있겠다.

다소 피상적일지는 모르지만 기자가 느낀 달라진 평양, 변화하는 북한의 풍경을 몇 가지로 나눠보자.

평양시내부터가 달라졌다

   
  ▲ 양각도호텔에서 내려다 본 서평양 풍경. 쌍둥이 건물 고려호텔이 보이고, 도색한 건물들이 눈에 띤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먼저, 평양의 변화는 평양거리에서부터 다가왔다. 이는 평양의 관문인 평양공항에서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이동하는 차창을 통해 본 평양시내 풍경에서 확연히 느낄 정도였다. 평양시내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활기찼다. 비가 방금 그친 뒤라 쾌적한 날씨 탓도 있으리라. 특히 련못동 지나 금수산기념궁전 못미처 ‘99절 다리’가 끝나는 샛강에서는 얼핏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낚시꾼들이 보였다.

평양시내로 접어들면서 금수산기념궁전-김일성종합대학교-4.25문화회관-개선문-천리마동상-만수대동상-만수대의사당-인민대학습당-김일성광장을 거쳐 평양역을 지나 양각도호텔로 들어서면서 받은 6월 말 평양의 느낌은 ‘녹음이 우거진 계획도시’였다.

2000년 6월 당시 남측 김대중 대통령이 북측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측의 각 언론들은 평양을 ‘동방의 부다페스트’라 하며 극찬했었다. 평양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조형물과 건축물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그 숱한 아파트도 모양이 달랐다. “건축에서 반복은 죽음이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침에 따라 평양은 철저하게 계획도시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평양은 녹지 비율이 전체 면적의 30% 이상인 전원도시이기도 하다.

이처럼 평양공항에서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이동하는 중에 차창 밖에 비친 평양의 풍경은 풍부한 녹지대와 우거진 녹음, 적지 않은 인파, 자전거로 이동하는 사람들, 문을 연 상점들, 유난히 많이 보이는 매대들이었다. 특히 2-4년 전만 해도 매대는 고려호텔 부근에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길가 어디에나 있으며, 서로 경쟁하듯 한 곳에 세 개씩 모여 있기도 했다.

평양인구가 250만 명으로 추정된다. 천 만 명이 넘는 서울인구에 4분의 1 정도다. 당연히 서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인구밀도로 보아 적지 않은 평양시민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줄을 이었고, 달리는 버스 안은 사람들로 꽉 찼으며, 전철역 지하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래도 역시 평양시내의 압권은 당연히 평양역전이다. 평양역전은 항상 사람들로 차 있으며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주패인 듯한 놀이를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혁명의 수도’ 평양은 대형 건축물 도시이다. 평양의 여름은 녹음으로 우거졌다. 계획도시로서의 면모가 거대하게 꿈틀거렸다. 간혹 엷게 도색을 한 건물들도 보였다. 이들 평양거리의 풍경들은 분명 2년 전, 4년 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첫 순간이 중요하다던가. 이번 참관 첫날부터 평양이 매우 친근한 모습으로, 달라진 모습으로 참관단 일행에게 와락 안기듯 그렇게 다가왔다.

활기찬 평양시민들

   
  ▲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악기를 다루며 소조활동을 하는 북녘 학생들. 빨간 스카프를 두른 어린 학생들이 거리를 나서면 앙증스럽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또한, 평양시민들의 몸짓은 활기차고 자신있는 표정들이었다. 유행이나 변화는 여성들로부터 시작된다고 했던가. 특히 여성들의 옷 색깔이 바뀌었고 매무새가 다양해졌다.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른 채 무리지어 길을 걷다가 참관단이 탄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어린 학생들은 여전히 앙증맞았다. 평양시민들은 선도차 두 대와 참관단 버스 네 대가 줄지어 다니는 광경을, 길을 걷거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거나 혹은 자신의 일을 하다가 한 번 정도 고개를 돌리는 여유를 부렸다.

이번 참관중에 유난히 눈에 많이 띤 것은 연인들의 데이트 광경이다. 조금만 주의를 주면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들은 깨끗한 옷차림과 단정한 치장을 하고 둘이 붙을 듯 말 듯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1960, 70년대 남측의 ‘재건 데이트’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재건 데이트’란 쉽게 말해 그저 걷다가 헤어지는 데이트를 뜻한다. 그 시절 젊은 연인들은 커피값이나 문화공연 관람비가 없어 한없이 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즐겼다.

북녘 연인들은 특히 대동강의 샛강인 보통강가에 많이 있었다. 참관단을 태운 차량이 평양시내의 이면도로로 빠져 보통강가를 달릴 때면 재건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과 꼭 마주쳤다. 남측의 연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재건 데이트를 즐겼다면 북측 연인들은 보통강가를 거닐며 재건 데이트를 즐긴다고나 할까.

   
  ▲ 만경대학생소년궁전에서 예술공연을 관람한 후 바깥으로 나온 재일동포 민족학교 학생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참관 첫째 날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예술공연에서 만난 재일동포 민족학교 학생들도 평양의 거리를 한층 밝게 해 주었다. ‘조국’을 찾은 나이 어린 학생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예술공연을 관람하며 보다 나이 어린 ‘조국’의 학생소년들이 연기를 할 때마다 힘껏 박수를 쳤고 궁전 밖에 나와서는 ‘조국’의 맑은 하늘을 향해 마음껏 깔깔거렸다.

양각도호텔

평양의 변화는 숙소인 양각도호텔에서도 느껴졌다. 양각도호텔은 평양에 온 남측 참관단이 주로 머무르는 곳이기도 하다. 몇 차례 양각도호텔을 이용한 남측 참관단이 눈에 익은 홀을 ‘거침없이’ 휘저으며 다녀도 북측 안내원들은 때로는 웃음으로 때로는 무덤덤하게 맞이했다. 양각도호텔에는 중국인과 서양인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기자는 특별히 서양인을 눈여겨 봤다. 그즈음 IAEA(국제원자력기구) 대표단이 오지 않았나 하는 직업의식에서 그랬다.

당시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가 풀려 북측이 초청한 IAEA 실무대표단이 6월27일 평양에 도착해서 30일까지 머물면서 북측 인사들과 영변 핵시설 폐쇄 및 봉인 조치와 관련한 사전 협의를 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IAEA 실무대표단의 사진이라도 찍고 인터뷰라도 할 수 있다면 특종감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양인을 찾아서 그런지 유난히 서양인이 눈에 많이 띠었다.

깜깜한 밤. 양각도호텔 숙소 33층에서 바라본 평양시는 예전보다 불빛이 많아졌다. 아니 불빛이 많아졌다기보다는 없던 불빛이 생겼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르겠다. 2년 전 양각도호텔에서 내려다 본 평양시는 불빛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동강을 사이에 두고 서평양을 내려다보니 평양시내에 불빛이 반짝거리고, 그 불빛만으로도 고려호텔 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대동강변에는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분주하다기보다는 끊이지 않게 다니고 있었다.

평양시의 야경(夜景)으로 보아 ‘긴장된’ 전기사정도 어느 정도 펴진 듯했다. 전기사정이 좋아진 건 참관 나흘째인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참관 때도 들었다. 해설강사의 설명을 듣는 전람관 내 홀에 전등이 모두 켜져 있어 밝았다. 몇 차례 이곳에 온 남측 참관단의 허태곤 (주)두보식품 대표는 2003년 때에는 정전이 됐었고 2005년엔 전기가 흐렸다고 말했다.

북측 민화협 성원들

   
  ▲ 묘향산 향산호텔. 호텔 바로 앞에 냇물이 흐른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남측 참관단을 안내하는 북측 민화협 성원들로부터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이번 남측 참관단이 6.15민족통일대축전 직후 첫 방북이어서 그런지 북측 민화협 성원들이 다른 때보다도 많이 나왔고 또 행동거지도 바르고 절도가 있었다. 그들은 일사분란했고 거침없었다.

정덕기 민화협 부회장은 거의 모든 일정을 참관단과 함께 했다. 백두산도 함께 가고 묘향산도 함께 했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여유있는 웃음과 넉넉한 말투를 잃지 않았으며 특히 남측 참관단들의 안전과 편의에 신경을 썼다.

북측 민화협 성원들은 이동중인 버스 안이나 참관지에서나 남측 참관단과 대화를 나누고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버스 안에서는 참관단의 빈자리에 일부러 와서 앉으며 대화를 이끌었다. 참관단이 묻는 말에 막힘없이 대답을 했다.

역시 민화협 성원들의 주요 관심사는 6.15행사에 대한 남측의 평가와 북측 입장의 전달이었다. 그들은 6.15대축전을 ‘총화’한 것이 분명했으며 그 내용을 중심으로 통일의 전령사마냥 남측 참관단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어 했다.

기자의 경우 북측 민화협 성원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서도 그들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례도 있다. 묘향산 향산호텔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호텔 바로 앞 냇물이 흐르는 다리 위에서 사진도 찍고 주변 풍경도 감상할 때였다.

날씨도 좋은데 냇가로 내려가 물에 발이라도 담그라는 한 민화협 성원의 말에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이곳 묘향산에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냇가에 발을 담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민화협 성원의 지시와 안내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냇가에 내려가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힐 수가 있었다.

묘향산 가는 길 농촌의 풍경

   
  ▲ 묘향산 가는 길 농촌 풍경. 논이 있고 살림집이 있고 야산이 있다. [사진 제공 - 겨레하나]  
 
평양의 변화에 이어 북측의 변화, 보다 정확하게는 북녘의 농촌 풍경을 새삼 느끼게 해준 건 넷째 날 묘향산 가는 길이었다. 2년 전에도 똑같은 코스로 이동해 묘향산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묘향산 가는 길이 평양거리만큼 새롭게 다가왔다. 그때는 가을이어서 그런지 왠지 스산했는데 이번 묘향산행은 넉넉했다. 아침 8시20분 참관단은 묘향산을 향해 출발했는데, 일요일 아침 평양 거리는 좀 과장한다면 사람들로 부산했다. 특히 가족 단위로 어디론가 이동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평양시내를 거쳐 교외로 나가자 농촌 풍경이 들어왔다. 농촌 풍경은 시냇물이 흐르고, 논과 밭 등 들판이 널려 있고, 그 뒤로 간간이 살림집들이 자리잡고, 멀리 야산과 큰 산으로 이어졌다. 산은 푸르렀고 완전 벌거숭이산은 전혀 눈에 띠지 않았다. 누군가 몇 해 전에 보였던 황토 빛의 민둥산이 안 보인다고 말했다. 개울가에선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아낙네가 빨래를 하고 낚시꾼들로 붐볐다.

모낸 논은 푸르렀고 풀밭에선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간혹 일이 밀렸는지 일요일인데도 황소를 부리는 농민들이 보였다. 살림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워 올랐고 주요 도로엔 사람들이 부산히 이동하고 있었다. 최근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은 듯 낮은 산엔 키 작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였고 멀리 보이는 산들도 푸름에 덮여 있었다.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전쟁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북미간 핵문제 갈등으로 인해 전쟁일보 직전까지 갔었으니, 그 생각을 하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다.

특히 묘향산 가는 길에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무대인 청천강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버스는 청천강 줄기를 따라 묘향산으로 향했다. 강은 폭이 그리 넓지 않지만 비가 온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물이 비교적 많이 흐르고 있었다. 2년 전 가을엔 강 바닥을 드러냈었다. 청천강 다리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동했고 강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물속에 들어가 낚시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측으로 치면 견지낚시 같았다.

   
  ▲ 묘향산 풍경.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낚시꾼과 염소

   
  ▲ 이른 아침 대동강과 접한 양각도 산책길을 걷다가 만난 북측 낚시꾼이 잡은 물고기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여러 풍경이 와 닿았지만 특히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물만 있으면 아이들이 고기를 잡거나 낚시를 하는 광경이다. 특히 낚시꾼은 평양 대동강이나 보통강, 묘향산 가는 길 청천강이나 숱한 시냇가 어디에나 있었다. 사흘째인 백두산을 갔다 온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을 나서 양각도 주변을 돌아볼 요량으로 대동강과 접한 유보도(遊步道, 산책로)를 걷다보니 이른 아침부터 낚시를 하는 북측 인사를 만났다.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정중히 사양하면서 잡은 물고기를 보여주며 그것만 찍으란다.

기자는 옆 자리에 앉은 북측 민화협 로승일 안내원에게 낚시에 대해 물었다. 그는 나이가 30대 중후반인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하나를 두고 있었다. 이 민화협 안내원의 말이 북측에서는 나이 드신 분들이 직장을 은퇴하고는 낚시를 즐기는데 ‘낚시애호가협회’가 있어 이들 낚시 애호가들이 규칙을 정하고 대동강에서 시합을 한단다. 북측에서는 물이 있는 곳엔 꼭 낚시꾼들이 있기에 마치 남측에서 유행하듯 산이 있는 곳에 산행하는 것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또한 개울가에서 아이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게 많이 보이길래 뭘 하는 거냐고 묻자 그 안내원은 “반두질을 한다”고 표현했다. 반두질? 기자는 과문한 탓인지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기에 그때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이 개울가에서 무슨 그물질을 하기에 그저 반두질이 남측의 족대질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서울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니 ‘반두질’은 ‘반두로 물고기를 잡는 일’이고 ‘반두’는 ‘양쪽 끝에 가늘고 긴 막대로 손잡이를 만든 그물. 주로 얕은 개울에서 물고기를 몰아 잡는다’로 되어있다. 반두와 족대가 비슷하긴 비슷한 모양이다.

인상적인 풍경 다른 하나는 염소들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띤다는 것이다. 간혹 소들도 보였지만 염소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냇가 위 풀밭에선 한 무리의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 뜯는 모습이 자주 눈에 잡혔다. 이 역시 묻자 안내원이 말했다.

“‘고난의 행군’시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염소 키우는 걸 장려했다. 염소는 낟알을 먹는 게 아니라 풀만 먹는다. 그리고 고기와 젖을 낸다. 우리에게 아주 잘 맞는다. 그 이후 집집마다 염소 키우는 게 급증했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최근에는 토끼를 기르는 일도 장려한다”면서 “토끼고기는 영양가가 높고 고기 맛이 좋다. 얼마 전에는 토끼 기르는 집이 텔레비전에 소개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미래를 사랑하라”

   
  ▲ 평양-묘향산 가는 고속도로. 도로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기자 자신도 ‘평양이 바뀌고 있다’는 표현을 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명확히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평양 내부의 시스템과 그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확한 건 이번 평양행은 그 이전 두 차례의 평양행과는 분명 달랐으며 무엇보다도 평양을 여러 번 방문한 몇몇 남측 인사들도 이구동성으로 ‘평양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는 것이다.

그날 묘향산을 출발해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오면서 기자의 머릿속엔 하나의 구호성 문장이 맴돌았다. 그 구호는 다름 아닌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참관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향산호텔로 향하던 중 길옆에 서있는 팻말에 적혀 있었다. 자꾸 그 팻말이 어른거렸다. 그 팻말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미래를 사랑하라.”

이전과 달라진 평양, 변화하는 북녘. 그리고 분명 그것을 느끼는 남측 참관단들. 이 묘향산 구호 팻말은 북측만이 아니라 남북 우리 민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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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18:05
북의 농촌에서는 소로 밭은 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남쪽에서도 소를 이용한 밭갈이를 하긴 하지만, 극히 드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소로 밭갈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쪽의 대중들은 '못산다'. 이북의 기계화 수준이 매우 낮다라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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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21:04
잘살고 못살고의 평가 가준이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또한 '소'로 밭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기계화 수준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축력은 가장 훌륭한 재생에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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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25:16
농업기계화나 과학기술에 있어서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남쪽이야 기계부품이나 전자부품에 있어서 핵심기술부분은 모두 수입해서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총공이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죠?

반면에 이북은 자체의 기술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대륙간탄도미상을 발사합니다. 과학기수에 있어서 세계 최고수준입니다. 그런 과학시술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세계 최강이라느 미제를 군사력으로 억제할 수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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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28:04
트렉타가 없어서 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북은 59년에 자체의 기술로 3천대의 트렉터를 생산했고, 80년대 초에 이미 15만대의 트렉터를 보유했습니다. 남쪽과는 비교가 안되는 실정이죠. 80년대 초라면 남쪽은 경운기도 변변치 못했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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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33:24
후대에 대한 착취입니다. 또한 화석연료는 필연적으로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을 시킵니다.

이북에서 석유가 생산된다고는 하나 아직은 적은 양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제와 첨예한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자립경제, 자주권, 안보, 그리고 후대와 자연환경에 대한 입장 등을 포괄적으로 고려하여 축력을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아닌 말로, 모든 것을 기계화 했을 때, 에너지 공급이 끊긴다면 어찌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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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34:44
트렉터를 만들지 못해서도 아니고, 트렉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여러가지 상화을 고려하여 축력이용능력을 보존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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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39:07
산천이라는 것이 여름에 볼 때와 겨울에 볼 때가 다르겠죠? 이북은 식량자급을 위하여 많은 산지를 개간했습니다. 추수가 끝나고 새작물이 심어져 자라기 전까지 산지경지는 민둥산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특히 차를 타고 가면서 멀리 보이는 산지경작지는 민둥산으로 보일 수 있겠죠. 더군다나 민둥산에 대해서 세뇌된 사람이 본다면 그런 모습은 무말할 것도 없이 민둥산으로 보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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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42:56
훌륭한 순환연료입니다. 도시의 경우는 여건상 나무를 연료로 이용하기 어렵겠지만 시골에서야 얼마든지 나무를 연료로 이용할 수 있겠죠.

이북에서는 나무를 길러서 연료로 사용합니다. 이유는 소를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립경제와 안보의 일환으로 나무를 길러서 연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나무를 길러서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나무가 적당히 자라면 베에서 연료로 사용하고, 다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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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48:28
나무를 길러서 건축재로 사용하나 똑같은 것이죠. 그런데 남쪽 사람들은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면 못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화석연료는 언젠가는 고갈됩니다. 또한 환경파괴와 환경오염을 동반합니다. 과도한 화석연료 사용은 후대에 대한 약탈이 됩니다.

이북에서는 나무를 길러 연료로 사용합니다. 베어내고 다시 심고, 베어냈을 때 보면 민둥산으로 보일 테고, 다시 나무를 심으면 민둥산으로 보이지 않을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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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52:24
가난하게 사는 시골 사람들이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지만, 이북에서는 자립경제, 환경문제, 안보 등의 이유로 나무를 길러서 연료로 사용하는 겁니다. 못 살아서 나무를 연료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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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8:58:18
착취를 전제로 합니다. 제국주의 자본에 의한 착취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산업입니다. 자동차나 난방연료.......또한 정부의 세금정책과 맞물려 있는 것이죠. 지배계급에 의한 착취정책의 일환입니다.

이북의 민둥산이나 소로 밭을 이용하는 것은 생산수단이 전인민적 소유로 전환된, 즉 착취가 없는 사회에서 자립경제나 환경, 안보 등 이유로 시행되고 있는 에너지 정책에 의한 현상이지, 남쪽처럼 못살아서 나타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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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09:00:39
보안법을 폐지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이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차단하기 위해서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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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 2007-07-13 15:16:34
이북 주민들은 가지는 것이 모자라도 자기 힘으로 해결합니다. 이남 주민들은 미국의 노예이며 현재도 일본의 식민지 국민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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