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20주년을 맞은 지난 주간은 거리와 매스컴이 떠들썩했다. 신문과 TV는 연일 6월 항쟁 20주년 특집을 통해 6월 항쟁의 정신과 의미를 되새겼다. 좌담과 토론회에서는 6월 항쟁에 대해 ‘민주항쟁’, ‘시민항쟁’, ‘민중항쟁’이니 또는 ‘6월혁명’, ‘미완의 혁명’이니 그리고 ‘절반의 승리’니 하는 재평가가 줄이었다. 모두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사적 차원 말고 실제 기념행사와 국민적 참여 차원에 가면 다른 생각이 들 정도다. 9일과 10일에 걸쳐 갖가지 기념행사가 정부당국과 시민사회단체 주도로 각각 치러졌지만 정부당국행사는 정부당국행사대로, 민간행사는 민간행사대로 그 뒷맛이 씁쓸하다. 아니 씁쓸한 정도가 아니다. 민관이 모두 6월 항쟁을 너무 쉽게 맞이하거나 더 나아가 통과의례쯤으로 여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부는 6월 항쟁 20주년을 맞아 6월10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이날 오전 10시 처음으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기념행사를 치렀다. 당연히 20년 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유가족도 초청을 받았다. 하지만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와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씨는 기념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념식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장준하, 박태순 열사’ 등이 최근 민주화운동심의 결과 기각 판정이 난 것과 관련, “민주화운동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다”며 기념식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특히 “현장에서 다치거나 죽어야만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는 심의위원회의 잣대를 이해할 수 없다”며 강하게 정부측을 성토했다. 6월 항쟁의 상징이랄 수 있는 두 열사. 그 두 열사의 유가족이 초청은 받았지만 참석하지 하지 않은 채 진행된 정부의 기념행사. 당연히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민간 차원에서는 ‘6월 항쟁 20주년 계승 범국민 대행진’이 10일 낮 12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렸다. 20년이 지난 지금 행사 규모의 크고 작음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날 기념행사에 이름을 건 참가단체가 1천여개인 것에 비해 참가자 수는 500명 정도였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기념식 후 오후 1시부터 약 1시간에 걸쳐 참가자는 서울광장에서 출발해 남대문시장, 중앙우체국 분수대를 거쳐 명동성당 근처 로얄호텔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가졌다. 거리 행진중 주최측은 6월 항쟁 당시의 투쟁과 시민의 격려 등을 재현했다. ‘아! 나의 조국’이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는 태극기를 뒷 배경으로 웃통을 벗은 젊은 사내가 두 팔을 벌리고 질주하는 광경, 건물에서는 유인물이 뿌려지고 거리의 시민들이 음료수와 빵을 시위대에게 나눠주는 광경 등을 재현했다. 이 광경을 보는 ‘실제’ 시민들은 무덤덤했고 그나마 신세대들이 즉석에서 핸드폰카메라를 눌러댔다. 물론 열기와 스케일까지 20년 전 당시를 재현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뭔가 어색한 무늬만 재현일 뿐이었다.

왜 이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20년이 지났기에 세상도 변하고 민심도 변해서 일까? 아니면 6월 항쟁의 의미와 정신을 민은 민대로, 관은 관대로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을까? 당시 6월 항쟁의 주역과 참여자들 대개가 지금도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권에 들어간 인사들은 여와 야로 분화됐고 운동권에서는 지어 뉴라이트까지 생겨났다. 20년 사이에 숱한 변화와 전향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 정당성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고 또 정당한 평가도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6월 항쟁의 의의를 재평가하고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한들 국민적 무관심과 불참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6월 항쟁의 정신은 영원하다. 앞으로라도 정부는 모든 ‘열사’들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하며, 시민사회단체는 이름을 건 것에 걸맞게 활동하고 국민적 참여를 북돋워야 한다. 6월 항쟁 때 산화해 간 열사들을 떠올리기조차 민망스러운, 아니 유감(遺憾)인 200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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